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28화 (28/114)

28. 이름 없는 강 건너 (6)

2017.11.06.

“벗을 내달라?”

환은 의아한 눈으로 소희를 내려다보았다.

소희는 그사이 피부가 거칠어져 부쩍 축나 보였지만 두 눈은 전에 없이 생기로 가득 차 반짝였다.

오늘 그녀는 작정이라도 한 듯 환을 보자마자 자신의 이야기만 쏟아내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그녀가 낯설었지만, 환에게는 그보다 그녀의 이야기가 더 뜻밖이었다.

“벗을 내달라?”

잘못들은 것인가 싶어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네.”

소희는 그런 그를 보며 야물게 답했다.

‘벗을 내달라니.’

의아해하는 그의 기색을 읽었을 텐데도 소희는 한 점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를 재촉했다.

모든 사실을 털어내고야 말리라 하는 환의 의지는 꺼낼 틈도 없이 속절없이 뒤로 밀렸다.

그가 입을 떼려고 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소희가 말을 막으며 자꾸만 몰아세우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이곳은 하계입니다. 모두가 저를 소희님이나 마마님이라고 부르며 뒷걸음질 치기 일쑤이니 어찌나 외로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그렇지요?”

“그런데, 그 일전에 먼저 이야기…….”

“크흐흡……. 컥.”

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문을 열려 하자 갑자기 그의 뒤에 서 있던 풍천이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쿨럭거리는 그의 기침 소리는 무척이나 크고 어색해 단박에 이목을 끌었다.

“…….”

말없이 그를 응시하는 환에게 풍천이 얼굴을 붉히며 목에 뭔가 걸린 것 같아서……. 라고 말을 하며 두어 번 더 기침을 하곤 하늘을 응시했다.

목덜미까지 시뻘게진 품새가 무척이나 딱해 아무도 그를 타박하지 못했다.

환이 작게 혀 차는 소리에 기어코 풍천이 등을 돌려 서며 그대로 주의가 환기 되려나 했지만 생각보다 염휘는 고지식했다.

환이 전에 없이 진지한 음성으로 아수라와 풍천을 향해 ‘주위를 물러라.’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늘 웃는 인상이던 아수라의 표정에 낭패감이 스치고 지나가고 풍천 역시 딱딱하게 안색을 굳혔다.

“차라도…….”

“물리래도.”

어떻게든 곁에 남으려는 아수라에게 환이 엄한 목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붉어진 안색이 그가 진심으로 역정을 내고 있음을 말하는 것 같아 아수라와 풍천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자리를 비워야 했다.

“내궁 밖으로 나가거라.”

환은 단단히 결심한 듯 자못 비장한 태도로 염라의 두 불을 내궁 바깥으로까지 내쫒았다.

아수라와 풍천의 기척이 멀어지자 환은 손을 들어 한번 크게 휘둘렀다.

그의 손을 따라 흐르는 도포의 소맷자락이 마치 장막처럼 소희의 눈앞을 가리고 시원한 향취를 남긴 채 멀어졌다.

그의 손짓이 신호라도 된 듯 순식간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졸졸거리고 흐르는 냇물 소리도 작게 지저귀던 새소리도 모두 사라지고, 자신의 맥이 들릴 듯 고요함만이 귓가를 잠식해들었다.

“그대.”

불안정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에 저도 모르게 손을 올리자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환이 소희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네.”

“그대에게 하여야 할 말이 있어.”

“무슨…… 말이시길래, 염라의 두 불조차 내궁 밖으로 물리셨습니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목이 졸리듯 속삭여지는 낮은 목소리가 간신히 말을 만들었다.

소희는 비장하기까지 한 환의 태도에 꾹 눌러놓은 서러움과 배신감이 울컥 차올라 두 눈가로 열이 쏠리기 시작했다.

다독였다 생각했건만, 환의 태도 하나에 또다시 이렇게 속절없이 휘둘리고 마는 제 자신이 한심했다.

먼저 마음에 담은 사람이 약자인 것이다.

소희는 진작부터 겁을 집어먹고 바들바들 떨리는 가여운 제 마음을 다독이며 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빛 아래 차분하게 드리워진 그의 시린 은발이 오늘따라 눈부셔서 함부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잔잔한 빛을 뿌리는 은발을 타고 올라가 그토록 마주 바라보길 원했던 그의 홍안에 시선을 맞추자 가슴이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울렁이고 옥죄여왔다.

그의 아름다운 홍안 속에서 일렁이는 불꽃이 침통해 보이고, 서글퍼 보이는 무언가를 말했다고 느꼈다.

아직 아무 말도 들은 바가 없건만, 그만 가여운 심장이 철퍼덕 소릴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인간의 육신을 벗고 마주한 그의 눈동자엔 짓궂긴 해도 언제나 상냥함이 일렁였고, 능글맞았어도 사랑스러운 것을 대하듯 달보드레함이 함께 묻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두 눈은 몹시도 메마르고 상처받은 자의 그것일 뿐.

언제나 소희에게 보내오던 감정은 모조리 사라진 것 같았다.

“하……시지요.”

소희는 지레 겁먹으면 안 된다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자꾸만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아 입안의 속살을 어금니로 지그시 깨물며 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어떤 무서운 소리가 나올지를 가만히 귀 기울이며 기다리는 건 생각보다 무척이나 힘들었다.

환은 침중한 표정이긴 하였지만, 어쩐지 미적거리는 기색이었다.

그것은 더더욱 소희의 신경을 갉아먹었지만 소희는 겉으로 보기엔 적어도 평안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대. 내가 하여야 할 말이 있어.”

“…….”

“그대는 모르겠지만. 내가 꼭 알려주어야 할 것이 있어.”

“상계의 휘 말씀입니까.”

전에 없이 머뭇거리는 환의 태도가 의미하는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님을 예감한 소희는 제 목소리가 떨리질 않길 바라며 환의 말에 먼저 입을 뗐다.

그것은 충동이었으되, 여직 한번 내비치지 못했던 분심이기도 하였으며 전하지 못했던 서운함이기도 했다.

‘귀문의 별로 곁에 서달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염라의 두 불에게 당당히 이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소희는 저도 모르게 새된 소리가 나가지 않게 붉은 입술을 질겅대며 숨죽였다.

“맞아.”

“…….”

“그대는 참 영민하거든.”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들었거든.

환은 붉은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일전, 사신의 문에서 보았다는 것이 그것이었지.”

“그렇습니까.”

“그래서 말이야. 그대…….”

환은 정말이지 무척이나 뜸을 들였다.

염라의 불을 다루며, 하계의 모든 것을 권속으로 삼는 지존으로서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건만.

환은 스스로가 얼마나 못난 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떨어지지 않는 마른 입을 몇 번이고 혀로 축여야만 했다.

“그대는, 상계의 휘이기도 하니, 그대에게 생각할…….”

“무슨 생각을 말씀이십니까.”

소희는 전에 없이 냉한 목소리로 환의 말을 잘랐다.

이전의 그녀라면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자신의 감정에 취해있던 환은 묘하게 달라진 소희의 태도를 눈치채지 못했다.

“거취를 선택할 생각 말이다.”

“!”

“‘상계의 휘’로서도 충분히 고민해 보길 바라. 그대의 거취는 그대의 뜻에 맡길 것이야.”

미간을 좁히며 담담하게 말을 잇는 환의 표정은 무척 말끔했다.

미간 사이에 새겨진 실금이 아니면 흡사 빚어놓았다 할 만큼 더할 나위 없이 매끄러운 얼굴이었다.

소희는 유리알같이 매끈한 사내의 얼굴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을 내치려고 하는 것인가? 내치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묻는 것인가?’

바르르 떨리는 입술 끝에 매달린 질문들이 서로 아우성이라 아무것도 꺼내들 수가 없었다.

“…….”

“모셔올 때야 짐의 마음대로였다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대는 상천의 휘.”

그녀를 휘라 부르며 환은 아마도 웃었던 것 같다.

그런 환의 미소는 소희의 마음속에 가늘게 이어진 무언가가 툭 끊어지게 했다.

“……그게……!”

다급하게 소희가 입을 뗐으나 환이 조금 더 빨랐다.

묵직하게 지친 음색으로 그는 선언하듯 읊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대에게 짐이 야차같이 굴었어.”

“!”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나 함부로 군것은 속죄하여야 함이 마땅하지. 허니, 그대의 처분을 기다릴 것이다. 그대. 상천의 휘로서도 충분히 고민해 보길 바라.”

“속죄라니…….”

얼빠진 듯 멍하게 울리는 소희의 목소리 끝에 울음이 묻었다.

“미안하다, 용서해달라…… 말하는 것이야. 그대가 결정을 할 때까지 억지로 취하지 않을 것이다.”

환은 말하다 말고 잠시 숨을 골랐다.

“……태자를 택한다면 그가 즉위할 때까지 그대는 짐이 보호하여 줄 것이고, 내게…….”

말하다 말고 잦아드는 그의 목소리가 마치 ‘휘’이기 때문에 그녀에게 안녕을 고하는 것같이 들렸다.

소희는 발밑이 꺼져 드는 것 같았다.

굳이 지난 일을 꺼내 들어 ‘벌’을 청하듯 뒤로 물러서는 환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혼약자가 있다고 목을 잡아 뜯고 싸안아 하계로 내려오던 이가 아니었던가.

귀문의 별로 서달라 하던 이가 아니었던가.

이제 와 ‘휘’를 빌미로 뒤로 물러나는 것 같은 모습은 무어란 말인가.

“마음에 담지 마세요.”

지난 일을. 이제 와서.

그저 붙잡으란 말입니다.

이곳에 매이길 원하는 날 단단히 붙들어 매달란 말입니다.

“상냥하구나, 그대는.”

“…….”

그녀의 진심 어린 말을 그저 으레 하는 소리로 듣는 환의 말에 소희는 입을 다물었다.

가늘게 떨리는 차가운 두 손을 소맷부리 안으로 감추는 그녀의 모습은 언뜻 무심하고 고요해 보였다.

환이 순간 소희가 제 말을 못 들은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차분한 손짓으로 소맷부리를 모두 정리해 톡톡 털어내고 나서야 소희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환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바라시오니 그리 하겠습니다. 하오면, 아까 소청 드린 것에 대한 답도 주세요.”

“무엇…… 아. 벗을 내달라 하였지.”

환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겠다며 대꾸하는 소희에게 불쑥 섭섭함이 치밀었지만 가만히 마음을 다독이며 그녀의 청을 떠올렸다.

벗이라.

생각에 잠긴 듯 그의 홍안이 햇살 아래 잔잔하게 빛을 머금고 영롱하게 빛을 냈다.

매끈한 턱을 쓰다듬던 곧고 단단한 손가락이 허공을 가볍게 가르자 이내 공기가 무겁게 짓눌리며 두 인영을 그려냈다.

짙은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며 그 형태가 뚜렷해지고 청량한 향기가 후각을 자극함과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소희를 반겼다.

“이러지 마시라니까요.”

그냥 오라 부르시지.

들리게 투덜거리는 풍천의 목소리까지 들고 나서야 환이 느릿하게 몸을 돌려 그들을 맞았다.

“이러지 않으면 맞이하러 가란 말이냐.”

불손한 그의 언사가 하루 이틀 일은 아닌 듯 풍천을 가볍게 나무라던 환은 접선을 들고 묘한 눈빛을 하고 있는 아수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이런. 아는 눈치로군?”

환은 눈꼬리를 책망하듯 가늘게 밀어올린 채 낮게 웃었다.

하지만 시선만은 더없이 진지했다.

“누구를 추천할 것이냐.”

환은 뒷짐을 지고 아수라에게 가볍게 턱짓을 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아수라의 시선이 재빠르게 맞은편에 서 있는 소희와 환을 훑어내리고 다시 짙고 풍성한 속눈썹 그림자 뒤로 숨었다.

상심한 표정인 소희의 시선이 향한 곳과 그 시선을 받으면서도 등을 돌리고 선 환의 모습.

마치 지금의 그들의 마음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그까짓, 도의 따위.

원하신다면 소장이 부덕함을 지고 갈 터이니.

얼굴을 가린 접선을 치워낸 아수라는 붉게 타오르는 홍안을 갈무리하며 순식간에 빙긋 웃는 모습을 완성해냈다.

“소장이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우리 사이에 겸양할 것이 무어 있겠느냐. 편하게 말하거라.”

말끝을 늘이는 아수라가 답답한 듯 환이 그를 재촉했다.

마음 붙일 곳 없다 내달라 청한 벗이니, 그가 잘만 해준다면 소희가 상천이 아니라 이곳 하계에서 제 곁에 남아 줄지도 모를 일이다.

환의 가난한 바람이 조급하게 입 밖으로 새나왔다.

“좋은 이가 있겠는가?”

“이곳 하계에는 없사옵고……. 이름 없는 강 건너에 계시는 분을 모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

아수라의 답에 환은 생각에 빠진 눈치였다.

사실, 아수라의 답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귀문의 별인 소희를 그 존귀함으로 놓고 보았을 때, 이곳에서 그녀의 ‘벗’이라고 할 만한 항렬의 자가 있을 리 없었다.

해서, 대대로 두 지존의 안곁들은 사이가 무척이나 도타웠다.

그 고아함이나 직분에 치우침 없이 독대할 만한 이가 있을 리 없는 두 비의 만남은 몹시 타당했다.

그러나 소희는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소희가 바로 그 귀문이 별이었으며 상천의 휘였기에 그녀는 철저히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니 삼계에 그녀와 마음을 트고 지낼 이가 뉘가 있으랴.

하계의 지존인 환이 그의 직무를 내려놓고 온종일 그녀의 말상대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거친 것들을 상대하는데 익숙한 염라의 두 불들이 그녀를 보좌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물며, 두 염라의 불들은 염연히 사내 몫.

귀왕의 비와 함부로 격의 없이 지낼 수 없는 처지임에랴.

지금 상황에 소희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는 삼천외에 계신 이름 없는 강 건너에 계신 분들일 것이다.

환은 가만히 몇을 떠올려보다 아수라에게 다시 물었다.

제 짐작이 맞는다면 소희의 벗이 될 수 있을법한 자는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혹시 그이인가?”

“소청조를 부리는 이를 말씀하시옵니까.”

“직인이 맞군.”

조심스러운 확인 끝에 환은 다시 접선을 펴 입매를 가리는 아수라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소희를 뒤돌아봤다.

아수라가 접선을 편 이유야 뻔했다.

제 주인의 비가 될 분과 함부로 말을 섞을 수 없는 노릇이라 제가 나설 수 없으니 말을 아끼겠다는 뜻을 알려온 것이다.

환은 제 뒤에 가만히 서 있는 소희에게 다정히 일렀다.

“짐작해 아실 테지만, 그대의 벗이라 할 자가 그리 많지 않아.”

“네. 이해하였습니다.”

소희는 찬찬히 이르는 환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 벗이라니.’

쓴웃음이 절로 물렸다.

입안이 마르고 속이 헛헛해 무어라도 좀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제가 청한 것이니 이제 와 변덕 부리듯 해서 모두를 곤란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계의 휘’임을 일깨우며 거처를 고민해보라는 환의 말이 야속했다.

느닷없는 소리에 벼락 맞은 듯 산란해진 정신으로는 그저 끄덕거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적당히 격이 맞고, 그대와 눈높이가 맞을 만한 이가 있기는 하지만.”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나지막하고 근사한 미성에도 고요하기 짝이 없는 제 가슴에 가만히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새, 죽은 듯 미동 없는 마음이 퍽 안타까웠다.

“삼천의 바깥에 계시는 분이라. 맡고 계신 직무가 있어 바쁘신 터라 확언은 하지 못해. 정성으로 청하면 외면치는 않으실 것이라 믿는 수밖에.”

“네.”

“수일 내로 운명을 잣는 이, ‘직인’께 납셔 주십사, 청해 볼 것이니. 기다려 주겠어?”

“그러겠습니다.”

어린 것을 가르치듯 조곤조곤 이르는 그의 말이 귀에 머무를 리 없었다.

먹먹해진 가슴을 추스르기도 바빠 소희는 자신이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도 몰랐다.

“이만 돌아가 볼까 하는데…….”

오래지 않아 이야기를 마친 그가 돌아가 보겠다며 인사를 건네 왔다.

그제야 소희는 정신이 들어 화들짝 놀라 환을 올려다보았다.

환이 해를 등지고 선 까닭에 눈이 부셔 그의 표정은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소희는 문득 그가 무척 상심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연하게 가라앉은 눈꼬리며 빛이 사그라든 아름다운 눈동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모습을 감추었지만, 순간 그가 분명 슬퍼하고 있다 느꼈다.

“그전에 받아주실 테야?”

그래서 사라진 그의 표정을 덧그리며 떠올리려 애쓰느라 환이 작게 읊조린 말을 놓치고 말았다.

“……안 되겠어?”

“아……!”

“그대에게 주려고.”

“이것은…….”

소희의 손바닥 위에 환이 올려준 것은 붉은 구슬로 만든 머리꽂이였다.

종전에 아수라가 주었던 것과 같은 붉은 구슬.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살아있는 듯 쉴 새 없이 소용돌이치며 눈길을 잡아끄는 바로 그것이었다.

“이…… 이것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소희가 감탄한 듯 중얼거리며 머리꽂이의 구슬에서 시선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자 환은 멋쩍은 듯 입꼬릴 비틀어 올렸다.

“이런, 그대가 이것을 본적이 있다는 것을 깜빡하였어.”

“……이것도 그럼!”

소희는 환의 이야기에 깜짝 놀라며 손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가 본 그것은 아수라의 생을 담고 있던 생명의 환.

그럼 이것은 환의-

크게 동요하는 표정인 소희를 보고 환이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 삼생을 가지는 것은 삼계를 털어 아수라가 유일하지. 이것은 음, 그저 내 영력을 담은 것이니 일전의 아수라의 것과는 완전히 같다고 할 순 없어.”

설마 환이 제 목숨을 나누어 준 것인가 해서 화들짝 놀라던 소희는 환의 영력을 담은 것이라는 말에 놀라 퍼덕이던 가슴을 진정했다.

거취를 결정하라고 등을 떠민 게 아니었나.

목숨값은 아니지만, 기운을 나눠 담아줄 만큼. 마음이 남아있다 생각해도 되는 걸까.

‘오해하게 하시면 저 좋을 대로 오해할 것입니다.’

말과는 달리 애틋한 행동을 하는 환을 보며 소희는 수많은 말을 그저 삼켰다.

얕은 숨만을 몰아쉬며 손에 들린 머리꽂이만을 내려보았다.

그새 또 기대하고 마는 제 마음에 어떤 소리가 날아들지 몰라 함부로 입을 뗄 수 없었다.

무서워서.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곱습니다.”

소희는 이것이 환의 마음이면 하는 바람을 담아 손에 들려진 머리꽂이를 제 머리에 찔러 넣었다.

머리꽂이에 매달린 붉은 구슬이 짤랑이는 맑은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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