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붉은 하늘에 뜨는 별 (4)
2018.01.19.
이틀을 꼬박 내린 비는 땅을 넉넉히 적셔주었다.
물을 흠뻑 먹은 나무들은 그사이 부쩍 등치를 키웠고, 새순을 앞 다퉈 틔워냈다.
“싱그럽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거군요.”
소희는 아수라를 따라 후원을 걸으며 진심으로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땅을 스치는 비단 치맛단은 이슬에 흠뻑 젖었지만, 그마저도 상쾌했다.
흐음.
음미라도 하듯 깊게 숨을 들이켜는 소희에게 아수라의 웃음이 닿았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갑자기 온 사방에서 생명력을 분출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소희는 자신의 감정을 원하는 만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게 영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런 게 느껴지십니까?”
반보 정도 앞서 걷던 아수라가 문득 뒤를 돌며 되물었다.
어느 정도는 정말 말 그대로의 느낌이었던 탓에 아수라가 정색하는 것 같자 소희는 두 손을 홰홰 저으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그냥 비가 온 끝에 나무들이 잘 자란 것 같아서 괜한 소릴 한 거지요.”
소희는 혹시 아수라가 오해라도 할까 봐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아아. 소장 농이 과했사옵니까?”
아수라 역시 가볍게 건넨 말이었던 듯, 소희가 정색을 하자 멋쩍게 얼버무렸다.
그의 손에 들린 묵빛 접선이 가볍게 흔들리며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나긋하게 팔랑거리는 그의 손이 마치 그의 등 뒤에 가지를 늘어뜨린 수양버들 같았다.
별생각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희는 문득 ‘표가 공자’가 떠올랐다.
봄비가 한껏 내리고 난 다음 날이었던가.
“돌아가시거든 드셔보세요.”
“어머. 이건.”
그가 내민 것은 작은 차단지였다.
매일을 하루가 멀다 하고 서신이며, 부담스럽지 않은 작은 선물들을 꼬박꼬박 보내는 걸로 모자랐던 것인가.
이번에도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차단지를 꺼내 드는 모습에 소희는 난처해졌다.
매번 받기만 하자니 염치없다 싶었고, 거절하자면 늘 실랑이가 하루 내내 이어졌다.
자신도 뭐라도 보내드리면 그나마 이 미안한 마음이 좀 나을 텐데, 입에 풀칠하기도 빡빡한 처지라 차마 입 밖으로 내기 힘들었다.
차단지를 싼 천을 풀고 뚜껑을 열자 은은하면서도 달큰한 향이 단번에 끼쳐 들었다.
“꽃차입니다.”
향만큼이나 그 색도 일품이었다.
표가 공자가 내미는 단지 안의 꽃봉오리들은 바짝 말려진 것이었으나 그 색과 모양은 생화보다 더 생생했다.
보라색 꽃잎을 야물게 오그라뜨려 잎사귀를 둥글린 모습이 꼭 예쁜 구슬 같았다.
실타래를 감아 놓으면 이렇게 야물게 나올 것인가.
소희는 공자가 내미는 차단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귀한 것을.”
“귀하긴요. 꽃차라 다 비슷한 것을요.”
“매번 이런 귀한 것을 맨손으로 받으려니 민망합니다.”
이어지는 소희의 말이 당연한 거절일 거라 생각한 모양인지 그는 드물게 단호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같다.
맞아. 눈에 이렇게 힘을 줘서.
새파랗게 빛이 나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
자신을 찾아와 꽃차가 담긴 합을 기어코 들려주며, 봄날 차 한 잔 마셔달라 부탁하던 그의 등 뒤로 이렇게 수양버들이 늘어져 흔들리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가지를 따라 잎사귀들이 한들거리고, 눈을 찌르는 햇살이 그 사이사이 비쳐들어 바라보기가 힘들었더랬다.
앞에 서서 파랗게 눈을 빛내는 남자와, 그의 등 뒤에서 비쳐드는 강렬한 태양빛에 결국 고개를 돌리고 말았었다.
“……님?”
그 빛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알겠다.
눈이 부셔서 잘못 본 줄 알았던 그것이, 그가 상태자였기 때문임을.
그 새파란 빛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제야 알겠다.
“……님!”
“!”
갑자기 끼쳐 드는 청량한 향기와 함께, 잔뜩 걱정 어린 표정을 지은 아수라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런 그의 모습에 소희가 화들짝 놀라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 아수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이 들어찬 까만 눈동자가 소희를 담고 있었다.
빛을 모두 흡수해버린 눈동자를 마주 보자, 이유 모르고 서늘해졌던 가슴이 두근두근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다시 살아 움직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향기 좋은 꽃차를 챙겨주던 다정했던 남자의 기억이 무슨 위협이라도 됐던 것처럼.
“괜찮으십니까?”
아수라의 걱정스러운 눈길에 푸흣- 묶어둔 숨이 터졌다.
“괜찮아요.”
소희는 진심을 담아 웃었다.
자신이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었다고.
두려워할 이유는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있을 리가 없는데.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던 건, 아마도 이제야 그가 ‘상태자’였다는 것을 실감해서 그랬을 것이다.
알고 지내던, 아니.
평생을 함께하자 약속했던 남자가 사실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서.
원래는 없었던 사람이라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서.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소희는 순식간에 온몸에 소름이 바짝 일어서는 괜찮다고 웃었다.
“그럼, 가실까요?”
아수라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허리를 과장되게 굽혔다.
그의 손이 아수라전으로 난 길을 안내하듯 쭉 뻗어있었다.
“네에. 가시죠.”
부디 즐거워 보이길 바라며 소희는 명랑하게 대꾸했다.
귓가를 울리는 새소리를 타고 오래된 이야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사박거리는 작은 발소리와 함께 오솔길을 타고 뭉근히 피어오르던 초여름 풀내까지 생생하게 살아 올랐다.
다리 건너에 있는 큰 약재방을 다녀오는 길이었던가.
그날따라 아버지를 따라 가보겠다고 조르고 졸라, 길을 나섰던 참이었다.
오래 걸어 힘들기도 했고, 약재방을 다녀오는 길이 그리 재미있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의 기억이란 건 열 살 이전의 것이니.
그 어린 것에게 먼 길을 다녀오는 것이 재미있을 리가 있겠나.
“아버지. 저기는 사람이 안 사는 집인가 봐요.”
“이리와, 그런데 기웃거리면 못써.”
“히익, 주인이 삽니까?”
“저 집에 주인이 어디 있겠느냐.”
“이사갔습니까?”
‘이사라…….’
자꾸만 빈집을 흘끔거리는 소희의 손을 얼른 잡아챈 아버지의 손이 금세 축축해졌다.
“아무도 안 살면, 구경이라도……!”
“안된대도!”
“…….”
순식간에 버럭 소리를 지르고서는 깜짝 놀라 움츠러든 소희를 보던 아버지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반역으로 몰려, 멸문당한 집이다. 터를 불사르고 3대를 참수했느니라. 아무도 저곳에 발을 디뎌선 안 돼.”
“……네.”
“무슨 말인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란다. 알겠느냐?”
“네.”
아버지는 잔뜩 풀죽은 소희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다 이내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가자, 덕실 어멈이 상을 두 번 차리게 할 수는 없잖느냐.”
“예 아버지.”
아버지는 재촉하듯 손을 끌며 덕실 어멈이야기를 했지만, 어린 날의 기억들은 이제 와서 그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날의 소희는 약재상을 들러 낮것을 배부르게 먹고 오는 길이었고,
반역자로 몰려 멸문을 당했다던 그 집은.
표가 공자의 장원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오래도록 터를 잡고 고을 큰 부자로 소문난 표가 공자의 장원이라는 것은 누구의 기억인가.
쿠쿵-
머릿속에 굉음이 울리며 눈앞이 캄캄했다.
기억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한번 금이 가더니, 쩌억 갈라져 메꿀 수 없는 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속도를 높였다.
머릿속에서 온갖 것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
소희는 자꾸만 돋아나는 소름을 감추려 손으로 팔뚝을 쓸고 선뜩해진 목덜미를 매만졌다.
앞서가는 이는 아수라.
예민하고, 섬세한 이였다.
그가 알면 걱정할 일이라 소희는 아수라가 눈치채지 못하게끔 가만가만 옷자락을 정리하는 듯 굴며 피부 가득 돋아난 소름을 잠재우려 애썼다.
열아홉, 십구 년을 살아온 자신의 인생은 평범했다.
하지만 그것은 위장된 평화.
꿀꺽.
소름보다 더한 긴장감이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이 순간에도 소희의 기억은 점점 그 균열의 크기를 늘려갔다.
어느 날 문득. 봄바람이 불어오듯 갑작스레 들리던 이야기가 이제야 그녀의 균열에서 본모습을 드러냈다.
“표가 장원 곳간이 열렸답니다!”
“세상에, 기근이라고 곳간 문을 열어 주신거유?”
‘표가 장원이 어디지?’
의문을 가질 새도 없었다.
행랑채를 드나드는 이들의 이야기의 대부분은 어느 날부턴가 당연하게 표가 장원으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댁 어르신께서 워낙 마음이 넉넉하지 않소.”
“하긴 그렇지요?”
“아무렴 그걸 말이라고. 어르신께서 넘치게 복을 지으니 그 댁 도령들이 그렇게 잘나신 게지.”
“아니 그런데 도령들께서 뭐 어떻기에. 난 금시초문이라.”
“어떻긴 헌헌장부라는 말이 부족하다더구먼.”
이야기는 점점 표가 장원에서 표가의 아들들로 옮겨갔었다.
행랑을 오가던 덕실의 뺨에 홍조가 들고 ‘아씨!’ 작게 부르는 말끝에 설렘이 묻어있던 나날.
말로만 듣던 표가의 어르신이 소희를 찾아 왔었다.
“소희야.”
다감한 부름에 모든 것이 그 순간 실재가 되었더랬다.
그리고 어르신께서 쭈뼛거리듯 물러서던 소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오래전 ‘선친의 약조’를 꺼냈을 때.
기억에 없는 약조의 내용이 어르신을 통해 의미를 가지던 그 순간, 소희의 어린 시절이 의미를 잃고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 것을.
소희는 이제야 깨달았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고갯마루를 오르던 기억과 함께 추운 겨울 밤 긴긴밤 웅크려 있을 그녀를 위해 모르는 척 화톳불을 넣어주시던 온기가 ‘영’이 되어 하계를 딛고 있는 지금에서야 떠올랐다.
‘아버지.’
하지만 소희의 기억 속 선친은 소희에게 단 한 번도 ‘귀왕’에 관해 언질을 주진 않았다.
아직 떠오르지 못한 것인지, 없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소희는 마음 한구석을 갉아먹는 ‘영혼의 맹약’을 떠올리다 가늘게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평온한 듯 흩어지는 날숨처럼 그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임을 간절히 바랐다.
아버지께서 환생의 좌를 받지 못하고 지옥불에 계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녀를 괴롭게 했다.
어떻게 아수라의 뒤를 따랐는지 기억도 없었건만 아수라의 가벼운 발걸음이 어느 순간 멈춰 섰다.
“이곳입니다. 아수라전. 수라전이라고도 하지요. 어서 오세요.”
아수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소희를 반겨주었다.
아수라전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전에 들어서자, 역시. 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평상시 그의 모습만큼이나 깔끔한 그의 처소는 군더더기 없는 모습으로 방문객을 반겼다.
“잠시만요.”
잘 닦여진 소로 끝에서 그의 전으로 들어가려는 소희를 만류했다.
묵빛 기왓장이 얹어진 야트막한 담장에 별다른 문을 달아둔 것도 아니건만, 아수라는 마치 문이 있는 듯 뭔가를 손을 들어 가볍게 그어 내렸다.
그의 손에 들린 접선을 따라 검붉은 궤적이 보였던 것도 같았지만 워낙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제, 들어가시지요.”
“방금 그건.”
아수라의 안내에 소희가 궁금한 듯 입을 열었다.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러진 않았을 것이다.
“진이 쳐져 있어서요.”
“진이라구요?”
“네.”
아수라는 소로 끝에서 발을 넘겨 안으로 들어가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런 그를 따라 소희도 얌전히 아수라전으로 들어섰다.
진이 쳐져 있다니, 기분 탓인지 소로 끝에서 전안으로 들어설 때 뭔가 서늘한 것이 스치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이겠지?’
“느껴지십니까?”
“예?”
“전이 느껴지십니까? 방금 표정이.”
“아니에요. 잠깐 서늘한 기분이 들어서요. 그저 괜한 기분 탓이에요.”
주책맞게.
소희는 말하고 나서도 멋쩍어 볼이 달아올랐다.
아까부터 떠오르는 기억에 신경이 예민하게 솟아난 탓에 무언가 느껴진다 자꾸 착각하는 것이었다.
“느껴지시는군요?”
하지만 아수라의 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수라전에 진을 두른 것은 밤의 아수라입니다. 그녀의 극음에 달한 기가 들어간 탓에, 밤의 아수라가 그린 진은 만져보면 무척 차답니다.”
“아아…….”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이야기해주는 아수라.
아무래도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착각하는 성싶었다.
헛된 기대를 키워서야 될 일인가.
소희는 머뭇거리다가 미안한 듯 작게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아수라 저는 아무것도.”
“느끼기 시작하셨으니, 곧 보이게 될 겁니다.”
이번에도 아수라는 깔끔하게 응수했다.
소희의 얼떨떨함은 배려해주지 않는 그답지 않은 태도였다.
오늘의 아수라는 어딘지 평상시의 아수라와 미묘하게 그 느낌이 달랐다.
심지어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전안으로 들어선 아수라는 살짝 바빠 보였다.
‘아까 공연히 딴생각을 하느라 아수라님의 시간을 뺏고 말았네.’
지나간 기억이 뭐 그리 급하다고.
굳이 이때에.
소희는 자책하며 아수라의 뒤를 종종거리고 쫓았다.
긴가민가하던 것은 뚜렷해졌다.
“소희님, 소장. 곧 가봐야 하니 조금 서둘러 주시겠습니까?”
“네네. 그러겠습니다.”
아수라의 보폭이 더욱 넓어지며 소희가 가볍게 뛰는 것 같은 정도가 되었을 때, 아수라전의 본채와 그 앞에 나와 있는 풍천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든 한눈에 들어오는 분이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와, 다부진 몸.
그리고 무엇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빛이라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누구보다 확연한 존재감.
“푸흣.”
정말 눈에 띄시는 분이로고.
어디서든 길을 잃으면 저분을 보고 찾아 나서면 될 것이다.
저도 모르게 든 시답잖은 생각에 웃음이 터졌지만 급하게 걸음을 옮기던 아수라가 그 순간 걸음을 멈추고 빙글 돌았다.
에그머니.
소희는 제 웃음소리 때문인가 해서 찔끔한 기색이 되어 아수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아수라는 조금 전까지 다급해 보이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옅은 미소를 머금은 표정은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아아, 다행입니다.”
“네?”
“소장은 이만 안심하고 가보렵니다. 소희님.”
“어디로 가신다는……!”
이상한 말에 다급히 되물었지만 소희의 말은 닿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게 무슨…… 아수라?”
소희는 갑자기 텅 비어 버린 자리를 보며 황망한 목소리를 냈다.
화창한 아침, 꿈이라도 꾼 듯 정신이 없었다.
아수라는 사라져버렸다.
땅속으로 꺼지듯, 하늘로 솟은 듯.
순식간이었다.
“소희님!”
어리둥절한 소희를 일깨운 건 풍천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눈앞에서 우렁우렁 귀를 울려버리는 그의 큰 목소리가 산란한 정신을 단번에 불러일으켰다.
“어? 풍천. 저기 아수라께서. 아니.”
마치 제정신이 아닌 듯 두서없이 마구잡이로 더듬거리는 소희를 풍천이 다시 한번 불렀다.
“소희님! 진정하십시오.”
“어? 네, 네.”
풍천의 말에 소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마음이야 다스렸다지만 정신없이 군 것이 뒤늦게 부끄러워져 변명처럼 작게 덧붙였다.
“제가…… 인간일 적의 버릇이 남아서…….”
아수라가 사라졌다는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 대신 점잖은 척, 애써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이해……합니다.”
그런 소희에게 풍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상히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풍천은 눈에서 피를 쏟던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밤 내내 멈추지 않는 피를 받아내며 둘은 반나절을 보냈다.
그 덕일까.
다시 만난 풍천은 예전과는 달리 묘하게 친밀해진 느낌이었다.
이전이라면 형식적인 대꾸를 해주었을 테지만, 지금 풍천은 조금 더 솔직하게 굴었다.
“하지만, 익숙해지십시오.”
곧 달 마마가 되실 분께서.
중얼거리는 말이 그저 미워서 하는 타박이 아님을 이제 알 것 같아서.
소희도 겸양하는 대신 그녀 역시 풍천 같은 솔직한 목소리를 냈다.
“그치만, 놀랐단 말이에요.”
펑. 하고 사라지셨어요. 산신령처럼.
꼭, 어린 시절의 소희처럼. 숨기는 것 없이 놀란 마음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흐음…… 손을 내밀어 보시겠습니까.”
소희의 이야기를 들은 풍천은 그녀의 손을 청해 그 위에 종이인형을 하나 주워 올려주었다.
무게감도 없이 바람에 팔랑이는 그 작은 것을 조심스럽게.
“아수라입니다.”
“…….”
농담이라기에 풍천의 표정은 진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는 잠시 다녀갔다고 봐야 하려나.”
두툼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풍천은 곤란한 기색이었지만,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설명하기가 어렵네, 라고 중얼거리던 풍천은 우선 아수라 본전으로 들어가자며 소희를 청했다.
풍천은 말을 고르는 듯 긴 거리를 걷는 동안 더러 한숨을 쉬고 더러 머리를 긁적였다.
고민하는 품새가 뻔히 보여 소희는 궁금했지만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수라 본전에 다다라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시비에게 다과상 좀 내다오. 라며 접객실로 그녀를 청한 것까진 좋았으나,
“아수라는 지금 귀문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뜬금없었다.
“그럴 리가요. 아수라께서는 조금 전까지 여기 계셨습니다.”
뜻밖의 말에 소희가 재빨리 대꾸했지만 풍천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상한 대답을 했다.
“그렇지요, 조금 전까지 여기에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게 무슨. 놀리지 마시고 제대로 알려주세요.”
귀문까지는 이름 없는 강을 타고 반나절.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뻔하게 아는 것을 가지고 장난치려 들다니 살짝 서운했다.
저는 이 친밀감에 기대 어린 것처럼 아수라께서 펑 하고 사라지셨어요. 라고 속마음을 숨김없이 모두 말씀드렸건만.
‘기껏 하시는 것이 이런 농이란 말인가.’
소희가 손에 들린 종이인형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수라께서 풍천의 농을 들으면 대체 뭐라고 하실 것인가.
‘아니, 그런 것에도 속으셨답니까.’
오죽접선을 팔랑이며 잔뜩 웃겠지.
‘어휴 정말.’
소희는 얼굴을 붉히며 손에 들린 종이 인형을 구겼다.
“안 돼!”
아니 구기려고 했다.
화들짝 놀란 풍천이 그것을 빼앗아 가지만 않았다면.
“소희님! 아수라라고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예에?”
이번에야말로 소희도 놀라고 말았다.
놀린 게 아니었어?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종이인형의 목을 접어버리려고 했던 것이 떠올라 움찔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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