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소청조의 속삭임 (4)
2017.11.20.
염휘의 눈꼬리가 기분 좋은 듯 가늘게 밀려 올라갔다.
옅은 미소가 진홍의 눈동자를 부드럽게 풀어냈다.
“사실, 풍천 그대가 이러지 않아도 보내지 못하였을지도 몰라.”
미풍에 흩날리는 은사 같은 머리카락처럼 은근하고도 가벼운 목소리였다.
“네?”
풍천이 뜻밖의 말에 깜짝 놀라 바보 같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락의 절벽에서 말이야.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다잡았어도 돌아와 고운 분을 마지막이구나 하고 바라보고 있으려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즈음 해서 염휘는 아예 느물거리는 말투를 감추지 않았다.
무언가 단단히 감춘듯한 목소리에 듣고 있던 풍천이 볼을 붉혔다.
붉어진 볼이 다시 희게 식어버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도대체 뭘 떠올리는 것인지 얼굴색이 그새 다채롭게도 변하며 벌벌 떨리는 목소리가 새소리보다 가늘게 울렸다.
“설마, 혼례도 하시기 전에…….”
어떤 의미로든 용서받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대가는 참혹했다.
풍천은 마치 자신이 희롱당하기라도 한 듯 분노에 찬 아수라의 눈총을 받았고, 염휘로부터는 짧은 타박을 들었다.
“풍천.”
“저 자를 치워내야겠습니다.”
분기탱천하여 염휘에게 허락을 구하는 아수라의 목소리에는 절반의 진심이 물려있었다.
실제 아수라의 손은 홍월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니, 풍천의 민망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능글맞게 웃던 염휘마저 반듯한 이마를 손을 짚으며 말을 아꼈다.
‘아아니. 왜.’
도대체 그럼, 사내 꼴을 해서는 그 밤에 연심을 품은 반려를 보고 못 참는 게 치미는 욕심 말고 뭐란 말이지.
풍천은 저를 치한으로 몰고 가는 눈앞의 군신을 보며 속으로 처절하게 항변했다.
‘오해하라 그리 말씀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리 말씀하시면 백이면 백 다 오해하기 마련입니다.’
억울했지만, 그를 쏘아보는 아수라의 눈매가 여간만 사나운 게 아니라 까딱하면 억울이 아니라 울어야 할 판이었다.
풍천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는 끙끙 앓았다.
태평한 얼굴로 낯뜨거운 소리를 잘도 지껄인 풍천을 노려보던 아수라의 입술이 달싹거린 건 그때였다.
“머리꽂이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아수라가 여전히 풍천에게 냉랭한 눈빛을 보내면서 공손히 말을 올렸다.
염휘가 소희에게 건넨 머리장식은 마치 작은 홍옥을 깎아 수북하게 핀 홍매화를 만든 것처럼 보였다.
소희는 들어도 잘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 붉은 구슬은 보통 보석붙이가 아닌 염휘의 영력을 응축시켜 만든 것으로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귀물이었다.
숨이 끊어지는 두 염라의 불을 불러일으킬 만큼 대단한 것을 머리 장식 가득 달아 건넨 것이다.
‘이…… 이것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염휘가 건네는 머리꽂이에 잔뜩 매달린 것이 홍옥이 아니라 그의 영력이라는 것을 들은 소희는 무척 놀란 표정을 했다.
동그랗게 떠진 커다란 눈을 따라 따스하게 번지던 기쁨을 본 것 같았다.
아수라가 건네준 붉은 구슬을 떠올리며 이것도 설마 목숨 값이냐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그는 아니라는 짧은 부정과 함께 다시 소희에게 쥐어주었다.
염휘가 건네준 것은 아수라의 그것처럼 생명의 환은 아니었다.
소희의 머리에 꽂힌 그 장식은 꺼져가는 염라의 불도 다시 지필 수 있는 그의 정수.
염휘는 엄밀히 말해 소희를 속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생명의 환보다 더 귀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소희는 그의 생명을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서야 그것을 받아 들었다.
홍매화가 만개한 듯한 머리꽂이를 찌른 소희는 무척이나 고왔다.
몰라주어도 괜찮았다.
모르셔서 흔쾌히 머리에 장식을 꽂아주었으니 오히려 다행이라 해야 할 것인가.
분명, 저 소심한 이는 염휘가 건넨 머리꽂이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 줄 알았다면 결코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의 가치를 아는 건 오직 염휘 앞에 앉은 두 염라의 불들뿐이었다.
“귀한 마음을 알아주실 것입니다.”
그것의 의미를 아는 아수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맑은소리가 밤하늘을 채우고 이내 흩어졌다.
새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달빛을 받으며 허공을 나는 소청조의 모습은 이제 흔한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밤하늘을 푸드덕거리는 바쁜 날갯짓 소리가 적막을 찢어냈다.
푸드덕-
힘찬 날갯짓에 푸른 깃이 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반짝였다.
작은 새는 눈에 익은 길을 바삐 날아왔다.
동그랗고 까만 눈에 날 듯이 들어선 전각이 들어왔다.
새는 날갯짓을 짧고 느리게 쳐냈다.
달빛을 가르던 날개가 얌전히 접혀 들며 순식간에 하강을 마쳤다.
소청조는 제가 가야 할 곳을 무척 잘 알았다.
열린 들창으로 작은 몸을 밀어 넣으면 저를 기다리고 있던 하얗고 긴 손이 달빛에 얼어붙은 날개를 포근히 감싸주는 곳이다.
오늘도 열린 들창으로 작은 머리가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희고 긴 손가락이 새를 맞이했다.
“이런 이런, 항시 네가 고생이로구나.”
상냥하고 듣기 좋은 미성이 지쳐있는 작은 것을 위로했다.
등 뒤로 가지런히 놓인 백금발이 그의 움직임에 물 흐르듯 굽이쳐 흐트러져 내리는 것이 성가실 법도 하건만, 그는 성가신 기색도 없이 그저 작은 새를 두 손으로 가만히 안아 쥐었다.
빠르게 파드득대는 작은 새의 맥박이 그의 손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태자는 제 손에 들린 새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마구잡이로 두근거리는 작은 새의 심박이, 여태 물어올 소식을 기다리던 그의 것과 닮았다 싶었다.
그의 따스한 손이 익숙하게 새의 가느다란 다리에 매달린 글줄을 끌어내 허공에 띄웠다.
직인이 써 내려간 글씨가 허공에 둥실 떠오르며 자리를 잡고 문장을 이루자 태자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푸른 가을하늘같이 청명하기 그지없는 그의 두 눈동자 가득 빛이 번져 아름답게 일렁거렸다.
바람이 불 턱이 없는 그의 침전 안이건만 그의 백금발이 하늘거리며 나부끼고 소맷자락이 가볍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황홀한 듯한 아름다운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상태자의 표정은 무척이나 행복해보여 그에게서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잘 계시다는구나.”
꿀이 녹아내리는 듯한 달콤한 음성이 가볍게 흔들렸다.
“하지만, 많이 마르셨대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아. 워낙에 섬약하신 분 아니더냐.”
태자는 작은 새에게 찬찬히 설명하듯이 말을 읊조렸다.
“진작에 천도를 내드릴 걸 그랬지. 이렇게 떨어져 버릴 줄 몰랐느니.”
직인의 글줄에 적힌 소희의 이름자를 무척이나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덧그리던 태자는 일순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곧이다.”
화가 난 듯 싸늘하게 가라앉은 그의 푸른 눈동자는 불과 며칠 전보다 확연히 밝아져있었다.
마치 차가운 늦가을 하늘을 그대로 가져다 박아 넣은 듯 시린 푸른 눈동자에선 묘한 열감이 터져 나왔다.
삐이익-
손에 들린 작은 새에게서 새된 소리가 새어 나오고 나서야 상태자의 기세는 사그라들었지만, 두 손에 맺힌 눈부신 빛은 그 뒤로도 한참을 더 머물다가 잦아들었다.
“자칫하면 가여운 것을 잃을 뻔하였구나.”
겸연쩍은 목소리를 낸 태자가 손가락으로 소청조의 작은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의 기세에 압사 당할 뻔한 작은 새는 가엽게도 몹시 겁을 먹은 채였다.
자신을 감싸 안은 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뒤늦게 깨달은 눈치였다.
태자는 제 손에서 도망가려는 작은 새를 내려다보다 쥐고 있는 손에 들어가려는 힘을 풀었다.
최근 힘이 조금 더 개방이 되어 아직 영력도 악력도 조절이 쉽지 않은 탓에 자칫하면 소청조를 터트려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시비가 올린 찻잔을 쥐다 터트려버린 오늘 아침보다는 많이 노련해졌지만, 아직 손끝에 닿는 것이 조심스럽다.
태자는 자신의 손안에서 빠져나가려는 작은 새를 결국 소매 속에 넣어버렸다.
아직 직인에게 보낼 서신을 쓰지 못했으니 겁먹은 저 작은 것을 놔줄 수가 없었다.
태자는 자리에 앉아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붓두껍을 열고 잘 관리된 붓을 들어 바로 종이에 시원시원한 품새로 써 내려갔다.
단정하기 그지없는 표정에 가끔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시간을 들여 하얀 종이 빼곡하게 채운 글줄은 그가 붓을 내려놓는 순간까지 아무런 흔적을 그려내지 못했다.
그러나 태자는 연신 웃는 낯이었다.
먹물이 한 방울도 묻지 않은 붓을 가볍게 털어 정리한 뒤 붓두껍을 다시 씌우고 제자리에 거는 모습은 글줄 깨나 써 내린 서생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그에게는 벼루도, 먹도 없이 그저 하얗게 남은 종이 한 장 뿐이라는 것.
하지만 태자가 소매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소청조를 꺼내들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 손가락 위에서 날아오르려고 깃털을 단장하는 작은 새의 다리로 태자가 종이에서 무언가를 주워 거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아무것도 없던 그의 손끝을 타고 글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치 종이에서 방금 뜯어 꺼낸 듯 단단하고 시원하게 쓰인 글줄이 은은한 빛무리를 뿌리며 한 줄로 가지런히 엮여 의지를 가지고 소청조의 다리에 곱게 감겨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단히 기괴했지만 그만큼 신기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차곡차곡 감겨드는 글자들이 작은 온점과 함께 소청조의 다리에 닿자마자 조금 전의 일은 꿈이라도 된 듯 새의 다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질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이 끝이 나고, 작은 새는 제 깃털을 윤이 나게 다듬었다.
날개깃을 하나하나 부리로 쓸어 침전에 들어찬 더운 공기를 깃 사이사이로 밀어 넣고 정리해 차가운 달밤을 날 준비를 마쳤다.
태자는 바지런하게 준비를 마친 새의 머리통을 대견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슬슬 쓸어주었다.
“금세 배우는구나.”
손끝에서 느껴지는 훈기에 작은 새가 조금 전의 무서움도 잊고 그새 눈을 끔벅이며 작은 울음소릴 냈다.
“하하. 곱고 순하기도 하지, 작은 새야. 내 너를 볼 때마다 그분이 자꾸만 간절해지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웃음을 터트리는 태자의 모습은 온화하고 다정했다.
높고 잘 뻗은 콧날에 어울리는 깊은 눈매는 웃느라 가늘어진 눈꼬리 덕에 싱그러웠고, 결이 좋은 백금발은 그를 한층 더 화사하게 보이게 했다.
가늘어진 눈매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는 분명 소청조를 향해있었지만, 끝을 알 수 없이 깊어진 시선은 소청조가 아닌 그리운 누군가를 그리는 듯 아련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시온지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를 향해 묻는 나긋한 음성이 귓가를 울리고,
볼을 붉게 물들여 말하던 어여쁜 얼굴이 단번에 눈앞에 그려졌다.
‘큰일입니다.’
‘네?’
‘저도 모르게 자꾸만 바라보게 되니 혼롓날까지 어찌 기다릴지 막막합니다.’
‘!’
‘하루가 억겁같이 길고도 느립니다. 저만 이렇습니까?’
‘그건…….’
하루빨리 제 품에 가두고 싶다는 열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 보이던 그날.
목덜미까지 온통 붉게 물들인 소희가 너무도 아름다워 명치께가 시큰하게 울렸었다.
보고 싶다.
만지고 싶다.
품에 넣고 가는 뼈마디가 으스러지도록 안고 싶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기약 없는 기다림에 견디기 힘든 아픔이 가슴을 날카롭게 후벼 파내는 것 같았다.
“하아…….”
느리게 깜빡이는 눈동자에 열망이 실리고, 태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거둬졌을 때,
그는 손을 가볍게 털어 소청조를 차가운 밤하늘로 밀어 올려보냈다.
“가거라, 네 주인께 기나긴 달밤을 홀로 버티는 이의 소식을 전해주려무나.”
달빛 아래 흐트러진 그의 백금발이 차갑게 빛을 머금었다.
태자는 소청조가 사라진 하늘을 가만히 더듬다 들창을 닫았다.
기대하던 밤손님이 다녀가셨으니, 이제는 그의 날을 마무리해야 했다.
태자는 허공을 향해 목소릴 냈다.
“천관아.”
시비를 부르듯 무게감 없이 낮게 터져 나온 그의 목소리는 크진 않았지만 밤하늘을 타고 또렷하게 퍼져나갔다.
그의 목소리가 채 흩어지기도 전에 그의 침전문 밖에서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은 예민한 듯한 카랑한 목소리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불러계십니까, 전하. 소신 천관사복대제 대령했사옵니다.”
태자는 자신이 찾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자 들창께에 서 있던 몸을 돌려 서안 앞으로 가 자리를 잡고는 천관을 들였다.
“들어오시게.”
태자의 허락에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깊게 부복한 천관이 조심스럽게 그의 앞으로 다가와 예를 올렸다.
태자는 자신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천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소청조를 바라볼 때와 같은 태도임에도 그의 기세는 사뭇 달랐다.
봄바람같이 온유하고 다정한 소릴 하던 이는 사라지고 서릿발같이 추상같은 기세를 피우는 미청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보드랍게 빛을 발하던 푸른 눈동자는 냉엄하기 그지없었고, 달콤한 목소릴 내던 입술은 일자로 단단하게 맞물렸다.
태자는 그려낸 것 같은 미청년이라기보다 달빛에서 건져낸 차가운 상제의 재림을 보여주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천관은 하루가 다르게 힘을 채워나가는 자신의 주인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언제고 그가 제위에 오르는 날에 자신이 모시던 주인이 얼마나 고아하게 피어날 것인지를 상상해왔었다.
하지만 자신의 주인은 그의 기대를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양기를 진득히 품어 태양 없이도 고고한 빛을 뿌리는 그의 백금발을 보고 있자면 한낮의 빛 속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대대로 지존의 외양은 그의 영력에 비례했다.
천관은 하루하루 조금씩 더 찬란하게 피어나는 제 주인을 바라보며 자신의 선택에 자부심을 느꼈다.
빛바랜 지푸라기 같은 금발을 하고선 매일 사람 좋은 미소만 짓는 현재의 상제.
그에 비하면 제 주인은 이 얼마나 찬란하신가.
천관의 머리는 더욱더 깊숙이 숙여졌다.
제 주인의 대업에 조금이나마 자신이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광영이었다.
천관은 주인을 힐끔대는 못난 제 눈을 탓하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천관, 요즘 날이 무척 좋더군.”
“네 전하. 더할 나위 없이 쾌청하여 외유 나가시기에도 좋사옵니다.”
“그럼 언제 남쪽 동산으로 가서 도화나 보자꾸나.”
“예, 채비할 것입니다.”
한밤 두 남자의 대화치고는 무척이나 괴이하였지만, 최근 태자는 무척이나 곤하였다.
그는 매일매일을 새롭게 태어났다.
매일 새롭게 차오르는 영력을 버텨내기 위해 전신이 부서지고 새로 맞춰지는 고통을 감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천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이렇게 급박하지 않았건만.
어찌 된 영문이지 이제 그 속도를 버텨내기가 벅찰 정도였다.
그 연유야 태자도 알 도리가 없었지만 재위의 그 날이 머지않았음을 그도, 삼관들도 느끼고 있었다.
맑게 빛나던 두 눈에 잠시 스치고 지나간 건 채 지워내지 못한 고통이었다.
상태자는 전신을 꿰뚫는 격통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시시때때로 자신을 덮치는 이 고통은 곧 끝이 날것이지만, 속수무책으로 감당해내야 하는 이 순간은 무척이나 괴롭고 곤하였다. 외로웠다.
태자는 고통이 잦아들길 기다렸다가 한참 만에야 짧게 끊어진 토막 숨을 내쉬며 가만히 말을 입 밖으로 내었다.
“그럼, 언제쯤이 되겠는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사이 그의 푸른 눈은 조금 더 제 빛을 찾아 한층 더 투명해졌다.
천관은 정수리에 떨어지는 제 주인의 말에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자를 향해 성심껏 답을 올렸다.
“닷새 주시옵소서. 어그러짐 없이 준비하겠사옵니다.”
“그러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천관의 말에 짧게 대답한 태자는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 이마를 가만히 훔쳤다.
아마, 오늘 밤도 내도록 이 고통을 감내해야 할 모양이었다.
천관이 안색이 굳어지는 상태자를 염려 가득 담은 시선으로 잠시 올려다보다 다시 깊게 읍을 하며 물러나길 청했다.
태자는 목소리 낼 힘도 없는 듯 가만히 손을 내저으며 천관을 물렸다.
이미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 있는 턱은 힘이 들어가 단단히 당겨진 채였다.
자신을 덮쳐오는 거대한 힘을 소리 없이 버티며 참아내는 태자의 등 뒤로 차가운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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