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이름 없는 강 건너 (2)
2017.10.23.
휘오오오오오오-.
광포한 바람이 대기를 찢어발기듯이 휘몰아치며 사납게 울었다.
바람이 한 번씩 불어닥칠 때마다 절벽 위의 나무는 금세라도 부러질 듯 휘청이며 나뭇잎을 떨어댔다.
가느다란 은사가 어지럽게 흩날리며 바람을 타고 분분히 날리며 시선을 가로막았지만, 불꽃이 일렁이는 보석안은 흔들림 없이 해가 잠겨 드는 강 너머에 고정되어있었다.
환은 이름 없는 강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칼날같이 날카롭게 솟은 절벽을 타고 오른 바람이 거칠게 그의 옷자락을 뒤흔들어도 환의 시선은 붉게 잠겨 드는 태양을 향한 있었다.
나락의 절벽.
생의 끝을 맞이한 자들의 세상에서도 제일 끝의 벼랑이라, 하계에선 절망의 절벽, 나락의 절벽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일 년 내내 삭풍이 입김을 얼리고 마음을 할퀴는 곳.
갈 곳 잃은 요괴들이 마지막에 찾아와 잠드는 곳.
하계의 그 어떤 곳보다 삭막하고 외로운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환은 태양의 마지막 핏빛 빛무리가 어둠에 물드는 순간까지 미동 없이 절벽 위에 서서 지켜보았다.
오래인 듯했지만, 사실 그리 길지 않았다.
그 억겁 같던 시간은 겨우,
이틀인가, 사흘이던가.
환은 전신을 도탑게 감싸드는 냉기를 털어내며 몸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야 달포쯤 머릴 식히면 좋겠지만, 소희를 홀로 두고 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아니지.
마음에 걸린 게 아니지.
환의 가슴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속닥였다.
한순간도 마음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었잖아?
그녀를 만난 후로 단 한 번도 머릿속에서 떠난 적이 없는데.
“크흣.”
적나라한 지적에 절로 고소가 머금어졌다.
아아…… 그래.
단 한 순간도 마음 곁에서 떨어뜨려 놓은 적 없는 분이시지.
환은 차갑게 얼어 굳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눈이 감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떠오른 건 역시나 소희의 모습이었다.
‘그대.’
그날 밤, 침전에 보내드리고 닫히는 문 사이로 보이는 소희의 까만 두 눈에 스민 것은 상처였다.
자신의 차가운 태도에 상처받았음을 알면서도 환은 무심한 표정으로 손에 힘을 줘 문을 꾹 눌러 닫아 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천둥처럼 귓가를 울렸다.
환은 차마 소희를 곁에 둘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한 무도한 짓을 떠올리며 소희의 곁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 난 도망쳤지. 비겁하게 도망을 쳤음이야.’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꺼풀아래 눈동자는 빛이 꺼져있었다.
‘그대에게서부터, 나로부터. 도망쳤다.’
환은 푸르스름한 달빛에 자신의 하얀 손을 들어 비춰보았다.
소희와는 달리 크고 힘이 느껴지는 손이었다.
한 손에 들어오던 그녀의 가느다란 목이 떠올랐다.
손에 감겨들던 보드랍고 따스한 살결도,
손가락 사이를 타고 내리던 뜨겁던 피도,
공포와 절망에 범벅이 된 채 생기를 잃고 텅 비어가던 그녀의 두 눈도.
귀여운 이를 데리고 사신의 문을 보러 간 것이 잘못이었을까.
문틀에 선명하게 새겨진 귀문의 별의 징표를 보았을 때 가슴을 뿌듯하게 메우던 기쁨도 잠시.
사신의 문에 조각된 휘의 찬란한 문양을 보자마자 손을 불로 지져내는 것 같은 통증이 스몄다.
달빛에 빛을 뿌리는 문양에 환은 가슴에 비수를 꽂은 양 몰려오는 고통에 숨을 멈춰야 했다.
‘저것은.’
그것을 본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어 환은 수천 번을 다시 보았다.
문틀을 짓이겨버릴 듯이 안력을 돋워 보고 또 보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눈에 아프도록 박혀 들어 온 것은 바로 ‘상천의 휘’,
태양을 머금은 상제의 비라는 확실한 문양이었다.
‘난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전신을 타고 무섬증이 돋았다.
그것의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후회든.
자책이든.
그 무엇이든 괜찮았다.
시간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이 손으로.
소희의 목을 꺾어내던 그 순간으로만 되돌릴 수 있다면.
벌벌 떨리는 가슴이 제 것이 아닌 듯 낯설었다.
일찍이 생을 부여받은 이래, 이렇듯 참람한 심정을 겪어 봤을 리가 없었다.
후회라니.
자책이라니.
후회했다.
자책했다.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을 내는 자신의 손을 보는 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것을 삼키듯 찌푸려진 미간은 한참이나 펴질 줄 모르고 잘게 떨리는 날숨이 한없이 애처로웠다.
환은 무척이나 후회하고 있었다.
하계의 지존으로 태어나 만물을 발아래 두는 그에게 이것은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의 말은 법이었으며, 절대적인 것이었다. 지존은 본디 무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니 그날 밤 이후로 환은 무섭도록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의 단죄는 합당하다 했었지만, 이젠 더 이상 아니었다.
환은 푸르게 빛을 머금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아니, 그날의 자신의 눈을 가리고 싶었다.
아니, 실은 정말은 산속에서의 그날 자신의 손을 잡아채고 싶었다.
그래. 환은 절절히 후회하고 있었다.
가슴이 갈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산 채로 불구덩이에서 굴러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으아아아-!”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속 아픈 후회가 나락의 절벽을 타고 올라온 바람에 부딪혀 산산 조각나버렸다.
사위를 감싸 안은 바람의 무서운 포효만이 자리를 지켰다.
후오오오오오옹-
다시 한 번 절벽을 타고 올라온 바람이 무서운 소리를 내질렀다.
달빛에 반짝이는 가느다란 은사가 갈 곳을 잃고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가볍고 사뿐한 발걸음이 바쁘게 산길을 두드렸다.
치마 아래로 하얀 버선에 감싸인 작은 발이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쪽빛 물들인 치맛자락이 수풀에 씻겨 푸릇한 풀물이 올라 이미 엉망이 되었지만, 여자는 잠시 숨을 돌릴 새도 없이 개울을 따라 달빛을 따라 무턱대고 걸음만 재촉하는 모양이었다.
겁을 먹고 커다랗게 열린 까만 동공.
작은 소리에도 흠칫거리는 동그란 어깨.
그리고 가냘픈 팔로 끌어안은 보라색 꽃다발은 이미 오랜 시간 시달려서인지 축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잔뜩 지쳐있을 그녀인 듯 느껴져 안타까웠다.
주르륵-.
물이끼가 잔뜩 낀 바위 위로 작은 발이 내밀어지나 싶더니 말릴 새도 없이 여자가 그만 미끄러지며 휘청였다.
자신도 모르게 내뻗은 손이 허공을 가르며 아쉬움을 삼켰다.
여자가 미끄러지며 놓친 보라색 꽃 더미가 마치 눈 내리듯 송이송이 흩어져내려 개울 물살에 휩쓸리는 건 순간이었다.
까만 물에 잠겨 드는 보라색 꽃망울들이 참 어여뻤다.
“아이, 이걸 어떻게 해.”
달빛 아래 허탈한 표정을 짓는 지친 기색의 여자만큼은 아니었지만, 물길을 따라 흘러가는 꽃 역시 고왔다.
동그란 이마에 매달린 땀.
살짝 벌어진 작은 입술 사이로 가쁘게 터져 나오는 숨소리.
말하지 않아도 여자가 얼마나 고단한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바위에서 미끄러진 발이 어떤지.
작은 발에 상처라도 난 것은 아닌지.
지금이라도 나서서 잡아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응차-.’
잠시 망연히 흘러가 버리는 꽃을 내려다보던 여자가 소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이 밤에 혼자 산을 다니면 위험합니다. 조심하셔야지요.”
그리고 길을 나서는 작은 발길을 막아섰다.
환은 달빛 아래로 나서며 그 여자, 소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
그를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품새가 달갑진 않았지만,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이 밤, 깊은 산속에서 남자를 마주쳤을 때 놀라지 않으면 그것이 더 이상했다.
환은 제 앞에 선 소희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하얀 얼굴에 달빛을 가득 품은 소희는 어릴 적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커다랗고 순진한 까만 눈동자도 빛을 머금은 그대로였고, 오똑하게 자릴 잡은 콧날도, 작지만 도톰한 입술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며 흘러간 시간을 더듬어 추억하는 것은 환뿐이었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소희의 눈에 담긴 것은 ‘경계심’이었다.
소희는 척 보기에도 무척이나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크게 벌어진 까만 동공을 스치고 지나가는 두려움에 환은 작게 혀를 찼다.
잔뜩 지쳐있는 그녀에게 신경 쓰느라 인간은 망각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저를 보면, 기억을 떠올려주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어린 날 자신이 품에 안아 체취를 나누고 제 어미에게서 묻은 ‘죽음’의 기운을 털어내 주었던 기억은 그에게만 남아있는 것이었다.
너럭바위에 앉아 물장구를 치던 그녀와 나누었던 인연은 남아있질 않았다.
소희에게는 그날의 인연이 흘러가 버렸다.
제게 까만 눈을 맞대어 어여쁘게 웃어주던 ‘귀문의 별’의 기억은 아쉽게도 모조리 사라지고 없었다.
욱씬-.
하지만, 뻔히 알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환은 가슴 어딘가가 못 견디게 쑤석거렸다.
예리한 것으로 들쑤신 듯 상처를 내 헤집듯, 아리고 서운해졌다.
서운해……?
환은 예상치 못한 감정에 설핏 얼굴을 굳혔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표정에 소희의 어깨가 흠칫거리며 옴쳐들었다.
따스한 빛을 머금은 까만 눈동자가 잔뜩 얼어 자신에게 변명이라도 하듯 작게 소곤대는 목소리에 환은 표정을 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길을 잃어 이 지경이랍니다. 염려 감사합니다.”
멀찌감치 자신을 밀어내는 소희의 작은 목소리에 환은 쓴 입맛을 다시면서 그녀를 따랐다.
인간의 몸에 갇혀 자신과의 인연을 잊은 채 망각해버린 귀문의 별을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소희는 무척이나 더디게 산을 내려갔다.
눈에 뻔히 보이는 돌을 헛딛기도 했고, 낙엽 그림자에 발이 빠지기도 했다.
휘청이는 모습이 계속 환의 시선을 앗아갔다.
경계하는 그녀의 모습에 얌전히 함께 걸어주기만 하려했건만.
“아앗!”
또다시 말릴 새도 없이 바위에서 이끼를 밟고 주르륵 미끄러진 그녀를 잡아 일으키는 환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제 몸 추스르기도 벅차 그런 환의 표정은 모르고서 그저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할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도대체 자신이 이날서 오지 않았다면 이 험한 곳에서 어떻게 내려갈 심산이었는지 기가 막혔다.
그의 눈이 닿지 않았던 지난 십수 년간 그녀는 이렇게 살아온 것인가?
욱씬-
말릴 새도 없이 그저 가정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왔다.
귀문의 별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을 줄이야.
그 잠깐 사이에도 소희는 몇 번이고 몸이 휘청였다.
환은 불퉁한 심사를 감추지 않고 소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더 이상 그냥 두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저러다 물이끼를 밟고 넘어져 물에 휩쓸리기 딱이었다.
“발설치 않을 것이니 의지하시고…….”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소희의 야무진 말이 그의 호의를 탓하며 멀찌감치 물러났다.
“아닙니다. 남녀가 유별하니 내외함이 옳습니다. 머리 올리지 못했으나 혼약자가 있는 처지입니다. 놓아주시지요.”
야물게도 그를 내치는 소희의 말에 환은 심화가 들끓었다.
분명 소희 말 속 '혼약을 약조한 분'은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녀가 '혼약'을 자신 앞에서 들먹일 리가 없었다.
그녀의 아비와 약조한 대로였더라면, 사위가 환해진 지금 그녀는 자신을 알아봤어야 마땅했다.
달그림자에 가려져 어둠에 묻힌 자신을 못 알아 봤었더래도.
사위가 대낮같이 밝아진 지금은 그녀가 자신을 알아봤어야 했다.
‘혼약을 약조한 이’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말이다.
홍안을 가진 인간이 중천에 있을 리 없었다.
은발을 가진 인간이 있을 리는 더더욱 만무하다.
그를 본 그녀의 아비가 신부를 맞이하러 올 ‘귀왕’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단 한 번이라도 언질을 주었다면 그녀가 저를 보고 못 알아 볼 리가 없었다.
환은 헛웃음이 났다.
갈무리하지 못하고 새어나온 그의 기세가 주변을 에워싸 음험한 공기가 숲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무얼 해?”
넘치는 힘이 그의 홍안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희의 눈에 비치는 제 모습이 똑똑하게 보였다.
제 본신을 보고 공포에 질리는 그녀의 모습이 더더욱 그의 화를 부채질했다.
귀문의 별이, 자신의 비가 되어 달 아이를 낳고 함께 하계에 살아 주실 분이.
지금 다른 사내를 보려한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부정을 목도한 환은 심장이 깨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맛보았다.
귀문의 별을 맞아들이는 것은 귀왕의 임무.
하지만, 그보다 먼저 별은 그의 마음속에 둥지를 틀었다.
그것이 인연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한눈에 반한건지 알 도리 없지만,
이십 년 전 강보에 싸인 핏덩이 일 때부터 그녀는 환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길에서 이십 년 만에 마주한 소희는 환의 마음을 여인의 몫으로 단번에 빼앗아버렸다.
인세에 두고 온 어린 비를 맞이하러 오랜만에 발걸음 한 그의 마음을 보란 듯이 첫눈에 사로잡고 말았다.
별같이 고운 자태에,
결기 곧은 모습에.
귀왕의 의무를 밀어낸, 사내의 마음이 단박에 그녀를 품었다.
어릴 적부터 이어진 인연의 몫이 더해지자, 귀문의 별은 환에게 더 이상 운명이 ‘정해준’ 짝이 아니었다.
그가 바라게 된 여자였다.
그녀는 별이었으나,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그가 은애하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녀를 의무로 맞이해야만 한다던 운명이 그렇게 기꺼울 수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축복이었다.
그런데.
“무얼 했다 했지?”
“놓으시오. 이 무례한 작자 같으니라고! 놓으란 말이오!”
“무례하다?”
재차 확인을 하여도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날 선 대답뿐이었다.
쏴아아아아-.
바람이 숲을 휩쓸고 지나갔다.
짙은 구름이 바람에 밀려나고,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다시 환하게 사위를 밝혀왔다.
탁 트인 시야에 또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소희의 얼굴은 무척이나 화가 난 듯 입술을 앙다문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차게 식어내리는 가슴에 자리 잡은 것은 저 작고 어여쁜 여자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얻은 사내를 향하는 무서운 질투였다.
다쳐버린 왕의 자존심이 피를 흘리며 복수를 원했다.
온몸을 내달리는 주체 못할 힘을 애써 누르며 소희에게 다시 고쳐 물었다.
부드러운 말로 달래듯 다가가 자신을 경계하고 물리는 소희에게 매료안(魅了眼)을 걸었다.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자신을 보고 매정하게 굳었던 눈매가 보드라이 내려앉고, 목소리가 나긋하게 깔리는 소희의 모습에 환은 자괴감이 들었다.
“혼약을 하였다고?”
나를 두고.
삼킨 그의 말이 아프게 염휘의 가슴을 후벼팠지만, 몽롱하게 눈이 풀린 소희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생긋 웃었다.
“달포 뒤면 표가 둘째 공자와 혼사를 치를 것입니다.”
나를 두고.
미소한 채로 나긋하게 대답하는 소희의 모습에 누군가 가슴에 칼을 들이민 듯 심장이 아릿하고 숨이 답답해져 환은 절로 인상이 구겨졌지만 가까스로 표정을 지우는데 성공했다.
“네 지아비를 두고 어디 가서 다른 사내를 보려 했더냐?”
하지만, 참담한 심정은 절로 입을 타고 흘러나와버렸다.
숨기지 못한 진심이 원망을 담아 밤공기 사이로 흩어졌다.
환은 눈앞에서 말간 표정으로 웃고 있는 이 어여쁜 이가 무척이나 잔인하다 생각했다.
밤바람에 흩날리는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눈이 풀어진 채 몽롱한 표정을 짓는 소희를 차마 볼 수 없어 환은 눈을 내리깔았다.
‘너는 내게 참으로 잔인하구나.’
전하지 못한 마음이 울고 있었다.
영혼의 맹약을 지킨 것이 자신뿐이라는 것에 놀랄 틈도 없이.
울컥. 치미는 서러움 같은 씁쓸한 감정에 눈을 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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