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붉은 하늘에 뜨는 별 (2)
2018.01.12.
쏴아아아아.
무서운 소리를 내며 빗방울이 대지를 두드리는 소리가 우렁찼다.
하루를 내도록 이어가던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연이어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 같습니다.”
매년 장마 때면 물난리로 애먹던 기억에 이른 새벽부터 소희는 잔뜩 잠이 물린 눈을 해서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힘이 들어있지 않은 손짓으로 이불을 젖히자 포근한 냄새가 뒤를 따랐다.
“이리와.”
이불을 걷어내고 반쯤 일으킨 몸이 길게 뻗어 온 남자의 팔에 잡혀 소리도 없이 그의 품에 잠겼다.
당연하게 끌어당기는 손에도 노곤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지난밤 새벽 늦도록 달큼한 장난질을 한 참이라 잠이 깨려면 아직 멀었다.
“어딜 가려구.”
품에 잠긴 머리에 코를 박고는 그대로 얼굴을 비비는 환은 눈을 뜨지도 못하고 있었다.
“비가 너무 와서, 좀 내다보려고요.”
소희도 너른 품이 주는 기분 좋은 안락함에 머리를 조금 더 바짝 들이밀었다.
찰나의 단위로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물이 고이진 않는지, 고여서 빠지지 못한 물은 없는지 봐두어야 했다.
그건 열아홉 아씨의 오랜 버릇이었다.
이미 인간의 몸을 벗어났건만, 그녀가 가진 모든 경험은 인간일 때 받은 것.
그런 소희에게 이 무서운 소리를 내는 비는 그저 즐겁게 듣기만 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하루 이틀.
무겁게 내리는 장대비에는 반드시 무서운 일도 따랐다.
묵직하게 감겨드는 눈을 간신히 밀어 올리고는 정수리에 가만히 입을 맞추는 환에게 작게 종알거렸다.
“이러다 물이 넘쳐 들어오면 어쩝니까.”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소희의 체향을 즐기던 환의 눈이 뜨인 건 그때였다.
방금 눈을 뜬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맑고 환한 눈빛에 오히려 소희가 민망해졌다.
재빨리 손을 들어 부스스한 얼굴을 한번 쓴다 머리를 매만진다 부산을 떨었지만 환은 소희를 부둥켜안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등을 구부려 소희에게 얼굴을 맞대왔다.
“비가 넘치기도 했던 건가?”
“네?”
“더러, 비가 샜었나?”
소희는 환이 무엇을 묻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많이는 아니지만, 장마 끝에 한 번씩 말썽을 부렸더랬지요.”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했지만 적어도 불편하긴 했다.
너른 집터에, 번듯한 가옥처럼 보였지만 소희의 집은 낡을 대로 낡아 행랑채 아범이 수시로 손을 보고도 흙벽이 떨어지고, 기왓장이 깨져 나갔다.
기왓장을 살 돈푼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적에 그 돈이면 몇을 먹이겠느냐고 지붕을 수리하지 못하게 하셨던 것이다.
‘아니 그럼 이제 비가 오면 어쩌나요.’
유모가 볼멘소리를 하며 입을 퉁나발을 해 있으면 아버진 짚과 황토를 이겨 기와 자리에 올려두고는 깨져버린 기와를 조각 맞춰 올려두었다.
겉으로 보기엔 괜찮았지만, 깨진 기와 사이로는 반드시 비가 스며들게 돼 있었다.
하루쯤이야 버텼지만, 이삼일을 내리 무겁게 비가 퍼부으면 천정으로 뚝뚝 빗물이 흘렀다.
눅눅하고, 더운 여름.
그릇을 받쳐두고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건 소희에게 일상이 되었다.
그것은 불편하고도, 가끔은 신경이 곤두서는 기억이었다.
어제 하루를 내도록 이은 세찬 비가 이 아침이 되도록 그치질 않으니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소희는 습관처럼 몸을 일으켰다.
‘뭘 하려고 했지?’
그릇을 가져다 놓으려고 했나.
화원을 따라 작게 패인 물길이 막히진 않았나 보려 했나.
소희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환의 눈을 바라보며 실소했다.
금속성의 은빛 머리카락을 하고서 눈에서 불꽃을 피우는 남자를 마주 보고 있었다.
살아생전 보지 못한 이를. 이제 마음에 품고 지아비로 받아 함께하려고 마음먹은 지금.
자신은 아직까지 인간으로 살 적의 기억에 목을 매고 있었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아니 기억은 무거운 것이다.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사람을 잠식해버린다.
“고단했던 건가.”
느리게 깜빡이는 소희의 커다란 눈에 비친 환의 표정은 살짝 일그러져있었다.
“고단키는요.”
걱정하는 환의 모습에 새삼 가슴 끝이 찡하게 울렸다.
“이제와 생각하면 추억입니다.”
이제 며칠씩 비가 와도 근심 없이 마냥 즐길 것이니까.
“소중한 추억입니다.”
소희는 생긋 웃었다.
입꼬리를 바짝 끌어올려 그녀의 지난 시간에 마음 아파하는 남자를 위로하려 했다.
“진작 데려올 것을.”
환의 마르고 곧은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소희의 뺨에 닿아왔다.
서늘함이 닥치고 뒤이어 은근한 온기가 뒤따라 그녀의 뺨을 포근하게 감쌌다.
소희는 자신의 뺨 위에 올려진 환의 손에 자신의 손을 더했다.
“곱게, 모셔올 것을.”
후회가 가득한 환의 말에 자책이 더해졌다.
그가 말하는 ‘곱게’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뻔하게 와닿았지만 소희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괜찮다, 아니다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두 눈을 감으며 물린 미소를 지우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환의 사과는 충분했다.
한 번이면 됐다.
매번 이런 식이라면, 자신과 환은 어느 순간 파멸할 것이다.
소희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죄를 지은 남자와, 그 죄를 사하는 여자.
이들의 결말이 행복할 수는 없었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만 언제나 죄책감을 가지고 바라볼 것이고. 여자는 남자의 그런 마음을 헤아리려 부담스럽도록 상냥하게 굴어야 했다.
편치 않은 관계가 오래 지속될 리 없었다.
“그만 하세요.”
“……평생을 두고…….”
“그만 하세요.”
평생을 두고 죄를 사할 생각이었던 건가.
소희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황급히 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자신은 왜 상태자와 혼약했던 걸까.
환은 어째서 자신을 이십 년이나 내버려 두었던 걸까.
왜
어째서
하필이면.
모두가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엮였던 걸까.
뻔하고도 답 없는 울분이 일었지만 삭혔다.
이렇게 고약하니, 운명이었다.
환이 넘기지 못한다면 자신이 삭혀야 했다.
소희는 뺨을 타고 건너오는 환의 심박을 느꼈다.
불안하고 빠르게 뛰는 그의 고동 소리에 오히려 울컥거리던 마음이 빠르게 진정됐다.
가슴 앞으로 모았던 손을 펴 환의 등 뒤로 돌려 세게 끌어안았다.
그래, 한 번이면 족했다.
더 이상 운명에 휘둘려 어그러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이미 정해진 것이라 운명입니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소희는 다짐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더 이상 그날의 기억에 그녀도 환도 상처받아서는 안됐다.
이제는 그만 털고 잊어야 했다.
“빗소리가 운치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마냥 이렇게 느긋하게 즐겨도 된다 생각하니 전 좋습니다.”
“……짐도 그렇단다.”
“빗소릴 좋아하세요?”
“그럼. 저 소릴 싫어하는 이가 어딨겠느냐.”
“설마, 풍천께오서도……?”
크흣.
이어지는 소희의 말은 너무 의외의 것이라 한껏 감정이 달아올랐던 환은 웃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소희를 끌어안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환은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하핫.”
“……비밀로 하시깁니다.”
소희는 뺨을 붉게 물들이고선 환에게 다짐하듯 채근했다.
“크흐흐흐흐흣.”
“……정말 비밀로 하셔야 해요.”
“풍천이…… 크흣.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슬퍼하겠느냐.”
“안돼. 안돼. 안돼!”
소희는 절망적인 목소리를 냈다.
이제야 생각하니, 풍천이 덩치는 우람하지만 당과를 집어 들며 티 나지 않게 기뻐하던 표정이며 꿀타래를 먹으며 깊이 감탄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풍천께서는 은근히 감수성이 풍부하신 게 아닌가.
‘오.’
두툼한 손가락으로 작은 다식을 하나 집어 들어 앞니로 반만 잘라 맛을 보는 그 섬세함이 왜 이제야 생각나는 것인지.
“제발, 네? 비밀로 해주시어요.”
“해주면.”
환이 순식간에 능글맞게 눈꼬리를 휘며 대번에 몸을 일으켰다.
한 팔 안에 안긴 그녀를 반쯤 몸을 일으킨 환이 지그시 내려다보며 빙글거렸다.
“그대는 내게 뭘 해주실 거야?”
“뭐, 뭐든.”
“이런.”
발그레해진 두 뺨에 촉촉이 젖은 눈빛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도 모르고 납죽 대답하는 소희의 모습에 환이 낮게 혀를 찼다.
“늘 내게 자비 없이 구는 이분이.”
웃음을 머금은 남자의 말은 다급하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똑똑똑-
똑똑-
“기침하셨습니까?”
“소희님?”
차마 대놓고 간밤 염휘께서 계셨다는 것을 저희들의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아이들이 소희를 애타게 불렀다.
“으…… 응!”
환의 아래에 깔려있던 소희가 파드닥 놀래며 황급히 그를 밀치고 일어났다.
훌렁.
급한 걸음에 걸치고 있던 침의가 크게 펄럭이며 희고 매끈하게 뻗은 맨다리가 잠시 나왔다 사라졌다.
등 뒤로 짧은 신음이 들렸던 것도 같았지만 소희는 자신을 다급하게 찾는 목소리에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황급히 문을 열고 바깥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던 시비들을 마주했을 땐 소희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오후 너덧 살의 모습의 아이로 안겨 보냈건만.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시비들의 손을 붙들고 있는 건, 적어도 여덟은 되었음 직한 어린이였다.
아직 울음이 덜 가신 듯 작게 코를 훌쩍이며 서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가.
“설마.”
“맞습니다.”
당황하는 표정의 소희에게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이라 낯설겠지만, 달 아이들은 금세 자랍니다.”
“어지간하면 달래려고 했는데 어찌나 우는지.”
이어지는 말에 소희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어째서 울었어.”
두 팔을 벌리며 다정히 내는 목소리에 삐죽거리며 시비의 손을 잡고 있던 아이가 왕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밤새 기다렸는데.”
자연스럽게 매달려 안기는 아이를 안으며 소희는 무척 미안해졌다.
“기다렸었구나.”
“소희님께서 아이를 오래 품어주셔서 아이가 기억을 했나 봅니다. 원래는 씨앗인 채로 보내져 그곳에서 태어나고, 보살핌을 받는지라…….”
엉엉 우는 아이를 안고 있는 소희에게 주눅 든 목소리로 시비들이 말했다.
아마 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 꾸지람이라도 들을까 겁먹은 것 같은 소리였다.
“내내 자길래. 어젯밤서도 곤히 자는 줄 알았지.”
소희는 시비의 말을 듣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를 달랬다.
“안 잤어요.”
울음이 반인 목소리에 투정이 담겨 목청이 돋았다.
“기다렸는데.”
“이런 이런.”
쪼그리고 앉아 우는 아이를 안아 달래는 소희와 주절거리며 변명 같은 설명을 하는 시비들의 왁자지껄한 틈으로 낮지만 또렷한 남자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환.”
소희는 눈물로 엉망이 된 아이의 얼굴을 잽싸게 소매로 훔쳐주며 그를 반겼다.
“이 염휘의 첫 아이가 이런 울보라니.”
“울보 아니에요.”
옅은 웃음소리가 물린 그의 말에 아이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대왕께 목청을 돋우다니!”
시비가 놀란 듯 중얼거렸지만, 환은 발끈한 아이에게 꾸지람하지 않았다.
“이곳에 계시다는 걸 몰랐느냐.”
대신 느긋한 목소리를 내며 손을 뻗어 소희에게 매달린 아이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에게 앙칼진 목소리를 낸 것과 달리 아이는 염휘가 내민 손에 얌전히 들려 그에게 안겼다.
“기다렸어요.”
“네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알아요. 전 달 아이. 이 하계를 이어나갈 선인입니다.”
아이는 한 호흡마다 자라났다. 살짝 뭉개지던 발음이 말을 이을수록 또렷해졌다.
석류알 같던 눈동자는 간밤 그 색이 짙게 물려 이제는 완연한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럼, 난 누구냐.”
“하계의 지배자, 염라의 첫 번째 불이십니다.”
알려주지 않아도 아이는 모든 것을 스스로 깨치고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인간의 경험밖에 없는 소희에게는 무척 신기한 광경이었다.
예전 같으면 이렇듯 이질적인 상황에 ‘이방인’이라 느끼며 움츠렸겠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눈앞에서 매 순간순간 빠르게 자라나는 아이는 달 아이, 이 하계의 선인이기도 했지만, 소희의 아이이기도 했다.
소희는 모든 것을 익히고 싶었다.
저 아이처럼 편견 없이 당연하게 익혀서 어서어서 이곳에 완벽한 달 마마로 녹아들고 싶었다.
“그렇구나. 요녀석, 영민한 것이 꼭 그대를 닮았어.”
그 짧은 사이 아이는 팔다리가 조금 더 길어졌다.
형님 옷을 받아 입은 듯 무척 길던 옷이 어느샌가 살짝 헐렁하게 맞았다.
환은 아이를 추슬러 안으며 이번에는 손으로 소희를 가르쳤다.
“그럼 저분은 뉘시냐.”
“달 마마십니다.”
아이의 붉은 눈이 그 말을 하며 호를 그렸다.
눈꼬리까지 홍조가 번져 생긋 웃는 품새가 무척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제 어머니이십니다.”
“!”
작은 입술이 달싹이며 말을 덧붙이더니 부끄러운 듯 염휘의 목에 손을 두르고는 얼굴을 묻었다.
빨개진 귀 끝이 눈에 새겨들 듯 선명했다.
환은 아이의 말에 넋이 빠진 듯 올려다보는 소희를 보며 옅게 미소지었다.
“맞다. 네 어머니이시지. 태로 낳진 않으셨다만 달에서 너를 받아 내주신 분이지.”
환은 아이에게 말했지만, 시선만은 소희에게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넌 이 염휘와, 달 마마의 첫 아이란다.”
은근해진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다정히 울렸다.
무섭게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단번에 마음을 흠뻑 적시는 환의 말에 얼띠고 황망해 뭐라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
환은 아이를 안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곧 또 다른 달 아이들도 태어날 것이란다. 첫아이든 아니든 모두 소중한 아이들이지.”
안겨있는 아이의 작은 등을 가만히 쓸었다.
“자라 무엇이 되든, 무엇을 하든. 보고 싶으면 이리 오너라.”
“정말입니까?”
“그럼.”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환에게 묻는 아이의 눈이 예쁘게 반짝거렸다.
“정말 찾아와도 됩니까?”
“그렇대도. 달 마마가 그리우면 울지 말고 찾아오너라.”
“정말로 찾아올 것입니다.”
“이렇게 빗소리가 요란한데 들릴 리가 없잖느냐.”
환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들뜬 기색의 아이를 가만히 다독였다.
그 사이에도 아이는 부쩍부쩍 자랐다.
겨우 어깨너머에서 찰랑이던 머리가 그새 등허리까지 길어져 예쁘게 흩날렸다.
“안 들리셨습니까?”
“요것. 밤새 듣고 찾아오시라 앙앙 울었구나.”
환이 아이의 말끝에 장난스럽게 코를 쥐고 흔들자 아야아야 하는 엄살이 터져 나왔다.
“안 들리셨습니까?”
아이는 빨개진 코를 두 손으로 쥐고는 소희에게 다시 물었다.
한결 밝아진 목소리가 노래하듯 그녀를 찾았다.
하지만 밤새 저를 부르는 울음소리를 못 들었냐는 말에 소희는 웃을 수 없어 두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그리고는 간신히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못 들었단다. 빗소리가 거세서.”
하고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찾아오련?”
일어서서 아이의 고사리 같은 말랑한 손을 잡아 주며 물었다.
아니, 약속했다.
“보고 싶으면 만나러 와주련?”
예서 기다리마.
항시.
환을 닮은 홍안에 웃음이 물려 가늘어지게, 애정을 듬뿍 담은 목소리로 아이에게 속삭여주었다.
“예. 찾아오겠습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아이의 까만 머리채가 밤하늘 너울처럼 부드럽게 출렁였다.
쏴아아아아아-.
비는 아직도 거세게 울음을 토하고 있었건만.
내궁에서만 붉은 미소가 연이어 번졌다.
소희는 문득, 앞으로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이날의 광경이 떠오르리란 걸 확신했다.
환이, 그를 닮은 아이를 안고.
저를 향해 웃는 이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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