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엉켜 드는 바람 (7)
2017.10.16.
영력이 쏠린 안력이란 건 실로 대단했다.
단지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지저분한 것들이 치이익 소릴 내며 타들어 가거나 기괴한 소릴 내며 흩어졌다.
“키에에엑-.”
그녀의 시선 끝에 걸린 염이 단말마를 지르며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그것이 피워올린 불덩이에서 후끈한 열감이 느껴질 정도로 이번 것은 덩치가 제법이었다.
그 세가 크건 적건 질척이는 요괴들도 단번에 쳐내는 아수라에게 염이야 손쉬운 상대였지만, 수가 한둘이 아니어서 눈이 조금 피곤했다.
아수라는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붉게 달아오른 눈매를 쓸어내렸다.
차가운 손가락이 닿자 열 오른 눈매가 한층 더 달궈진 것같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영력을 돋운 눈꼬리가 아릿했다.
하지만 그 덕에 무겁게 가라앉은 내궁 공기가 대번에 시원하게 흐르고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달빛이 상쾌해졌다.
“그나저나, 염휘께 한소리 듣겠구나.”
아수라는 걱정스러운 듯 입을 뗐지만, 정작 그녀의 표정은 후련해 보였다.
일부라도, 제멋대로 정화를 해버렸으니 후에 염휘에게 어떤 질책을 듣게 될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수라는 소리죽여 우는 소희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영력을 돋을 수밖에 없었다.
‘흐으으윽-.’
예민한 밤 짐승보다 더한 아수라의 청력에 가는 울음소리가 잡혔었다.
작게 헐떡이는 숨과, 그 사이사이로 뱉어지는 서러운 울음조각이 생각지도 못하게 아수라의 이목을 끌었다.
‘저런, 저런.’
가볍게 혀를 차며 우는 그녀를 딱하다 생각했었다.
그녀가 우는 속내야 뻔하게 짐작됨이라.
그런데.
실컷 울고 털어내시라 담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 것이 실수였을까.
염휘의 진이 사방으로 둘러진 침전이라 안력을 돋워도 흐릿한 영체만 보일 뿐, 소희가 제대로 보인 건 아니었다.
‘흐으윽-.’
하지만 웅크린 품새와 귀를 작게 울리는 흐느낌에 이상하게도 가슴이 저릿해지고 말았다.
‘이런……?’
당혹스러움에 고운 미간에 실금이 새겨졌다.
소희의 울음소리에 마음이 동한 건 아수라만이 아니었다.
온갖 염들이 그녀의 울음소리에 착실히 모여든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역시, 달 마마이신게지. 아니 그러하냐, 홍월.”
아수라의 손이 허리에 매달린 홍월로 향했다.
아까부터 잘게 떨리는 홍월 역시 소희의 울음에 공명하는 듯 그치지 않고 계속 검신을 떨어오고 있었다.
“쉬-.”
보태지 말거라.
바르르 떠는 검신을 향해, 어린 것을 달래듯 다독거리는 아수라는 드물게 자상한 표정이었다.
아수라는 계속해서 떨리는 홍월을 영력을 두른 손끝으로 가볍게 쓸어주었다.
홍월은 익숙한 영력에 겨우 진정이 되는 듯 잘게 떠는 것을 멈췄다.
“처연하기도 하구나.”
아직은 인간에 가까운 영이 흘리는 울음소리가 무척이나 아프게도 가슴을 울린다.
‘염라의 불인 자신이 이럴진대.’
마치 해일이 몰려들 듯 온 사방에서 끌려드는 염과, 소희의 울음소리에 공명하는 홍월이 이상할 리 없다.
소희의 울음소리에는 ‘감정’이 들어 있어 듣는 자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흐윽.’
짧게 죽인 울음소리가 다시 한 번 귓가에 잡혔다.
“흐음…… 이건…….”
아수라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에 붉게 빛나는 눈동자를 지그시 감으며 아프게 펄떡거리는 가슴을 꾹 눌렀다.
그러니까, 이건 전대의 핏물에서 태어나던 그때 이후로 처음인가.
참담함과 서글픔, 그리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애틋함까지.
그날과 어쩌면 이렇게도 꼭 같으냐.
“곤란하신 분이로고.”
울음소리로 염라의 불을 휘두르시다니.
아수라는 가벼운 코웃음을 치며 잠잠해진 홍월을 쓰다듬었다.
애틋함이라니?
서글픔이라니.
그런 감정 따위, 이미 전대의 아수라와 함께 눈감고 잠들었거늘.
‘정말, 이상하다.’
인간에 가까운 저 작은 영이 내뱉는 작디작은 울음소리가 어째서 이 아수라의 마음을 울리는 것인가.
그날의 기억을 꺼낼 만큼 대단하지도 않은 저 작은 소리가.
마치 바스러진 먼지부스러기처럼 보잘것없기 그지없는 것이.
“어째서 이렇게나 마음이 쓰이게 만드는 것이냐.”
감히, 염라의 불을.
아수라는 열이 오른 제 눈을 다시 한 번 쓸었다.
손끝에 묻어나는 축축한 것을 못 본 체 허공에 털어내고는 다시 홍월에 가느다란 손을 얹었다.
시린 달빛에 달뜨던 가슴이 어느샌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호방한 남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도록 흘러내리던 핏물과, 그가 있는 힘을 다해 지어냈을 것이 분명한 미소가 떠올랐다.
잦아드는 태양빛이 마치 그의 숨날인 양 처연했다.
‘여어- 이번 대는 끝내주는 미인인데?’
푸릇해진 입술에 잔뜩 피가 물려서 웃었던가.
아수라는 다시 한 번 눈을 거칠게 쓸어냈다.
‘누워서 인사라니 이거이거. 첫인상이 엉망이겠구만. 하하핫.’
영력이 고갈된 웃음소리에는 아무것도 없었건만.
아직도 그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묻었던 기억인데 어째서 이렇게 허락 없이 멋대로 떠오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고얀…….”
바르르 떨리는 붉은 입술이 심술 맞게 비틀렸다.
비수처럼 돋아난 송곳니가 사납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누굴 향해서 인지 모를 말을 읊조리며 으르렁거리던 아수라는 적발을 헤집는 찬바람을 맞으며 누각 위에서 일어났다.
아수라는 사슴처럼 곧게 뻗은 두 다리에 힘을 줘 단번에 하늘로 박차 올라 이내 모습을 감췄다.
더 이상 누각 위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보다 작은 소리가 자꾸만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어, 더 이상은 아수라도 무리였다.
아수라까지 자리를 비운 내궁에는 시린 달빛만이 자릴 지켰다.
푸르고 푸르른 차가운 달빛이 비수처럼 사방을 매섭게 내리쳤다.
“흐으으윽.”
참으려고 했으나 자꾸만 입술을 비집고 미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참지 못한 소리와 함께, 눈에선 그치지 않고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려 이미 베개는 축축하게 젖어 버린 지 오래.
앞니로 짓씹은 입술은 엉망으로 너덜거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엉망이 된 건 마음이었지만, 살펴 줄 수 없으니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후우-.”
소희는 깜빡이는 눈을 따라 또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작게 서러운 한숨을 토했다.
한숨으로 터져 나온 설움이 어느새 눈에서 시작돼 어깨를 들썩이고 호흡을 거칠게 만드는 지경이 될 때까지 원 없이 울었건만.
어째서 아직까지 가슴이 답답한 것인가.
소희는 울어 붉게 물든 눈을 비벼내며 침상에 앉아 무릎 위에 머리를 괬다.
그리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정말이지.’
멈춰지지 않는 눈물을 꾸짖기라도 하듯 냉정한 손짓이었다.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마구 닦아내다 보니 이내 얇은 피부는 쓰라림을 호소해왔지만, 소희는 다시 한 번 힘을 줘 습한 눈매를 꾹 눌러 쓸었다.
아프다니?
이까짓 거.
이까짓 거.
이까짓 거!
가슴은 넝마가 되어 찢겨버리는 것 같은데.
온통 인두로 지져버리는 것 같이 마냥 타들어 가는데.
이까짓 거!!!
갑자기 흘러넘치는 감정에 소희는 주먹을 쥐고 가슴을 두드려댔다.
말아 쥔 주먹이 야무졌다.
텅텅 소리가 나도록 내려치길 수차례.
하얀 피부가 붉게 물들다 이내 푸릇하게 색이 변했다.
하지만 소희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어…… 어쩌라고…….”
이미 담아버린 것을 어쩌라고.
소희는 침상 위에 쓰러지듯 엎드리며 오열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슬픔을 마구잡이로 뱉어내던 소희의 울음소리가 잦아든 것은 시린 달빛이 잔뜩 기울어져 전신을 차게 품어줄 무렵이었다.
등허리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기운이 소희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슬픔에 마구잡이로 헝클어진 모습을 추스르게 했다.
두 팔로 몸을 지탱해 간신히 일어나 앉은 소희는 잔뜩 지친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눈에선 더 이상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붉게 물들어 부은 눈꺼풀이 아니었다면 조금 전까지 온몸으로 울어내던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담담하고 고요하게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소희의 커다란 눈동자에 담긴 하얀 달은 광포한 기세와 단번에 마음을 홀리는 유려한 자태,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소희는 차게 죽어버렸다.
생기가 돌던, 다정한 밤하늘 같던 눈빛은 까맣게 말라버렸고, 종종 분홍빛으로 물들던 둥그런 뺨은 희게 질렸다.
온통 눈물로 젖어 습기를 머금은 소맷부리에 감춰진 작은 두 손은 파리해져 제멋대로 늘어져 있었다.
소희는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달만을 올려다보았다.
하계의 달은 실로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인계에 속해 있을 때의 달과는 확연히 달랐다.
하계에 비하면 인계의 달이라는 것은 빛이 꺼진 것과 다름없었다.
하계에서 만난 달은 ‘만월’이라는 것은 이것이다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자신만만했으며, 광오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인계에서 익숙했던 달과 같이 유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밤을 품어내는 넉넉하고도 무한한 힘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실제로 하계에선 달빛을 받아 선인을 잉태한다고 하니 마냥 틀린 것만도 아니었다.
하계의 달은 이지러지지 않았다.
늘 언제나와 같은 만월인 채 밤을 맞이하는 것이다.
꽉 들어찬 시린 빛으로 세상을 그득히 채워내는 저 도도한 모습조차 환을 떠올리게 하니.
소희는 다잡은 마음이 다시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밤의 지배자.
아름다운 불꽃을 두 눈에 품고 있는 오만한 하계의 지존.
소희는 다시 한 번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자신이 그런 이의 마음을 얻었다 착각한 것은 부끄러워할 만한 일이 아니다.
‘누구든 한 눈에 매료될 멋진 사내가 아니던가.’
너른 품에 푸근하게 잠겨 들던 기억도,
다정히 불러주는 낮은 음색도,
늘 아름답게 일렁이던 붉은 두 눈도.
모조리 작은 가슴에 수줍게 담았었다.
억지로 뜯어내는 이 순간이 고통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소희는 애끓던 마음이 조금씩이지만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환’은 자신처럼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상계의 ‘휘’ 인 것을 자신처럼 모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묘하게 어긋나던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지럽던 머릿속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고, 인계에서의 일들과 하계로 이어지던 모든 것이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제 시간을 찾아 흐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죽음으로 멈췄던 것들이 이제야 제대로 흐름을 타고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실상, 그것들은 멈춰있지 않았으나 자신만이, 아니 환과 둘만이 멈춰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귀문의 별이자 상천의 휘.
염라대왕의 비이자 옥황상제의 내정된 안주인이었다.
어째서 이 무거운 운명이 제 어깨에 모조리 내려진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염휘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것도,
상태자가 굳이 혼약자로 나서며 제게 인연을 이은 것도,
모두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서글픔이 가라앉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내뻗은 손은 집요한 구애가 무색하리만큼 쉽사리 거두어들여 졌고, 남겨진 것은 엉망진창으로 휘둘린 자신뿐이었다.
혼란스러운 것은 '환'만이 아닌데.
이렇게 자신은 또 혼자가 되었다.
다정하게 희롱하여주던 그는 차갑게 등을 돌리며 멀어졌고, 남은 것은 차게 식은 눈물뿐이었다.
소희는 억울하고 서글펐다.
분했고 슬펐다.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고 싶었고, 모조리 다 부숴내 버리고 싶었다.
가슴 속에 치받는 이 마음을 가눌 수 없어 그저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귀문의 별도 상계의 휘도 그 무엇도 아닌 소희이건만.
나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건만.
어째서 당신은 변해버린 것이냐 따져 묻고 싶었다.
변해버린 것이냐 묻고자 하여도 환은 없었다.
그는 자신만 남겨두고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러니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눈물로 만들어진 것처럼 울고 또 울며 엉망이 된 마음을 추슬러내야 했다.
그뿐이었다.
‘귀문의 별’만이 아닌 자신은 환에게 쓸모가 없어진 것인지, 자신이 ‘상천의 휘’이기도 하여 그의 마음이 식은 것인지.
진실을 알 도리가 없지만 확실한 것은, 싸늘해진 환의 태도.
그것이었다.
거리를 두며 뒤로 물러나던 차갑게 굳은 그의 얼굴을 소희는 기억했다.
멋모르고 피어나던 불안감의 실체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볼썽사납게 까무러치기까지 했지만, 눈을 떠도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환은 ‘휘’를 타고 난 자신을 두고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가 가버렸다.
자신은,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건만.
지금 역시 그대로이건만.
이 자리에 홀로 남겨졌다.
갑자기 목이 쓰라리고 홧홧하게 타오르는 기분에 소희는 푸릇하게 얼어 내린 손으로 황급히 목덜미를 잡아 쥐었다.
환에게 뜯겨졌던 곳이다.
태자가 속박의 인을 새겼던 곳이다.
두 사람이 멋대로 헤집어 놓은 목이 타오르는 듯 아팠다.
그보다 더한 그녀의 마음은 가루도 남지 않게 찢어져 버린 지 오래였다.
소희는 차가운 달빛을 받으며 동이 트도록 목을 움켜쥔 그 자세로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얼굴에서 바스러지는 태양빛이 찬란해 서글펐다.
붉게 물든 눈을 차마 뜨지 못하고 소희는 질끈 감아버렸다.
귀에 들리는 작은 새소리가, 후원을 가로지르는 냇물이 흐르는 물소리가 멀어지자 낮달이 기어코 태양빛에 가려졌다.
“풍천께오서 드셨습니다. 어찌할까요?”
그리고, 내궁에 풍천이 들었다는 말을 시비가 전해왔다.
“후원에서 뵐 테니 다과를 마련해주련.”
밤새 운 목이 깔깔하게 잠겨있어 그 소리가 거칠었다.
“그리고 얼른 들어와 차비를 좀 해다오.”
소희는 시비에게 새 옷을 달라 머리 꽂이를 해 달라 이것저것 부탁했다.
그녀의 운명은 딱했으나, 그것을 서글퍼 하고 동정하는 건 소희, 그녀 자신이면 충분했다.
서둘러 차비한 덕에 소희는 풍천이 차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 후원 누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사이 얼굴이 야위었습니다.”
풍천은 전날보다 한층 더 살가워진 목소리를 내며 소희의 안부를 챙겼지만, 소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
밤사이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 버석하게 마른 표정을 짓는 소희를 보자 풍천은 뭐라 설명 할 순 없는 묘한 기분을 맛봤다.
비어버린 찻잔을 채운다, 이야기를 들려달라 조르던 어여쁜 사람이 가고 그 자리에 다른 이가 와 앉은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풍천은 맞은편에 앉은 그녀를 재차 확인할 정도였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런 느낌이 없는지 왜 그러시냐 재차 묻는 말에 짤막한 답변을 되돌릴 뿐이었다.
“그냥, 제가 조금 피곤하여서.”
딱히 뭐라 뒷말을 잇기 어려운 대답이라 풍천은 소희에게 어째서 그러냐 다시 물을 수가 없었다.
말을 흐린 건 고의였으니 그것을 꺼내 들긴 어려웠다.
“그러십니까.”
그러니 이쪽에선 맞장구를 칠 수밖에.
워낙에 말주변이 없는 풍천에 소희까지 입을 닫자 분위기는 몹시 어색해졌다.
견디지 못한 풍천이 내궁을 둘러본다며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반 각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멀뚱하게나마 자리를 지키던 풍천마저 곁을 비우자 다시 소희는 혼자가 되었다.
소희는 누각에 둘러진 휘장으로 새어들어 오는 태양빛을 가리지 않은 채 감은 눈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이제는 무엇이든 어떠랴 싶어졌다.
태양빛이든 달빛이든 괴롭긴 매한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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