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엉켜 드는 바람 (3)
2017.10.02.
풍천은 투명한 보랏빛 찻물을 조심스레 머금었다.
‘말로만 듣던 이 귀한 것을 마시게 될 줄이야.’
단숨에 넘기긴 아까워 천천히 삼킨 찻물의 뒤끝을 따라 상쾌하고 뭐라 말하기 힘든 향이 숨을 따라 잔잔히 퍼졌다.
풍천은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떠서 아수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서녘 달빛으로 우린 것인가?”
“음……. 아는군?”
아수라는 아직까지 희게 질린 얼굴이었지만, 제법 기운 차린 목소리로 화답했다.
확실히 힘이 깃들어 있어 이제는 낮아도 똑똑하게 들렸다.
“이 귀한 것을 어떻게…….”
“말하자면 길고, 간단히 말하자면 은혜갚음이지.”
“저런? 아무튼 그 덕에 입이 제대로 호강하는구먼?”
풍천은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크고 투박한 손으로 작은 찻잔을 조심스럽게 쥐고는 홀짝이는 품새가 마치 의식을 치르는 듯 너무나 경건해 보였다
비는 찻잔을 채우고 또 채워주던 소희의 손이 멎은 것은 주전자가 모조리 비어버린 후였다.
작은 찻잔들은 금세 비어 바닥을 드러냈고, 오전 초록의 정취를 즐기던 이들의 한담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때, 소희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으흠흠.”
“으흐흠!”
작은 손으로 주먹을 말아쥐고 입 앞에 대어 목청을 가다듬는 부산한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용건 있소.’ 하는 모양새였다.
“궁금하신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비어버린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수라가 빙긋 웃었다.
“네. 저…….”
“저런, 무엇이길래 이렇게 기다리셨을까요.”
아수라의 새카만 눈이 가늘어지며 곱게 휘었다.
그는 이미 소희가 계속해서 말을 할 기회를 엿보았다는 것을 아는 말투였다.
‘그렇다면.’
상대가 이미 알고 있다니 미적거릴 이유가 없었다.
겸양의 말도 없이, 소희는 아수라가 내민 기회를 야무지게 맞잡았다.
궁금한 것이 있다고 다소곳한 음색으로 답한 것과는 달리, 그 눈은 아수라를 향해 반짝거리며 빛을 발했다.
“그럼, 어젯밤 일부터 여쭈어보겠습니다.”
소희의 수줍어하던 첫마디와 달리 이어지는 말은 단도직입적이었고,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것들이었다.
느긋한 미소를 머금었던 아수라의 미끈한 얼굴이 설핏 굳었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턱을 굳히고 안색을 갈무리한 건 풍천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한담을 즐기던 따스하던 분위기는 일순간에 얼어붙었다.
그 누구도 설마 소희가 이 이야기를 꺼낼 거라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
누구 것인지 모를 신음 같은 소리가 낮게 새어 나왔다.
날 선 긴장이 세 사람을 헤집고 거칠게 달렸고, 그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러기를 한참. 살얼음판 같은 침묵을 깨뜨린 건 낮의 아수라였다.
“어떤 것부터 말씀 올리면 되겠습니까? 우선 설명 올리는 소장에 대해 먼저 알려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주세요.”
소희는 허리를 곧게 세우며 신경을 아수라에게 집중했다.
아수라는 긴장한 기색이 완연한 소희를 보며 작게 웃었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웃음기를 머금은 아수라의 목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
“소장, 염라의 세 번째 불 아수라입니다. 일전 달밤에 만난 것도, 오늘 소희님 앞에 있는 것도 모두 ‘저’ 입니다.”
아수라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말을 했다.
그의 말은, 함께 할 수 없는 두 가지를 담고 있었다.
괴이하고 사리에 맞지 않는 소리였지만 소희는 반문하는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이해와 함께, 그의 이야기를 격려하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본디 아수라는 전장의 사신. 아수라전의 주인이며 홍월을 다루는 자입니다. 그리고 아수라는 낮과 밤의 경계를 가지는 자이기도 합니다.”
“낮과 밤의 경계요?”
소희는 아수라의 이야기 중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반문했다.
“크흠. 쿨럭쿨럭.”
풍천이 주먹을 말아쥐며 마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듯 밭은기침을 했지만, 아수라는 그런 풍천에게 외려 질책하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그런 신의 없는 행동은 그만하게. 설명해드리기로 하지 않았나.”
“크으으흠.”
풍천은 가감 없는 아수라의 말투에 얼굴이 벌게져 목청을 가다듬었다.
“낮과 밤의 경계를 가지는 자라 함은…… 아까도 보셨겠지만.”
“거창하기는. 남녀 한 몸입니다. 둘이지만 몸이 하나이니 대를 달리해 육신을 지배하는 쪽이 바뀝니다. 거기에 따라 능력도 바뀌지요.”
풍천은 민망함을 만회해보고자 함인지 아수라에 대해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 대는 밤의 아수라가 세를 타고나 낮의 아수라가 유난히 힘들어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을 때, 기어코 아수라의 입에서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쓸데없는 소릴.”
“없는 소리도 아닌 것을. 신의 없이 숨길 참이었는가?”
풍천은 조금 전 아수라의 이야기를 그대로 본인에게 돌려주었다.
다분히 고의적인 것이라 아수라는 풍천을 탓하는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 속 좁은 인사.’
그새 토라진 게군. 덩칫값은 언제 할 참인지.
“흠.”
아수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세상에 차를 즐기는 아수라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아수라는 전장의 사신. 아수라전의 왕인데 접선을 들고 다니며 차를 대접하다니요.”
흥분한 듯한 풍천의 목에 푸른 핏대가 돋으며 목소리가 커졌다.
“전대의 아수라는 대검을 휘두르는 호탕한 자였단 말입니다.”
풍천은 아예 기세를 몰아 전대의 아수라까지 들먹이며 이야기를 이었다.
“전대라 하시면, 풍천께서는 꽤 연치가 높으신가봅니다.”
아무래도 쉽지는 않은 주제라 큰 소리를 내긴 어려웠던 듯 소희가 작게 소곤거렸다.
다부지게 염라의 불을 캐묻던 처음과는 달리 유순한 본래의 심성은 소희를 열아홉 아기씨로 돌아가게 했다.
소희는 달 마마로써 보이던 위엄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상냥한 표정이 된 지 오래였다.
이번에는 머뭇거리는 풍천을 대신해 아수라가 소희의 질문에 답을 했다.
“풍천께서는 거의 천년 가까이 사셨습니다.”
“천년이요?”
인간의 상식에 짙게 밴 소희는 놀라 처음 듣는 까마득한 수명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게 솟아버렸다.
“네, 염라의 불들은 선인들과는 달리 이천에 가까운 수명을 받습니다. 주군이신 염휘께서도 사정은 비슷하시니, 이는 아무래도 모시는 분을 위함이 아닌가 합니다.”
“아……. 그러시구나.”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풍천을 존경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젊은 청년의 얼굴을 하고선 그렇게나 오랜 세월을 버텨왔다니.
이럴 때마다 이들이 사람이 아니고 이곳이 ‘인간’이 살던 그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감탄과 또 다른 의미의 놀람을 담은 눈빛으로 새삼스럽게 풍천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럼 아수라께서는…….”
소희는 상냥하게 대답해준 아수라에게 물었다.
그 역시 이렇게 젊은 서생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풍천처럼 천년을 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저는 이제 막 이십 년이 되었습니다.”
의외로 너무나 젊은 그의 나이에 소희가 깜짝 놀라며 반색했다.
“아수라께서는 저와 비슷한 연배이십니다. 인세에 머물 때 제가 열아홉이었으니. 따지자면 또래이시겠군요.”
작은 공통점이었지만, 그것이라도 충분히 기꺼웠던지 소희는 두 눈을 반달모양으로 휘어 내리며 곱게 웃었다.
“아…… 저런. 소희님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아수라는 저와 비슷한 연배라며 그저 반가워하며 웃는 소희를 바라보다 착잡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3계 중 태어난 것을 기꺼워하는 것은 오로지 중천뿐이랍니다.”
이어진 아수라의 말은 방실거리고 웃던 소희의 표정을 하얗게 얼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선대의 죽음과 동시에 이어지는 후대의 탄생은 그래서 축하받을 수 없었다.
추모하는 분위기 속에 태어나 그를 계승하고, 그의 업을 짊어져야 했기에 그 탄생을 마냥 즐거워할 수 없었다.
“전, 청천의 전 때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자신의 태어난 배경을 설명하는 아수라의 표정은 처음 보는 날 선 것이어서 소희는 반가워 웃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청천의 전……?’
큰 전쟁이라도 있었던 듯한 아수라의 말에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 풍천의 혼잣말이 쓸쓸하게 울렸다.
“……아수라.”
그를 부르는 풍천의 목소리가 지독히도 낮아서 소희는 순간 그가 우는 것 같다 생각했다.
어두워진 낯빛을 한 채 풍천은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아수라를 그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양손 대검을 휘두르던 전대의 아수라는 ‘낮'의 아수라였습니다. 낮의 세를 받아 남성형이 지배했다 합니다. 그래서 검술만큼이나 호쾌한 성품이었다 들었지요.”
“…….”
“청천의 전때 그가 이끌었던 군사가 10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달빛 차가운 밤 그림자에 그 명을 달리하고…….”
“아아…….”
풍천에게서 침음성이 터졌지만, 아수라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만월의 밤에 선대 아수라의 핏물 속에서 태어난 것이 이번 대의 아수라입니다. 그래서 이번 대의 밤의 아수라는 적발에 홍안을 타고 났지요.”
“아……. 만월의 밤에…….”
‘그렇게나 선명하고 눈부신 적발이 그런 의미였다니.’
“그녀의 검에는 자비가 없습니다. 그날 밤 아수라의 자비와 동정심은 전대와 같이 죽어버렸거든요.”
“…….”
“해서,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밤의 아수라 덕에 전 이렇게 푸념이나 하는 서생이 되었습니다만, 이런 저라도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아수라는 무거운 분위기를 의식한 듯 적당히 말을 끊었다.
그의 시선은 놀란 듯 한껏 눈을 키운 소희에게 닿아있었다.
“말동무쯤이야 허락하실 테지요?”
아수라는 말을 마치고는 싱긋 웃었다.
소맷자락을 갈무리하며 접선을 꺼내 펼쳐 드는 그의 얼굴은 어느샌가 단정하고도 온화해져 정말로 한담을 나누던 중 같아 보였다.
접선 너머 까만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어둡게 가라앉아 빛을 발하고 있었다.
“푸념만 하시다니요. 아까 요괴에게서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당할 뻔했었는걸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소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허릴 숙이며 재차 아수라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아수라 역시 급하게 일어서 그런 소희를 향해 맞절을 하며 만류했지만, 소희는 요지부동이었다.
소희는 아수라의 하얀 손에 무심하게 들려진 접선을 보며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아수라의 손에 들린, 오죽으로 살을 대 만든 접선.
묵빛 한지를 둘러 완성한 접선은 아수라의 손에서 가볍게 팔랑이고 있었지만,
저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위세를 뿜어냈는지는 직접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허공을 긁어내리던 무시무시하던 손톱과 날카롭고 기괴하게 빼곡히 들어찬 이빨.
번들거리는 두 눈에 가득한 집착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팔뚝 가득 소름이 오소소 돋아 올라 소희는 얼른 팔을 쓸어내렸다.
‘죽었구나.’
절망과 공포에 잘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버둥거리기만 할 때 자신을 부르던 침착한 음성.
그리고 눈앞의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것과 같은 얼굴을 한 서생을 보았을 때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이 놀라고 말았었다.
‘이리 오시겠습니까?’
내미는 손이 언제 자신을 갈가리 찢어낼지 몰라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가로젓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살려주세요.
환, 도와줘요.
작게 달싹이는 입술은 여지없이 환을 부르고 있었지만, 들릴 리 없는 까닭에 환은 나타나주지 않았다.
하지만 눈물과 식은땀으로 범벅이 돼 간절하게 그를 부르는 말을 하늘은 들어준 덕인지, 그를 대신해 서생이 나타났다.
‘무서워하시니, 그럼 저것을 먼저 정리 하는 게 순서겠군요?’
마치, 눈앞의 요괴가 보이지 않는 듯 가벼운 말을 남기고는 벌벌 떠는 소희를 제 뒤로 끌어 당겨 놓았다.
선이 가는 서생이 저 무서운 것에 맞서서 승산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소희가 만류할 새도 없이 손에 쥔 접선을 툭- 털어냈다.
마치 물 묻은 손을 털듯 성의 없고, 의미 없는 행동 같아 보였지만, 눈앞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서생이 흔드는 손목을 따라 접선이 낭창하게 늘어지듯 길어나 어느덧 다섯 자나 되는 검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빛을 허락하지 않는 듯한 어둡고 묵직한 색이 물린 늘씬한 검.
그 검은 서생과 묘하게 잘 어울려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검을 든 서생은 조금 전과는 달리 싸늘하고 비정해보여 소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서생이 나서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외마디 소릴 지르며 피를 뿌리고 죽어가는 건 소희, 바로 자신이었겠지만 다행히도 이번엔 소희 쪽이 아니었다.
허공을 마구잡이로 찢어발기던 그것의 손놀림은 이내 그 궤를 달리하다 바닥으로 늘어져 내렸다.
이윽고 귀를 찢는 것 같은 단말마와 함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도록 숨을 죽이고 모든 것을 지켜봤던 소희와 소맷자락을 가볍게 흔들어 칼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 태워버리는 서생의 눈이 마주쳤다.
서생의 새카만 눈은 불꽃을 품고 있는 듯 무섭도록 아름답게 일렁였고, 그 안의 동공은 맹수와 같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채였다.
어디선가 보았던 그 눈동자.
매섭게 다물린 입에 사르르 미소가 맺히고 사납게 찢어진 눈동자가 녹아내리듯 풀리며 유순하게 내려앉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간극을 눈앞에서 봤음에도 소희는 순하게 내려앉은 표정을 한 서생이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익숙함이 그녀를 그가 내민 손을 잡게 했고, 엉망이 되어버린 방에 염화를 불러내 ‘부정한’ 것을 태워내는 것을 지켜보게 했다.
‘무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지금 잠시 흐트러졌을 뿐, 아직 죽은 것이 아닙니다.’
양해를 구한 뒤 손끝을 튕겨 영까지 태워버린다는 염화를 불러내는 그의 모습에는 정중하고도 무시하지 못할 엄중함이 담겨있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었다.
유약한 서생의 모습을 한 그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기백은 마치 전사와 같아 ‘소장’이라며 본인을 칭하는 것이 정말이지 잘 어울린다 생각했었다.
그가 아수라라는 것은 의외였지만.
“그렇다면, 가끔 이렇게 차를 청하는 벗으로 남게 해주시겠습니까?”
문득 귓가를 부드럽게 타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소희는 상념에서 퍼뜩 깨어났다.
접선을 들어 가볍게 부쳐내며 웃는 아수라의 얼굴이 시선에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기대에 찬 까만 눈동자가 가감 없이 맞닿아 옴을 느꼈다.
“그래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소희는 아수라를 향해 예쁘게 미소 지었다.
한번은 목숨을 위협받았고 한번은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아수라와의 인연도 보통이 아니다 싶었다. 소희는 아수라의 청을 물리지 않고 기쁘게 응낙했다.
옆에 앉은 풍천의 미간이 미미하게 구겨지는 것이 느껴졌으나, 어째서인지 그는 소희를 볼 때마다 저런 인상이어서 으레 넘겨버렸다.
“크흠……. 아니 뭐, 벗을 청하는 자리는 아닐 테고. 크흠, 하던 이야기나 마저 마무리 짓지, 아수라.”
말을 막으며 훼방 놓을 땐 언제고.
풍천은 그새 마음이 변한 것인지 다정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을 재촉했다.
“그럴까요? 이 이야기는 조금 길어질 테니 시비를 불러 다과를 청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소희님?”
“아. 예. 저…… 그런데 아까 내궁 시비를…….”
반색하던 것도 잠시, 아수라가 소희 침전을 들쑤시던 요괴를 처리하며 내궁 시비를 모두 궐 밖으로 물린 것이 생각나 소희가 난색을 표했다.
“이미, 돌아와 있습니다.”
이런 일에 익숙한 아이들이지요.
작게 덧붙인 아수라가 소희 등 뒤로 “다과를 좀 내오련?” 다정한 말을 넘기자 정말 놀랍게도 “네 아수라님.”이라며 곧장 답이 따라왔다.
“!”
“익숙한 아이들이라니까요.”
부드럽게 웃는 아수라의 목소리가 밝게 달아오른 한낮의 태양빛에 녹아들 듯 스며 흩어지고 그들의 긴 이야기는 다과를 먹으며 계속 이어졌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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