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이름 없는 강 건너 (4)
2017.10.30.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오뚝한 콧날을 따라 흘러내린 눈물을 가려주었지만, 이내 환하게 스미는 달빛에 들키고 말았다.
“…….”
서늘한 손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훔쳐내고 소맷부리로 고운 눈매를 꾹 눌러주었으나 그때뿐이었다.
눈물의 주인은 쉽게 그칠 생각이 없는 듯 닦아내기가 무섭게 다시 눈물이 방울방울 흘려보냈다.
“…….”
소매를 떨어뜨리기 무섭게 다시 맑게 차오르는 눈물이 달빛에 영롱하게 빛을 발했다.
눈꼬리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환의 손가락이 뒤쫓듯 따랐다.
스윽 훑어 내리는 손끝에 잡혀 든 눈물방울을 홍염이 일렁이는 눈동자가 가만히 응시했다.
‘슬퍼하는 건가……?’
‘그대, 불행한가……?’
환의 표정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따라 한없이 처연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소희는 지쳐 잠든 모습을 해서는 소리도 없이 끊임없이 계속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날 밤 이후로 계속 이러고 있는 것인가.
‘그대 내 곁에서 우는 것인가……?’
불쑥 원망처럼 치미는 생각에 잠잠했던 가슴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묻어두었던 마음은 꺼내 들기 무섭게 더욱더 그 기세를 세워 올리며 저를 놓아 달라 아우성이었다.
나락의 절벽에 버려두고 왔다 생각했건만, 소희의 얼굴을 보자 욕심이 치밀어 오르고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두근거렸다.
자면서도 우는 그녀가 불행해 보여서, 그를 탓하는 것 같아서.
서운하고.
그만큼의 몫으로 더 애틋해지는 것이다.
날이 밝으면 이야기를 할 것이라,
야물게 다짐하고 돌아온 걸음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곁에 머물러 줄 리가 없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때에도 태자와 혼약을 했던 그녀 아니었던가.
어두운 산길, 그저 염려되어 호의로 내밀어진 점잖은 손을 무례하다 매섭게 일갈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혼약자가 있다며 그에게 당당히 맞서던 결기 곧은 눈빛이 화살처럼 날아들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곁에 머물러 줄 리가 절대.
절대, 없었다.
가망 없었다.
그래서 딱한 제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못이기는 척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저 찾아 나선 길인데.
이렇게 울고 있을 줄이야.
닿지 못한 마음이 쓴웃음과 함께 뭉그러졌다.
거둬지지 않은 손을 들어 억지로 떼어내 돌아서 나오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환은 침전의 문을 열고 나오려다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 가만히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달빛을 받고 곤히 주무시는 님을 다시 한번 눈에 새겼다.
평화롭고 잔잔한 표정의 그녀를 보는 건 지금이 마지막일 것이리라는 생각에 무심코 돌아본 것이었다.
“!”
그러나 뜻밖의 광경에 환의 눈은 저도 모르게 커지고 말았다.
소희를 뒤덮은 유백색의 창백한 달빛은 그대로였지만, 그녀의 몸에 닿은 빛은 마치 봄날의 아지랑이같이 일렁이며 사그라들었다.
빨려 들어가듯, 보드랍게 하늘거리며.
소희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저건……!”
문을 잡고 있던 환의 손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가 하얗게 뼈가 도드라져 올라왔고, 그의 홍안은 황금빛으로 일렁이며 동요하고 있음을 숨기지 못하고 고스란히 드러냈다.
“설마…….”
환의 입에서 탄식도 기쁨도 아닌 애매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신이 명을 소진하고 마고께 다시 올라가는 길이라 눈이 침침한 것이 아니라면, 그가 본 것은 소희가 달빛을 흡수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사나운 달빛을 받아들여 부드러이 감싸 안아주는 귀문의 별로 각성한 것이 틀림없었다.
‘고작, 사신의 관문을 하나 지났을 뿐인데 갓 태어난 요괴 같던 그녀가, 달빛을 다루기 시작하다니.’
소희의 목덜미에는 아직도 속박의 인의 영취가 이토록 뚜렷한데.
환은 길을 잃은 아이처럼 이마를 쓸며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서.’
‘왜 이제서야.’
‘어째서 이렇게 손 놓기 어렵게 이러느냐.’
원망이 새어 나오려는 입술에 힘을 줘 어금니를 꾹 깨물고는 환은 아지랑이처럼 아롱이며 소희에게 미약하게 스며드는 달빛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이제야 겨우 손을 놓으려 마음을 먹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욕심나게 들쑤시는 거냐.
고약한 운명을 붙잡아 다그치고 싶었다.
‘놓고 싶지 않다.’
놓고 싶을 리 없었다.
이십 년을 기다리고 기다려 제 곁에 세운 그녀였다.
고약한 운명을 탓하며 보내주리라 마음먹었건만.
환의 심장이 두방망이질치며 숨 가쁘게 내달렸다.
전신을 재빠르게 휘감아 치며 온몸에 가여운 제 소릴 들으라 외쳤다.
콰득-.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무언가가 볼썽사납게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환의 손이 쥐고 있던 문짝이 기어코 잘게 바스러져 나가버렸다.
하지만 그 소린 환의 귀에까지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졌다.
놓기 싫다.
저이는 짐의 반려이기도 하느니.
왕의 속마음이 가림 없는 욕심을 드러냈다.
어째서 나만 놓아야 하는 것이냐.
귀문의 별인 그녀를 어째서 놓아야 하는 것이냐.
이대로 덮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더냐.
실상, 자격 있는 것은 오직 나, 이곳 하계의 지존뿐이지 않더냐.
환의 홍안에 진한 금빛 물결이 일렁이며 한참을 달빛을 받고 서서 소희가 잠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으윽-.”
소희는 몸을 동그랗게 말아 어린 것처럼 웅크린 채 계속해서 흐느끼고 있었다.
굳이 그녀의 꿈을 헤집지 않아도 뻔히 보였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꺼풀이 그의 시야를 천천히 지워냈다.
황금빛으로 물든 그의 눈동자가 소희를 따라 허공을 더듬었다.
눈에 보일 리 없는 것이, 그가 영력을 개방하자 선명히 드러났다.
소희의 동그란 이마에서 시작된 하얀 가지 같은 것들은 그가 바라보고 있는 순간에도 착실히 그 세를 늘리고 있었다.
콰드득-
들리지 않을 심란한 소음과 함께 또다시 희고 날카로운 송곳 같은 것이 한자쯤 더 뻗어 나왔다.
솟아난 그 끝이 달빛에 더욱더 사나워 보였다.
“악몽을 꾸는 건가.”
환이 안쓰러운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소희의 이마에 돋아난 것은 그녀의 꿈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지독한 꿈을 꾸길래.’
사나운 꿈자리가 가시처럼 돋아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잘게 흩날리는 운무 사이로 소희의 흐느낌이 진하게 스며들었다.
“쯧-.”
이런 순간마저 방해하는 고약한 꿈에 환은 혀를 차며 손을 들었다.
긴 도포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며 가볍게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삽시간에 흐느낌은 잦아들고 땀이 배여 찌푸려진 미간이 이내 평온하게 풀렸다.
진작 이렇게 하여줄 것을.
고운 분의 눈에서 이리 내도록 눈물을 받아 내다니.
저렇게 울고 계시는데, 한번 찬찬히 봐 드릴 것을.
환은 너무 늦게 악몽을 알아차린 자신에게 혀를 차며 가볍게 손을 튕겼다.
그의 손끝을 타고 흐르는 은은한 빛무리가 소희의 이마에 닿자마자 눈 녹듯이 녹아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적어도 이 밤서는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으실 테지. 심연의 바닥에 닿도록 깊게 잠들 것이니. 달게 주무시길.’
환은 자신의 영력을 슬쩍 묻혀주며 소희에게 다정한 밤 인사를 남겼다.
사실, 그는 소희에 한해서 힘을 쓰는 것을 가급적 자제하려 다짐했었다.
이미 자신의 넘치는 힘으로 그녀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지은 처지였다.
지금은 인세에 명이 묶인 그녀에게 자신의 힘이 얼마나 위협적이고 효과적인 지배를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만 서럽게 우는 소희를 두고 발이 채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것을 핑계로 잠시간만이라도 더 그녀를 보고 싶었다.
내가 악몽을 쫓아주었지.
시답지 않은 것이 붙어 있기에 치워주었어.
훌륭히 변명할 거리마저 생겼으니 가난한 자의 마음이 그를 부추겼음이다.
환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실소했다.
‘정말 구질구질하구나. 사내 몫이 할 짓이 아니건만.’
고작 이런 잔재주로 기회를 틈타 환심이나 사려 한 자신이 얼마나 치졸한지.
매섭게 정신을 다잡지 않으면 자신은 소희를 영영 놓지 못할 것이다.
“이것 참, 고약한 것이구나. 아니 그러하냐?”
환은 소리 없이 문을 닫아 주며 침전을 나서며 허공을 향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러자 후원으로 향하는 그의 뒤에서 어둠이 일그러져 내리더니 곧 검은 신형을 토해냈다.
커다란 덩치가 소리도 없이 맵시 나게 바닥에 발을 딛으며 자연스럽게 환의 뒤를 따랐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짙게 깔린 운무보다 더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로 풍천이 환의 말에 대답을 올렸다.
환의 은빛 머리카락이 그의 걸음을 따라 가볍게 살랑였다.
달빛을 받아 빛을 뿜어내는 듯한 고운 머리채를 나풀나풀 흩날리며 환은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가 다시 입을 뗀 것은 내궁 후원을 거의 빠져나와서였다.
“너도 보아서 알겠구나. 풍천.”
“사신의 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악귀같이 군것도 아느냐?”
“……자책하지 마시옵소서. 제왕무치(帝王無恥)라 하였습니다.”
풍천의 단호한 대답에 환은 걸음을 멈추고 드물게 풍천을 돌아보기까지 했다.
“!”
“애쓰지 말거라.”
곧 사그라들 달빛 같은 목소리였다.
움찔, 생각지 못한 흐린 목소리에 풍천이 놀라버렸다.
그래서였다.
왕이 몸을 돌려세우는 것을 알고서도 미처 조아릴 새도 없이 환과 시선을 마주해버린 것은.
놀란 몸이 그의 의지를 제때 따르지 못해서였다.
“아…….”
풍천은 침음성을 삼켜야만 했다.
아름다운 주인의 보석안에 일렁이던 불꽃이 얼마나 참혹하게 꺼져들었는지, 하계의 주인이자 염라의 첫 번째 불인 그가 얼마나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를.
그 모습을 감히 두 눈에 담아버렸던 것이다.
환은 얼어버린 듯 굳은 풍천을 보며 낮게 웃었다.
“오늘 밤만이니라. 못 본 척 하려무나.”
환은 다시 이렇다 할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조용했다.
“달이 기우려면 얼마 남지 않았느니.”
왕의 자조적인 혼잣말을 끝으로 뒤에 남겨진 풍천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달이 기울어 사위가 희붐하게 물들도록 밤새.
풍천은 염휘를 도울 수 없는 무능력한 자신을 탓하고 탓했다.
염휘가 누구이시던가.
저 지고하신 분께 뉘라서 그런 표정을 짓게 한단 말인가.
마고께선 어째서 이런 가혹한 운명을 염휘께 내리셨는가.
풍천은 아수라가 쥘부채로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며 깨워주기 전까지 정신을 놓고 서서 제 주인의 운명에 애통해했다.
주인의 아픔을 대신할 수 없음을 통탄하는 그의 마음을 알아줄 이는,
곁에 선 또 다른 염라의 불, 아수라뿐일 것이다.
풍천은 제 옆에 선 흑발의 선량한 인상의 ‘낮의 아수라’에게 무거운 입을 뗐다.
“간밤, 그대가 있어드렸더라면 좀 낫지 않았겠는가?”
“그럴 리가.”
아수라는 질색하는 표정이었다.
“…….”
“그녀가 도움이 되었겠는가?”
“……그도 그렇군.”
풍천은 대번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헤집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답답해서 한 소리이네.”
“두 분이 버텨내셔야 할 일이지.”
“그래도 무슨 방도가…….”
“대신하여 줄 수 없어 아픈, 풍천 자네의 충정도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마고대할망께서 아무 뜻 없이 이런 시련을 주시진 않으셨을 거라 믿어보게.”
“대체 뭘 드시길래 말이 청산유수인가?”
풍천이 유창한 아수라의 언변에 살짝 질린 표정을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저 작자는 어째서 단 한 번도 말문이 막히는 법 없이 졸졸졸 시냇물 마냥 떠들 수 있는 것인가.
풍천은 정말로 궁금했다.
이런 순간에도 마치 준비한 듯 내놓는 매끄러운 답에 살짝 배알이 뒤틀렸다.
저는 지난 밤 내내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애통해했건만.
주인을 위하는 마음이야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건만.
어째서 번번이 저 현란한 혓바닥에 지고 마는지,
심통이 더럭 났었다.
“글쎄, 누군가가 다 죽어가는 표정을 짓고…….”
“내가 언제……!”
“주인 잃은 검둥이마냥…….”
“어허!!!”
검둥이라니!
풍천은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에 진한 눈썹을 사납게 구겼다.
이어지는 아수라의 말이 농지거리임을 알면서도 풍천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수라의 입을 막으려고 애썼다.
큰 손을 들어 입을 가로막으려는 자와 접선으로 가볍게 그 손을 내려치는 자 사이에서 가벼운 몸싸움이 일었다.
사위는 환하게 밝혀진 지 오래였고, 어느새 잠에서 깬 새들이 서늘한 아침 기운에 날개를 푸덕거리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탁-.
접선이 풍천의 커다란 손을 가볍게 쳐내며 아수라가 뒤로 풀쩍 물러나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염휘를 맡으시게.”
다과를 권하듯 고저 없는 목소리로 아수라가 빙긋 웃으며 풍천에게 가볍게 말을 남겼다.
“무슨…….”
풍천이 뜬금없는 말을 못 알아듣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아수라는 눈을 둥그렇게 뜬 풍천이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되는 양 그의 이마를 철썩 내리쳤다.
사정을 두지 않은 손속에 몹시 매서운 소리가 울렸다.
“이 아둔한 자. 이런 순간까지 세세하게 일러 가르쳐야 한다니.”
“아니 이 무슨!”
풍천이 새빨개진 이마를 감싸 쥐고 이를 갈듯 아수라를 향해 으르렁거렸지만, 아수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끼며 부채를 가볍게 휘둘렀다.
“도대체 이 염라의 불은 무슨 기준으로 그 좌을 차지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 아둔함인가? 우직함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첫 번째 불에서부터 내려오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고지식함인가?”
“아니, 이 무도한 자가 감히 왕까지 들먹이며 이 아침서부터 시비를 거는 겐가?”
알쏭달쏭한 말을 하며 심사를 건드리는 아수라에게 드디어 풍천이 목소릴 높였다.
작은 바람 소리가 일며, 아수라의 손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빨리 움직인 건 그 순간이었다.
“큽.”
아수라가 새카만 눈을 매섭게 굳히며 풍천의 목덜미를 거머쥔 채 제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깊이의 끝을 알 수 없는 새카만 묵빛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투명한 은회색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매혹적인 붉은 입술로 으르렁거리는 목소릴 냈다.
“내가, 조금만 더 그 세를 달리하였다면 굳이 풍천, 너를 붙이지 않았다.”
“무슨 뜻이냐.”
“힘이 모자라 아쉬울 따름이다. 밤의 아수라 정도만 되었던들.”
“무슨…….”
“화를 내고 눈물을 짓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뜻이지. 너만이 왕의 운명을 애통해한다 생각지 말란 말이다.”
“……아수라.”
언제나 빙글거리던 낮의 아수라가 정색을 하고 차갑게 읊조리는 건 낯설었지만, 우습게도 아수라가 화를 내자 풍천의 어지럽던 마음이 다독여졌다.
그것은 안도감이었다.
염휘의 곁에 선 자가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든든함이었다.
아수라는 풍천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달싹였다.
“전력을 다해 염휘를 귀문의 별에게서 떼어놔라. 필요하다면 힘이라도 개방하라 이 말이다. 이대로 순순히 별을 상천에 ‘휘’로 진상할 생각은 아니겠지.”
“방법이 있는 게야?”
“없다 해도 만들어 내야 하겠지. 아아-, 고지식한 염라의 불이란.”
아수라는 붉은 입술을 길게 늘이며 나른하게 웃었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아수라는 풍천의 멱살을 거머쥔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손을 그의 귓가에 가져다 대며 비밀을 나누듯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뒤로 그들의 대화란 것은 이따금씩 풍천이 짧게 대답을 하면 다시 아수라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식이었다.
“과연, 효과가 있겠는가?”
“있든 없는 해봐야 하겠지. 귀문의 별을 이런 식으로 넘기는 건 자존심이 상하여서.”
“저런, 그런 게 있으셨단 말인가?”
자존심이라니.
풍천이 킬킬거리며 도발하듯 아수라를 향해 농을 건넸지만, 아수라는 가느다란 눈매를 실쭉하게 뜨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풍천은 아수라가 말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만 보았음에도 괜스레 뒷목에 진득하게 땀이 빼어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 어째서 그런 눈으로! 이건 농…….”
“적월의 빛내림은 내가 다 마셔야겠군.”
촤악-.
아수라의 쥘부채가 경쾌한 소릴 내며 그의 손안에서 접히자 풍천이 울상이 된 얼굴로 아수라를 뒤따랐다.
“이 속 좁은 자! 농담이란 말이다.”
풍천의 투정과도 같은 사과는 아침 햇살이 진한 황금빛으로 물들 때까지 후원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 하계에 칼같이 솟은 자네의 자존심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다고! 이보게!”
“아수라!”
“잠깐 기다려 보란 말일세! 미안하대두!”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