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소청조의 속삭임 (3)
2017.11.17.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먼저 꺼낸 건 성질 급한 풍천이었다.
볼멘 목소리가 어지간했다.
“뭘 말이냐.”
“뭔지 몰라 그러십니까.”
“그래. 모르겠구나.”
끝까지 시치미 떼는 듯한 염휘의 태도에 풍천이 기어코 선을 넘어버렸다.
왈칵 화를 터트리듯 제 주인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염휘께서는 정말 바보다 이 말입니다. 상태자께선 정녕 모르셔서 그러셨답니까? 네?”
“…….”
“상태자께서는 정녕 몰라서 속박의 인까지 새겨두셨답니까!”
“…….”
“휘를 맞을 자격도 아니 되는 분도 탐을 내 모르는 척 덮으시는데 염휘께서는!”
“…….”
“모르는 척 그냥 덮으시면 안 될 일이었습니까? 어째 이리 고지식하신 것입니까? 아니, 이것이 애당초 들춰낼 일이기나 했냐 이 말입니다.”
“풍천.”
풍천이 도를 넘어 입질하는 것을 여태 가만 들어주기만 하던 염휘가 드디어 입을 뗐다.
그만 두라는 경고와 같은 염휘의 부름에도 풍천은 맹렬한 기세를 꺼뜨리지 않았다.
“휘를 타고 나셨다고는 하나, 금번 대의 휘께서 버젓이 계십니다. 당연히 귀문의 별로 서실 분을, 달 마마를 어째서!!”
씩씩거리며 말을 채 잇지도 못할 만큼 흥분이 최고조에 달한 풍천은 묵빛 갑주가 오르내릴 정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 이쯤에서 아수라가 나서서 풍천을 말리곤 했지만, 이번에는 그마저 접선을 꺼내 입매를 가렸다.
‘저 역시 풍천과 별다를 바 없는 심정이다 이리 시위 하는 건가.’
염휘는 가만히 눈을 늘어뜨렸다.
“풍천.”
“왜 부르십니까! 이 자리에서 소멸시킨다 하셔도 오늘은 단단히 아뢰어야 하겠습니다. 도대체 왜 귀문의 별을 밀어내시는 겁니까. 이럴 때일수록 붙잡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 것이냐.”
“염휘시여, 소장.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아뢰는 것이옵니다.”
“…….”
“상천의 휘니 뭐니 전 모르겠습니다. 이미 염휘께서도 싸안고 내려오셨을 때 별로 삼고자 하심이 아니셨습니까?”
풍천은 숫제 악다구니를 하듯 염휘를 향해 으르렁 거렸다.
목에 솟은 핏대가 선연했다.
“…….”
“그런데 이제 와서 내주시는 겁니까? 어째 그러시는 겁니까. 그냥 눈감고 별로 품으시면 안 된답니까?”
풍천은 마치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보십시오, 만월의 달빛이 얼마나 유순해졌는지. 어린 요괴들이 어쩌는지 안 보이십니까?”
풍천의 읍소는 타당했고 그가 핏대를 세울 만 했다.
염휘의 행동은 이상했다.
그는 자신의 비를 자격도 없는 태자에게 양보하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 오욕을.
그 수치를.
직접 뒤집어쓰려고 하고 있었다.
왕께서 정상이 아닌 것 같으니, 자신이라도 말려야 할 것 아닌가.
달 마마를 내줄 수 없다고 저라도 목소리를 내어야 했다.
소희가 하계로 내려온 지 여러 날,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많은 것을 해냈다.
살기등등하던 월력은 유순해졌고, 넘치는 힘에 주체를 못 하고 하계를 어지럽히던 어린 것들은 얌전해졌다.
그리고 생명을 품고 부드럽게 살아나는 달빛을 피해, 요괴들이 귀문 쪽으로 몰려든 것마저 정상이었다.
귀문, 그곳은 월력이 맨 마지막에 스미는 땅이니 달이 온전히 제힘을 되찾으면 그마저도 순리대로 정리가 될 것이었다.
달 마마의 따사로운 힘이 티 나지 않게 서서히 하계로 스미기 시작했다.
소희는 스스로가 귀문의 별임을 훌륭하게 입증했다.
그런데 그런 달 마마를 염휘께서 무슨 연유로 밀어내시려 함인가.
이럴 순 없음이다.
풍천은 이 자리에서 대를 마감하여도 좋다 생각하고 전신에 기세를 피워올렸다.
애당초 말로 해결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말이 안 된다면, 주먹을 맞대서라도 저 단단히 막힌 귀를 뚫을 셈이었다.
염휘가 전력으로 응하면 단 한 번에 끊어질 목숨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염휘께서 정신을 차려주신다면 풍천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풍천이 영력을 개방하자 공기를 가르며 그 기세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풍천의 전신이 먹구름과 같은 기세에 집어 삼켜지기 직전, 그의 귓가에 서글프기까지 한 염휘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푸확-.
염휘의 말에 풍천의 영력이 거센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쿨럭쿨럭.”
하지만 급하게 기운을 갈무리하는 통에 미처 흩어내지 못한 영력이 마구잡이로 몸속을 헤집어 풍천이 격렬한 기침 끝에 왈칵 핏물을 게워냈다.
핏물이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낸 풍천이 희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아수라의 부축을 받아 몸을 추슬렀다.
“괜찮으냐?”
덤덤한 듯 옅은 웃음을 담은 염휘의 목소리에 풍천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방금 얼마나 날뛰었는지도 막, 깨달았다.
제 주인에게 얼마나 불경한 짓을 저지른 것인지 깨닫고는 무릎을 꿇으려는 풍천을 향해 염휘의 희고 곧은 손이 먼저 뻗어 나와 저지했다.
“앉거라.”
단호하고 힘이 실린 목소리에 풍천은 고개를 조아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다시피 하며 아수라에게 기대 간신히 자리에 앉자 등을 돌리고 선 염휘에게서 높낮이를 죽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풍천, 너는 모르겠구나.”
“소장. 무엇을 일러 말씀이시온지……. 쿨럭.”
고갤 조아리며 공손하게 말을 올리던 풍천이 다시 한번 격한 기침을 하며 핏물을 삼켜냈다.
잔뜩 억눌린 염휘의 목소리가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내가 소희를 어떻게 데려온 것인지 들어 아느냐? 모를 테지. 이 손으로 말이다. 풍천.”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선 염휘가 빙글 뒤로 돌아 풍천에 마주 섰다.
“보이느냐? 이 손이 말이다.”
영력이 돋워진 염휘의 손끝은 이미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염휘는 저를 올려다보는 장수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섬뜩하고 사나워 슬픈 눈을 구태여 감추지 않은 채 빛가루를 머금은 듯 찬란히.
하지만, 눈부시게 웃었으나 그는 꼭 우는 것 같았다.
“이 손으로 한 줌도 되지 않을 목을 생을 뜯었느니라.”
붉은 불길이 일렁이는 홍안에서는 은은한 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흥분한 그를 대변이라도 하듯 은빛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가운데 미동 없는 건 오로지 굳어버린 염휘의 얼굴뿐이었다.
천천히 들어 올린 그의 손이 옆으로 길게 뻗어나 우람하게 가지를 드리운 나무에 닿았다.
마치 솜털을 움켜쥐듯 가볍게 그러모은 그의 주먹 아래 나무는 가루가 되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빠각거리는 소리까지 잦아든 그곳엔 염휘의 포가 휘날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보았느냐 풍천? 염라의 첫 번째 불이 굽어살펴야 할 것들을 이렇게 악귀같이 무자비하게 뜯어내 죽였느니라. 생때같은 목숨을 친히 거둬들이고 내 것이 되어라 윽박질렀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옅게 떨리고 있었다.
“이 얼마나 무도한 자이냐. 대답해 보아라. 너라면 이런 자를 지아비로 삼아 줄 것이냐?”
염휘의 목소리엔 지우지 못한 자기혐오가 짙게 깔려있었다.
“대답해 보아라. 아수라. 너라면 이런 야차 같은 자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겠느냐?”
염휘의 주먹이 풍천과 아수라를 향해 뻗어졌다.
황금빛으로 곱게 물든 그의 주먹이 펴지자 가루가 되어버린 나무가 바람에 눈보라가 일듯 휘날려 사라졌다.
아수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 바보 같은…….’
그가 소희에게 머리꽂이를 건네는 걸 보고 기대했건만.
저 미련한 자신의 주인은 그새를 못 참고 자신을 닦달해 마지막 남은 단심마저 뜯어냈다.
아수라는 먹먹해지는 마음을 가눌 길 없어 부축하고 있던 풍천의 팔을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쥐고 말았다.
그건 딱히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었건만 풍천은 달리 해석한 모양이었다.
곧이어 풍천은 희게 질린 얼굴을 하고선 잘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못할 건 뭡니까.”
“뭐라?”
아직도 제 의중을 못 알아듣는 풍천이 답답한 모양인지 염휘의 눈썹이 하늘로 솟았다.
“못한 건 무어 있답니까! 사내가 되어 그게 뭡니까!”
“풍천!”
아수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풍천을 불렀다.
그를 부축하던 손을 풀어 입을 막으려 했지만 닿기도 전 풍천에게 잡혀버렸다.
“그럼 더 잘해주시면 되잖습니까. 그 목숨값까지, 면구함까지 보태서 귀문의 별께 생이 끊어지는 날까지 헌신하시란 말입니다. 가서 무릎이라도 꿇으면 또 어떻습니까.”
“풍천.”
스산하기까지 한 염휘의 목소리가 풍천을 불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까짓 자존심이 뭐라고! 사내로 태어나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하계의 지존으로서 책임도 없습니까? 누가 제 몫의 비를 딴 놈에게 들이밉……!”
“감히!”
쿠앙--!
대노한 듯 사나운 염휘의 일갈과 함께 굉음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풍천이 아수라와 함께 뒤로 떠밀려 의자에서 떨어졌다.
풍천을 떠안은 아수라는 굳건했고, 목숨을 걸고 쓴소릴 올리던 풍천도 무사했다.
그들 앞으로 뻗어 나온 아수라의 손은 검붉은 기로 뒤덮여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금세라도 꺼질 것 같은 가냘픈 숨소리.
보기와는 달리 아수라는 큰 부상을 입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직언한 것은 자신이건만.
“이 바보 같은 작자가. 내버려 두지 그랬어.”
“그럴……수야 없지. 염라의 첫 번째 불이…… 두 번째 불을 때려죽였다는…… 추문은 피해야지…….”
“끝까지 입만 살았네그려.”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훔치지도 못하고 풍천이 아수라를 타박할 때였다.
사르락-
비단이 스치는 소리가 스산하게 귓가를 울렸다.
염휘가 자신들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풍천은 자신에게 남은 영력을 모조리 끌어올려 손에 모았다.
염휘가 어디를 치고 들어올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게 어디이든 딱 한 번은 막을 수 있길 바라며 풍천은 등 뒤의 아수라의 손을 힘줘 움켜잡았다.
이대로 여기서 목숨을 내놓는대도 괜찮았다.
적어도 길동무는 든든한 놈으로 맡아두었으니.
그래서 염휘의 황금빛 손이 뻗어져 나왔을 때 눈을 감지 않고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전신을 감싸 안는 그 어마어마하고 황홀한 영력을, 정신이 끊어질 때까지.
“아니, 이 작자는 도대체 언제까지 늘어져 있을 거지?”
단정치 못한 저 말투는 몹시 익숙했다.
풍천은 귓가를 찔러 들어오는 뾰족한 목소리에 움찔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눈앞에 마주한 붉은 한 쌍의 눈을 보자 풍천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만…… 살아남은 것인가?”
“뭐?”
“그는 어떻게 되었지?”
‘낮의 아수라’를 찾는 풍천의 비감한 목소리에도 아수라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어두워진 하늘을 가리킬 뿐이었다.
어느새 밤이 된 모양인지 하늘을 가득 채운 만월은 오늘도 그 자태가 찬란했다.
그리고 아수라의 손끝엔 달빛을 받아 빛무리를 뿌리는 자신의 주인인 염휘도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달빛과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셨다.
한결 온화해진 달빛을 전신에 두르고 계신 덕인가, 염휘의 표정 역시 자애롭기 그지없다.
제 주인에게 속절없이 넋을 빼앗긴 풍천을 일깨운 건 염휘의 목소리였다.
“누가 어찌 되어?”
다분히 장난기가 가득한 염휘의 말투에 풍천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죽었다지만, 염휘까지 계시는 건 이상했다.
기억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염휘는 자신들의 목숨을 한 번에 거둘 듯 무자비한 손속을 휘두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환생의 도에 오른 것은 풍천 자신과, 아수라 둘만이어야 했는데 염휘까지 계시다는 건.
풍천은 언젠가 우스갯소리처럼 흘려들었던 환생의 도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마고께서 다시 생의 좌를 내려주시기 전까지 새 운명을 기다리며 생시와 다름없이 산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참이었구나?
“정말…… 죽어서도 비슷하구나.”
풍천은 깨달음을 얻어 홀가분한 느낌이었지만.
“이 지긋지긋한 작자.”
아수라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맹한 풍천의 소리에 더 이상 아수라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손을 휘둘러 풍천의 뒤통수를 쳤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풍천이 제 머릴 부여잡고 끙끙거리자 이죽거리는 아수라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왜? 죽어도 아픈가 보지?”
“그……런가……. 너 이 녀석 어째서 죽어서까지 이렇게 손버릇이 험한 거냐?”
“한 대 더 때려주거라. 저 녀석은 아직 정신이 덜 든 모양이구나.”
티격태격하는 아수라와 풍천을 향해 느른한 염휘의 말이 더해졌다.
풍천은 아수라와 투덕거리던 것도 잊고 염휘의 말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흘려들을 수 없는 말에서 뭔가를 깨달은 것도 같았다.
“설마…….”
“맹한 작자 같으니라고. 이런 자가 무려 염라의 두 번째 불이라니 실로 애석한 일이옵니다.”
아수라의 희고 고운 손이 마치 못 볼 것을 본 듯 과장스레 눈을 가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바보는 정직한 법이라고 하였지. 두어라. 오늘 덕분에 귀한 깨달음을 얻었느니.”
이제는 아수라뿐만이 아니라 염휘마저 풍천을 대놓고 조롱하였지만, 풍천은 여전히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기 급급했다.
“아…… 안 죽이셨습니까? 저는 그때. 분명 염휘께오서…… 어…….”
풍천의 말은 횡설수설이었으나 다들 알아들을 법한 것들이었다.
어쩔 줄을 모르고 뒹구는 그의 시선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푸흣-.”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아수라의 높고 새된 웃음소리가 달밤을 울리고, 이어 염휘의 낮은 웃음이 뒤를 따르다 사라졌다.
“염휘께서…… 되살리셨습니까?”
한참 만에야 풍천에게서 ‘확인’을 바라는 질문이 나왔다.
그러나 간신히 비나 가림직한 단출한 곳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술잔을 나누는 군신에게선 이렇다 할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죄를 청한다며 무릎을 꿇은 풍천만 그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아. 향이 일품이로군?”
이따금 나오는 소리라야 술을 논하는 말뿐.
일각쯤 지나자 슬슬 무릎이 아려왔다.
이각쯤 지나자 헛웃음이 나왔다.
죄를 청하며 무릎을 꿇은 저를 까마득히 잊고 달구경을 하는 두 군신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저는 다리가 저리고 실로 온몸이 비틀리도록 괴롭건만.
‘아니, 이것이 대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 풍천이 은혜를 입은 제 처지도 잊고 고약한 성미에 뿔이 돋을 무렵이 되어서야 염휘가 그를 불렀다.
“뭐 하는 게야. 궁상은 그만하면 되었으니 어서 오잖구선. 아수라가 오랜만에 술을 풀었어.”
“더 기다려야 하는 건가.”
작은 술잔을 귀하게 받아 들고 음미하는 염휘의 표정이 너무나 느긋해서 풍천은 근심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터지려는 한숨을 삼키고는 고개를 주억인 채 다가갔다.
다리가 저려 기는 것인지, 걷는 것인지 모를 만큼 제멋대로 휘청이는 몸뚱이가 그의 처지만큼이나 볼썽사나웠다.
“진작 오면 좀 좋았느냐.”
“미련이 능사는 아니온데.”
오늘 두 군신은 합이 잘 맞았다.
같이 얻어맞았건만.
늦게 깬 것이 죄였다.
풍천은 생사를 함께 한 정리도 잊고 주군 옆에서 저를 같이 놀리기 바쁜 아수라를 향해 이를 갈며 잔을 받았다.
쪼르륵-
마치, 이날의 모든 소동이 지워질 듯 청아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깊은 밤을 고즈넉하게 울리는 벌레소리와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를 안주 삼아 주거니 받거니 독주를 즐기던 염휘가 풍천의 말에 뒤늦게 답해주었다.
“괘씸했다.”
“…….”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라 염휘의 이야기를 따라잡느라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렇사옵니까.”
뒤늦게 염휘의 말을 알아들은 풍천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떨궜다.
염휘는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은 붉은 눈동자만 슬쩍 굴려 희게 굳은 풍천을 지그시 바라보다 이내 다시 시선을 만월로 돌렸다.
그가 얼마나 애써 스스로를 다스리는지 두 눈에 훤히 보여 풍천의 고개는 더욱 땅속으로 꺼져들 듯 수그러들었다.
그가 얼마나 주군께 큰 상처를 냈는지를 차마 보고 있기 힘들었다.
제아무리 좋은 뜻이었다고 하나, 그것은 분명 하극상이었고 목숨으로 죄를 물어도 면키 어려운 것이었다.
푹 숙인 고개 끝에 염휘의 잔잔한 목소리가 와닿았다.
“하지만, 시원하였느니. 알고 있느냐 풍천? 꽤 아프긴 하였으나 시원하였다.”
“네?”
“알고 있었지만, 차마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보아라. 이렇게 우세를 당하여도 지존입네 하는 자존심이 살아 있어.”
“…….”
“그리고 이제 너도 알지 않느냐, 그렇게 사납고 야차 같은 이를 누가 지아비로 받아주겠느냐.”
환의 말은 담담하게 이어졌다.
“나는 당당하였느니라. 부정을 저지른 별이니 단단히 경고했다 생각하며 무참했던 그 날을 그리 기억했다.”
염휘는 말 끝에 손에 들린 잔을 단숨에 비웠다.
독한 술 냄새가 훅 끼쳐 들었다.
비어진 잔에 말없이 아수라가 술병을 기울이고, 찰랑이는 독주에 달빛이 잠겨 들었다.
그런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염휘가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한참을 입맛을 다시다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백했으니, 이 죄인이 속죄할 길은 ‘원래’의 제 짝에게 보내주는 거라 생각했었다.”
“그…….”
아수라의 입귀가 비틀리며 한숨도 아닌 탄식도 아닌 것이 짧게 밤공기를 흩트리고 사라졌다.
무람없이 구겨진 미간에 가득 들어찬 건 불만이었다.
“고약하게 굴어도 곱게 웃어주던 그이를 너는 모를 것이다. 부러, 상처받으라 함부로 대하여도 얼굴 한번 붉히는 법이 없었다.”
“타고나길 유순하신 듯하였습니다.”
드물게 아수라의 입에서도 칭찬하는 말이 나왔다.
밤의 아수라는 나긋한 생김새와는 달리 무뚝뚝하기 그지없어 좀처럼 후한 평을 하지 않았다.
그런 아수라마저 성정이 곱다 할 정도이니 제 안목이 틀리지는 않았다 싶어 염휘는 그 와중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그런 이에게 내가…… 손을 뻗는 게 가당키나 하겠느냐.”
“하지만……!”
또다시 물러서는 듯한 말에 아수라가 목소리를 돋웠지만 그보다 염휘의 말이 빨랐다.
염휘는 뾰족하게 돋은 아수라의 음색이 뭘 뜻하는지 아는 듯한 눈빛이었다.
시원하게 뻗은 눈매에 드물게 장난기가 매달렸다.
싱긋 웃는 그의 모습은 등 뒤의 달빛과 어우러져 정말이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그 모진 일을 겪고도 말이다, 귀문의 별로 서주겠다고 염라의 불들에게 말해주기도 하였지.”
“압니다.”
“그게 보통 심성이겠느냐. 이 야차 같은 이를 참고 품어주겠다는 분께 속죄라도 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염휘의 말을 타당했다.
그러나 동의는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아수라도 풍천도 매한가지였다.
운명이라는 이름 아래 그 모진 것을 말없이 덤덤하게 삼켜가며 버텨온 그 작은 분이 얼마나 마음으로 울었을 것인가 짐작이 되어 못내 마음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놓을 수는 없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계에서 이십 년을 오매불망 기다려온 달 마마.
그녀께서 상천의 휘를 타고 나셨다고는 하나 자격 없는 태자를 위해 귀왕께서 양보하시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
귀왕께서도 사정을 모르셨으니 진노하신 것이 아닌가.
두 염라의 불은 슬금슬금 변명하듯 이것저것을 떠올렸다.
염휘께서 뜻을 굽히지 않고 상태자에게 보내려고 하면 이번에도 또다시 목숨을 걸고 말릴 셈이었다.
“태자께 보내드리는 것이 속죄는 아닙니다.”
“그것은 속죄가 아니라 회피이옵니다. 무릇 사내몫으로 나셨으니 당당히 구십시오.”
풍천이 입을 열자 아수라가 말을 거들었다.
두 염라의 불이 하려는 말은 뻔했다.
염휘는 다시 흥분한 기색인 두 염라의 불들을 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누가 뭐라 하였느냐? 아, 아까 풍천이 알려주었구나. 가서 무릎이라도 꿇으라고.”
풀벌레 소리 사이로 누군가의 앓는 소리가 스쳐 지나갔지만 아수라도 염휘도 굳이 돌아보진 않았다.
누군가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 다 죽어가는 표정일 거란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웃음기를 머금은 미성이 공기를 타고 넘어왔다.
“가서 꿇어보련다. 속죄하련다. 사내로 태어났으니 당당히.”
“!”
“예에?”
기함할 소리에 두 염라의 불은 제 귀를 의심했다.
“참이십니까!”
그러라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목청을 높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정말 소희에게 가서 무릎이라도 꿇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라니.
염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 웃고 말았다.
“하하하하-. 그럼 허언하랴?”
“그…… 그건.”
“매달려 은애하여주오, 미안하였다 빌어보면 날 받아줄지 아느냐.”
염휘의 즐거운 모습은 악동 같았지만, 그 말이 진심인 듯하여 두 염라의 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 풍천이야 오래전에 이미 정신을 놔버렸다지만.
아등바등하던 풍천을 염휘와 함께 놀려먹기 바쁘던 밤의 아수라까지 정신이 홀딱 빠진 표정으로 염휘를 바라보았다.
세상 그 누구보다 지고하신 이가 지금 무슨.
“하하하하핫.”
“…….”
“…….”
“이런 표정들이라니, 정말 볼만하구나.”
두 염라의 불을 잔뜩 얼어붙게 만든 장본인은 유유자적하게 술잔을 다시 한번 비우고 나서야 흥겨운 음성으로 그들을 불렀다.
“아수라, 풍천. 허니. 그대들이 날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
“네?”
“설마 정말 가서 소희에게 울며 매달리기라도 하란 건 아니었을 테지?”
“농이 과하십니다!”
두 손을 내밀어 크게 내젓는 풍천만큼이나 아수라도 놀란 모양인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풍천의 말에 동조했다.
“그럼, 믿어보기로 할까?”
내 무릎을 지켜줄 거라 마음 놓아도 되겠는가.
슬쩍 말을 덧붙이는 염휘의 말은 다분히 고의적이었지만 이미 아수라와 풍천은 입 밖으로 낸 말이 있어 미간에 슬쩍 실금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걸려도 단단히 걸렸다.
그것은 너무도 늦은 깨달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마냥 놓이기도 했다.
방금 염휘의 말은 짓궂기는 하였지만.
자신들의 달 마마이자 하계의 안주인을 보내지 않으련다 천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째서 되살리셨습니까.”
풍천은 못내 궁금했던 듯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염치란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염휘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아수라가 채워준 술잔을 비우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미련으로 질척거리는 등을 떠밀어주었으니 아무리 중죄를 지었다 한들 되살리지 못할까.”
풍천은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확실히 도를 지나쳤었다. 하계의 지존을 향해 언성을 높이며 꾸지람을 하고 그 앞에서 영력을 돋워 전신에 두르기까지 했다.
염라의 불의 영력이라는 것은 하나의 무기와도 같았다.
주군 앞에서 먼저 칼을 뽑아들어 겨눈 것과 다름없는 일을 했으니, 이는 인세의 말로 치자면 반역이라 부를만한 일을 한 것이다.
풍천은 염휘가 당장에 소멸시키더라도 할 말이 없는 중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염휘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영력을 풀어 그들을 치유해주었다.
그의 단죄는 합당했지만, 굳이 영력을 쏟아부어 두 염라의 불을 되살린 것은 그들의 충심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징벌은 ‘경고’정도로 끝남이 합당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알아채는 것도 이들의 몫이지만, 눈앞의 이들은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었다.
“저런…….”
상념에서 빠져나온 염휘는 소맷자락으로 장난스레 눈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풍천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심전심이라 했던가.
자신들을 보듬은 염휘의 마음을 뒤늦게 알아챈 풍천이 울먹였다.
그것은 과히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으나, 염휘는 술잔을 기울이는 이 순간이 홀가분했다.
상황은 어느 하나 좋아진 것 없었고, 소희에게 다가갈 길은 요원하였지만 억지로 밀어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으니 그 짐이 덜어진 듯 가벼웠다.
이 밤, 내궁서 잠들어 계신 고운 분이 그의 마음에 단단히 둥지를 틀었다.
아니 그가 둥지를 지어준 참이다.
여기 계셔달라.
지난 잘못을 속죄하는 마음에, 소희를 바라는 그의 단심을 더해.
내 곁에 머물러 달라.
염휘는 소원했다.
그리고 억지로 뜯어낸 마음에 다시 홍조가 들자 앞날을 기약할 순 없어도 설레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