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름 없는 강 건너 (1)
2017.10.20.
풍천이 비운 자리를 채운 건 아수라였다.
아수라는 기운 없이 늘어지는 소희를 굳이 내궁 밖으로 청했다.
“하계에 오신 뒤로 내궁에서만 계셨다지요?”
“네? 네.”
“오늘 아수라가 청할 터이니 함께 염라궁을 천천히 둘러보시지요.”
정해진 답을 묻는 질문이 의아했지만, 이어지는 말에 아수라의 의도가 담뿍 묻어 있어 그제야 아차. 하고 말았다.
“어서.”
점잖게 내미는 하얀 손을 차마 내칠 수 없어 소희는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아수라를 따라나섰다.
그러나 맥없는 걸음이 그녀를 자꾸 뒤처지게 했고, 물결치듯 흩날리는 아수라의 머리카락은 소희의 눈앞을 어지럽게 했다.
아수라는 소희의 반 보 앞에 서서 어린것에게 이르듯 상냥한 어조로 이곳저곳을 알려주었다.
염휘의 처소가 있는 본궁 안쪽과 정무를 보는 대전. 달 아이를 키우는 월하각, 이름 없는 강에 이르기까지.
아수라는 조금의 쉴 틈도 주지 않고 소희를 데리고 염라궁의 모든 곳으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태양빛이 정수리를 달구는 한낮 즈음해서 마치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소희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아차, 제가 너무 흥에 겨웠나봅니다. 다리가 아프진 않으십니까?”
지금까지 보란 듯이 긴 다리로 휘적거리며 드넓은 하계의 궁을 모조리 뒤지고 다닌 그가 할 소리가 아니었건만.
길고 선하게 생긴 까만 눈을 접어 내리며 웃는 아수라의 모습은 퍽이나 능청스러워 소희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촤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 들린 묵빛 접선이 펴지더니 이내 소희 앞에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이런, 땀을. 많이 힘에 부치셨습니까?”
능청스러운 태도도 잠시.
아수라는 정말로 땀에 푹 젖은 소희를 보며 당황한 듯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담고서 잘게 흔들렸다.
‘설마, 정말로 걱정하는 건가.’
아수라의 까만 눈 가득 담긴 염려가 소희에게 닿아오는 건 의외로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접선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이 소희의 앞머리를 간지럽혔다.
잔잔한 미풍이 진득하게 땀이 배어난 이마를 식히고 열 오른 뺨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태양빛이 꽤 뜨거운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아수라의 걸음을 따라가기 벅차 몰골이 엉망이 된 것도 몰랐던 소희는 그제야 얼굴에 신경이 쏠렸다.
얼마나 남세스러운 꼴이었을지.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와 소맷부리로 슬그머니 이마를 훔치고는 아수라에게 괜찮다고 말을 했지만, 아수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안되겠습니다. 우선…….”
말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아수라는 머지않은 곳에 있는 전각을 보고는 안심한 표정으로 소희를 청했다.
“마침 딱입니다. 조금만 더 걸어 보시지요.”
“네.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말과는 달리 한번 피곤하다 생각하자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다행히 전각은 오솔길처럼 좁지만 잘 다듬어진 후원의 길을 따라가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아수라가 권한 전각은 내궁의 것과 비슷했지만 훨씬 더 크고 다부진 느낌이었다.
사방이 트여있으되 울타리 치듯 촘촘히 돌려 살을 댄 가벽은 살대 하나하나에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가운데 놓인 탁자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림 같기도 하고 문자 같기도 한 문양은 이상하게도 시선을 끌었지만, 처음 보는 것이라 소희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수복강녕(壽福康寧)
[몸이 건강하고 편안하게 오래 삶]
과 같은 것이려나.’
막연한 생각으로 손가락으로 슬쩍 쓸어내리는 소희를 아수라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
오래지 않아 진득한 시선을 느낀 소희가 저를 바라보는 아수라를 보고 짧은 외마디를 내며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소희는 뒤늦게서야 제가 너무 철없이 군 것 같아 볼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지만, 아수라는 시종일관 선량한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본궁 아이들 솜씨도 그만합니다.”
수줍어진 마음에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발끝만 내려다보기를 한참.
아수라의 목소리가 상냥하게 소희의 귀를 울렸다.
“네?”
뜬금없는 아수라의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어느새 후원 오솔길을 따라 시비들이 신경 쓴듯한 음식을 날라오고 있었다.
“시장하시지 않습니까?”
“……아아……. 전…….”
“염휘께서도 타박하시지 않고 잘 드시는 것들이지요.”
소리 없이 탁자 위로 차려지는 진수성찬을 보며 아수라가 덧붙였다.
“염휘께서는 입맛이 무척 까다로우시답니다. 그러니 믿고 조금이라도 드셔보세요.”
아수라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수란이 올려진 그릇을 슬쩍 소희 앞으로 밀어주었다.
향긋한 나물과 맛깔난 양념, 보기에도 정갈한 음식치레들이 과하지 않을 만큼 제 자리를 잡고 객을 기다렸지만 소희는 쉽사리 손을 대지 못했다.
“어서.”
보다 못한 아수라가 젓가락을 쥐어 주며 어르는 목소리를 냈다.
“드시질 않으시니 저도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 무척 시장합니다. 소희님. 염라의 불도 먹어야 산답니다.”
이러다가 배곯아 죽는 염라의 불이 나올 참입니다.
반쯤은 엄살일 아수라의 말이 분명하지만, 소희는 그의 눈꼬리가 추욱 내려앉는 표정에 그만 또 휘둘리고 말았다.
“어…… 어서 드세요.”
보란 듯 밥을 떠 입에 넣고는 식사를 권하자 아수라가 그제야 그의 앞에 놓인 음식으로 손을 뻗었다.
소희는 쥐여준 젓가락을 열심히 놀려 앞에 놓인 나물도 맛을 보고 반질반질 윤이 나는 밥도 한술 입에 밀어 넣으며 연신 아수라를 흘끔거렸다.
그는 허둥대는 소희를 배려해서인지 내리뜬 시선을 올리는 법 없이 얌전히 목을 축이고 쌀밥을 떠넣어 공들여 씹어 삼켰다.
긴 소맷자락이 접시에 쓸리지 않게 왼손으로 아랫단을 슬쩍 감아쥐고 오른손으로 긴 젓가락을 놀리는 모습이 마치 글을 쓰는 선비 같았다.
그 모습이 음식을 먹는다기보다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침착하고 맵시 나는 모습에 허둥거리던 소희의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황망하게 움직이던 손이 점잖아지고, 부담 없이 음식을 즐기기 시작하자 그제야 비로소 음식 맛이 제대로 입안에서 맴돌았다.
소금을 솔솔 뿌려 구워낸 조기 살을 입에 넣고 씹던 소희의 눈이 감탄한 듯 크게 뜨였다.
그 모습에 아수라가 나물을 집으며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맛있다니까요?”
“맛있네요.”
심각한 표정으로 나물을 씹으며 본궁 숙수 솜씨를 칭찬하는 염라의 불이라니.
소희는 제 앞에 앉은 아수라를 보며 실소했다.
많은 양을 먹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음식을 즐긴 두 사람의 느린 식사가 끝이 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상을 말끔하게 치워낸 시비들이 다식이며 차를 가져다 나르기 시작했다.
무엇으로 색을 낸 건지 선명한 자색이 무척이나 고와 소희는 제 앞에 놓인 다식이 아까워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소희의 마음을 눈치 챈 것인지 아수라가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질리게 드실 터이니 아까워 말고 맛보세요.”
“……색이 고와서요.”
“곱지요? 적월의 빛내림을 일곱 번 걸러낸 것이라 선명하고 그 빛이 바래지 않는 것이지요.”
“적월의 빛내림이요?”
“네, 서녘의 달빛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월의 빛내림도 그 풍미가 일품입니다.”
소희는 아수라의 차분한 설명에 귀를 기울이다 실풋 웃는 듯 우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인지 일그러지는 소희의 표정에 아수라가 놀란 듯 이유를 물었지만 소희는 다식을 입에 쓱 밀어 넣으며 제 입을 막아버렸다.
꾹꾹 힘을 줘 씹어 삼키고 향이 깃든 찻물을 모조리 비우고 나서야 소희는 아수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럴 때마다, 제가 이방인임을 느껴서……. 잠시 마음이 외로웠습니다.”
“그런……!”
“달 아이도, 아수라도, 서녘 달빛도 제겐 모두가 낯설고 어렵습니다.”
저는 나고 자라길 평생에 인간이었는걸요.
미풍에 흩날리는 혼잣말이 더할 나위 없이 담백해 오히려 처연했다.
뭐라 말을 하기도 전 담담한 듯 사그라지는 소희의 이야기에 아수라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표정으로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까.”
“네, 아시다시피 전 인간이었습니다.”
“…….”
“차나무 잎을 덖어 마시며, 달빛을 내려 마시는 차라는 건 생각도 못 해본 인간입니다. 한 몸에 자웅(雌雄)이 깃든 이를 마주하고 있는 것도 아직 실감하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
“아니, 사실은 제가 죽었다는 걸 믿지 못해서인지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소희는 두서없는 말을 하며 잔뜩 헝클어진 속내를 내비쳤다.
담아두리라 생각했던 말이다.
이렇게 내뱉게 될 거라고는 소희 자신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래서 이야기는 무척이나 산만했지만, 표정만은 한없이 처량했다.
아수라는 소희의 심사가 어떨지 대충 짐작하는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녀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었다.
비어버린 찻잔에 따스한 찻물을 채우며, 마구잡이로 나오는 그녀의 당황스러움을 모조리 쏟아낼 수 있도록.
“하루아침에 삼천의 것에 익숙해지길 바라는 것도…… 버겁습니다.”
“버겁습니까?”
“네, 버겁고 두렵습니다.”
소희는 반쯤은 우는 표정이었다.
“아수라. 전 인간이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죽어 지옥 간다는 말을 반신반의하며 사후 세계가 있는가에 대해 궁금해하던 평범한 인간 말입니다.”
“그렇군요.”
“전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고아였습니다. 하루 끼니가 고단했던 박한 처지였습니다.”
소희가 복받친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마마라니요. 달 마마라니요.”
갑자기 뒤바뀐 처지에 황망하고 놀란 소희의 마음이 은연중에 새어 나왔다.
‘고아라니.’
이제야 알게 된 그녀의 인세의 삶은, 결코 풍족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에게 한없이 귀한 것이, 한없이 막중한 책무가 쏟아져 내리는 것이 버겁지 않을 수 없었다.
아수라는 말없이 뒷말을 기다려주었다.
소희는 살짝 격해진 마음을 달래듯 찻물을 머금었다.
그리고 아수라가 보내는 무언의 위안에 용기를 낸 듯 다시 말을 시작했다.
“…….”
“지아비가 되실 분께 색 고운 배자를 지어드리고 싶어 산으로 갔었습니다. 별꽃을 찧어 물을 내 옷감에 입히면 무척 곱거든요.”
소희의 목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하고, 그녀의 까만 눈에 맑은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벼…… 별꽃을 꺾으러 산에 갔답니다. 배자를 지어드리려고요.”
소희는 어딘가 망가진 것처럼 눈물을 후드득 떨어뜨리며 환하게 웃었다.
눈물에 젖은 까만 눈동자가 아스라하게 빛을 뿌리고,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웃으며 아수라를 향해 입을 뗐다.
속풀이를 하듯 더듬거리면서도 소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즈음 소희의 말이란 것은 온통 바스러져 울음과 범벅이 된 채라 말을 하는 그녀조차도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었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흘러나오는 울음소릴 삼키며 ‘말’이고자 하는 것을 열성적으로 뱉어내는 그녀를 아수라는 무척이나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눈부시게 부서져 내리는 태양빛이 전각 지붕을 뜨겁게 달구다 그 기세가 꺾일 무렵에서야 소희의 이야기는 잦아들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렇게 산으로 내달렸는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고아를 거둬줄 고마운 분께 은혜 갚음 하려 한 것인지, 다정한 그분을 은애하였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태 따스한 눈빛으로 소희의 말을 듣던 아수라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소희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으며 도리질을 했다.
“상관없었습니다. 전 몰랐어요. 아니, 알았어도 상관 안 했을 것입니다.”
“!”
“고아인 제게 곁을 주신다 하신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소희님!”
“……제가 '상천의 휘'라 곁을 내준 게 아니라 하신다면, 전 정말 상관 안했을 겁니다.”
“!”
옷감이 쓸리는 소리와 함께 소희가 소맷자락을 들어 뺨을 훔쳐냈다.
더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 충격받은 듯 아수라는 희게 질려 몇 번이고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소희가 젖은 뺨을 닦아내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도록 그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수라가 알아들은 것은 거의 없었지만, 소희의 속내를 짐작키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소희의 말처럼 그녀는 인간이었다.
인간이란 것은 중천에 머물며 짧은 생을 불꽃처럼 피워올리는 존재들이었다.
삼천의 존재를 모르면서도 짐작하는 영특한 자들이었으며, 삼계를 통틀어 신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들은 무척이나 나약하였으되 열정적이었고, 아름다웠다.
그들이 가장 빛을 발하는 건 운명의 상대를 맞이할 무렵.
바로, 지금의 소희가 그랬다.
아수라는 지금도 어째서 환이 그렇게나 거칠고 사납게 소희의 목숨을 취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염휘는 분명 속세의 고리를 끊는 비약을 품고 중천으로 올라갔었다.
내궁의 주인은 한 달 뒤 이름 없는 강(無河)을 건너올 예정이었다.
비약을 가지고 강을 건너간 환이 손에 ‘업’을 묻혀가면서 억지로 육신을 벗겨 올 일이 아니었다.
‘인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엉망이 되어 만나시게 된 것인가.’
염휘는 이미 이십 년을 기다렸다.
귀문의 별이 성장하여 곁을 채워주길 기다린 것이다.
‘저 모자란 것을 곁에 두느니 차라리 내궁을 비워두겠다.’
염휘는 누군가 비어있는 내궁에 대해 이야길 꺼낼 때마다 멋쩍은 변명을 덧붙였다.
언제나 그는 정색했다.
하지만, '모자란 것'이라고 핀잔주듯 말을 할 때, 염휘의 홍안이 얼마나 부드럽게 일렁이는지는 염휘 자신만이 몰랐다.
어린 것을 데려오기 내키지 않는다며 도도한 얼굴을 한 채 냉정히 말했어도 그의 시선은 냉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어린 것을 바라는 부모의 가난한 욕심을 기다려주었고,
귀문의 별을 취해 데리고 와도 중천에 남을 '소희'가 살 수 있도록 재물을 내주고,
삿된 것이 스미지 못하게 집터에 그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고 오기까지 했다.
‘어린 것이 이리도 짐을 오라가라 하여서야 되겠느냐.’
마지막이라며 부득불 집터에 그의 기운을 심어주고 오던 날, 고집스레 앞만 보고 걷던 그에게서 나오던 변명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 뒤로 염휘는 인계에 발을 딛지 않았다.
‘어린 것이 제법 컸겠구나.’
그 언젠가 흘리듯 실수로 말을 한 것 외에는 두 번 다시 입에도 올리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염휘 식의 기다림이었다.
삿된 것보다 더한 것이 똬리를 틀고 그의 귀문의 별에 장난질을 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 사나운 달을 모두가 묵묵히 견디며 소희가 어서 자라길 기다렸다.
뼛속까지 얼려버릴 것 같은 매서운 달빛을 받아내고, 월력을 받아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는 어린 요괴들을 잡아 누르며 그들은 귀문의 별을 기다렸다.
소희가 하루빨리 하계로 건너와 주길 바라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달 마마께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
아수라는 헛숨을 삼키며 쓰라린 속내를 눌렀다.
자신의 왕이 어째서 이런 결정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귀문의 별은 '소희'와 분리가 되지 못한 채 너무나 인간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어째서 비약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아수라의 마음이 그의 눈동자처럼 까맣게 타들어 갔다.
‘비약을 먹여 이름 없는 강을 건너오시기만 했더라도, 인간의 본성이 남아 이런 망측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텐데.’
차마 왕께 전하지 못할 사실에.
‘염휘시여. 이 망극한 모습을 어찌 소장이 아뢰오리까.’
입을 열 수 없는 아수라의 쓰린 속내가 누군가를 대신해 울고 있었다.
염휘(炎煇).
하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왕이었다.
염휘는 염라의 불들의 자랑이었으며, 하계의 불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주인이었다.
그 누구보다 고아했으며 매혹적인 지존이었다.
하계의 그 누구라도 염휘를 경애했고, 그들의 어버이인 왕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귀문의 별'이 저런 망측한 심사를 털어놓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소희가 하는 말은 그녀의 영까지 파고든 상태자의 속박의 인 때문일 수도 있고, 인간이었던 '소희'가 남아 무의식중에 원망을 덧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경우를 따져보아도 하계에 머무는 '귀왕의 별'인 그녀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이십 년을 기다려온 모두에게 해서는 안 될 소리였다.
아수라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귀문의 별로만 생각하셨다면. 진작에 모셔왔을 거라는 걸 왜 모르시는가!’
‘이십 년을 인고한 왕께 어쩌면 이러실 수 있는가.’
염휘의 기다림을 아는 풍천이 소희에게 상천의 휘마저 내려진 것을 알고 얼마나 황망해 하였는지, 소희는 모를 것이다.
염라의 두 번째 불인 그가 평점심을 잃고 순간에 기세를 갈무리하지 못한 채 영력를 피워올려 버렸을 정도로 놀랐음을, 이 눈앞의 어여쁜 이는 몰라주고 있다.
어째서, 풍천이 그토록 '귀문의 별'로 남을 것이냐 집요하게 물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소희를 몰아세우다시피 다그쳐 묻던 그의 절박함을 전혀 몰랐다.
모르는 게 당연했지만, 귀문의 별인 그녀는 몰랐어도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됐다.
‘아아, 어째서…….’
아수라는 가엽고 무뚝뚝한 제 주인을 떠올리며 두 눈을 감아버렸다.
어째서 이렇게 모든 일이 어그러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갈 데 없이 미쳐 날뛰는 참담한 마음만이 햇살아래 서글프게 부서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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