56. 갈라진 틈 사이 (4)
2018.02.12.
하루 내내 초조하게 기다리던 밤이 드디어 사방에 어둠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준비를 해볼까요?”
간신히 발밑이 보일 정도로 어둑해지자 내궁아이들이 하나둘 뜰채를 챙겨 들기 시작했다.
“요것 쓰세요.”
어두운 내궁 후원에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소희에게 은빛으로 빛나는 작은 뜰채가 들이밀어졌다.
“아……!”
늘 허술하게 굴다 제 짝인 조양에게 혼이 나길 잘하는 반요였다.
그간 제 실수를 만회해보려는지 손에 꼭 맞는 뜰채를 소희에게 쥐여주며 수줍게 웃었다.
“아……. 내가? 아니 나도?”
“떠보셔요. 그래도 재미삼아. 달빛에 대고 슬쩍 받아오면 됩니다.”
혀를 빼물며 웃는 반요는 잘못짚어도 한참 잘못짚고 있었다.
“아니, 두었다가 너 쓰렴. 나는 못 뜨지 싶어.”
“왜요?”
의아한 듯 되묻는 아이를 향해 소희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하루 내내 설레고 딱 그만큼의 무게로 걱정하던 것이 그만 터져버렸다.
“나는 인간이었잖니, 아니 지금도 영일뿐이라. 선인인 너희들과는 달라.”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반요를 향해 소희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조양의 야무진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삼칠일도 안 지난 어린 것들도 뜨는 것이 달빛입니다. 염려 말고 뜨세요.”
명부도 없는 아이들도 떠내는 것이니 할 수 있다 말해주는 조양의 차분함에 소희가 체면도 버리고 매달리듯 물었다.
“만일, 만일 내가 만월의 가루를 만들지 못하면 어쩌지?”
“괜찮습니다.”
“짐이 도와줄 것인데.”
“!”
소희는 목소리를 쫓아 뒤를 돌았다.
달빛을 받아 차게 빛이 나는 아름다운 분.
환이 왔다.
확신에 가득 찬 그의 말은 단호한 듯 다정했고, 그것은 자신 없어 하던 소희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정신 차릴 새도 없이 환은 망설이는 소희를 다독이며 등 떠밀었다.
‘가볍게, 손에 정신을 집중시켜 휘둘러보세요.’
소희는 설명 들었던 대로 가볍게 뜰채를 휘둘렀다.
부디 가득 담기길.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러나 차마 두고 볼 자신은 없어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는데, 반요의 호들갑에 감긴 눈이 번쩍 뜨였다.
“아니, 못한다 하신 건 엄살이셨답니까? 이렇게 소복이 담아오시다니요.”
뜰채 가득 남실거리며 담긴 달빛.
“어……?”
반요의 말에 달빛을 떠내던 아이들이 몰려들어 소희의 뜰채를 구경했다.
“내가…… 빛을 담았네……?”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잘하셨습니다.”
이어지는 환의 칭찬까지.
얼떨떨하고 기뻤다.
만들지 못하면 어쩌나 초조했는데, 달빛을 떠내니 이제 한시름 놓았다싶어 마음이 탁 놓였다.
“신기합니다. 신기해요. 이제 이것으로 가루를 만들면 되는 것이지요?”
“천천히 하세요. 생각보다 고된 일입니다.”
염려를 담은 다정한 당부에 소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고양감에 없던 힘도 넘쳤고, 밤새도록 해도 즐거울 것 같았다.
지금 소희가 바라는 것 오직 하나.
만월의 가루.
지켜보는 눈이 수십 쌍이니 차마 대놓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라, 소희는 환에게 가까이에 몸을 붙이고 서서 어서 도와주세요. 라고 작게 소곤거렸다.
그 목소리가 퍽 귀여워 환은 저도 모르게 빙긋 웃고 말았다.
이런 목소리가, 이런 표정이 사내 마음을 얼마나 세차게 흔드는지도 모르시고.
고약한 분이로고.
옅은 한숨을 흘리면서도 눈이 못내 사랑스러운 분께서 떨어지지 않았다.
환은 제게 몸을 붙이고 선 소희의 마른 어깨에 가만히 손을 둘러 당겨주었다.
“만월의 가루를 도대체 얼마나 많이 만드시려고 내궁 아이들을 모조리 부르신 게야.”
“마음 같아서야 쌀가마니 쌓듯 그득그득 쌓이도록 만들고 싶지요.”
어깨를 감싸 안은 큰 손에 얼른 뺨을 가져다 부비며 소희가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 꼭 도와주세요. 안 그럼 이 밤서 제가 망신을 당할 참입니다.”
“저런, 누가 그렇게 되게 두기나 한다던가.”
소희를 향해 느긋한 말투로 고개를 내저으며 대꾸를 하던 환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이제 보니 앙큼한 분이로고. 내궁 아이들이 그대를 좋아 따르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건만, 겨우 이런 일에 망신을 당할 리가 없잖은가.”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그만하시고 어서 도와주셔요.”
소희는 능청맞은 소리를 하며 자꾸 애를 태우는 환을 향해 야무지게 한마디 한 다음 아이들이 뜰채로 달빛을 건지는 틈에 얼른 그의 옆구리를 ‘쿡-’찔렀다.
“읏.”
“아이. 이게 뭐 아프다고 엄살이실까.”
이래서 버릇이 무서운 것이다.
장난기 많고 개구진 덕실이 유모 앞에서 능청맞은 소릴 할 때면 덕실의 옆구리를 툭툭 찌르던 버릇이 그대로 나와 버렸다.
당황함에 작게 신음을 삼키는 환을 타박해버렸지만, 찔끔해 눈치를 보게 된다.
“손도 매우니 아이들을 엄하게 키우시겠어.”
“아이참!”
하지만 한술 더 뜨는 능글맞음에 미안함도 잠시, 눈을 세모꼴로 치켜뜨고는 보란 듯이 한숨까지 쉬고 말았다.
“알았어, 이제 그만 하시자고.”
환은 자못 매서운 표정을 지은 소희를 달래듯 어깨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줘 잡아끌었다.
“달빛이야 아이들이 떠줄 것이니, 우리는 어서 가루를 만드십시다.”
“이제 정말 도와주시는 겁니다.”
“그럼, 그럼.”
환은 소희가 들고 있던 뜰채를 뒤따르던 아이에게 넘겨주고는 달빛을 가득 받아놓은 은쟁반으로 소희를 끌었다.
탁자 위 은쟁반 안에 담긴 달빛을 보는 건 기묘한 느낌이었다.
달빛을 떠와 차를 내렸다더라. 몇 번을 걸러 색을 냈다더라.
하더라 하는 말과 직접 달빛을 떠오는 것은 실감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텅 비어있지만 꽉 들어찬 쟁반이었다.
쟁반에서 빛이 나는 것도 같았고, 달님이 잠겨든 것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그 어떤 말로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
“세상에.”
소희는 환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자리에 앉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번 탄성을 질렀다.
“어여쁘지?”
“네.”
“꼭 그대를 닮았다.”
“네?”
“만져보실 테야?”
환은 되묻는 소희에게 깔끔한 표정으로 시침을 떼고는 은쟁반을 소희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가 미는 대로 은쟁반 위의 달빛은 찰랑거렸다.
흔들거리는 빛덩이를 따라 빛내림이 탁자 위로 예쁜 무늬를 만들어 냈다.
“손을 넣으세요.”
이렇게.
환은 머뭇거리는 소희의 손을 잡아 그대로 은쟁반 빛덩어리에 손을 집어 넣어주었다.
환에게 잡힌 손가락 끝으로 차갑고 시원한 것이 그대로 타고 올라왔다.
이내 그가 손을 놔버리자 벌어진 틈을 타고 청량한 것이 그 자리를 메웠다.
“아…… 좋다.”
“이제 그것을 양손으로 맞잡아 살살 비벼주는 것이야.”
“이렇게?”
환은 소희에게 시간을 들여 세심하게 알려주었다.
시시덕거리며 달큰한 눈짓을 주고받던 둘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진지해졌다.
“정신을 집중하시고, 달빛을 손바닥에 넣고 비빈다 생각해보세요. 그러다 보면 따끈하게 열이 오를 것인데, 제대로 되고 있다는 뜻이에요.”
“네.”
소희는 환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집중해서 두 손바닥을 비볐다.
손바닥이 맞닿지 않음에도 텅 빈 그곳은 무언가로 가득해있었고, 이내 환의 말처럼 무언가 따끈한 것이 느껴졌다.
“어?”
열감을 느꼈다고 생각한 순간.
은쟁반 위로 가루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어?”
소희는 감탄과 놀람을 가득 담아 외마디를 외쳤다.
연신 미소 띤 얼굴을 한 환은 그런 은쟁반을 가만히 잡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영특하신 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
환은 은쟁반에 자신의 영력을 흘려 넣어주었다.
혼례를 올리지 않은 귀문의 별이니 자신의 기운을 담아주려면 이런 수밖에 없었다.
꽤 번거롭고,
무척 고단한 일이지만.
“어어!!”
다른 것은 필요 없었다.
지친 그에겐, 좋아서 외마디만을 연신 지르는 소희를 홍안 가득 새겨 넣는 것으로 충분했다.
연이은 소희의 감탄사에 내궁 아이들이 쭈뼛거리며 주변을 맴돌았다.
그중 키가 작고 살집이 있는 귀염진 아이가 까치발을 해서는 작게 소곤거렸다.
“만드셨사옵니까?”
“어! 응응, 그렇지요? 아닙니까?”
어린 시비의 말은 이내 소희의 입을 타고 환에게 질문으로 돌아왔다.
은쟁반을 꾸욱 누르며 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죽주머니를 챙겨와야겠구나.”
“세상에!”
시비 아이의 감탄사가 곧바로 들불처럼 번졌다.
“세상에!”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하는 소리가 울렸다.
염원이 담긴 가루였다.
효험이 있어야 했다.
소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다잡으며 맨 처음 채운 가죽 주머니를 단단히 여며 환의 손에 올려주었다.
“이런 것.”
“음?”
마치 뒷말을 다 안다는 듯 눈매를 휘어뜨리는 남자의 미소는 말문이 막힐 정도로 근사했다.
그러나 소희는 붉어진 볼을 해서는 웅얼거리듯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필요도 없으시겠지만, 마음이려니 받아주세요.”
“필요가 없다니, 첫 만월의 가루 아닌가. 응당 짐에게 주어야 하셔야 하는 겁니다.”
환은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 위의 가죽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손끝에 감겨드는 폭신한 감촉을 음미하던 그는 가죽 주머니를 이내 품 안에 깊이 넣었다.
툭툭.
마치 잘 계십시오 하듯 주머니를 넣은 곳을 두드리는 그의 모습은 꽤 유쾌해 보였다.
“기뻐 보이십니다.”
“원래 만월의 가루는 달 마마께서 지아비인 귀왕을 위해 만드신 것.”
“아아…… 아!”
환의 말 속에 담긴 묘한 것에 소희의 두 볼이 대번에 붉게 물들었다.
“당연히 기쁠 수밖에요.”
“그, 그런 말씀을 하시면.”
“증표로 간직할 것입니다.”
능글맞은 남자.
부끄러워하는 소희를 실컷 눈에 담으며 매혹적인 미소를 그리는 환은 충분히 능글맞았다.
그러나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어 고개를 들지 못하는 소희를 위해 점잖게 물러나준 것도 바로 그였다.
“그리고, 염라의 불들도 증표로 받을 것이지요.”
“네?”
“뒤에 묶인 세 꾸러미는 아수라‘들’과 풍천의 몫이 아닙니까.”
환은 너무 수줍어하는 소희를 위해 기꺼이 화제를 돌려주었다.
“네. 네. 맞습니다. 사실 효험이 있을지는…….”
“그럴 리가. 못 믿으시니 보여드려야지.”
그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신 없어 하는 소희의 말에 환은 낮게 혀를 찼다.
무려, 귀왕이신 자신이 직접 기운을 나눠주었다.
효험이 없다니.
그 어떤 만월의 가루보다 강력하고 영험할 것이었건만, 소희만 그 사실을 몰랐다.
환은 말로 설명하는 대신 보여주기로 했다.
그저 아무나 부르면 되는 일이었다.
지난 이십 년간 모두들 만월의 가루 없이 버텨낸 덕에 크고 작은 상흔쯤은 하나씩 몸에 새기고 있었으니, 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영력을 돋워 아수라를 끄집어냈다.
보란 듯이 손을 들어 허공을 내리긋자 희게 빛나는 도포를 펄럭이는 모습을 따라 하늘이 길게 찢어지며 대번에 ‘밤의’ 아수라를 토해냈다.
“아…… 정말이지. 소장을 이렇게 불러내시는 건 염휘께서 유일합니다.”
바닥에 닿는 소리도 없이 우아하게 착지한 아수라가 작게 불평했다.
“저런, 나 말고 그대를 이렇게 불러낼 자가 있다면 그것이 더 큰일 아닌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있다 끌려나온 덕인지 아수라는 침의 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후원을 딛고 선 두 발도 새하얀 맨 것이었다.
“아…… 아수라님.”
오히려 소희가 아수라의 차림을 보고 깜짝 놀라 입고 있던 자신의 겉옷을 서둘러 벗어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여성체라지만 아수라는 장수.
소희보다 훌쩍 키가 큰 아수라가 소희의 도포를 걸치니 살짝 짧아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아. 역시 좀…….”
볼을 붉히며 소희가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아수라는 민망해하는 소희와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몹시 흡족한 듯 하얀 손을 뻗어 제 어깨에 둘러진 도포를 매만지다 가만히 웃었다.
“소장, 이 다정하신 배려에 그저 감읍하옵니다.”
소희가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으려는 아수라를 만류했다.
이미 맨발인 그녀가 침의까지 버리게 둘 순 없었다.
얇은 옷자락을 통해 미약한 온기가 서로 섞여들었다.
그것은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소희는 일찍이 아수라를 이런 식으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밤의 아수라.
그녀는 소희에게 언제나 무섭고 꺼려지는 이였다.
그러나 이런 따사로운 온기를 가진 아수라라니.
이건 소희의 가슴에 묘한 파동이 일게 했다.
저도 모르게 아수라를 붙들고서는 선명한 홍안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소희를 일깨운 건 환의 근사한 미성이었다.
“화기애애하군? 조금 더 일찍 부를 걸 그랬지?”
묘한 분위기를 단번에 깨뜨리는 웃음기 어린 그의 말에 붙들려있던 아수라도, 정신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소희도 화들짝 놀라 서로 떨어졌다.
“그대, 바라만 볼 것이 아니지 않나?”
“네?”
“줄 것을.”
환의 길쭉한 손가락이 소희의 마른 어깨에 차례로 내려앉았다.
단번에 소희의 어깨를 감싸 안은 환은 소희를 은쟁반 쪽으로 슬쩍 밀어주었다.
아수라와 풍천을 위해 만월의 가루를 담은 은쟁반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희는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느끼며 잠자코 환이 시키는 대로 ‘아수라들’을 위해 준비한 주머니를 두 개 집어 들고 돌아왔다.
“이것.”
이번, 귀문의 일을 보고 놀라 유난히 눌러 담은 터라 아수라의 주머니는 둘 다 잔뜩 배가 불러 빵빵했다.
마음이야 더할 나위 없이 정성스러웠지만, 환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소희는 손이 생각처럼 뻗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제법 잘 나왔다.”
툭.
아수라를 향해 환이 말을 꺼냄과 동시에 소희의 팔꿈치를 건드린 건.
가볍게 떠밀린 팔꿈치는 앞으로 뻗어졌고 소희는 저도 모르게 주머니를 내민 모양새가 되었다.
“……받으세요!”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아수라가 두 손을 내밀어 공손하게 받으며 소희에게 물었다.
“만월의 가루이온데…….”
“누가 다치고 왔다더구나? 필요할 것이니 받아두어라.”
머뭇거리는 소희의 말을 자르고 환이 떠보듯 아수라에게 당부했다.
그러자 으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수라가 순식간에 사납게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조금 전까지 상냥하게 소희의 도포를 매만지던 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붉은 머리채를 흩날리며 독 오른 표정을 짓는 무시무시한 이가 나타났다.
“요괴 냄새에 코가 썩는 것 같습니다.”
“저런.”
화가 단단히 난 듯한 아수라의 말에 환이 코웃음을 치듯 대꾸했다.
“괜찮으십니까?”
까만 눈 가득 상냥함을 담아 웃어주던 그가, 눈앞의 그녀가 걱정되어, 소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보이십니까.”
환에게 말을 할 때보다는 독기가 빠졌지만, 동공을 사납게 세운 아수라가 소희를 돌아봤을 땐 저도 모르게 숨이 멈춰지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소희님.”
“네.”
아수라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속상해하는 것도 같았다.
“이 주머니는 돌려드리겠습니다.”
얕은 한숨을 내쉰 아수라는 받았던 두 개의 주머니 중 하나를 다시 소희 손에 올려주었다.
“염휘께서 말씀하신고로, 효험이 대단할 터. 그 바보에게 직접 전해주십시오.”
“예?”
“아낀다고 안 쓸까봐 하는 소리입니다. 하기야 더 주신들 그것까지 사신들에게 줘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킥.”
“아수라.”
환은 키들거리며 웃는 아수라의 행동이 사실은 속상함에 하는 푸념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치 막아놓은 둑이 터지듯, 억눌렀던 마음이 다정한 소희의 부름에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한 몸을 공유하는 사이이니 밤의 육신을 걸친 들, 그것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정양한다지만 등뼈가 보일 정도로 깊게 패인 상처는 쉽사리 좋아지지 않았다.
만월의 가루만 제때 발랐어도 이 지경은 안됐을 것인데, 낮의 아수라가 사신을 위한답시고 미련을 부린 통에 이 사달이 난 것이었다.
그래서 아수라는 화가 났다.
“아수라.”
이번에도 염휘의 목소리가 염려를 담아 그녀를 불렀지만, 아수라는 들끓는 감정이 잘 갈무리 되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걱정이라니요, 그저 멍청한 녀석에게 화가 날 따름입니다.”
“잡아다 뿌려주랴?”
반쯤은 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수라는 서슴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밤의 아수라는 잔뜩 끓어오르는 마음을 누르며 자신의 앞에 선 염휘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에 더 머무르다가는 정말 꼴사나운 짓을 할지도 몰랐다.
저 스스로 조절할 수 없다면, 차라리 갇혀 있기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소장. 돌려보내주시옵소서.”
“……진정하라, 아수라.”
“소장, 아수라 전으로 돌아갈 영력도 없사옵니다.”
아수라의 말이 그저 하는 말인 줄 알았던 환은 이어지는 솔직한 말에 놀라 눈을 크게 홉떴다.
부상을 입은 줄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이 무슨.”
놀란 염휘의 목소리에 담긴 의문을 아수라가 모를 리 없었다.
아수라가 요괴에게 이렇게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할 리가 없다는 것을 염휘가 모를쏘냐.
“이미 처리한 것이었습니다. 먼지가 되기 직전 악살 맞게 쏘아진 것이었습니다.”
아수라는 답을 원하는 주인에게 소상히 아뢰었다.
“왜 피하지 않았느냐.”
늘 엄정하고 여유 있던 염휘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스몄다.
“소장이 피하면 하나 남은 감재사자를 내주어야 했습니다.”
“…….”
아수라에게 사신이 가지는 의미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염휘는 그제야 밤의 아수라가 화를 내고 감정에 들떠 어쩔 줄 모르는 것을 이해했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고, 더더군다나 낮의 아수라의 탓은 아니었지만 속상하고, 화가 날 수밖에 없을 상황이었다.
그러고 나서도 끝까지 감재사자를 챙기는 미련한 처사에 화를 내는 건 당연했다.
염휘는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그를 붙잡아 반드시 만월의 가루를 발라주마.”
“꼭 해주십시오.”
“오늘 밤새 만들 터이니, 부디 받아주세요.”
여태 조용히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소희가 작은 목소리나마 또렷하게 냈다.
아수라와 환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지만 소희는 평상시처럼 숨거나 말을 멈추지 않았다.
“부족하다 하시지 않게 동이 트도록 만들 것입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만들 것입니다.”
“그대…….”
“어린 것들을 기르고 지키려면 본디 부모가 강건해야 하는 법입니다.”
“…….”
이어지는 소희의 말에 아수라의 눈에서도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먼저 바르시고 몸을 추스르세요. 이십 년을 버텨온 사신들 아니겠습니까.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듣고 있습니다.”
밤의 아수라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소희에게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아?”
“일어났습니다.”
낮의 아수라가 깨어나 소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소리에 소희는 반색했다.
“바르시는 건 바르시는 것이고, 이것도 받아주세요.”
들어달라 목청을 돋워 ‘바르시라’ 외치던 소희는 어느새 손에 작은 꽃송이 하나를 들고 있었다.
달큰한 향이 진한, 복숭아꽃이었다.
“향이 좋아 심신이 지쳤을 때 도움이 되던 것이라 드리니 받아주세요.”
소희는 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아수라에게 꽃을 떠넘기다시피 쥐여주었다.
“소장, 염치 불구하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미 너무 많이 망가진 몸이라 아수라는 거절하지 않고 기쁘게 받았다.
그리고 그녀가 꽃을 받자 염휘가 기다렸다는 듯이 공간을 열고 아수라를 전으로 보내주었다.
“가서 쉬거라.”
달큰한 꽃향기와 함께, 다정한 당부를 담아.
한밤, 만월의 가루 만들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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