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41화 (41/114)

41. 비가 오던 날에 (1)

2017.12.22.

부지런을 떤 덕에 밤사이 씨앗을 한가득 쌓아놓을 수 있었다.

손가락 끝이 간질거리는 느낌은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이것이 귀문의 별의 능력이라니 차라리 기꺼웠다.

손끝에서 돋아나는 씨앗들이 참 귀여웠다.

‘그럼 혹시 아수라. 혹시 말입니다.’

‘말씀하십시오. 제가 아는 것은 다 알려드릴 것입니다.’

‘이 씨앗들은 그러니까, 아까 말씀하신 달 아이가 영영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흐음. 글쎄요. 소장은 거기까진 모르겠사옵니다. 달 마마께서 씨앗을 키우는 것은 종종 보았지만 말입니다.’

아수라는 소희의 말에 생각에 잠긴 듯했지만 귀문의 별이 아닌 그가 알 리 만무했다.

그러나 소희는 이것이 ‘씨앗’이라는 말만으로도 괜찮았다.

자신이 아수라가 오기 전 ‘구슬’이라 생각하며 놓친 것을 두고 어째서 그토록 애잔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어서.

제대로 자라지 못한 씨앗을 모르고 있을 때도 애통해 해준 것이 기뻐서.

마치, 다정한 달 어미라는 증표 같아서.

답을 듣지 못해도 괜찮았다.

아수라가 돌아간 뒤에도, 고즈넉한 달빛 아래 혼자 남겨져도 소희는 외롭지 않았다.

달빛 아래 ‘아이’가 되어줄 씨앗을 키워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득 차고 잔뜩 행복해졌다.

그래서 등 뒤에서 열린 사신의 문을 보지도 못했다.

순간순간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미안함이 어쩌면 그렇게 짙게 마음을 물들였는지도 모르고, 이제야 알게 된 사실에 기쁘고 기뻐.

등 뒤에 열린 ‘탄식의 문’을 아무도 모르게 가뿐히 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신의 두 번째 관문은 달 씨앗이 가져다준 넘치는 기쁨에 열리기가 무섭게 닫혔다.

아무도 모르고, 소리 소문도 없이 두 번째 관문을 넘긴 그 밤 끝에 새날이 찾아왔다.

그리고 달이 결국 그 자리를 아침에게 비워주고 나서야 소희의 일도 끝이 났다.

밤사이 온 힘을 다해 키워낸 씨앗이 탁자 위에 소복했다.

“보석 같구나.”

소희는 아침 첫 햇살이 눈에 닿자 그제야 밤사이 쌓인 피곤함에 온몸이 노곤해졌다.

눈이 쓰라리고, 눈물이 절로 흘렀다.

창 너머 밝아오는 하늘을 보자 곧 궁녀 아이들이 자신을 깨우러 올 시간이었다.

“저런…….”

달님이 계시는 동안 어서어서 씨앗을 키워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날이 밝아오면 직인이 찾아온다는 것을 그만 깜빡했다.

밤사이 내도록 설레고 흥분해서 직인을 떠올릴 여력이 없었다.

소희는 이제 얼얼해진 손을 들어 가만히 눈을 비볐다.

아릿한 손끝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씨앗을 키워내는 일은 월력을 몸에 두르는 것이라 밤 내내 찬 달빛 아래 있었더니 그만 손이 빳빳해지도록 얼어버린 것이다.

따가운 눈두덩에 얼음처럼 차가운 손을 가만히 올려두자 이내 찬기가 스몄다.

쓰린 눈이 훨씬 진정되어 한결 수월했다.

소희는 의자에 가만히 기대앉아 피곤한 눈을 냉한 체온으로 달랬다.

적막하던 하늘에 햇살이 찾아들자 잠들었던 내궁의 뜰도 깨어났다.

간밤 달게 자고 일어난 새가 지저귀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한껏 목청을 돋웠다.

시끄럽지 않은 정다운 소음이 사위를 가득 채웠다.

귓가를 울리는 잔잔한 소리에 자꾸만 졸음이 몰려왔다.

‘이대로 잠들면 안 되는데. 곧 직인께서…….’

“…….”

“……희님”

“소희님!”

자신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든 것인지 문밖에서 잔뜩 커진 목소리가 소희를 찾았다.

소희는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으응?”

“소희님 기침하셨습니까?”

“아…… 이제 막 일어난 참이야.”

소희는 문밖의 궁녀에게 황급히 대답하며 재빨리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밤을 새운 것을 알면 아이들이 걱정할 것이라 생각한 그녀의 고운 심성이 시킨 일이었다.

이불 안에 자리를 잡고 누워선 침전 문이 열리자 때맞춰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비님이 오시려나 봅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온 궁녀가 대뜸 창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응? 비라니?”

“새벽 달무리가 제법이지 않았습니까?”

“그랬던가?”

간밤 씨앗을 만드는 데에만 골몰했던 터라 정작 달님이 어떠신가는 살피지 못했다.

아아, 달무리가 져서 새벽엔 씨앗이 더디 열었던가?

소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충 얼버무렸다.

“아침서는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고요.”

“아, 그렇구나.”

“암만해도 이 아침서 비가 꽤 내리지 싶습니다.”

“흐음…….”

그러고 보니 언뜻 불어오는 바람에서 희미한 물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소희는 티 나지 않게 공기를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세 물 올릴까요? 아니면 더 주무시렵니까? 오늘은 직인께서 아니 오실 테니 천천히 일어나셔도 될 것이고요.”

실로 반가운 소리였다.

“아니 오신다던가?”

눈이 따갑고 졸음에 겨워 절로 머리가 꾸벅거린다.

소희는 그새를 못 참고 다시 눈을 한번 비볐다.

말을 하는 중간중간 자꾸만 하품이 터져 나올 것 같더니, 궁녀가 대답할 때쯤엔 소매로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을 하기도 했다.

“못 오실 겁니다.”

“연통이 온 거야?”

“아닙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청조가 날지 못합니다.”

“청조야 안고 오시면 되는 것을.”

소희는 직인이 오지 못하는 이유가 청조 때문이라는 말에 살짝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그 작고 어여쁜 새야 직인의 소맷부리에 들어앉으면 되는 것인데.

하지만, 그런 소희의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지 궁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손을 내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안고 오다니요? 청조는 타고 다니는 것이지요.”

“타고 오신다고? 손바닥보다 작은 것을?”

“아…… 소희님은 청조를 제대로 못 보신 겁니까?”

궁녀는 소희의 말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궁녀와는 달리 소희 머리는 가로로 내저었다.

“제대로 못 보긴. 고 귀여운 것을 손바닥에도 올려놓았었는걸.”

하아암.

다시 작게 하품을 하며 흐리멍덩해진 눈으로 소희가 궁녀를 보며 항의하듯 목청을 돋웠다.

하지만 궁녀는 그런 소희를 보며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청조는 직인의 애완새입니다. 평상시에는 소식을 물어 나르고, 이름 없는 강에서는 주인을 태우고 날아가지요.”

“그 작은 것이?”

“덩치는 키우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것과 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우산을 쓰고 오시면 되는 것을.

곧 직인께서 도착할 것이니, 눈 좀 붙여보려던 것은 영 그른 모양이었다.

“흐음.”

숨기지 못한 실망이 옅은 한숨이 되어 새어 나왔다.

소희가 이제 막 따근하게 데워진 침상에서 일어나려 몸을 일으킬 때였다.

졸음이 가득 물린 몸이 천근만근이라 이불을 젖히는 손에는 열의가 없었다.

“청조의 깃은 물에 젖으면 날 수가 없단다.”

부드럽게 대답하는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삽시간에 지척으로 다가왔다.

뜻밖의 목소리에 모두가 놀랐고, 궁녀가 재빨리 예를 올리며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염라의 첫 번째 불을 뵙사옵니다.”

“환?”

궁녀랑 이야기하는 통에 언제 온 것도 모른 채 갑자기 나타난 그가 얼떨떨하고, 반가워 소희가 작게 외쳤다.

일어서려던 것도 잊고는 이불깃을 쥔 채로 불쑥 나타난 환을 맞이하는 소희의 얼굴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예쁘게 들린 입꼬리와 졸음이 잔뜩 물린 까만 눈에는 감추지 못할 반가움이 함뿍 물려있었다.

밤사이 화사해진 안색으로 자신을 반기는 소희를 보는 환의 표정도 한결 부드럽게 풀려있었다.

무서워하며 뒷걸음질로 주춤거리고 거리를 벌리던 여자 대신, 수줍게 볼을 붉히며 반기는 귀여운 이가 돌아왔다.

“하핫.”

참지 못하고 새나간 낮은 웃음소리가 나뭇잎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섞여들었다.

투툭-.

“이것 보라지. 벌써 비가 오지 않느냔 말이야.”

환은 저를 반기는 소희에게 다정히 이르며, 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쭉 뻗은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어느새 잔뜩 어둑해진 하늘을 타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투둑

투둑

이제 막 내리는 듯 크고 둥근 것들이 사방으로 떨어져내리며 짙은 얼룩을 만들었다.

쏴아아아아-.

시작된 비가 무섭게 쏟아지는 건 순간이었다.

“아이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궁녀가 질색하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황급히 창문을 닫았다.

바람과 함께 비가 들이닥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꺄앗.”

훅 들이치는 비바람에 소희가 작게 소리 지르며 이불을 집어 들자 그새 지척으로 다가온 환이 팔을 들어 소맷자락으로 소희를 가려주었다.

“바람이 고약하군.”

“이렇게 금세 비가 오다니요.”

“비야 어젯밤서부터 오려고 기다리고 있었는걸.”

환이 다정히 대꾸하며 들어 올린 손을 내렸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부르시어요.”

환이 침상에 앉은 소희에게 다가가자 방안에 들어와 있던 궁녀가 재빨리 인사를 올렸다.

“잠시.”

소희는 환이 몸을 돌려 궁녀에게 작게 무언가를 당부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하아암.-.”

아차 할 새도 없이 다시 하품이 터져 나왔다.

이불을 들어 가릴 새도 없었다.

이미 머리는 반쯤 정신이 날아가 졸음에 겨워 꼬박거리고 있는 채였다.

“비가 오다니 참 다행입니다.”

하품 소리를 무마해보려고 대뜸 말은 꺼냈지만, 졸음에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피곤하시군.”

“예 조금만 자고 싶……습니다.”

소희는 저도 모르게 꾸벅,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느릿하게 끔뻑이는 눈꺼풀이 게으르기 짝이 없었다.

“늦게 일어나시는 분이 아니신데.”

“간밤 조금 바빠서 자질 못 했…… 하아아암. 답니다.”

소희는 소매를 들어 터져 나오는 하품을 가리고는 냉큼 말을 이었다.

“무엇을 하셨길래.”

침상 앞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여상히 묻는 환의 목소리에 담긴 웃음기가 소희의 느린 숨에 묻혔다.

“아…… 그…… 씨앗이.”

“씨앗?”

생소한 단어에 환이 되물어도 졸음에 겨운 소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입매에 보기 좋은 미소가 물린 것도,

그가 유난히 힘을 줘 씨앗이라 되물은 것도.

모두 놓치고 말았다.

“달 씨앗을 만들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라……. 하아아암.”

“졸리시군. 이리와. 재워줄 것이니.”

환은 앉은 채로 잠이 드는 그녀를 끌어당겨 침상에 눕혔다.

“밤새 안 주무셨단 말씀이야?”

“그것이, 하다 보니 신기하여서요.”

“아니 평생을 하셔야 할 일에 욕심을 부리셔서 될 일인가.”

환의 손이 어느샌가 목 뒤로 들어와 자연스럽게 소희를 뒤로 안아 뉘고, 남은 손은 자연스레 소희의 허리에 둘러 바짝 끌어당겨 품에 가두었다.

소희는 시원한 향이 풍기는 환의 가슴에 이마를 가져다 붙이며 작게 웅얼거렸다.

“귀엽지 않습니까.”

“어여쁘지.”

그의 손이 소희의 동그란 앞이마에 흐트러진 잔머리를 가만히 정리해 넘겨주었다.

“고와서 저도 모르게.”

“눈이 떨어지지 않지.”

이야기는 통하는 듯 통하지 않는 듯 애매했다.

그러나 소희는 자신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기는 환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그가 끌어당기는 대로 끌려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맞대고 그가 괴어주는 팔에 머리를 베어 눕는 건 정말이지 기분 좋았다.

멀어지는 의식 끝에 이마에 닿는 보드라운 것을 느꼈다.

초옥.

간지럽고도 습한 소리가 귓가를 작게 울렸다.

“잘 자요.”

다정한 당부가 뒤따랐던 것도 같았다.

간밤, 환은 침소로 뛰어들다시피 하는 아수라를 맞이해야 했다.

아수라는 문을 두드림과 동시에 들이닥쳤다.

환의 의사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의 허락 따위가 중요치 않을 만큼 다급한 얼굴을 해서는 아수라가 그를 불렀다.

“염휘시여.”

그녀는 자신의 왕을 불렀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에 숨기지 못할 감정을 잔뜩 담아 조급하게 불렀다.

“느끼셨사옵니까?”

“무엇을 말이냐?”

환은 억눌린 목소리로 제 앞에 부복한 아수라를 향해 급히 다가갔다.

이제 막 잠자리에 찾아 들려던 참이라 그는 침의 한 겹만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어수선한 옷차림이 눈에 들어올 정신이 없었다.

아수라가 울고 있었다.

맹수처럼 길게 찢어진 동공을 해서는 아수라가 울고 있었다.

“소장은 이토록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안 느껴지신다 할 참이옵니까.”

아수라는 눈물로 젖은 사나운 눈을 그에게 똑바로 맞춰왔다.

“하계에 새 아이들이 내려올 준비를 하고 있사옵니다.”

“무……슨…….”

아수라의 말은 앞뒤도 없이 온통 엉망진창이었지만, 환은 아수라의 말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영력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넓고 뭉근하게 퍼져나가는 왕의 기세에 아수라가 반응해 움찔거렸다.

맹수의 그것처럼 날 세운 동공이 수시로 풀렸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하아…….”

기분 좋은 듯 작은 탄식과 함께 입술을 비집고 삐죽 나오는 송곳니가 달빛에 점잖지 못한 윤기를 흘렸다.

아수라를 내려다보던 환의 시선이 일순 잘게 흔들렸다.

“느껴지시옵니까?”

움찔, 놀라는 자신의 왕을 놀리듯 느긋하게,

깜빡거리는 눈꺼풀만큼이나 여유로운 목소리가 얄미울 지경이었다.

“이게…….”

“놀랍지 않습니까?”

“확실한 것이냐?”

“이십 년 만의 첫 아이들입니다. 아직 왕께서 기운을 나눠주지 않으신고로 씨앗일 뿐이지만.”

아수라는 파르르 떨리는 검푸른 속눈썹을 늘어뜨리고는 두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사이로 굵게 흘러내리는 눈물 자국마저 황홀해 하는 그녀의 표정을 방해할 수 없었다.

“소장은 가슴이 터질 것 같사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이냐?”

“사신의 문을 지나시고 겪는 변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겨우 첫 문에, 씨앗을 만드셨다고?”

“그렇습니다. 만드셨습니다.”

“하.”

환은 황금빛으로 진하게 물든 홍안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벽 너머 어딘가로 시선을 던졌다.

안력을 돋운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소희가 있는 내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아수라는 자신의 왕이 무엇을 바라보는지 아는 눈치였다.

“참으로 어여쁘지 않습니까?”

“그렇구나.”

“혼자 계시도록 몸을 물리자마자 등 뒤에서 월력이 몰려드는 것을 느꼈사옵니다.”

“신기했던 게지.”

“등 뒤로 방울방울 모여드는 월력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왕께서는 모를 것입니다.”

아수라는 감은 눈을 떠서는 활짝 웃었다.

“달빛을 그대로 머금은 씨앗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곧 이 하계에 자리를 잡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다.”

“그 아이들 중 더러는 이 아수라에게 몸을 의탁할 것이고요.”

“저런, 벌써부터 수라전 아이들을 챙기는 것이냐.”

환은 먼 곳 어딘가를 더듬던 시선을 돌려 자신의 앞에 부복한 아수라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눈물을 훔친 모양인지 유백색의 얼굴이 말끔했다.

아수라는 자신을 놀리듯 내려다보는 환에게 설핏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청천의 전 때 수라전 아이들이 많이 비었습니다. 제일 먼저 보내주십시오.”

미소 지은 표정과는 달리 단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아아…… 하기사…….”

“삼분지 일을 잃었습니다. 성장을 마친 사신들은 모조리 수라전을 떠나 하계의 이곳저곳에 퍼져있사오나 정작 제 일을 도울 아이들이 없사옵니다.”

“자네가 이런 식으로 새 아이를 청하는 것을 풍천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환은 아수라를 책망하는 듯 고개를 슬슬 젓고는 몸을 돌려 침상 옆 탁자로 걸어갔다.

그의 말이 농인 것을 모를 리 없으나 아수라는 발끈한 표정이었다.

“풍천의 전에는 아이들이 차고 넘칩니다.”

“풍천도 그리 생각하겠느냐.”

“염휘시여! 사신이 부족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아수라의 절박한 목소리에는 장난기라고는 들어있지 않았다.

환은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손을 뻗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그대로 아수라가 딸려 왔다.

마치 바람이 부는 대로 흩날리는 꽃잎과 같이 가볍고도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팔랑거리듯 환의 손에 딸려온 아수라가 환의 곁에 세워졌다.

“아수라. 무리하지 말아라.”

“네.”

환은 단번에 친절한 표정을 지웠다.

사담을 나누던 군신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깨끗이 사라지고 단호한 기색이 물린 표정으로 환이 다시 말을 뗐다.

“너를 귀문으로 보냈을 때는 사정이 급박해서였다. 그곳에 집중하거라.”

“네.”

“먼 곳에 있는 네가 이곳에 식신까지 부릴 정도로 애를 쓰라고 몰아세운 것이 아니다.”

“압니다.”

담담한 아수라의 대답에 환이 자신의 옆에 선 아수라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네 사정은 어떠하냐.”

“고단합니다.”

금방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목소리와 함께 조금 전까지 수라전에 달 아이를 보내달라 청하던 모습 대신 잔뜩 희게 질린 아수라가 그 자리에 덧입혀졌다.

“쉬어라.”

환은 낮게 혀를 차며 그대로 손을 퉁겼다.

손끝을 타고 허공을 향해 나르는 황금빛 궤적이 그대로 아수라를 덮치자 지친 기색으로 환의 옆자리에 서 있던 아수라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람 모양으로 오린 종이 인형이 나풀거리고 떨어져 내렸다.

환은 종이 인형을 주워 가슴 안에 갈무리했다.

“아수라.”

그리고는 먼먼 귀문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충직한 자신의 장수를 가만히 불러보았다.

풍천을 일러 미련한 자라 놀리면서도, 그 자신이 얼마나 미련할 정도로 충직한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내궁을 떠나 보냈더니 남겨질 소희가 걱정이 되어 식신을 심어 두고 간 아수라의 충정에 환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환은 식신에 실려 잠시 강림한 아수라를 귀문에 잠들어 있을 본체로 돌려보낼 때 그의 영력을 실어 주었다.

지쳐있는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은 먼 곳에서나마 내궁의 주인을 살피려는 아수라의 갸륵한 마음에 내리는 상이었다.

내일 아침, 소희를 만나면 밤사이 그녀가 만든 씨앗을 수라전으로 보내주리라 생각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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