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19화 (19/114)

19. 엉켜 드는 바람 (4)

2017.10.06.

“네?”

소희는 당과접시를 풍천에게 건네주다 손을 떨었다.

풍천이 재빠르게 접시를 낚아채 당과 하나 떨어뜨리지 않았지만, 소희는 자신이 접시를 놓쳤다는 것도 모를 만큼 당황한 상태였다.

“이번 대의 귀문의 별은 또한 상천의 휘이기도 합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제…… 제가…….”

“반응을 보니 이해하신 것 같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차 한 잔 더 드릴까요? 놀랐을 때는 따뜻한 것을 마시면 도움이 되지요.”

아수라는 소희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놀라 작은 새처럼 푸드덕거리는 그녀에게 따뜻한 차를 권하고 단것을 물려주며 그녀 스스로가 마음을 추스르길 기다려주었다.

“제가 잘못 듣지 않았다면, 무척이나 중차대한 일인 것 같습니다.”

아수라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으며 잘게 떨리는 손끝만큼이나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그에게 침중한 소릴 냈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소희의 말에 아수라와 풍천이 동시에 답을 했다.

“그러니, 만사를 제치고 지금 호위를 서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려 염라의 불들이 말입니다.”

“당과를 즐기며 말이지요.”

툴툴거리는 것이 분명한 풍천의 말에 아수라가 뾰족하게 대꾸를 하며 접선을 꺼내 살랑이며 부쳤다.

까만 눈동자에 질책을 가득 담아 풍천을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속 좁은 자 같으니.’

들리라고 힘줘 느릿하게 혀로 굴리는 ‘혼잣말’이 여간 매서운 게 아니다.

“그럼 저는 어쩌면 좋습니까?”

소희는 머릿속이 복잡해져 울고 싶었다.

이승에서 끊어졌다 생각한 연이 뜻하지 않게 튀어나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 홀가분하게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끝나지 않은 이야기였다니.

자신은 이미, 환의 곁에 서겠다 마음을 먹었다.

아니, 그것은 마음먹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은 이미 환을 마음에 담아버렸다.

눈을 감고 있자면 보석처럼 찬란한 빛을 뿌리는 그의 아름다운 홍안이 뿌듯하게 가슴을 채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시선뿐만이 아니라 기어이 마음마저 물들였다.

은사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당당하게 서 있는 그를 탐내고 말았다.

차갑고 도도한 달빛과 같은 사내를 연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제게 얼마나 다정하고 세심한지는 일러 무엇하랴.

‘비로 삼을 것이다.’

‘너는 내 것이다.’

사내답게 말하는 그의 말에 속절없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던 마음은 이내 제멋대로 그 덩치를 불려버렸다.

이미 마음은 소희의 손을 떠난 지 오래였다.

통제가 되지 않는 그 마음은 시시때때로 올라와 귓가를 울려댔다.

두근두근.

여기, 그를 바라는 단심이 있노라.

환을 바라는 열아홉 아기씨의 수줍은 마음이 자꾸만 고개를 쳐들었다.

‘환.’

소희는 입안으로 나직이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를 떠올리자 간밤 서늘하게 내려앉은 그의 홍안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단지 기억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 한구석이 못 견디게 아려왔다.

사신의 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했으니, 환도 아마 알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차갑게 변한 것일까.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걸까.

소희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아아…… 어쩌면 좋겠느냐? 안타깝게도 그것은 상천의 색, 내 너에게 은과 홍은 내려줄 수 있느니라.'

‘벽안에 금발을 바라는 건 어떤 이유에서였나?'

자신은 분명, 반쯤은 분풀이 하듯 내뱉은 말이었다.

충동적으로, 저를 살해한 남자를 조롱하고자 미운 마음을 다짐하듯.

은발의 홍안을 가진 그를 대놓고 거부하듯 금발의 벽안이라는 말을 내뱉었었다.

하지만 자신이 휘라는 게 밝혀진 이상 그것은 더 이상 분김에 한 소리가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 환이 차게 식어 내린 것도, 그런 말을 했던 것도 다 그런 연유였을 테지.

‘벽안에 금발을 바라는 건 어떤 이유에서였나?'

그가 어떤 심정으로 저 말을 했을지 짐작하기도 벅찼다.

소희는 절망감에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까 염화가 타올라 태워버린 것은 요괴였지만, 그것은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부정한 감정의 찌꺼기.

그리고 그 찌꺼기는 아직도 남은 모양인지 가슴 속이 불붙은 듯 타들어 가고 못 견디게 괴로웠다.

‘오해입니다.’

단 한마디만이라도 좋으니 전하고 싶었다.

‘진심이 아닙니다. 딱히 의미를 담고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환에게 달려가 말하고 싶어졌다.

이유를 모를 땐, 그저 답답하고 서운하던 것이 이유를 알게 되자 더할 나위 없이 괴로워진다.

가슴 속을 누가 할퀴어 내리는 듯 아파와 저도 모르게 숨이 헐떡여지고 만다.

자신 속에 있던 작은 분심이 그랬노라고.

‘비’를 맞으러 왔다 말해놓고선, 무섭게 몰아세운 당신이 잠깐 미웠었다고.

잠깐. 잠깐이었다고.

스치듯 하던 투정과 같은 것이니 마음에 담지 말아 달라고.

그러니 이러지 말아 달라고.

당신을 담기 시작한 이 마음을 이제와 버리지 말아 달라고.

당장에라도 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낱낱이 말하고 싶어 소희의 입안이 바짝 마르고 손끝이 잘게 떨려왔다.

“저…… 염휘께서는…….”

“사나흘 곁을 물리셨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아수라의 까만 눈동자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조용히 답을 전했다.

그의 말에 심장이 발치로 툭 떨어지는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사나흘이나…… 자리를 비우신다고요?”

“네, 염휘께서는 하계의 지존. 몹시 바쁜 것이 일상이시지요.”

차분한 아수라의 말에 풍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를 둘러보러 가신 건가?”

늘상 있는 일을 묻듯 그저 예사로운 목소리다.

“글쎄, 새벽에 언질도 없이 나가셨다 하더군. 사실 이렇게 오래 궁에 머무신 적이 드물었지.”

“또 새벽달 따라 훌쩍 나가신게로군.”

환의 족적을 더듬듯 풍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희님 덕에 저희가 염휘의 옥안을 물리도록 뵈었지요.”

“하긴.”

이어지는 아수라의 말도, 풍천의 말도.

마치 이것이 그들에겐 일상인 것 같아 소희는 타들어 가는 속내를 차마 넌지시 꺼내보지도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와서 이들에게 저의 입방정을 꺼내 이야기를 해본들 소용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늘상 있는 일이라니.

그런 말은 없었잖아요.

곁을 비운다 말도 없이 훌쩍 가버리면…….

삼킨 이야기만큼 전하지 못한 속내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속은 타들어 가는데 환은 이미 궁을 비우고 나간 지 오래라니 그를 만나 맺힌 말을 할 수도, 그에게 안겨 불안한 마음을 달랠 수도 없다.

후우-

작게 몰아쉬는 숨에 숨기지 못한 불안감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그래서, 달 마마…… 아니 소희님께선 마음을 정하신 게 확실하십니까?”

아수라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던 풍천이 다짜고짜 소희에게 따져 묻듯 이야기를 꺼냈다.

아수라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접선으로 풍천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나 풍천은 아예 이야기를 끝내려고 작정한 모양인지 아수라의 만류도 못 본 체하며 소희를 재촉했다.

“간밤에 귀문의 별로 저희를 부르셨습니다. 귀문의 별로 남아주실 겁니까?”

그는 간밤 소희가 했던 이야기를 다짐받고 싶은 것처럼 묻고, 또 물었다.

소희에게 향하는 풍천의 목소리는 아수라에게 하던 것처럼 능글맞지도 친근하지도 않았다.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낸 풍전의 모습이란 그저 사납지 않은 정도, 딱 그것이었다.

한일자로 다물린 입을 하고선 소희를 바라보는 준수한 장수의 모습은, 날카롭게 벼린 한 자루 칼 같았다.

저도 모르게 뿜어져 나오는 위협적인 기세에 그가 조금 전까지 당과를 집어 먹으며 기뻐하던 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맹수를 마주하고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솜털이 바짝 서고, 긴장이 된다.

순식간에 변해버린 분위기에 소희는 얼떨떨해졌다.

은회색의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매끈해 아름답긴 했지만,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소희의 모습은 희게 질려 안쓰러울 정도라,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던 소희는 어느 순간 맥이 풀려버렸다.

“…….”

도무지 정신 차릴 새가 없다.

그 누구 하나 자신을 다독일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자신의 운명은 어쩌면 이렇게 숨 가쁜지.

귀문의 별이든 상계의 휘이든 그 무엇이든.

어째서 자신은 늘 이렇게 격랑에 휘말린 조각배처럼 버텨내기에 급급해야 하는가.

‘어째서!’

모두 다그칠 구실만 생각하는가.

이 와중에도 누구의 편에 설 것이냐 다그치기만 하는 것인가.

나조차도 이제야 알게 된 고약한 운명인 것을.

다짜고짜 이렇게 몰아세워야 하는 것인가.

눈가가 뜨끈하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코끝이 찡하게 울린 것도 같았다.

갑자기 복받치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단지 풍천의 말 때문은 아니었다.

반려라며, 사납게 제 목을 꺾은 사내의 단심이 이토록 허망하게 흩어지는 것 같은 모습에서 오는 허탈함일지도 모르고.

이 와중에도 그를 찾아가 ‘몰랐다고, 오해라고.’ 저도 몰랐던 운명을 변명하고, 그의 마음을 다시 얻고자 하는 서러운 자신의 처지 때문인지도 몰랐다.

‘환.’

난 이미, 마음을 정해 내 자리라 여기고 있었건만.

‘너의 자리’라고 알려준 남자는 곁에 없고.

‘나의 자리’라고 천명한 것을 다른 이는 의심을 하고 있다.

내 것이다.

짐의 비이다.

소유욕을 드러내며, 다급하게 자신을 품던 이를 자신은 이제야.

이제야 마음으로 받아들였건만.

그는 어디로 간 것인가.

‘어째서 내 운명은 이렇단 말인가.’

참으로 고약하기 짝이 없다.

소희는 목이 메어와 아프게 숨을 참았다.

가슴이 먹먹해,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곳에 마음 붙이고, ‘내 집’이라 여기며 살겠다는 소희의 수줍은 꿈이 다시 찢겨져 버린 것 같았다.

‘업보인가. 그래서 마음 곳 둘 데 없이 모조리 앗아가는 것인가.’

나자마자 어미를 잃고,

고사리손을 잡아주던 아비를 앞세우고,

평생을 다정하자 약조한 이와 해로하지 못하고 생목숨을 잃었다.

무자비하게 명줄을 끊어낸 이가 지아비라며 다가왔을 땐 무서웠지만, 진심인 듯 아껴주는 모습에 그새 이 가난한 마음이 그를 품어버렸다.

이제 이 노곤한 마음 한 사람에게 귀애받으며 행복해지려나 기대했다.

다정한 눈빛과 애정을 담아 희롱하는 손짓에 가슴이 설레고 그를 기대하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등 돌려 가버릴 것이었다면.

‘어째서!’

“!”

놀라 홉 뜨인 풍천의 은회색 눈동자가 마치 거울 같았다.

검은 머리를 하늘로 나부끼며 다급하게 손을 뻗어 오는 아수라의 모습이 어째서 이렇게 느릿하게만 느껴지나 했다.

“소희님!!”

다급하게 외치던 아수라의 목소리가 멀게만 느껴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무언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며 소희는 그대로 눈앞이 어두워짐을 느꼈다.

마른 지푸라기처럼 한 점 무게도 없이 무너져내리는 소희를 받아든 것은 바로 곁에 있던 풍천이었다.

한 팔도 채우지 못하는 가늘고 힘없는 자태에 그 역시 적잖게 놀란 모양이었다.

등을 받치고 있는 팔뚝 너머로 꺾여 내린 하얀 목덜미가 불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이…… 소…… 소희님?”

덩치 큰 사내가 잔뜩 놀란 목소리로 손에 들린 여자를 흔들어 보지만, 감긴 두 눈은 뜨일 줄 모르고 그가 흔드는 대로 물속 수초처럼 흔들릴 뿐이었다.

“아수라!”

황급히 다가온 아수라를 향해 풍천이 다급한 목소리를 내며 받쳐 들고 있는 소희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아수라는 얼른 소희를 살피기 시작했다.

애처로울 정도로 말라 희게 질린 그녀는 누가 봐도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든 아수라는 굳은 표정으로 소희를 받아 안아 들었다.

“영력이 고갈되어 잠시 혼절 하신듯하네, 마지막 찌꺼기도 방금 다 빠져나간 듯 하고.”

“아, 그럼 괜찮으신 건가?”

“음. 뭐 큰일은 없을 것 같네. 더 이상 요괴가 태어나는 일도 없을 테고. ……하지만 풍천 자네.”

“큼. 왜?”

풍천은 지은 죄가 있는지라 아수라가 단호한 기색으로 자신을 부르자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적당히 하게.”

“내…… 내가 무얼!”

“어젯밤에 사신의 첫 관문을 통과하신 분이야, 오늘 아침엔 요괴에게 목숨을 위협받았지. 그런 분을 그렇게 다그치듯 몰아세우는 것이 과히 좋아 보이진 않아.”

“몰아세운 것이 아니야, 그저 확실히 하고 싶었을 뿐이지.”

“무엇을 말인가? 확언하면 그 마음이 정해진다던가?”

아수라는 차마 소희 앞에선 하지 못했던 말을 풍천에게 신랄하게 퍼부었다.

풍천, 그는 염라의 불이자 자신의 웃전이었다.

게다가 그의 속내를 짐작하지 못함이 아니었기에 바로 나서지 못하고 적당한 기회를 보고 있었던 건데, 소희의 감정이 이렇게 터져 나올 줄은 몰랐다.

‘조금 더 일찍 움직였더라면.’

아쉬움과 자책이 맞물려 저도 모르게 말끝이 뾰족해지고 말았다.

“조금 더 너그럽게…….”

“너그러워지라니. 휘를 타고 났다지 않는가. 내가 얼마나 아끼고 아껴 말을 꺼냈음을 모르시는 것인가?”

풍천의 목소리가 드물게 커졌다.

“알아. 하지만…….”

‘저분은 이곳에서 오롯이 혼자 아닌가. 적어도 마음을 바라면 몰아세우지는 말아야지.’

아수라의 말은 소리가 되어보지도 못하고 사납게 이어지는 풍천의 말에 잘려버렸다.

“난 염라의 두 번째 불. 소희님이 귀문이 별이 되어주지 않겠다고 하면, 기꺼이 목을 베어 염휘께 진상할 수도 있어.”

“뭐라?”

“나의 하나뿐인 주군인 염휘께는, 바라는 그 무엇이든 가져다 바칠 것이야.”

“풍천!”

갑자기 목소리만큼이나 거칠어진 그의 마음 소리에 아수라가 질색하며 그의 이름을 새되게 불렀다.

하지만 풍천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 할 말을 마저 했다.

“아수라. 거치적거리는 건 이 풍천이 다 치워낼 참이다. 더러운 건 내 손에 묻힐 거라고! 아수라. 염라의 첫 번째 불을 잃는 건 한 번으로 족해.”

마지막엔 흡사 으르렁거리듯 이를 갈며 말을 하는 풍천의 두 눈은 은색으로 번쩍였고, 전신에 피어오른 기세는 검은 안개처럼 일어나 위협적으로 일렁이기까지 했다.

“말도 안 되는 수작으로 주군을 잃고도 참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 이 말이다. 그까짓 예의니 명분이니 하는 것들에 목줄이 채워져 아무것도.”

푸확-.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가 마침내 형상을 갖추었다.

이미 묵빛 갑옷만으로도 충분히 위압감 넘치던 풍천의 전신을 그의 기세가 뚜렷하고도 거칠게 일렁이며 감쌌다.

폭풍을 두른 듯한 위험한 모습에 다시 한번 스산한 소리가 스며들었다.

뭉클거리며 집어삼키듯 한 번 더 팔뚝을 감싸며 대도의 모습을 완벽히 그려내자 사나운 장수의 모습을 한 풍천이 그곳에 나타났다.

“못하는 과거 따윈-.”

풍천은 독 오른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두 번 다시 이 풍천에게는 없을 것이다.”

다짐하듯 음산하게 읊조리는 풍천의 목소리는 지하에서부터 올라오는 듯 한없는 울림을 가지고 대기를 떨게 했다.

동공마저 지워진 그의 은회색 눈동자는 기괴하다기보다 흉포해서 아름다웠다.

“그르르르르-.”

검붉은 연기가 풍천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새어 나오고, 갈 곳 잃은 분노에 가득 찬 영기가 내궁 후원을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고 있는 아수라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풍천을 바라보았다.

“나, 아수라가 지키기로 맹세하였지.”

붉은 입술이 무감한 목소리로 풍천의 말에 차갑게 응수했다.

“아수라의 맹세는 낮과 밤의 경계를 허물며 삼생의 명이 끊어질 때까지 유효한 것이다.”

“그르르르르.”

“그것은 풍천 너라 하여도 예외는 아니다. 이분은 귀문의 별. 그 어떤 명분으로도 이분께 위해를 가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고저 없이 이야기하던 아수라의 눈에서 불꽃이 튄 것도 바로 그때였다.

무저갱을 떠온 것 같이 어둡기만 하던 암흑 속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등 뒤로 가지런하게 늘어뜨린 머리가 사납게 흩날리며 어지럽게 날리고 소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였다.

손에 들린 접선이 위태롭게 흔들리던 그때,

두 염라의 불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소리가 가냘프게 새어 들어왔다.

“흐으음…….”

“소희님!”

기세를 먼저 꺼뜨린 건 아수라였다.

그는 풍천은 이미 안중에 없는 듯 기세를 갈무리해 반색하는 목소리로 깨어나려는 소희를 재차 불렀다.

“소희님! 정신이 드십니까?”

“으음…….”

가늘게 떨리는 길고도 촘촘한 속눈썹이 힘겹게 들리며 아수라에게 시선을 맞대왔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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