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비가 오던 날에 (2)
2017.12.25.
환은 자신의 품 안에서 쌕쌕거리는 숨을 뱉으며 곤히 잠든 소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간밤 잠을 이루지 못한 건 소희뿐만이 아니었다.
환 역시 아수라의 식신을 잠재워 돌려보내고, 내궁에서 넘어오는 월력의 파동을 기쁘게 즐기며 그 밤을 하냥 지새운 참이었다.
피로가 묵직하게 몰려와 달큰한 숨을 쉬는 소희를 안고 이대로 잠이 들고 싶었다.
하지만, 환이 소희를 품에 넣고 그저 넘치는 마음에 기꺼워하며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한 건.
정체가 무엇인지 모를 께름칙한 것 때문이었다.
뒷머리를 잡아채는 기분 나쁜 무언가가 있었다.
계속 신경줄을 건드리며 무언가가 어긋났다고 알려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환은 곯아떨어진 소희를 보며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를 싸안고 하계에 첫발을 디뎠을 때.
첫 사신의 문을 넘었을 때.
나락의 절벽에서 돌아와 자신의 죄를 고했을 때.
그리고 서왕모께 다녀와 그녀를 마주했을 때.
매 순간 달라지던 소희의 태도를 알고 있었다.
그를 경계하며 다부지게 꾸짖던 그녀가 주저하면서도 자신에게 차근히 곁을 내주고 있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상냥하고 유순한 성격이라는 것을 뻔히 알았다.
체념하듯 용서하고, 이럭저럭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도 눈치챘다.
하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소희는 귀문의 별이기 전에 자신이 한눈에 마음에 품은 여자였다.
그녀는 존귀했고, 존중받아야 마땅했다.
자신이 얼마나 험한 꼴을 당했는지 똑똑히 알아야 했다.
어물쩍 넘어가는 것은 환이 바라지 않았다.
그것은 두고두고 아픈 가시가 되어 그를 발목 잡을 것이었다.
환은 그 모든 것을 알고서도 자신에게 와주길 바라며 고백했다.
용서를 구하고 잘못을 빌었다.
그럼에도 내게 와달라는 마음을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와주시길 바라며 물러나는 걸음이 쉬울 리 없었다.
아직 자격도 없는 상태자를 제 옆에 세우며 비교해보라 말하는 것이 내킬 리 만무했다.
접으련다 해놓고서 미련을 덕지덕지 묻혀가며 만든 비녀를 기어코 손에 쥐여주고, 무릎이라도 꿇으련다 해놓고선 소희가 등 돌릴까 봐 겁냈었다.
그래놓고도 자신을 향해 애정 어린 시선을 던지는 소희를 기다렸었다.
이대로 상처가 아물 거라고도 생각했다.
믿었다.
그러나 소희는 자신을 보고 겁먹은 표정으로 물러났다.
뜻밖이었다.
인세에서의 명을 다하고 눈을 떴을 때도 안 그랬었던 이였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희게 질려 뒷걸음질하던 그 모습이 정상일 리 없었다.
‘왜 갑자기.’
그랬던 그녀가 또다시 다가왔다.
‘왜 갑자기.’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다.
소희의 마음은 매 순간 진심이었다.
그러니 환은 소희가 이러는 이유를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귀문에 가있는 휘하의 장수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식신을 두고 가는 판에, 하루 밤 버틴 피로를 핑계로 자신이 눈감고 잘 수 있으랴.
“어째서지.”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해, 그저 작게 중얼거렸다.
벌을 내리는 것이라면, 달게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아예 영영 놔버리고 가지만 말아라.
환은 간절함을 담아 소희의 동그란 이마에 힘줘 입술을 눌렀다.
간밤 내도록 달빛을 쬔 소희는 몸이 서늘하게 물들어 있었다.
입술의 예민한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냉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 마음이 이렇게 식어내리지 않기 바라며 환은 다시 한번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쪽 소릴 내며 온 얼굴로 날아든 입맞춤이 나비 날갯짓처럼 가볍고 부산스러웠다.
“흐응.”
귀찮은 듯 도리질 치며 환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소희를 담은 붉은 눈이 애틋했다.
“기다릴 것이니, 돌아오기만 한다면.”
환은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턱밑에 잠겨 든 소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닿지 못할 소망을 조심스레 내뱉었다.
그의 시선 끝에 햇살을 머금은 진주알 같은 달 씨앗이 한가득 잡혔다.
‘밤새 만드셨다고.’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하던 소희가 있었다.
품에 넣고 있으나, 자꾸만 불안하게 만드는 분이.
밤새 만드셨다고.
달빛 아래서 밤새도록 씨앗을 만드셨다고.
“평생 곁에서 해주시길.”
이렇게 달 아이 낳아 기르고, 고운 분 닮은 태자를 점지받아 기르며.
바라고 바라.
너무도 간절해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그의 바람을.
환은 소희가 깰 때까지, 전하지 못할 당부를 소희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꿈에서나마 들어달라고.
“허억.”
아수라는 비릿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홍월을 들고 있는 손이 천근만근이라 이제는 더 이상 휘두르지 못할 것 같았다.
“허억.”
간밤 술법을 걸어놓았던 식신이 깨어났다.
아수라는 대치하던 요괴들을 영력을 퍼부어가며 단번에 쓸어버리고 그나마 깨끗하게 정화된 땅에 자신을 묻었다.
어둠을 두둑이 덮어 요괴들이 육신이 비어버린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깊게 묻고 귀문을 잠시 비웠다.
소희가 가진 영력의 파동이 변하면 깨어나도록 걸어놓은 자신의 식신이 파드득거리며 그를 불러댔다.
식신의 부름에 응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실로 하계의 홍복이었다.
그 태생이 불완전하여 귀문의 별로서도, 상천의 휘로서도 입지가 애매하신 분께서 간밤 귀문의 별에 한 발짝 다가서셨다.
달 마마의 제1 책무인 달 아이를 길러내는 일을 본능적으로 터득하신 것이다.
손끝 가득 달빛을 머금고 씨앗을 담아내는 모습에 잔뜩 흥분해 가슴이 터질 뻔했다.
아수라는 밭은 숨을 내쉬면서도 진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하아아아…….”
홍월에 잔뜩 들러붙은 요괴의 체액이 길게 늘어지며 검은 얼룩을 발밑에 떨궜다.
투욱.
투둑.
툭.
이제는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없다.
아수라가 뜨거운 바람을 맞으며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키에에엑-.”
날카로운 이를 세운 것이 기어오며 그녀를 위협했다.
독오른 이로 물어뜯으려는 입에서는 끈적한 체액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저 홍월을 들어 한 번만 베어버리면 소멸할 테지만 아수라는 이제 영력이 고갈되어 홍월을 쥐고 있기도 벅찼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가 남의 것인 양 감각이 없었다.
“키에에엑-.”
지척에 닿은 것이 기괴한 소릴 질렀다.
마치 꿈쩍도 못 하고 있는 아수라를 손에 넣기라도 한 양 기뻐하는 꼴이었다.
콰득 콰득
가시처럼 솟은 손톱이 땅을 찍고 몸을 끌어당겨 오직 아수라를 찢어발길 일념으로 다가오는 요괴를 저 멀리 지평선 너머 첫 햇살이 반겨주었다.
“캬아악!”
허리가 잘려 기괴한 소리를 내던 것이 어둠에 몸을 숨기기도 전 찬란한 햇살에 닿아 터져나갔다.
“하아악.”
마지막 남은 것까지 모조리 재로 화해 바람에 흩어지는 것을 보고서야 아수라가 웃음도 한숨도 아닌 것을 터트렸다.
“하하하핫.”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엉망이 된 아수라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홍월이 바람 따라 그 자취를 감추었다.
햇살이 뜨거운 바람에 실려 아수라를 단번에 덮쳤다.
물을 쏟아붓듯 정수리에서부터 퍼부어진 햇살을 타고 찬란한 변화가 시작된 것 이었다.
요괴의 체액에 찌든 전신이 햇살 아래 정화되며, 낮의 아수라가 드러났다.
검은 머리채가 아침 햇살에 윤기를 머금고 흩날리고, 낭창한 몸이 단단하고 호리하게 길어졌다.
소매 사이로 나온 사내의 것이 분명한 손에 들린 것은 오죽접선.
촤륵 소리가 나며 대번에 접선이 펼쳐졌다.
“고생했다.”
접선 너머 새카만 눈동자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요괴를 천천히 더듬어 찾아냈다.
아수라는 잔뜩 지쳐 대답도 없이 숨어든 밤의 아수라를 살피다 낮게 혀를 찼다.
요괴 역시 아수라처럼 밤과 낮을 구분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낮의 것들은 그 힘이 미약하고 숫자도 많지 않았다.
짙은 수풀 아래 웅덩이 아래.
늪 바닥 속에.
요괴의 습성이 가진 한계는 분명했다.
밤처럼 활개 치고 그 덩치가 거대한 것은 낮엔 찾기 힘들었다.
낮의 아수라는 그저 잔챙이들을 수거하듯이 찾아내고, 밤의 아수라를 위해 안전한 장소를 봐두고 명도를 관리하는 것으로 일을 나눠 받았다.
인계를 떠나온 영들을 모아 낮 동안 부지런히 명도를 건너게 해야 했다.
아수라는 눈에 잡히는 요괴들을 서둘러 해결했다.
접선을 털듯이 튕겨내 검으로 바꿔 쥐고는 정수리에 내려꽂히는 햇살처럼 자비 없이 도륙했다.
“끄어억.”
아수라는 요괴의 단말마를 들으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밤사이 지친 것은 밤의 아수라뿐만이 아니었다.
명도가 비교적 안전하다고는 하나, 요괴들을 보고 동요한 영들이 당황해 영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다독이는 것은 사자의 몫이었다.
마른 모래가 걸음을 따라 뿌옇게 피어올랐다.
감재사자가 부디 영을 잃지 않고 지켜주었길 바라며 아수라는 걸음을 재촉했다.
지키는 자는 둘이었으나, 지켜야 할 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아수라는 전력을 분산시켰다.
그녀가 단신으로 귀문에 모여든 요괴들을 상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수라가 홍월의 울음소리를 터트려 명도에서 멀리 떨어져 요괴를 유인하면 감재사자가 명도에서 영을 다독이는 식이었다.
밤사이 몹시 치열했던 고로 아수라는 당초의 계획보다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와있었다.
몰려드는 요괴의 수가 많아질수록 아수라는 명도에서 한 걸음씩 더 떨어졌을 것이다.
간밤 서쪽에서 시작된 요괴 몰이가 아침 동이 트도록 이어졌으니, 그 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말로 설명할 수도 없었다.
염휘에게 약속한 것은 다섯 날의 밤.
첫날 서쪽을 정화했으니 그 출발이 나쁘지 않았다.
아수라는 날 듯이 달려 속도를 냈다.
저 멀리 가물거리며 잡히는 시선 끝에 명도에 올라선 숱한 영들과 단 하나 색을 띠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사하였구나.’
요괴들을 끌어갔다지만, 밤사이 홀로 남겨진 감재사자가 걱정되지 않을 리 없다.
아수라는 흐트러지려는 영의 무리를 계속 독려하는 감재사자를 보며 빙긋 웃었다.
“밤사이, 안녕하셨는가.”
발끝에 힘을 줘 마른 땅을 박차며 아수라가 영력을 돋워 소리쳤다.
“아수라님!”
단박에 얼굴이 보일 정도로 좁혀진 거리가 되고 그를 알아본 감재사자가 핼쑥해진 낯을 해선 반갑다고 웃고 있었다.
아수라는 손끝에 영력을 모았다.
그리고는 까맣게 모여드는 작은 구슬을 느끼자마자 그대로 손끝으로 퉁겨 저를 반기는 감재사자에게 쏘아주었다.
펑.
작게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감재사자의 감탄하는 목소리가 함께 울렸다.
“밤을 잘 넘긴 상급이니라.”
아수라의 청량한 목소리가 햇살을 타고 귀문에 울려 퍼졌다.
“낮에도 부지런히 움직여 보자꾸나.”
“예!”
잔뜩 흥이 난 목소리로 감재사자가 명랑하게 대꾸하며 막, 명도를 벗어나려는 영을 붙잡아 올렸다.
귀문에서의 두 번째 날이 밝았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굵은 빗방울을 쉴 새 없이 떨어뜨려 댔다.
후드득거리며 나뭇잎이 빗방울에 흠씬 두들겨 맞고는 늘어졌다.
직인은 아침부터 빗방울을 떨구는 하늘을 못마땅하게 올려다보다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청조를 부려 강을 건너야 했는데 비가 오는 날은 청조가 도통 날지를 못했다.
오늘은 오도 가도 못하고 삼천외에 발이 묶인 셈이라 그 심사가 날카롭게 솟았다.
“아니 아침부터 이게 무슨 꼬락서니라니.”
직인은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발을 구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짤랑거리는 비녀의 금편들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직인은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소매춤에서 소청조를 꺼내 들었다.
“꾸르륵”
고개를 갸웃거리며 까만 눈을 깜빡거리는 청조는 저를 불러낸 주인의 의도를 몰라 작은 머리통을 계속 까딱거렸다.
혹시나 맛난 것을 주시려나.
직인의 손을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가죽주머니였다.
맛난 것이 나오던 천주머니가 아니라 새는 실망한 듯 다시 한번 작게 울었다.
꾸르륵.
“태우고 나는 것이 아니니 다녀올 수 있겠지?”
새의 작은 머리를 직인은 손가락으로 슬슬 쓸어주었다.
“다녀오면 너 좋아하는 콩도 많이 줄 것이야.”
직인은 작은 천주머니를 꺼내 흔들었다.
볶은 콩 냄새가 고소하게 퍼졌다.
새가 작게 꾸르륵거리며 울자, 직인은 손에 들린 가죽주머니를 새의 발에 묶었다.
가죽주머니는 텅 비어있어 무게감이 하나도 없었지만, 새가 돌아올 때는 가득 차 제법 무거울 것이었다.
직인은 상냥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새에게 볶은 콩을 서너 알 주었다.
“다녀오면 실컷 먹게 해줄 것이야. 다녀오련?”
“꾸르르르륵.”
“비 오는 날이라 고생하는 것을 알지만, 당장에 떨어졌으니 어쩔 것이니? 애써주련?”
직인은 상냥한 말과는 달리 새침하게 솟은 눈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가서 태자께 듬뿍 받아오너라.”
“…….”
직인은 콩을 삼키느라 바쁜 새를 보며 입술을 심술 맞게 비틀었다.
“하필이면 이때 똑 떨어질 게 무엇이냐.”
요상맞게 비까지 오고.
“한 번만 더 썼더라면 끝났을 것을.”
혀를 끌끌 차며 팔짱을 꿰는 직인의 모습은 전에 없이 표독한 것이었다.
하지만 새는 그런 직인의 모습이 익숙한 듯 제 앞에 놓인 마지막 콩알을 쪼아 먹고 있었다.
작은 부리가 콕. 하고 콩을 찍어 삼키는 것이 요령 있고 맵시 났다.
“안 되겠다. 태자께서 혹시나 또 너를 걱정하여 덜 넣어주심 곤란해.”
직인은 소매에서 세필을 꺼내 허공에 가득찰 점(㶘)자를 썼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허공에 쓰인 글자는 은은한 빛을 뿌리며 덩실 떠올라 있었다.
세필을 정리할 새도 없이 글자를 집어 들어 새의 다리에 매달린 가죽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야무지게 묶었다.
소청조는 이미 콩을 다 먹고 직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득, 담아오너라. 가득. 꾀부리지 말고.”
직인은 다짐하듯 엄하게 이르고는 새를 잡아 쥐고는 창가로 가서 그대로 날렸다.
비가 오는 날씨는 이미 직인의 안중에 없었다.
무섭게 쏟아지는 비를 맞고 날아가는 새가 안쓰럽지도 않은지 그저 가득이라고 다시 한번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쏴아아아아-.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며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가 그대로 방안으로 쳐들었다.
“아이 차가워.”
직인은 튀어 들어온 비를 질색하며 물러서선 젖은 옷섶을 털어냈다.
창을 닫고는 면건으로 젖은 손까지 꼼꼼하게 닦아내고 나서야 직인은 베틀 앞에 앉았다.
그리고 길다란 손톱 끝으로 허공에서 뭔가를 낚아채 베틀에 걸고는 발을 굴렀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직인이 허공에서 끌어온 실이 베틀에 걸려들었다.
“아아…… 그 운명 고약하기도 하지.”
직인은 자신이 집어 든 것이 고난인 것을 알고는 콧소릴 내며 웃었다.
“딱해라.”
철컥 철컥
발을 구를 때마다 베틀에 걸린 운명이 짜여나갔다.
딱하구나 하는 것과는 별개로 직인은 연신 웃는 낯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철컥
철컥
“집에 불도 나는 것이야?”
철컥.
“들여다볼 재미도 없게 불운하구나.”
직인은 차갑게 굳어진 눈매를 해서는 능숙하게 베를 짰다.
누군가의 딱한 운명을 담은 것을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철컥철컥 짜내리는 그녀의 손목엔 황금빛으로 빛나는 팔찌가 걸려있었다.
철컥거리며 베틀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직인이 재빠른 솜씨로 운명을 한 필 짜내는 동안 해가 저물었고, 비도 함께 물러갔다.
먹구름이 잔뜩 물린 하늘 끝에 푹 젖은 청조가 날아든 것도 그때였다.
뚝뚝.
푸른 물을 떨어뜨리며 돌아온 청조를 마른 면건으로 싸안고는 직인이 웃었다.
“호홋. 그득하구나.”
새가 제대로 날지 못할 만큼 가죽 주머니가 잔뜩 채워져 있었다.
찰랑.
가죽주머니를 가득 채운 검푸른 물이 직인이 웃을 때마다 작게 파동이 일었다.
찰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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