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소청조의 속삭임 (7)
2017.12.01.
풍천은 면건으로 공들여 갑주를 닦고 있는 중이었다.
묵빛의 갑주는 힘주어 면건으로 문지르는 만큼 은근한 빛이 돌았고, 검고 짙은 색은 그 끝을 모를 깊은 어둠을 드러내며 상서로운 기운을 뿜어냈다.
쓰윽-
쓰윽-
풍천은 힘든 줄도 모르고 갑주를 구석구석 닦아냈다.
“요즘같이 평화롭기만 하다면야…….”
‘매일 갑주만 닦다 요것이 닳아 없어지겠구나.’
“크흣.”
실없는 생각을 하며 실실 웃던 풍천의 눈빛이 날카롭게 벼루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가 돌아갔다.
끈적하고 기분 나쁜 무언가가 멀지 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분명 요괴는 아니었으나 그것은 이질적이었고 ‘나쁜 것’이었다.
풍천은 저도 모르게 사납게 기세를 피워올리며 손에서 도를 빼 들었다.
후우우우웅-
그의 손바닥에서 솟은 빛을 잔뜩 흡수한 검은 칼날을 타고 세차게 영력이 휘몰아쳤다.
“이건…….”
청천의 전을 겪어본 풍천으로서도 느껴본 적 없는 이질적이고도 기분 나쁜 기운.
하지만 그 이상한 느낌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운을 더듬어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기에도 짧은 그 시간에, 마치 그가 착각이라도 한 것처럼.
동공이 없어진 풍천의 은회색의 눈동자가 염휘가 계시는 궁 언저리를 향했다.
방향은 분명 염휘께서 계신 곳인데 무엇에 가로막힌 듯 단번에 잡아낼 수 없을 만큼 그 기운이 은근하고 더러웠다.
“…….”
풍천은 염휘께서 계신 그곳에 함께이신 소희를 떠올리며 고개를 털었다.
‘일이 났다면 궁 안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지.’
아무렴.
염휘께서 이런 것을 두고 보실 성정이신가.
자애로운 만큼 엄혹하신 분이 바로 그의 주인이었다.
그는 하계를 엄정하게 다스리셨고, 특히 부정한 것들에 대해서는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으셨다.
이런 더러운 것을 염휘께서 두고 볼 리가 만무하고, 설령, 염휘가 아니더라도 자신보다 가까이에 있는 염라의 불이 있잖은가.
아수라.
염라본궁을 제외하고, 내궁에 가장 가까이 전을 둔 자였다.
“…….”
벌써 당도하였을 것이다.
본궁에서 한 시진 거리의 풍천이 알 정도이니, 염휘며 아수라가 모를 리 없고. 갑자기 꺼져든 기척은 삿된 것이 이미 정리됐음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풍천은 자꾸만 기분 나쁘게 쑤석거리는 가슴을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실제로도 일전의 요괴 사건 때도 자신은 알아차리지도 못했건만 아수라가 소희님을 구해 나왔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풍천은 찝찝한 기분에 더 이상 갑주를 닦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당분간 갑주를 푸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하며 풍천은 갑주를 단단히 돌려 묶어 몸에 걸쳤다.
텅-
출전 전처럼 단단하게 매어진 갑주를 주먹으로 두들기며, 기분 나쁘게 술렁이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
하지만 곤두선 신경은 자꾸만 그를 불편하게 갉아내 결국 풍천은 시비를 불러 당과를 청했다.
뭔가 달착지근한 것을 물고 있으면 조금 낫지 않을까 해서 한 일이었다.
“당과만 드시면 목이 메입니다. 같이 드시어요.”
달큰한 향내가 풍기는 접시를 내려놓으며 시비 아이가 당과와 함께 시키지도 않은 차를 받쳐내 왔다.
나긋하니 곱게 이야기하는 목소리까지 실로 상냥해 그 역시 다정해진 것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었다.
“차를 우리는 솜씨가 제법이구나. 언제고 아수라께도 대접해야겠어. 아주 맛이 좋아.”
“별것 아닌 솜씨입니다. 허나…….”
풍천의 칭찬에 수줍어 볼을 발갛게 물들이던 아이가 제 딴엔 아쉬움을 담아 그에게 말을 전했다.
“아수라께오선 한동안 못 오실 테니 훗날 잊지 않고 불러주시면 부족한 솜씨이나마 성심껏 우려드리겠나이다.”
“못 온다니?”
풍천은 당과를 하나 집어 들어 앞니로 깨물며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염휘께서 경계를 살피러 간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라 아수라가 그의 전을 비울 일은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탓이었다.
“모르셨사옵니까? 아수라께오선 오늘 아침 대왕의 명을 받잡고 귀문으로 떠나셨사옵니다.”
“아수라가?”
풍천은 정수리부터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났다.
허리를 고쳐 꼿꼿하게 세우며 영력을 두르자 온몸의 근육이 가볍게 긴장을 했다.
슬쩍 자세를 고친 것 같았지만 풍천은 지금 당장에라도 염휘의 궁으로 쏘아져 나갈 수 있을 만큼 전신을 다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어린 것은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함부로 우러르기도 어려운 분께서 저를 붙잡고 이러하냐 저러하냐 물으시니 그저 기뻐서 계속 그 작은 입으로 종알거렸다.
“예에-. 귀문으로 요괴를 정화하러 가신다 하셨습니다.”
“요괴를 말이냐? 귀문에? 이게 무슨 소리이냐? 어째서 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느냐?”
채근하든 묻는 풍천의 말에 아이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인지 살짝 주눅이 들어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게 저, 저도 전해 들은 것이라…….”
“너를 탓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서 말해 보거라. 아수라께 일이 생기면 안 되잖겠느냐. 내가 가봐야 할지 말지 알아야 하느니.”
그가 어르듯 좋은 소리로 달래자 그제야 아이가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첫새벽 귀문의 사신에게서 연통이 왔노라고.
“흑조를 관리하는 아이가 제 친구이온데…….”
겁에 질려 제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경위까지 낱낱이 고하느라 이야기는 생각보다 길어져 애가 탔지만, 풍천은 시비를 재촉하지 않았다.
“염휘께서 아수라를 귀문으로 보냈다 이 말이렷다.”
“네, 그렇다고 합니다. 닷새 뒤에 오신다고 이름 없는 강의 사공에게 일러두었다 합니다.”
“그래서 네가 한동안 못 오십니다 하였구나?”
“네.”
풍천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지만, 자신의 눈치를 보며 잔뜩 주눅이 든 아이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치하했다.
“차를 우리는 솜씨만 좋은 줄 알았더니 네가 이제 보니 귀도 밝고 영리하구나.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주인도 없는 빈 전(殿)에 갈 뻔하지 않았느냐. 고맙구나.”
아이는 제가 모시는 전의 주인이 얼마나 무뚝뚝한 이인 줄 익히 알고 있었다.
드물게도 상냥한 빛으로 말하는 풍천의 모습이 그런 아이에게 용기를 주어 조금 전까지 주저하던 것도 잊고 또다시 그 입을 놀렸다.
“아차. 오늘은 궁에도 가지 마시어요. 대왕께서도 오늘은 서왕모께 인사드리러 간다 하셨사옵니다. 이날 궁이 모조리 텅 비지 않았겠사옵니까.”
하지만, 시비는 기대했던 대로 제 주인의 다정한 치하를 들을 수 없었다.
“무어라!”
콰앙-!
사납게 일갈한 풍천이 아이가 뭐라 입을 떼기도 전 지축을 흔드는 무서운 소리와 함께 자리를 박차고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풍천의 반응에 얼떨떨하던 것도 잠시.
몸을 돌려 나가려던 아이가 털썩 소리가 나게 주저앉아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이,이,이게…… 대체…….”
벌벌 떨리는 아이의 시선이 활짝 열린 문 앞,
뚜렷하게 새겨진 발자국을 향해 있었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이 마치 구겨진 종이짝같이 짓이겨진 채로 선명하게 제 주인의 발자국을 담고 있었다.
‘이거 사달이 났구나.’
아이는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는 몰랐지만, 제가 전한 소식 중 무언가가 주인을 바쁘게 움직이게 했다는 것만은 알았다.
* * *
시비 아이의 말에 앞뒤 가릴 것 없이 질풍같이 내달리는 풍천의 모습은 검은 폭풍 그 자체였다.
후원을 내달리는 무자비한 검은 폭풍에 모두 아연실색했다.
풍천.
염라의 불이자 지존의 오른팔이었으며 하계를 수호하는 자.
그런 그가 이토록 무섭게 기세를 피워 올린다 함은 일이 나도 단단히 난 것이라 아이들은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살갗을 찌르는 날카로운 기세에 기가 눌려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도 부지기수였다.
“흐으으윽.”
작은 울음과.
죽이지 못한 비명.
가려지지 못한 소란스러움이,
그의 발자국마다 피어났다.
화원을 직선으로 가로질러 뛰어오는 그의 발걸음에 화단이 볼썽사납게 푹푹 패이고 꽃들이 짓밟혔다.
그가 가는 길에 있던 나무는 부러졌으며 내궁의 돌바닥은 모래알처럼 바스러져 내렸다.
거칠 것 없이 내달리던 풍천이 자신을 향해 장을 날린 것은 소희의 침천 앞에 다다라서였다.
심상치 않은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퍼억-.
투명한 벽에 부딪힌 듯
가벼운 반탄력에 밀려나듯.
풍천은 소리와는 다르게 그의 거구를 산들바람처럼 가볍게 멈춰 세웠다.
마음 같아서야 이대로 침전 문을 열고 소희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녀는 달 마마. 지존의 반려가 될 분이셨다
침전 문을 빠개고 달려들 만큼 무례하게 굴 수 없던 그의 처지가 스스로에게 장을 날리게 했다.
들썩거리던 묵빛 갑주가 크게 울렁이고,
흐읍- 하고 들이쉰 숨이 그대로 크게 되돌려졌다.
“소희님!”
우렁우렁한 그의 목소리에는 영력이 담겨 있어 곁에 가지를 늘이고 선 나무의 잎들이 파라라라라락 휩쓸려 거칠게 떨렸다.
“소장, 풍천이옵니다!”
이 정도만 해도 어지간한 삿된 것은 꼬리를 말고 도망칠 것이었다.
달려들어 그녀를 꺼내올 수 없었으니 이것은 그의 최대한의 배려였으며 예우였다.
“소희님!”
“뵙길 청하옵니다!”
쩌렁한 그의 목소리에 내궁 화원에 있던 새들이 놀라 바쁘게 흩어지고 모든 소리가 일시에 멈춰버린 것 같이 적막에 휩싸였다.
외궁 가장 바깥에 위치한 그의 전에서 내궁까지는 평소라면 한 시진의 거리였다.
영력을 둘러 온다 해도 적어도 이 각은 걸리건만 몸을 돌보지 않고 최대한으로 내달려와 일 각 만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니 그의 영력이 얼마나 소모되었을지는 일러 무엇하랴.
시큰거리는 그의 숨소리마저 절박하게 울렸지만,
적막감에 휩싸인 내궁의 침전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풍천은 전신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 등골이 싸늘해졌다.
“소희님! 대답이 없으시면 소장 무례를 무릅쓰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겠습니다.”
풍천은 다시 한번 소리를 내지르고는 영력을 두른 손을 들어 그대로 문을 내리치려 했다.
그러나 그의 흑수 문에 닿기 전, 가냘픈 목소리가 그를 멈추게 했다.
“풍천?”
몹시 작고 바스락거리는 목소리는 소희의 것이었다.
풍천은 안도함과 동시에 다시 왈칵 밀려오는 걱정에 초조해졌다.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염휘고 아수라고 모두 조심하라 했던 호칭을 마구 꺼내 써버릴 만큼 풍천은 애가 닳아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고 소희를 불렀다.
“마마, 소장 풍천이옵니다.”
경애와 염려를 담아 간곡히 청했다.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풍천은 그가 몇 번이고 내처 부르도록 답이 없는 문 뒤의 기척을 살피며 초조함에 몸이 달아했다.
‘어째서 이렇게 조용한 것인가. 몇 번을 불렀건만.’
문 뒤를 노려보다시피 하는 눈동자는 동공이 지워진 채 은회색으로 짙게 물들어 빛이 발했다.
‘설마, 잡혀계신……!’
그의 불길한 상상에 자꾸만 입안이 마르고 손끝이 거무스름하게 절로 물들었다.
차라리,
문을 부숴버리고.
검게 물든 풍천의 손이 느릿하게 뒷목을 쓸었다.
한계치를 넘은 초조함이 그의 이성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감히 마마의 침소에 뛰어든 불경함을 목숨으로 씻고 마마를 구해내는 건 어떨까.
풍천의 조급함이 그의 등을 떠밀기 직전,
“잠시만요.”
“마마!”
“오수 중이었던 터라, 차비를 하고 나갈 것이니 후원에서 기다려 주시렵니까?”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 금세 나갈 것입니다.”
염려 마시고, 풍천께서 당과를 드시고 계시면 덜 민망할 것 같습니다.
문 뒤에서 다시 한번 가녀린 목소리가 들리며 잠시 기다려 달라는 다정한 당부를 건네왔다.
“아닙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서두르지 마십시오.”
문 건너에서 들려오는 소희의 말에 자꾸만 뒷머리를 잡아당기는 불길한 느낌을 애써 지웠다.
풍천은 자꾸만 침전을 향해 돌아가는 제 머리를 다부지게 쥐어박고는 슬슬 걸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침전 앞 회랑을 두어 번 돌고 나서야 침전의 문이 열렸다.
“지루하셨겠습니다.”
소희는 문밖에 손님을 마냥 세워 둔 것이 무척 미안했던지 작게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전혀, 아닙니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제가 무례했습니다.”
전에 없이 겸양의 말을 길게도 늘어놓으며 곁눈질로 슬쩍 소희의 상태만 보려던 풍천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거뭇한 눈 밑이며 파리한 안색, 소희는 몹시 안 좋아 보였다.
“아니! 소희님!도대체.”
놀란 마음에 풍천은 불쑥 다가가 소희를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그때만 해도 이것이 무례라는 것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움칫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소희를 보고서야 그는 다급하게 헛숨을 삼켰다.
‘감히 이게 무슨 짓이냐. 풍천!’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풍천은 다급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안색이 나쁘신고로, 소장이 걱정 끝에 실수를 하였습니다.”
진중한 어조로 그녀가 걱정되었음을 설명하며, 부디 이 아둔한 이를 너무 나무라지 말아달라 사정했다.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소장이 너무 큰 결례를 범했사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걱정하여 그러신 것을요. 아닌 게 아니라 오늘은 제 몸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안색이 어둡고 피곤해 보이십니다.”
소희의 말에 풍천이 걱정하는 기색을 잔뜩 담아 대답했다.
은회색 눈을 짙게 물들며 풍천이 또다시 시선을 맞대왔지만, 소희는 그저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오전에 직인께서 들러주셨을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지......”
“어디가 편치 않으십니까?”
풍천은 무례하여 죄송하다 말은 했지만, 그녀를 마주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날카로운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냥 곤하여서 그러겠지요, 아까도 직인을 앞에 두고 졸았지 뭡니까. 민망하여…….”
“언제 말입니까?”
그때, 노곤한 목소리로 살짝 푸념하듯 말을 잇는 소희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던 풍천이 다급하게 말을 끊었다.
“글쎄요, 반 시진 정도 되었으려나. 얼마 안 되었습니다. “
소희는 풍천에 말에 기억을 더듬는 듯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는 입을 가리고선 작게 하품을 했다.
“그 잠시간에 어찌나 독하게 악몽을 꾸었던지, 전신이 노곤하여 지금까지 자다 나온 참이었답니다.”
자신이 말해놓고도 멋쩍은 듯 소희는 희게 질린 볼에 홍조를 돋웠다.
“졸음이 오십니까? 곤하시고요? 무슨 악몽을 꾸셨습니까?”
소희는 전에 없이 집요하게 캐묻는 풍천이 낯설었지만 그가 제 안색에 놀라 과한 염려를 하는구나 가볍게 넘겼다.
그래서 소희는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차마 자신을 걱정하여 달려온 이에게 네 주인 된 자가 사납게 내 목숨줄을 뜯던 기억이 생시처럼 살아나 무서웠노라고.
그리고 자꾸만 그것이 떠올라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말할 수 없어,
“별거 아닙니다. 악몽이 뭐 별다를 게 있겠습니까. 오신 김에 다과상 받고 차 한 잔같이 드셔주세요. 혼자 있자니 괜스레 더 처지는 것 같았답니다.”
방실거리며 웃고 차를 청했다.
소희는 말릴 새도 없이 제 뒤에 시립해 있는 아이들에게 후원으로 다담상 들이라 말하고선 작은 발을 내밀어 걸음을 옮겼다.
“아니……. 소장은 그런 것을 바란 게 아니오라.”
졸지에 다과상을 받고, 한담을 나누러 온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려 풍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뭔가 불길합니다.’
저만치 가버리는 소희를 잡으려 풍천이 급하게 손을 내밀었지만, 소희는 그에게 잡히는 대신 살짝 뒤돌아 비밀스럽게 소곤거렸다.
“풍천께 드리려고 색 고운 꿀타래도 만들어 두었답니다.”
“꿀타래요?”
조금 전까지 걱정에 펄쩍거리던 거구의 장수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순박하기 그지없는 사내가 그 자리를 채웠다.
끔뻑이는 짙은 은회색의 눈동자가 순하고 우직하기 그지없어 소희는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꿀타래 말입니다. 단것을 즐겨 하시는 것 같길래 부족한 솜씨나마 마련을 해보았으니, 타박 마시고 드셔주세요.”
“직접 만드셨다고요?”
소희는 놀라는 그의 모습에 기뻐서 더더욱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시고 가실 거지요?”
“크흠. 뭐 그럼…….”
풍천은 소희의 웃음소리에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그녀가 이끄는 대로 내궁 후원의 전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머나!”
소희가 무척이나 충격받은 듯 외마디 탄성을 내지르기 전까지 그저 기뻐했다.
“이……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후원이 왜.”
놀라서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커다랗게 벌어진 눈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마구잡이로 꺾이고 짓밟힌 후원이 그제야 풍천의 눈에 들어왔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돌이킬 순 없었다.
“크흠.”
아마 반 시진 전으로 돌려준대도 자신의 선택은 똑같을 것이고, 앞으로 또 그런 일이 생긴다 하여도 자신은 똑같을 것이다.
이까짓 화원은 백번 망가져도 괜찮았다.
조금 민망할 뿐.
풍천은 다시 한번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무래도 아랫것들을 불러 어서 화원을 정리하라 일러야 할 모양이었다.
* * *
귀문은 이름 없는 강을 꼬박 반나절을 따라 내려가야 했다.
북쪽의 끝에 물안개가 짙게 피어오르는 그곳은 달빛조차 닿지 않는 곳이었다.
언제나 미명에 둘러싸인 아슴푸레한 대지는 차갑고 축축해 보였으나, 실제로는 뜨겁고 메마른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오는 곳이었다.
아수라는 가볍게 복면을 지었던 천을 풀어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름 없는 강에서 전신을 잠식해오던 습한 기운이 일시에 사라지고 대신 가슴을 달구는 귀문의 바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폐부가 뜨겁게 달구어지는 기분이었다.
반나절을 꼬박 달려온 터라 아수라는 아직도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아 두 다리가 절로 휘청였다.
하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그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던 건 짙은 물안개 사이로 보이던 부정한 것들 때문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익숙해지고 싶지 않지만, 익숙해진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굳이 영력을 돋우지 않아도 절박한 목소리가 새된 비명처럼 어둠의 장막을 찢고 대지를 내달려 그를 반겼다.
“피하세요!”
감재사자(監齋使者)
[사후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저승사자]
의 비명과 같은 소리와 함께 지척에 서 있던 또 다른 사자의 인영이 크게 휘청였다.
이미 제 색을 잃어버린 붉은 관복이 너풀거리며 커다란 포물선을 그렸다.
그리고 쓰러지듯 간신히 피한 그를 향해 기괴한 덩어리가 달려들었다. 쩍 벌어진 커다란 입안은 공동처럼 뻥 뚫려 허무로 가득차 있었다.
“크에에에에엑-.”
거북한 소리를 지르며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그것이 노리는 것은 바닥에 쓰러진 감재사자였다.
요괴는 영과 선인들을 먹이로 삼았다.
정확히는 그들이 가진 영체이었지만, 영체를 빼앗기 위해 그들을 집어삼키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든 ‘잡아먹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스팟-.’
하지만 요괴의 식탐은 미명을 가르며 날아온 검붉은 궤적에 그 끝을 달리했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질척한 것을 갈라내는 소리에 바닥에 쓰러져 제 운명의 끝을 기다리던 사자가 질끈 감은 눈을 떴다.
“!”
적발을 흩날리며 서서 차갑게 내려앉은 시선으로 사자를 보던 그녀에게서 낮고 지극한 권능이 실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했으면 일어나시게. 한가로이 누워있기엔 장소가 별로군.”
하얗고 고운 손에 단단히 쥐어진 검붉은 검은 늘씬하고 범상치 않은 예기를 흘리고 있었다.
사자는 주춤거리며 일어서면서도 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기가 흐르는 검붉은 검 날에서 희미하게 울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이곳 귀문을 지키는 감재사자입니다. 은인께선 뉘시옵니까.”
경계를 품은 목소리가 아수라에게 닿았다.
“……꽤나 화려하게 그어놨군?”
아수라는 사자의 모습을 품평하듯 중얼거렸다.
여기저기에 꽤 자잘한 상처가 보였지만 그중 가장 심한 것은 최근에 입은 것이 분명한 복부의 절상
[예리한 물체에 의하여 입는 체표의 상처]
이었다.
대각선으로 길게 내리뻗은 상처에서는 아직도 피가 쉼 없이 꿀럭거리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헐떡거리면서도 제 신분을 밝히는 태도라니. 제법이란 말이다.’
아수라는 우웅거리며 불만스럽게 검 날을 떠는 홍월을 검집 속으로 밀어 넣으며 붉은 입꼬리를 길게 늘여 웃었다.
“염라의 세 번째 불, 아수라이다. 전장의 사신이며 수라전 사자(使者)들을 이끄는 자이기도 하지.”
아수라의 말에 사자들은 말릴 새도 없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머리를 깊게 조아렸다.
절상이 심한 자에게선 옅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지만 그 역시 매끄럽기 그지없는 동작으로 제 웃전에게 공경심을 표했다.
아수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내디뎠다.
“일어나라, 마주 보고 한담을 나누기엔 너무 소란스러우니 정리를 좀 하자꾸나.”
그녀의 말은 자연스러운 하대였고 사자들은 그녀가 나서는 대로 뒤를 따랐다.
‘우우우우웅-.’
아수라의 홍월이 가볍게 떨며 그녀에게 경고했다.
지척에 깔린 요괴들이 짙게 피어오르는 물안개 사이로 몸을 감춘 채 날카로운 이를 갈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몹시 가까이에도 있었다.
아수라는 길게 울음을 내지르는 홍월을 단번에 뽑아들어 크게 휘둘렀다.
빙그르 돌며 마치 검무를 추듯 크고 화려한 동작은 자신의 등 뒤를 따라오던 감재사신을 향해있었다.
정확히는 절상을 입은 제 동료를 부축하던 이에게 쏘아진 것이었다.
“크악-.”
홍월에 맞은 사자는 단말마를 지르며 그대로 쓰러졌다.
“이…… 이게 무슨!”
흘러내리는 핏물로 관복을 흠뻑 적신 또 다른 사자는 그런 아수라를 향해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까만 두 눈에 어린 절망감을 감추지 못할 만큼 그는 당황한 상태였지만,
아수라에게 검에 쓰러진 자신의 동료가 갑자기 물처럼 흐물거리며 녹아내리는 것을 보고는 얼굴이 희게 질려버렸다.
“아니…… 이……!”
“이리 오너라.”
아수라는 홍월을 가볍게 털어내며 안색이 파랗게 질린 사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홍월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은 검고 찐득한 점액질이었다.
“어서 오래두. 가만 보아하니 모두 잃고 너 하나 남은 모양이구나.”
받아들일 수 없는 무서운 소리를 태연히 내뱉는 화려한 미녀는 손끝에서 검붉은 영력을 모아서 동그랗게 뭉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는…….”
사자는 제 동료가 모두 요괴에게 잡아먹히고 자신만이 남았다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앞에 까마득히 높은 제 웃전이 나지막이 혀를 차며 손끝에 뭉친 영력을 자신에게 튕겼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파삭-.
검붉은 구체가 사자의 몸에 닿자 작은 유리가 깨져나가는 파열음과 함께 배에서 시작한 열감이 전신으로 퍼지며 삽시간에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감재사자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서서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가던 영력을 느끼고 있었다.
제게 내려진 사자의 업이 이제 채 1각(15분)도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제 웃전이 튕겨 보낸 붉은 구슬이 몸에 닿으며 터지자 단번에 길게 그어내려진 상처가 아물고 바닥난 생명력이 그득히 들어찬 것을 느꼈다.
“이, 이건!”
“모두 잡아먹혔지만 끝까지 버틴 너의 정신력을 높이 사서 주는 상이니라. 도망치고 싶었을 텐데. 용케 잘 참았느니라.”
“……아아…….”
“서신도 네 녀석이 쓴 것일 테지?”
사자는 아수라의 말에 갑자기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며 눈앞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주변을 가득히 메운 요괴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는 전력에서 오는 무력함.
더불어 이 자리를 피해 도망치고 싶은 삶에 대한 열망과 견디기 힘들었던 공포가 그제야 물밀듯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고생했느니.”
감재사자는 손을 들어 눈물을 거칠게 훔치며 고개를 주억였다.
적발을 흩날리며 하얗게 웃는 자신의 웃전은 아스라한 미명사이에서 단 하나의 붉게 타오르는 불꽃이었으며, 지독하게 피어오르는 물안개 사이에서 선명하게 살아 숨 쉬는 실재(實在)였다.
절망의 요괴가 내미는 달콤한 안식을 뿌리쳤던 제가 너무나 자랑스러워 사자는 한참 동안 끅끅거리고 울며 귀문을 소란스럽게 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