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갈라진 틈 사이 (2)
2018.02.05.
상태자에게 심부름을 다녀온 새는 조금 이상해져 있었다.
직인은 몸집이 퉁실하니 자란 소청조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고것 눈치가 영리하고 제법이라 쓸만하다 했는데, 역시 ‘청조’였던 모양인지 빗물에 녹은 뒤로는 하는 짓이 영 마땅치가 않았다.
“비 오는데 어디를 멋대로 다녀온 게야?”
구륵-.
“쯧. 한번 비 맛을 보더니 아예 나가 살기로 작정한 것이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찬찬히 뜯어보는 것을 알아챈 모양인지 작게 우는 품새가,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뭐, 아직은.”
죽기 전엔 한 번 더 부릴 수 있겠지.
직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까만 눈을 깜빡거리는 소청조를 집어 들어 그대로 새장 안에 넣어두었다.
구르륵-.
새장 문을 닫자 안에 갇힌 소청조가 푸덕거리며 울었지만 야물지 못한 발톱은 문을 열지 못하고 헛발질이었다.
“어림없다. 요것.”
직인은 꽤나 화가 난 듯 비녀의 금편이 짤랑거리도록 머리를 흔들었다.
“어딜 네 맘대로 쏘다니는 게야. 그 비에 녹아 죽기라도 하였으면 그 죄를 누가 받으라고.”
직인은 빗물에 녹아 없어질 뻔한 소청조를 걱정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매인 청조의 관리를 소홀하게 한 죄를 받게 될까 봐 적잖이 짜증이 나 있었다.
구르륵-.
새는 그동안에도 새장에 갇혀 부리로 철망을 쪼고, 발톱으로 뜯으며 난리였다.
깃털이 빠지고 기껏 채워놓은 모이와 물이 그릇째 엎어져 더러워졌다.
“이것이.”
그것을 지켜보던 직인의 눈이 매섭게 치뜨였지만, 새는 멈추지 않았다.
“하여간 짐승이란.”
잔인한 눈빛을 번뜩이던 직인은 치켜올린 손을 얌전히 소매 속으로 감추며 사나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손목에 매달린 팔찌가 짤랑이며 맑은 금속소리를 냈다.
차랑거리는 작은 소리에 들끓던 눈매가 순식간에 가라앉고, 심술 맞게 일그러진 표정이 그대로 유순하게 정돈되었다.
“금방이지.”
직인은 깃털을 흩날리며 온몸으로 새장에서 나오려 애쓰는 소청조를 보며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까지 짜증에 겨워 표독스럽게 굴던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환한 표정이었다.
“그래, 금방이란다. 나의 작은 새야.”
그리고는 손을 뻗어 떨어져내리는 푸른 깃털을 나긋한 손길로 받아냈다.
푸른 날개깃을 집어 들고 부채처럼 팔락거리는 직인은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천도를 배부르게 먹은 소청조의 깃털에선 향긋한 복숭아 향이 가득했다.
팔랑이는 깃털을 따라 이내 달큰한 향이 퍼져 나왔다.
구륵-
“…….”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직인이 갑자기 깜짝 놀란 듯 손에 들고 있던 깃털을 내던진 건 그때였다.
무언가에 굉장히 놀란 듯, 자신의 손과 갇힌 소청조를 바라보고는 벌벌 떨었다.
“작은 새……. 내 작은 새를!”
그리고는 새장을 잡아 뜯듯이 열어 소청조를 꺼내주었다.
달콤한 향을 풍기는 새가 직인의 보드라운 손안에서 바동거렸다.
직인은 놀라 퍼덕이는 새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히 감싸 안고 눈을 맞췄다.
“내가 또 함부로 했더냐? 그럴 땐 말하지 않았니. 도망가라고. 이것아.”
직인은 처연하고 서글픈 표정으로 낮게 뇌까렸다.
구륵-.
물기가 가득한 직인의 목소리에 버둥거리던 새가 눈을 껌뻑이며 울었다.
“서왕모가 계신 곳에 다녀온 게지?”
향이 좋구나.
직인은 소청조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는 토실해진 새를 만족스러운 손길로 쓸었다.
그녀의 옅은 갈색 눈동자에 자상함이 한껏 물려 해사하게 빛을 발했다.
“그래, 다음에…… 다음엔 꼭 서왕모가 계신 곳으로 가거라.”
뺨에 작은 머리를 가져다 대는 소청조에게 직인은 웃는 듯 우는 표정을 지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일그러진 눈썹이 마치 그녀의 마음같이 엉망이었다.
직인은 저를 위로하는 듯한 새의 움직임을 그대로 두었다.
뺨에 비벼지는 푸른 깃털에서 풍기는 상쾌한 향과, 온기를 머금은 부드러움이 울렁이는 마음을 감싸 안아주는 것 같았다.
큰 위안.
직인은 새에게서 큰 위안을 얻었다.
한 번씩 기억이 잘라 먹힌 것처럼 뚝뚝 끊어져 있고, 문득 정신이 들면 제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일이 늘어났다.
그리고 잦아졌다.
직인은 마치 자신이 거대한 파도에 잡아먹히기 직전의 작은 배 같다고 생각했다.
두렵고, 무섭지만 피할 수도 없고 피할 방법조차 없다.
직인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섬뜩한 냉기를 털어내기라도 하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짤랑
비녀의 금편들이 서로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내자 순식간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소청조야, 작은 나의 파랑새.”
직인은 노래를 부르듯 콧소릴 섞어 새를 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바삐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그녀가 일을 하는 방이었다.
방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직인은 그곳을 ‘자신의 방’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나무 살로 촘촘히 둘러져 멋을 낸 장지문을 열면 끝도 없고, 깊이도 알 수 없는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엔 황금빛을 뿌리는 거대한 베틀이 놓여있었다.
빛도 어둠도 없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에 홀로 빛을 내는 베틀은 이미 어마어마한 크기만으로도 경이로웠다.
하지만, 베틀이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홀로 놓여있지만, 베틀은 만져주는 이가 없어도 스스로 베를 짜고 있었다.
허공에서 시작된 실을 끌어당겨 무늬를 넣고, 탁탁 소릴 내며 씨실과 날실을 단단하게 당겨 천을 짜내고 있었다.
탁탁
탁탁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수백 개의 실을 가닥가닥 끌어당기고 풀고 끊어내며 조금씩 완성된 천을 바닥에 놓인 책 위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달빛이 좋으니…….”
직인은 비단신에 감싸인 발을 내밀며 새에게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아주 조금 간섭을 해볼까.”
구륵.
새는 직인의 말에 익숙하게 날아올랐다.
직인의 어깨에서 날아오른 소청조는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는 직인에게 허공에서 낚아챈 실 한 가닥을 들려주었다.
분홍빛이 고운 실은 달빛에 반짝거리며 윤이 나는 좋은 것이었다.
“이런 이런. 처음부터 제일 좋은 것을 물어다 주는구나.”
직인은 손에 들린 분홍색 고운 실을 보며 싫지 않은 목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꽃같이 고운 아가씨는 많을수록 좋지.”
직인은 손끝에 실을 감아쥐고는 그대로 베틀 앞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대한 베틀 앞에 그녀는 한없이 작아 보였지만, 직인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탁탁
씨실 사이로 스미는 날실을 야무지게 치는 바디 위에 손을 얹고, 잠자리 날듯 허공을 가르는 북을 잡아챘다.
직인의 손에 들린 북에는 어느새 분홍빛 고운 실이 물려있었고,
그녀가 한 번씩 팔을 움직일 때마다 베틀에 걸린 천에는 고운 분홍빛이 물들기 시작했다.
탁탁
탁탁
베틀 혼자 움직일 때보다 바디가 경쾌하게 움직이며 잔뜩 흥이 돋은 소리가 사방을 빼곡하게 채웠다.
“어디 보자. 꽃 같은 아가씨에겐 잘난 지아비도 내려줌이 어떠냐?”
단호한 손놀림과는 달리 더없이 상냥한 목소리였다.
직인의 말에 허공에서 퍼덕이던 소청조가 다시 실을 낚아채 머리 위로 뻗은 직인의 빈손에 올려주었다.
짙푸른 바다를 닮은 씩씩한 푸른빛의 실이었다.
“귀여운 것. 어쩌면 이렇게 마음에 쏙 들게 물어오느냐?”
이 내외 이미 혼례 전에 오며 가며 눈이 마주칠 것이다.
직인은 북을 하나 더 쥐었다.
분홍에 푸른빛을 문 두 북을 스칠 듯 말 듯 연이어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정해준 혼처에 마주쳤던 그이가 더러 생각났겠지만.
“후훗.”
저도 모르게 아쉬운 마음 누르고 혼례를 올리겠지.
그런데 말이다.
신방서 왠지 모르게 자꾸 생각나던 그이를 마주했을 때, 얼마나 설레고 안심될 것이냐.
탁탁
직인의 작은 중얼거림이 베 짜는 소리 사이사이 끼어들었다.
푸드덕거리다 어깨에 내려앉은 새가 직인의 목덜미에 가만히 작은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그래서 어찌 되냐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 것이란다.
직인이 손에 쥔 두 북을 힘줘 잡자 두 실이 하나로 합쳐져 그대로 베틀에 물렸다.
“오래오래. 그리고 그 명이 다해 상천으로 올라가서…….”
탁탁.
노래 부르는 듯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가며 베를 짜던 직인의 입술이 갑자기 멈칫거리며 소리를 삼킨 건 그때였다.
벙긋거리며 물에서 건져낸 물고기처럼 입을 달싹이던 직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상제가 막아버린 입이 또다시 그녀가 소리 내어 말하던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
쥐고 있던 북을 내팽개친 손이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리고,
바디를 움켜쥐고 있던 다른 손도 소리를 내지 못하는 입을 가렸다.
헛숨이 빠지듯 쉬익거리는 소리를 내는 입을 단단히.
“아아아아아아아악!”
마침내 오래 참아온 소리가 비명처럼 터지고, 직인이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무릎을 꿇고 바닥을 짚은 그녀에게선 거친 숨과 함께 눈물이 흘렀다.
“흐윽.”
고일 새도 없이 바닥을 물들이는 눈물 뒤에 숨겨진 눈동자엔 잔뜩 독이 올라있었다.
“흐윽. 반드시.”
투둑-.
“반드시 갚아줄 것이다.”
음산한 목소리로 읊조리며 눈물을 떨구던 직인은 오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서 빠져나왔지만, 소청조는 움직이지 않았다.
구륵.
새가 작게 울었다.
분노에 잔뜩 물들어 번들거리던 직인의 눈은 이미 탁하게 변해있었던 것이다.
남겨진 새가 다시 한번 울었다.
구륵.
장지문 밖의 아이는 무척이나 고집스러웠다.
아니, 실로 고집스러운 것은 아이의 주인인 ‘휘’였을 테지만.
태자는 날카롭게 솟은 심사가 튀어나가지 않도록 무척 애를 쓰고 있었다.
“전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그를 채근하듯 불렀다.
발발 떨리는 목소리에, 코웃음이 절로 났다.
새를 부리다 부리다, 지겨워지신 겐가.
이도 저도 아니면, 다시 한번 고약한 언사라도 쏟아보겠다는 것인가.
태자는 비딱하게 비틀리는 입귀를 감추지 않고 그대로 접선을 펴들었다.
솜씨 좋게 묶인 부챗살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펼쳐지는 것과 바람을 일으키는 건 동시에 일어났다.
팔랑이는 접선을 따라 향긋한 내음이 삐죽하게 솟은 태자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오늘, 몸이 편치 못하구나. 다른 날 생각해보자꾸나.”
“하오나 전하.”
“…….”
“전하, 휘께오서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럴 리가 없느니라.”
태자는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단호하기까지 한 목소리는 전에 없이 냉정해 어린 선인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휘의 심부름을 온 아이가 다급하게 헛숨을 삼키는 소리.
가파르게 심박이 올라가는 소리.
온갖 것이 태자의 귀를 따갑게 했다.
“비루한 것.”
저런 허접한 것을 보내시다니. 휘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시람.
태자는 팔랑거리던 접선을 내려놓고는 턱을 괴고 화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하.”
문밖에서 다시 지루하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넘어왔지만 이제 저 아이의 끈기를 칭찬해줄 마음의 여유조차 남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추락해버린 기분이 그를 자꾸만 축 처지게 했다.
언제고 닥칠 일이었다.
말없이 상천을 비운 지 근 이십 년.
오히려 여태 말없이 칩거해있는 그를 불러다 꾸짖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흐응…….”
콧소리가 작게 울리며 심드렁한 표정을 더했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게 아니었다.
태자의 두 눈이 느리게 끔뻑이며 그날과 똑같은 화원의 전경을 담았다.
근 이십 년간, 이곳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바람에 나부끼는 잎새마저 그대로인 듯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변했으나, 이곳은 그대로인 채로 고여 썩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태자궁으로 발걸음을 해주지 않는 휘가 놀라울 정도로 그대로라 오히려 정겨웠다고 해야 하나.
태자가 순식간에 얼굴을 굳히고는 허공에 대고 쥘부채를 그어 내렸다.
성의 없는 손짓을 타고 공기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몸집을 키우자마자 익숙한 인영을 불러냈다.
“전하.”
이번에는 장지문 너머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지관 왔느냐.”
태자는 자신이 불러놓고서는 으레 왔느냐 하는 인사를 건넸다.
이상한 인사였지만 군신은 그 말을 끝으로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지관은 장지문 밖의 아이를 신경 써서였고, 태자는 치미는 짜증을 참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서 아무래도 휘를 뵙기엔 무리가 있겠구나.”
한참 만에 지관이 장지문을 열고 회랑서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이를 달래듯 좋은 목소리를 냈다.
“하오나 지관 어르신.”
아이는 까맣게 죽은 눈을 하고는 지관에게 사정했다.
고집이 아니었다.
작은 눈동자에 가득 맺힌 것은 두려움.
아이는 휘에게 혼자 돌아가야 할 것이 두려워 이 회랑을 지키고 선 것이었다.
도와주십시오.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고 달싹이는 입술이 전한 말은 그런 것이었다.
지관은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축이는 아이를 보며, 마른세수를 했다.
가운데에 낀 입장이란 건 이래서 늘 불편했다.
태자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니 보란 듯이 이 아이를 매정히 내쳐야 마땅하건만, 그는 휘의 성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이 아이가 겪을 고초가 한눈에 보이니.
차마 죄 없는 것을 무참히 쫓아내지도 못할 일이라.
지관은 탁한 숨을 몰아쉬고는 얼굴에서 손을 뗐다.
“어쩐다……. 오늘은 어렵겠구나.”
자상하지만 완곡한 거절이었다.
제 사정 봐주시려나 애태우던 아이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차올랐다.
“허나.”
그러나 지관의 말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조만간 찾아뵐 것이니라.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 그럼 언제라고 말을 올려야 할까요?”
아이는 지관의 말이 목숨줄이라도 되는 듯 매달려 사정했다.
태자께서 걸음 해주시는 날이라도 받아가야 조금이라도 덜 시달릴 것이니 저로썬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흐음…… 너도 알지 않느냐, 천의 이동이라는 것이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님을. 어린 선인인 네가 그것을 아는데 휘께서 사정을 몰라주시겠느냐.”
“그런 사정 헤아리셔서 기다려 주신 게 아니옵니까.”
아이는 원망하듯 중얼거렸다.
“이삼일 내로 걸음 하실 것이다. 네가 오늘 애쓰거라.”
지관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건 듣는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벌써부터 양 볼이 얼얼하고 입안이 아파오는 것 같아 아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려 뺨을 감싸 쥐었다.
“참입니까?”
“태자께서 곤하시니, 네가 신경 써서 좋은 차를 준비해주려무나.”
“좋은 차야 진즉에 구해놓았습니다.”
볼멘소리였고, 그저 달래서 돌래 보내려는 것을 알았지만, 아이는 체념한 듯 지관에게 조곤거리며 말을 이었다.
“서녘의 달빛도 있는 것을요.”
“오? 그 귀한 것을?”
대충 둘러댄 말이었으나 아이가 꺼낸 차는 몹시 의외라 지관도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그럼요, 그런 것도 없이 휘께서 태자 전하를 청하였겠습니까.”
부루퉁한 얼굴에 남은 원망을 지우지 못하고 아이가 새침하게 말을 덧붙였다.
돌아가면 단단히 야단이 날 것이라 절로 솟는 원망을 감추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서녘 달빛까지 들먹인 것은 오신다는 한마디 답이라도 들고 가야 저가 살 것이다 하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꼭 오셔야 합니다.”
“그 귀한 걸 두고 청하시니 어찌 안 가시겠느냐. 여독이 덜 풀렸음이니 네가 말을 잘해다오.”
“아이 모릅니다. 전 이제 따귀를 맞게 생겼지 뭡니까.”
능청스러운 지관의 말에 결국 아이의 입에서 두려움에 젖은 불평이 터졌다.
“고생하거라.”
지관의 배웅이 도움이 될 리도 없었으나, 그는 끝까지 돌아가는 아이의 힘 빠진 걸음을 지켜봐 주었다.
가물거리던 뒷모습이 기어이 사라지고 나서야 태자께 돌아간 지관을 태자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반겨주었다.
“변한 게 없어 지루하다 할 참이었더니, 이제 선인들의 따귀도 올려붙이시는 모양이지?”
킥-.
정작 때리고 싶은 이는 따로 두고선 말이지?
접선을 팔랑이는 태자의 손을 따라 백금발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
그것이 꼭 지금 태자의 심사 같아 지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어깨가 들썩이도록 깊은 숨을 한번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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