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붉은 하늘에 뜨는 별 (7)
2018.01.29.
“이 아이, 소청조가 아니더냐.”
고운 목소리에는 깊은 연륜이 묻어나 부드럽게 울렸다.
새 다리를 받쳐 든 손가락은 앳된 소녀처럼 곱고 매끄러웠지만, 손에 올라앉은 새를 바라보는 눈빛은 해묵어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잔잔했다.
“이런 이런, 비를 타고 넘어온 것이냐?”
진즉 직인께 달려갔어야지.
비가 오면 날지 못하는 소청조를 아는 서왕모는 한껏 작아진 새를 손에 올려두고 자상한 꾸지람을 이었다.
“비 냄새를 맡지 못했던 것이냐? 이 녀석, 천도 향에 취해있었던 게로구나.”
서왕모는 새의 부리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소청조.
삼천외의 선인들이 부리는 새였다.
보통은 청조라 불렀지만, 직인이 부리는 청조는 그 크기가 유난히 작아 소청조라 불렀다.
청조는 선인이 올라타도 괜찮을 만큼 큰 새라 그 날개를 펴면 가히 장관이라 할만했다.
그러나 직인은 운명의 베틀을 다루는 자.
그렇게 큰 새가 퍼덕이다 베틀에 걸린 운명에 가는 바람 줄기라도 스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해서, 직인의 청조는 그 크기가 겨우 손바닥만 한 아이가 내려진 것인데.
지금 서왕모의 손위에 올라앉은 소청조는 아무리 잘 쳐줘도 손바닥의 삼분지 일이나 될까?
한 줌이 되도록 바깥에서 비를 맞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영리한 아이가, 어쩌다.”
속상한 마음에 서왕모는 자꾸만 소청조를 나무라고 말았다.
삐이.
꾸룩.
새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까만 눈알을 깜빡였다.
그 모습이 마치 변명을 하는 것 같아 서왕모는 새의 작은 머리통을 검지로 지그시 누르며 짐짓 엄한 목소리를 냈다.
“요 녀석, 비 맞고 돌아다닐 때는 좋았으나, 꾸지람은 싫다 이거로구나.”
허면.
소청조를 향해 은근한 목소리를 낸 서왕모는 이내 다른 손에서 천도 한 알을 꺼내 들었다.
“요것도 싫다 할 셈이냐?”
서왕모는 삼천외의 땅에서 도화원을 일구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른 복숭아밭을 가꾸었지만, 거기서 나오는 천도는 매일,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런 귀한 천도를 지금 서왕모는 소청조에게 내밀었다.
마침 며칠 전 삼천외의 봄이다 하여 상하천 지존들께 탐스러운 것들로 한가득 광주리에 담아 보내느라 천도를 거둬드렸더랬다.
진에 올려드리다 떨어뜨린 것이라, 지존께 이것은 진상하지 못하겠구나 하여 빼둔 한 알.
그것이 지금 서왕모 손에 들려있었다.
“주인이 있어, 상제께 가지 못한 것이니라.”
서왕모는 새를 어깨 위로 올리고는 찬찬히 복숭아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 주인이 아무래도 내 보기에, 너구나. 소청조야.”
잠자리 날개같이 얇은 껍질이 벗겨지며 몰캉한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순식간에 사위를 가득 채우는 진한 도화향에 들이키는 숨마저 달큼해졌다.
구룩.
기분 좋은 새소리에 복숭아 껍질을 벗기던 서왕모가 잠시간 웃고는 다시 매끈한 속살을 나뭇잎에 올려 새 앞에 놔주었다.
“먹거라. 인간조차 선인으로 만든다는 귀한 것이니 너 하나쯤 되돌리는 것이야 문제도 없을 것이지.”
구룩.
소청조는 서왕모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작게 울고는 부리로 열심히 쪼아 제 몫으로 주어진 천도를 모조리 먹어버렸다.
녹아 없어진 날개깃이 돋고, 앙상하던 꽁지가 살아났다.
윤이 흐르는 푸른 깃털은 금방이라도 물이 튈 것 같은 청명한 빛을 뿜었다.
순식간에 덩치를 불린 새는 이전보다 오히려 더 커진 느낌이었다.
구루룩-.
얌전히 부리로 깃털을 매만진 새가 서왕모께 인사라도 하듯 눈을 끔뻑거리고 낮게 울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새가 서왕모의 손에서 날아간 건, 오래지 않아서였다.
하늘로 녹아든 듯 푸른 새는 훌쩍 날아오르더니 이내 자취를 찾을 수도 없게 되었다.
“엉뚱한 녀석, 제일 영리해서 직인께 보내졌다 들었건만 비에……!”
서왕모께서 복숭아 껍질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주워 담으며 말을 잇다 문득 하늘로 사라진 소청조를 다시 보게 된 건 그때였다.
재빠르게 멀어지는 새가 향한 곳은 직인이 계신 강 근처가 아닌, 바로 상천.
서왕모는 기껏 주워든 복숭아 껍질을 모조리 놓친 것도 모르고 넋 놓고 그 모습을 보았다.
“어째서……?”
의아함에 잦아든 말문에 근심이 물렸다.
서왕모는 불길한 예감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생을 받은 이래 처음 느껴보는 불안감은 생각보다 훨씬 고약했다.
서도화전의 나무들이 꽃을 피우지 않고 애를 먹일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 누가 있느냐.”
서왕모는 이제 점이 되다시피 한 소청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어린 선인을 불러 찾았다.
“아무도 없느냐?”
심란한 마음도 모르고 오늘따라 어린 선인들도 늦장이었다.
서왕모는 목청을 한껏 올려, 다시 불렀다.
화들짝 놀란 발걸음이 달려오는 것이 들렸지만, 이때만큼은 어린 것들을 놀란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만년을 가까이 살아온 서왕모의 감이 보통 일이 아니라고 속삭였다.
“찾아계시옵니까.”
불안에 제멋대로 두근거리는 심박에, 정신이 산란해 막상 어린 선인 도착해 인사를 올릴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하명하시옵소서.”
“마고께…….”
“네?”
서왕모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당황해있었다.
겨우 새 한 마리가 상천으로 향한 것에 어째서 이렇게까지 허둥이는지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서왕모는 지금 당장 마고께 말씀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마고께 보내드릴 천도는…….”
“아직 세 개가 부족해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그래?”
무턱대고 마고께 철모르는 어린 것처럼 주절거릴 수 없으니 서왕모는 천도를 핑계 삼아볼 참이었다.
상하천의 지존께 보내드리는 것도 상품이었으나, 이 모든 곳을 아우르는 천신 마고께 올리는 것은 각별히 신경 써야 했다.
크고 탐스럽고, 그 모양이 어느 하나 일그러진 곳이 없는 최고의 것을 고르고 골라 한 꾸러미를 만들어 진상해야 하는데, 아직 셋이 부족해 천도가 가지 못했다니.
다행이었다.
“오늘 따 온 것 중에 고를 것이 없느냐?”
“오늘 딴 것들이 특히 좋아 안 그래도 이슬만 마르면 추려내려고 합니다.”
두 손을 소맷부리에 얌전히 넣고 대답하는 아이의 숨기지 못한 자부심에 목소리는 살짝 들떠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야, 이것보아라, 목소리가 들떴지 않느냐. 고것 네가 따온 것이렷다. 그냥 넘기지 않고 세세히 짚어 칭찬해주었으련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럼. 어서 추려보려무나, 꾸러미 완성되면. 내게 다오.”
“네?”
“꾸러미 속 천도가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묶어 가져오너라. 이번엔 내가 직접 가져다드릴 것이란다.”
“어머니께서 직접 가신다구요.”
어린 선인은 서왕모의 이야기에 팔짝 뛰며 놀라했다.
이제 갓 이백 살이 된 선인은 자신의 ‘어머니’인 서왕모가 이 천도전을 비운 것을 본적이 없었다.
서왕모를 청하는 곳은 많았다.
하늘의 영력이 가득 담긴 신성한 복숭아를 키우는 고귀한 분의 걸음을 바라는 곳은 넘쳤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상하천의 지존이신, 염라대왕과 옥황상제께서도 늘상 청하였지만 단 한 번도, 제가 아는 지난 이백 년간 그 어디로도 서왕모는 운신하지 않았다.
‘이것 섭섭합니다. 먼 곳도 아니고 청조를 부리시면 일 각 안에 닿는 곳 아닙니까.’
서운함을 가득 담은 상제의 말에도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대신 복숭아꽃이 한창인 시절을 핑계 삼아 상하천 지존들을 청해 그 마음을 달래주었던 분이셨다.
천신 마고라지만, 서왕모께서 직접 다녀오신다니.
어린 선인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이거 무슨 변고가 난 것 아닌가, 괜히 무섬증이 일어 다리가 달달 떨렸다.
“그…… 그럼 청조를 준비시키리까?”
어린 것의 목소리가 벌벌 떨리는 몸을 따라 마냥 떨렸다.
“준비시켜다오. 어째 그리 겁을 내는 것이냐.”
“어머니께서 외유하시는 것을…… 처음 뵈오니 더럭 겁이 납니다.”
“이런, 내 다른 곳은 몰라도 마고께는 종종 다녀오느니라. 벌써 오백 년 전에도 한번 다녀온 것을.”
“그렇습니까. 어머니, 제가 아직 어려 그만 주책을 부렸습니다.”
그러니 진정하려무나. 곧 다녀올 것이란다.
머리를 조아리는 어린 선인에게 서왕모는 자애로운 목소리로 당부를 남겼다.
도화원의 아이들은 모두 서왕모의 자식.
천도목에서 받아낸 도화원의 ‘아이’였다.
천도목을 싹틔우고 키우는 것은 바로 서왕모이니, 실상 이 아이들은 모두 서왕모의 자식이나 진배없었다.
아이들은 정신적 영적으로 서왕모에게 모두 연결되어 아주 미미하게나마 그녀와 공명했다.
서왕모는 순간 벌벌 떨며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어린 것이 자신의 영향 때문임을 알았다.
“원, 자주 있는 일도 아닌데, 너희들이 이러니 내가 늘 이 향긋한 곳에 매어 있게 되는구나.”
손을 들어 살짝 굳어버린 어린 선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서 꾸러미를 만들어 오려무나. 어미 늦지 않게 올 것이야.”
“네 어머니.”
자상한 목소리에 한결 생기발랄해진 대답이 돌아왔다.
어린 선인은 어머니의 ‘꾸러미’를 챙기고 지금쯤 도화원 입구에 누워 해를 쬐고 있을 청조를 찾아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
그저, 찰나에 든 느낌이었다.
과연 잘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서왕모는 뭔가 석연치 않다는 것은 확신했다.
청조 중 가장 영특한 것을 골라 보내준 소청조.
그것이 복숭아 향에 눈멀어 비 오는 것도 모르고 몸이 녹도록 밖에 있었다고?
고것이, 몸을 회복하자마자 상천으로 날아갔다고?
아니, 모두 차치하더라도 직인께서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는 새를 여태 찾지 않으신다고?
되짚어 보니 하나같이 말이 되지 않았다.
소청조가 삼천으로 사사로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야기였다.
운명을 짓는 자가 부리는 새가 삼천으로 나설 일이 있어서도 안 됐고, 새가 저리 삼천을 거리낌 없이 날도록 둬서도 안 될 일이었다.
삼천과 삼천외의 땅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했다.
그러니, 이 찜찜한 것을 그저 기우였다는 확인을 받고 부끄러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마고께 말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번 우세 당하는 편이 나을 테지.’
저 작은 것이, 현명해야 할 직인이 치우쳐 있다는 소식일랑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오늘, 서왕모는 단단히 창피당하고 오리라. 아주 대차게 각오를 했다.
‘아니, 이이는 도대체 언제 나이 값을 할 작정인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마고의 웃음소리를 짐작해보며 서왕모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마고께 인사 다녀온 지도 오래되었다.
겸사겸사 아주 잘 되었다 싶어, 무겁던 마음이 그나마 조금 가벼워졌다.
구르르-.
거친 새소리와 함께, 어린 선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어머니, 꾸러미를 챙겨왔사옵니다.”
사방이 달큰하게 녹아나는 향을 맡으며, 서왕모는 한층 단정해진 모습으로 아이가 건네주는 꾸러미를 건네받았다.
“다녀오마.”
서왕모의 말에 육 척이 넘는 거대한 날개가 펼쳐지고, 구르륵거리던 청조가 몸을 납작 엎드렸다.
한손에 꾸러미를 단단히 틀어쥔 서왕모가 청조가 펴준 날개를 딛고 몸통위에 앉았다.
“가자꾸나.”
그리고 날개를 지치며 일어난 거친 바람을 안은 청조가 크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땅을 박차고 하늘로 솟았다.
“다녀오세요오-. 어머니.”
땅위의 어린 것이 멀어지는 목소리로 명랑한 인사를 남기고 멀어졌다.
마고전은 오래전 기억 그대로였다.
아무도 발걸음을 하지 못하지만 먼지 한 톨 떨어져 있지 않은 것도 그렇고, 마치 조금 전까지 비라도 내린 듯 진하게 풍기는 풀 냄새도 그렇다.
전각 안에 서 있지만, 울창한 숲속 어딘가에 발을 딛고 있는 상쾌함.
“여전하시구나.”
서왕모는 들고 온 천도 꾸러미를 전각 한가운데에 있는 탁자에 올려두고는 가볍게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주름 하나 없는 치맛단까지 다 두드려 모양을 매만지고 나서야 서왕모는 북으로 난 창을 향해 절을 올렸다.
유리알같이 매끈하고 차가운 돌바닥에 서슴없이 무릎을 꿇고 정성껏 절을 올리고 나서,
서왕모는 절하던 그대로 땅바닥에 이마를 가져다 대고 지극히 공손한 목소리를 냈다.
“천신 마고시여. 천도전을 일구는 서왕모가 안부를 올립니다.”
전각을 울리는 목소리는 하나였다.
이따금 부는 바람이 서왕모의 옷자락을 가볍게 흔들 뿐 돌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날서, 마고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사와 부러 달려왔사오니.”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노인네 같이 구는지?”
서왕모의 얌전한 말투를 가르고 앳된 계집아이 목소리가 불평하듯 찾아들었다.
“!”
그리고 활짝 열린 창의 허공에서 삐죽 작은 발이 나왔다.
마치 공간을 가르듯 쑤욱 내밀어진 것은 이내 색 고운 치맛자락도, 예쁜 여밈을 한 허리띠를 지나 귀엽게 돌려 묶은 작은 머리통까지 대번에 그려냈다.
허공에 동동 떠 있는 것은 목소리만큼이나 어린 아이였다.
이제 갓 열 살을 넘겼을까.
아무리 많이 쳐줘도 열셋 이상은 되어 보이지 않는 모습을 한 계집아이는 머리에 오색 끈을 묶고 있었다.
제 머리는 단단히 돌려 묶어 놓고선 색색이 고운 끈을 머리채인 양 늘어뜨린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정말 고지식하기로는. 관둬라.”
저보다 한참 연배가 있어 보이는 서왕모를 향해 서슴없이 하대를 하며 심지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은 아이는 놀랍게도 계속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다.
안정적인 모습으로 위에서 서왕모를 내려다보던 아이는 빈정거리는 말에도 그녀가 꿈쩍도 않고 계속 엎드려 있는 자세를 고수하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탁-.
들으란 듯이 발끝을 퉁명스럽게 돌바닥에 디디며 소리를 내고.
제 말을 듣고도 돌바닥에서 고개를 들 줄 모르는 서왕모의 고집스러움에 화를 내듯 발을 구르며 걸었다.
당연하다는 듯 탁자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서왕모를 부르는 것까지 거침없다 못해 무례한 모습에도 서왕모는 머리를 돌바닥에 붙이고 조아린 채였다.
“저저저. 저 고집.”
아이는 한 손에 턱을 괴고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쏟아냈다.
“……어휴. 저것 보라지.”
“…….”
“그만하면 됐으니 이리 오너라. 들어줄 터이니.”
마고가 잔뜩 골이 난 듯 미간에 주름을 깊게 새기며 결국 답을 하자 그제야 서왕모가 자세를 추슬러 일어났다.
아이에게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공손하게 모은 두 손에 시선을 묶은 서왕모는 아이 앞으로 다가와 다시 절을 올리려고 했다.
“그만. 또 절을 하면 듣지 않고 가버리련다.”
“아, 아니…….”
“이거야 원, 마주치기만 하면 하루 종일 절을 하느라 이 귀한 시간을 낭비하니 보아 넘길 수가 있어야 말이지.”
투덜거림인지 꾸지람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은 아이를 보면서도 서왕모는 단 한 번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마고시여.”
눈앞의 이 어린 소녀는 천신 마고셨고.
“어머나, 징그럽게도 부르는구나. 싫대는 데도.”
지극히 귀한 분께 치레하듯 부르는 말에 진저리를 치는 저 어린 소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운 것은.
응당 그녀는 어리고 어려, 앳되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천신 마고.
이 세계를 만들어 낸 이이자, 이 세계와 그 운명을 같이하는 자였다.
그녀의 어린 모습은 이 세계가 아직도 누릴 날이 많다는 의미였으니 당연히 기뻐해야 했다.
서왕모는 자신을 보며 한숨을 쉬는 마고가 손짓하는 대로 얌전히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향이 아주 그만이구나. 뇌물인 게야?”
마고는 서왕모가 가져다 놓은 복숭아 꾸러미를 풀어선 하얗고 토실한 것을 손에 들어 올려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흐음. 하고 작게 내쉬는 소리에 묻어나는 진한 만족감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해 서왕모는 자신이 누구 앞에 있는 건지도 잊고 웃을 뻔했다.
툭.
무릎 위로 가벼운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은 조금 전까지 마고의 손에 들린 복숭아였다.
“먹거라. 길러냈으니 가장 좋은 것으로 맛도 봐야지.”
“아닙니다. 마고께 드리려고 어린 것들이 정성으로 고른 것이니 부디 가납하여…….”
“정성으로 배가 부르구나, 애썼으니 맛이나 보렴. 나머지는 내가 다 거두마.”
어느새 마고도 손에 탐스런 복숭아를 쥐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마고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내처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서왕모는 얌전히 복숭아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잘 키웠어.”
마고전을 두텁게 감싸는 달큼한 향이 마음에 든 듯 마고의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다 마고께오서.”
“엊그제 보낸 비는 요긴히 썼느냐?”
“단비를 보내주셔서 동천도전에 꽃이 만발했사옵니다.”
“단비라, 그 비가 기실 너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만. 잘 받았다니 되었지.”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해서는 근엄하기 짝이 없는 말투를 써도, 하얗게 살 오른 복숭아를 앞니로 크게 깨물어도 전혀 거리낌 없었다.
그녀는 이 세계이자, 창조주.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 바람도, 과즙을 뚝뚝 흘리는 천도도.
모두 그녀였다.
“올해 작황이 그만할 것이다.”
“그럴 것입니다. 유난하게 꽃이 피어오르고 있는지라, 아이들이 바쁘답니다.”
“잘 두어라.”
여상한 말투로 마고는 천도를 챙겼다.
마고의 말은 거기서 끝났지만, 서왕모는 조만간 무슨 일이 날 것이라는 짐작을 했다.
오백 년 전, 마고를 만나 천도를 잘 챙겨두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이십 년 전, 천도를 한 알도 남기지 말고 모두 거두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오래지 않아 모든 천도를 끌어다 써야만 했었다.
서왕모는 마고의 말을 곱씹었다.
“그 말씀은.”
“잘 두어라. 좋은 것으로 골라 두어라.”
마고의 말은 종전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한 알도 남김없이 거두라고 언질 했던 이십 년 전엔 청천의 전이 일어났다.
차원의 틈에 박힌 요괴들이 거대한 무리를 이뤄 경계를 넘으려던 것을 저지하러 일어난 일이었다.
본디 귀왕과 상제께서 그 대에 한번 경계의 요괴를 대대적으로 몰아내는데, 이십 년 전에 늘상 하던 기일에 재앙이 벼락처럼 들이쳤다.
수천에 달하는 선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지존의 좌가 대를 물렸다.
그리고 그의 첫손에 꼽는 권속마저 그 좌를 물려주었다고 들었다.
천의 경계가 선인의 피와, 요괴의 먼지로 그야말로 지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절로 입안이 바짝 마르고, 마른침이 넘어간다.
꿀꺽.
서왕모는 자신도 모르게 입이 타 손에 쥐고 있던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 들어온 과육이 씹을 새도 없이 녹으며 심신으로 파고든다.
심란하던 마음에 기운을 북돋고, 청조를 타고 날아오느라 지친 몸에 활기가 솟았다.
“걱정은 미리 해둘 만한 것이 아니지.”
어느샌가 천도 한 알을 깔끔하게 먹은 마고께서 서왕모에게 상냥한 어조로 이야길 꺼냈다.
“걱정이 아니오라 그저, 방비라도 해볼까 하여…….”
“방비라…… 그 생각이 깜찍하구나.”
그러니, 내가 널 어리다 하는 것이지.
마고는 천진한 소녀의 얼굴로 생긋 웃었다.
붉은 입술을 길게 늘여 두 눈을 활처럼 휜 표정은 분명히 웃고 있는 것이었으나 서왕모는 그것이 웃음이 아님을 알았다.
“피해 갈 수 없어서 운명이란다.”
“그러나.”
서왕모는 처음의 공손함도 잊고, 마고의 말에 반박하려 했다.
그녀는 마고를 흠모하고 따르는 마고의 아이였으나, 뻔히 위험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손 놓고 지켜보는 마고의 행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지금 마고는 분명히 ‘위험’을 얘기하고 있었다.
8천 년에 한번 그 열매를 맺는 천도가 필요할 정도면 적어도 상하천 두 지존이거나 그의 비, 아니면 그들의 바로 아랫좌들에게 위험이 닥친다는 의미이다.
천을 담당하는 지존이란 것이 얼마나 지극히 고아하고 까마득히 높은 자리인 줄 모르시는 것인가.
지금 한 세계가 뒤흔들릴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지하시고서도 그대로 흐르게 두련다는 의지가 날것 그대로 생생히 와 닿아 서왕모는 애가 타고, 태연한 마고가 원망스러워졌다.
“운명은 나라 해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그렇지만, 겨우 삼천외의 선인인 직인도 짜는 것을요.”
“그래. 아무것도 모르니 짜는 것이지.”
“…….”
“그 무게를 아는 나는 짜지 못해.”
마고는 어느새 어린 소녀가 아니라, 이 세계를 책임지는 천신의 얼굴로 말을 잇고 있었다.
“짜서도 안 되지. 관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보아 넘기지 못할 테고, 측은하다 하여 하나를 손대면 거기에 얽힌 운명들이 다 비틀린단다.”
“아…….”
“하나를 비틀어 수천을 다치게 하겠지. 그리고 그 비틀린 수천이 다시 수만을 힘들게 할 것이고.”
“그래도.”
“그래서 지켜봐 주는 것이지. 함께 버티며, 응원해주는 것이지.”
“…….”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아직 서왕모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돌아가렴.”
“아직 여쭙고자 하는 것은……!”
“쉿.”
“말하지 않았니. 지켜보아야 한다고.”
“다른 이야기가 있사옵니다. 오늘 제가 무얼 봤는지, 제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제발 들어나 봐주시옵소서.”
서왕모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마고를 향해 다급히 손을 내뻗었다.
마고가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했지만, 이대로 마고가 돌아가면 이후로 두 번 다시 만나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껴서인지도 모른다.
마고가 지켜봐야 하는 그 고난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일이 지나가기 전까지 마고를 다시 뵐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확신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지.”
마고는 허공을 움켜쥔 서왕모의 손등을 장난스럽게 두드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니 어서 돌아가 천도를 키우거라.”
“마고시여!”
서왕모는 다급히 마고를 불렀지만, 마고는 조금 전까지 눈앞에 있었던 것이 꿈인 양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춘 후였다.
“삼천외의 선인은 삼천의 일에 눈을 감는 거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서왕모에게 까마득히 멀어진 목소리가 울리는 것이 마지막이었다.
서왕모는 처음 마고를 뵈었을 때처럼 해가 저물 때까지 전각 안에 엎드려 다시 한번 청했지만, 마고는 두 번 다시 나타나주지 않았다.
붉은 해의 마지막 한 자락을 남겨두고서야 서왕모는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본디, 낮의 하늘에서 따온 청조는 비가 오는 날도, 밤하늘도 날지 않는 법이었다.
그러니 해가 그 위세를 감추고 어둠이 내려앉기 전 어서 돌아가야 했다.
가거들랑.
“부지런히 키워야겠구나.”
다짐처럼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체념뿐이었다.
삼천에 곧 파란이 일 것이다.
서왕모는 날개깃을 펼쳐 자신을 태워주는 청조위로 올라서며 이를 사리물었다.
정성껏,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최고의 천도를 키워낼 것이다.
“가자 청조야,”
마고전은 이내 텅 비었고, 늘 그렇듯 빈 전각에는 흐르지 못한 시간이 차곡히 쌓였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