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소청조의 속삭임 (2)
2017.11.13.
소희는 직인이 두고 간 향낭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매끈한 비단에 금사를 꿰어 만든 향낭은 단출한 생김과는 달리 무척 정갈했다.
솔기 마름 하나까지 허투루 넘긴 것 없이 단정해, 직인의 손끝이 얼마나 야무진지 한눈에 보였다.
하계에 내려온 뒤 곱고 귀한 것에 익숙해진 소희 눈에도 직인이 준 향낭은 예사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그녀가 여러 겹의 실을 꼬아 만든 황금빛 끈은 점잖은 빛을 품고선 어찌나 시선을 홀리는지, 아무것도 아닌 그 끈에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신기하지.
황금사라.
“설마 정말 황금으로 만들어 꿴 건가.”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달빛 아래 은은한 광택을 흘리는 황금빛 줄을 보며 소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늘게 뜬 눈으로 줄을 요리조리 돌려보는 모습은 웃기게도 진심이었다.
집착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눈길을 끄는 황금빛에 소희는 하염없이 빠져들었다.
자꾸 만지고, 쓸어보고 싶었다.
소희의 가느다란 손이 야물게 매듭지어진 황금색 끈을 한참이나 더듬었다.
이제 제 것이 되었지만, 자꾸 탐이 나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났다.
황금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지.
평생에 물건에 탐을 내 본 적이 없는데.
이깟 끈이 황금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라고 독오른 것처럼 눈을 꽂아 두었단 말이야.
소희는 탐욕스럽게 끈을 매만지던 손을 쓱 털어 맞잡았다.
달빛에 향낭을 들어 비춰보며 골몰하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재빠르게 감정을 갈무리했다.
“이런…… 이런…….”
갑자기 자신이 하던 일이 우스웠는지 소희는 치마폭에 두 손을 늘어뜨리며 어깨를 들썩여가며 웃었다.
‘하기사, 달빛을 거둬 차를 마시는 곳에 발을 붙이고 있는데 황금으로 만든 실쯤이야.’
참 딱하기도 하지.
제처지도 모르고 황금에 눈멀어 진짜인지 아닌지 그 궁리를 하다니.
이런 속없는 짓을 하니 환이 자신에게 질린 것인지도 모른다.
소희는 탁자에 두었던 향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허리띠 속에 잘 넣어두었다.
집착하는 마음은 다독인다지만, 품에서 아예 놔버리고 싶진 않았다.
손가락으로 허리띠 안쪽으로 꼼꼼히 펴서 넣는 손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향낭은 소희의 손가락을 따라 모양이 이지러지며 자리를 잡았지만, 그녀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향을 피워냈다.
이렇게 진하면 질릴 법도 한데.
“신기하구나.”
코가 아플 정도로 향이 진하건만, 머리가 아프고 물리고 싫기는커녕 품에 파고드는 향에 자꾸만 코가 따라갔다.
진한 것과는 달리 부드러운 향이었다.
“흐으으음.”
‘무슨 풀을 말리신거지? 다음에 오시면 꼭 여쭤서 나도 모아 놓아야지.’
소희는 가슴 아래서 차오르는 향을 기쁘게 즐기며 탁자에 손을 올려 턱을 괴고는 창으로 보이는 달을 감상했다.
하계로 내려온 후 생긴 버릇이었다.
이전에 보았던 기억 속의 만월들은 하계에서 마주한 ‘달’에 깡그리 잊혀졌다.
이것이 바로 달이다, 라고 말하는 듯 전신으로 뿜어내는 강렬하고 오만한 자태가 잊히지 않아 낮에도 눈앞에 어른거린다면 누가 믿을까.
깜빡거리는 말간 눈동자에 따스하게 빛을 뿜는 달이 새겨져 들었다.
이렇게 마냥 바라보고 있으면, 달빛이 마지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며 스며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전신을 감싸는 시원하고 포근한 이 느낌을 누가 믿어 줄 것인가.
“아아…….”
만족스러움에 저절로 탄성이 나오고 만다.
실상, 소희는 하루 중 이때가 가장 행복하다 싶었다.
잠자리에 들기 직전.
졸음에 겨워 꼬빡거리며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저도 모르게 졸 때까지
미련스럽게 버티고 버티는 것은 전신을 채우는 달빛이 주는 포만감 때문이었다.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충만감.
전신을, 마음을 빼곡하게 채워준다고 하면 누가 믿겠냐만, 이것은 포만감이었다.
‘좋구나.’
절로 탄성이 터질법한 시원함.
정수리부터 시작된 청량감이 천천히 사지로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매일 느끼는 것이지만, 항시 이 냉감은 목덜미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내려왔다.
오늘도 한참이나 기다린 끝에 목덜미를 타고 쑤욱 내려온다.
‘이쯤인가?’
소희는 목덜미 어딘가를 가만히 쓸었다.
짐작키에 언젠가 환이 말한 속박의 인이 박힌 곳이 이쯤 아닌가 했다.
‘아수라는 눈이 부시다고 했던가.’
‘홍월을 부른다고도 했었지.’
자신은 모르겠으나 하계에 적을 둔 이들은 모조리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것.
그것은 심지어 달빛마저 가리는 모양이었다.
‘절반이 넘은 것이군? 흥. 그래서 골수에까지 속박의 인이 박힌 것이야.’
노여워하는 환의 목소리가 귓가를 은근하게 울렸다.
골수에까지 맺혔다……라.
자신은 이미 육신을 벗었는데도 남은 것을 보면 그것은 아마 영혼이든 인간이든 형태를 따지지 않고 본질을 쫓는 술법인 모양이었다.
“지워지면 좋으련만.”
양손으로 달빛이 막혀 있던 곳을 가만히 덮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소희는 환의 이야기에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녀는 귀문의 별로 남을 것이다.
그러니 상태자가 마치 인을 찍듯 남겨둔 이 술법은 그녀에게 성가시기만 했다.
자꾸 그곳에 속박의 인이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목덜미를 감싸 안은 손바닥에서 괜히 열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 괜스레 작열하는 태양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라 과민하다 싶기도 했다.
‘어서 지워지면 좋으련만.’
소희는 아무것도 없는 목을 괜스레 자꾸 매만지다 팔을 괴고 다시 엎드렸다.
깜빡-
깜빡-
게으른 눈짓에 다시 달이 담겨 들자 사라졌던 청량감이 되살아나 천천히 손끝을 향해 달렸다.
목에서 시작되어 맞닿은 손바닥을 달구던 열감도 이미 기분 좋을 만큼 식었다.
“흐으음.”
만족스러운 콧소리가 터졌다.
역시 좋았다.
하루 종일 외롭고 허전했던 마음까지 이렇게 가득 차면 좋겠는데.
환이 마음을 내어주지 않아도, 태연하게 머무를 수 있게.
마음까지 꽉꽉 눌러 담아주면 좋을 텐데.
달님에게 이루어지지 못할 소원을 담아 중얼거리며 소희는 다시 늘어진 표정으로 달을 바라보았다.
비현실적으로 크고 둥근달은 어느새 눈에 익어 그 훤하고 둥실한 모양새가 퍽이나 어여뻤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보다 노란빛이 더해진 것 같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그 모습이 정겨워졌다.
‘하다못해 저런 것에도 드는 것이 정인데.’
소희의 입술에서 하릴없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거취를 선택할 생각 말이다.’
근사하게 가슴을 울리던 낮은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래, 정해야 하겠지.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것은 더 이상 사절이었다.
작은 입술이 앙다물어져 제법 결기 곧은 표정이 나왔다.
“누가 쉽게 물러날 줄 알고.”
겨우, 다른 자와 혼약을 하였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사납게 목숨을 취할 정도였다면.
그렇게 호기롭게 제 옆에 서달라 할 정도였다면.
이렇게 쉽게 나를 내몰 수 없다는 것도 아셔야지.
마음을 정한 소희는 이제 더 이상 서글프고 힘 빠지는 생각에 심력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정수리에 내리쬐고 있는 달빛이 주는 안온감에 텅 빈 마음이 힘을 얻어 추슬러졌다.
자신은 상천의 휘이며 귀문의 별.
거취를 정하란 것은 환이 내뱉은 말이니 자신은 그의 말대로 자신의 길을 정했다.
그 언젠가 환이 시켰던 그것처럼.
이제는 자신의 의지를 담은 그 말로 그에게 다시 한번 일러둘 참이다.
자신은 귀문의 별로 살 것이라고.
자신의 과오에 발목이 잡혀 눈감고 귀 막아버린 남자에게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가 그저 그런 이야기로 흘러버리고 만다면.
필요하다면 아수라에게, 아니 직인께 도움을 받아 화려하게 치장도 하고 꽃같이 어여뻐져 그를 유혹해보리라 다짐했다.
그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저를 원해 매달리도록.
언젠가는.
언젠가는.
소희는 파르르 떨리는 눈썹을 늘어뜨려 눈을 감았다.
눈두덩이로 스미는 따스한 달빛을 맞으며 격해진 감정을 다스리고 있자니 그 언젠가의 아련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 혼인이 결정된 지 얼마 안 돼서였던 걸로 기억한다.
표 공자가 보내온 첫 연서를 받았던 그 날의 기억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히 덮쳐들었다.
덕실이가 소란스럽게 표가댁에서 보내온 서찰을 두 손으로 들고 제방으로 들이닥쳐 얼른 읽으라 재촉을 하였다.
“어…… 어서 어서 좀 읽어보셔요.”
노상 바깥을 오가며 잔심부름을 하는 통에 햇볕에 까맣게 타버린 계집아이의 얼굴에 드리운 것은 근심이었다.
저 작은 것도 근심할 정도로, 이 혼사는 무척이나 기울었다.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부모 없는 고아에게 손을 내민 것은 번듯한 집안의 고을에 소문이 파다한 헌헌장부셨다.
그를 바라는 내로라하는 고을의 권세가의 아가씨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저, 가볍게 지나간 부친들의 오래전의 한담에 기댄 혼사였다.
언제라도 표 공자가 마음을 바꿔 먹는다면, 끝인 일이었다.
분에 차고 넘쳐 꿈이 아닐까 근심케 한 그런 분이시니 그의 변덕을 걱정하는 소희네 식솔들의 근심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꿈같은 일이라, 일장춘몽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며 비아냥거리는 저잣거리 수군거림이 멀쩡한 귀에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유모는 표가댁 아이들이 오기만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굴할 정도로 굽신거렸다.
그것을 보는 소희의 마음이 좋을 리는 없었다.
아버님의 약조라 하니 따른다지만, 과욕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잘난 사내의 앞길을 막는 것은 아닌가 당연히 죄책감이 들었다.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내키지 않는 혼사였다.
과분해도 너무 과분했고,
잘나도 너무 잘난 사내였다.
늘 소희 앞에 있어주었으나 지독히도 현실감이 들지 않는 사내였다.
그날도 그랬다.
몸종이로 딸린 어린 것이 까만 얼굴을 잔뜩 굳혀선 넘어질 듯 소란스레 달려와 숨이 턱에 차서는 건네는 것은 그저 고운 편지 한 통이었다.
순박한 눈에 박힌 그것은 마치 저승사자가 보낸 것이라도 되는 듯 무서워 보였는지 단단히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소희의 눈에 보인 그것은 고운 꽃물을 입히고 향물에 담갔다 꺼낸 것이 분명한 귀한 편지였다.
아이 손에 올려진 그것은 방문이 열릴 때부터 고운 향을 잔뜩 뿌리며 제 존재를 알려왔었다.
순간 짐작키에 연서가 아닌가 했지만, 너무나 겁먹고 달달 떠는 덕실이를 보자니 제 생각이 틀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소희는 아무 말 없이 덕실이가 건네주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손끝에 감기는 부드러운 촉감은 역시 무척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혼자 읽고 싶었으나 제 손에 들린 편지에서 덕실이의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를 위해 마음 졸이는 덕실이를 내치고 싶지 않아 소희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봉투를 조심스레 뜯어냈다.
채 두어 문장 읽기도 전에 조바심에 찬 목소리가 건너왔다.
“뭐랍디까 아씨. 무르자 하십니까? 네?”
식솔들의 눈에 비친 저의 위치란 건 딱 저만큼이었다.
언제 파혼서가 날아올지 모르는 위태롭고 보잘것없는.
그런 처지.
소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덕실이를 향해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란다.”
“그…… 그럼 왜 보내셨답니까?”
덕실이의 말은 무척 무례한 것이었지만 어째서 저렇게 황망하게 구는지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희는 나무라는 대신에 찬찬히 설명을 해주었다.
“왜긴, 새색시가 될 아가씨에게 오는 편지란 게 무어 특별할 것이 있겠니? 보고 싶구려. 잘 계시었소? 하시는 다정한 말이 전부지.”
“진짜랍니까?”
“그럼.”
“참이지요.”
“아범에게 일러 너, 글공부를 가르치라 해야겠구나? 이 연서를 보여주어야 안심할 테니.”
“아니. 아닙니다.”
장난스럽게 나무라는 소희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 두 손을 내젓는 덕실이의 표정에 스민 것은 안도감이었다.
그제야 덕실이는 제 나이에 맞는 얼굴을 한 채 웃기 시작했다.
“좋습니까?”
“그럼 좋지. 얼마나 다정하신지 모르겠다.”
아이에게 안심하라 큰소리치듯 태평한 소릴 내며 웃어주었다.
“뭐라십니까? 네?”
“요것이. 아씨 편지까지 넘보는 것이니?”
“아, 그러지 말고 알려주세요.”
“한번뿐이야. 흠. 흠.”
지키지 못할 엄포인 줄도 모르고 소희는 덕실의 성화에 글줄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잘 지내시고 계십니까, 뵈온지 오래지 않았는데 그새 그리우니 이것도 병입니다.’
소희는 아예 작정을 하고 덕실이에게 편지를 읽어주었다.
부끄러움도 잠시, 읽다 보니 저도 모르게 내용에 빠져들어 웃는 얼굴이 되었다.
수줍음에 붉게 달아오른 볼을 하고선 찬찬히 읽는 목소리에는 어느새 설렘이 스미었고, 그것은 곧 덕실이에게로도 번졌다.
잠시 숨을 고르느라 멈추면 덕실이가 재촉을 하였다.
“연서란 게 이런 것입니까. 듣다 오장육보가 녹겠습니다. 어쩜 이리 간질거립니까 네?”
“어서 읽어보십시오. 기다리다 숨이 끊어지겠습니다.”
어린 계집아이는 제 아씨를 대번에 다그쳤다.
이제 제가 모시는 아씨의 안위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처음 듣는 달큼한 연서에 그만 정신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덕실에게 일러놓으면 금세 제 아비어미에게 달려가 이를 것이라 읽어주기로 결심했건만.
그러나 그런 건 소희 자신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릴 정도로 들떠 마구 읽어버리고 말았다.
두 장을 꽉 채운 편지는 아쉽게도 오래지 않아 끝이 났지만 향긋한 편지지를 가득 채운 표가 공자의 시원하고 단정한 글씨는 그를 마주 대하고 있는 듯했다.
어쩐지 잔뜩 부끄러워진 소희는 붉어진 뺨을 연신 손으로 쓸어내렸다.
내키지 않는다 하였어도, 쏟아지는 애정이 싫을 리 없었다.
늘 정에 목말라했던 삶이었다.
작은 온기에도 쉽게 감동하고 마는 것이다.
“아씨, 볼 닳겠습니다.”
저를 놀리는 덕실이에게 눈을 흘기면서도 소희는 웃는 낯이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웃어본 게 얼마 만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소희는 덕실이랑 마주한 채 웃고 또 웃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별스럽지 않은 물음에도 웃음이 나고,
“혼롓날 그렇게 웃으면 딸만 낳는대요. 웃으면 안 돼요.”
능청스러운 말에 망측하다 핀잔주면서도 웃었다.
손에 들린 편지가 따끈하게 마음을 달구고 간지럽혀 참을 수가 없었다.
몽글몽글한 무언가가 가슴을 꽉 채우고 알 수 없는 온기가 자신을 감쌌다.
그날, 그랬었다.
너무나 설레고,
너무나 기뻤더랬다.
다정한 글줄로 가득 찬 편지를 꺼내서 보고 또 보고.
달빛 아래서 다시 읽고 또 읽고.
그러다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그득 차는 따사로움에 이렇게 두 눈을 감고 고즈넉한 밤공기를 달빛과 함께 즐겼었다.
“아…….”
그랬었지.
그랬었어.
소희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갑자기 떠오른 옛 기억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볼에 홍조가 스미었다.
눈에 비치는 달은 그때와 달랐지만 따뜻했던 감정만은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기분 좋게 두근거리는 가슴에 소희는 그때처럼 손을 들어 지그시 눌렀다.
그러고 보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상태자.
자신은 상천의 휘이자 귀문의 별.
자신을 지어미 삼겠다며 나섰던 그분의 다정했던 그 모습이 떠오르자 새삼 자신의 처지에 설움이 복받쳤다.
그 다정했던 기억이 이렇게 자신을 서글프게 만들 줄 몰랐다.
그와 혼인하였다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생각이란 것을 알면서도 소희는 떠오르는 기억을 멈추지 못했다.
연서와 함께 건네오던 다정한 안부와 걱정들이.
세심하고 푸근했던 배려들이.
지난날의 기억이.
물밀듯이 떠오르며 소희를 자꾸만 들쑤셨다.
그래, 그렇게 다정한 이에게서 데려왔다면 그렇게 무섭게 다그쳤다면 밀어내지 말아야지.
야무진 다짐도 잠시.
제 처지가 처량해 소희는 끝내 원망 아닌 원망을 하고 말았다.
품에 안긴 향낭에서 소희를 위로 하듯이 아련한 향기가 계속 피어올랐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