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엉켜 드는 바람 (2)
2017.09.29.
뺨을 간질이는 미풍에 은근히 온기가 실릴 때쯤에서야 소희는 자신을 아수라라고 소개한 남자에게 말을 걸어볼 정신이 들었다.
“……아수라……는 그러니까…….”
“말씀하세요.”
남자는 까만 눈을 선량하게 접어 내리며 실풋 웃었다.
그는 소희가 무엇을 묻고 싶어 하는지 짐작한 눈치였다.
미풍이 다시 그의 까만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지나갈 때까지 소희는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수라라는 것은 관직의 이름이온지요?”
굉장히 고심하여 고르고 골랐을 그녀의 말에 ‘아수라’가 즐거운 목소릴 터트렸다.
청량하고 듣기 좋은 소리에 소희는 제가 한 말이 그를 웃게 만들었다는 것도 잊고 후원을 메우는 그의 웃음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하하하핫- 달 마마, 아니 소희님. 정말이지 최근 들어 소장을 소리 내 웃게 만든 분은 소희님이 유일합니다.”
“소장이라시면…….”
“염라의 세 번째 불, 아수라입니다.”
“그렇지만, 그건…….”
“아아…….”
그는 소희의 말에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길고 가는 손가락이 가지런히 얼굴을 따라 슥 지나갔다.
“소장, 찾아계시옵니까?”
순식간에 그의 손을 따라 모습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그녀’, 아수라가 나타났다.
홍염의 눈동자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익숙한’ 적발의 미녀가 도톰한 입술을 열어 요염한 목소리로, 소희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아수라!”
소희는 그녀를 반가워하는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았지만 반가움에 크게 소리치고 말았다.
햇살 아래 불꽃처럼 일렁이는 붉은 머리카락이 눈웃음 짓는 그녀처럼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환한 태양 아래 그녀는 달빛 아래서만큼 생기 넘쳐 보이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한층 더 요염했다.
어딘가 아스라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그러나 아수라의 지독히도 현실감 없는 미모도 소희의 궁금함을 반감시키진 못했다.
“아수라 이게 어떻게……!”
소희가 급하게 말을 잇는 사이 아수라의 신형이 물결치듯 크게 울렁였다.
“아. 이런. 큰일이네요.”
아수라는 전혀 위기감 없는 목소리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며 느긋하게 웃었다.
소희는 그녀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이냐 묻기도 전 다시 한번 모습이 흐트러지는가 싶더니 그녀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아수라의 자리에 파리하게 질린 ‘그’ 남자가 나타났다.
그때에서야 눈앞의 선량하게 생긴, 마냥 서생 같은 이 남자가 어찌 됐든 ‘아수라’라는 말을 믿게 되었다.
“아수라?”
그러나 ‘돌아온’ 아수라의 상태는 척 보기에도 굉장히 좋지 못했다.
푸르스름하게 질린 하얀 얼굴엔 식은땀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수라는 검고 풍성한 속눈썹을 바르르 떨며 감긴 두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자신을 부르는 소희를 바라보는 그의 어두운 눈동자에는 아직 ‘그녀’의 흔적이 남은 듯 검붉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괜찮아요? 차라도 한잔…….”
소희는 그의 눈을 바라보다 당황하여 얼른 찻잔을 가져다 그에게 들려주었다.
그렇게 살짝 스친 손끝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손끝이 찡하게 울렸다.
“…….”
아수라는 소희가 건네주는 차를 거절하지 않았다.
입술을 작게 달싹이는 품새가 무언가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대로 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해, 오히려 지금 그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소희는 머뭇거리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는 아수라의 손을 붙잡았다.
“저, 잠시…….”
비록 소맷부리 안에 단단히 감춰둔 손이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제가 먼저 잡은 사내의 손이었다.
누가 시킨 것도, 강제한 것도 아니었고 음심을 품은 것도 아니었건만.
열아홉 아기씨의 수줍음이 금세 얼굴을 달구고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였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아수라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굳이 소희도 아수라도 말을 꺼내진 않았다.
의도야 뻔했고, 그 마음이 따사로웠을 뿐이다.
“…….”
부끄러워 시선을 발끝에 매어둔 채로 소희는 차갑게 얼어버린 아수라의 손을 만져주었다.
언젠가 병상에 누워계신 아버지의 손을 매만져드렸던 것처럼.
“호-.”
새파랗게 얼어버린 손을 문지른다, 입김을 쐬어준다 갖은 애를 써도 아수라는 쉬이 좋아지질 않았다.
“두십시오.”
한참 만에야 아수라가 입을 뗐다.
기실, 아수라는 여태까지 호흡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래서 부끄러워하며 한기가 돋은 그의 손을 주물러 주는 소희의 귀여운 모습을 보면서도 만류하지 못했다.
끝도 없는 어둠으로 그려낸 새카만 눈동자가 소희의 모습을 가만히 담아냈다.
‘달 마마께 이런 시중을 받아본 염라의 불은 아마 내가 처음일 것이다.’
희게 질린 표정 아래, 감춰진 입 끝이 힘없이 미소를 그려냈다.
낮의 기운을 바닥이 날 정도로 끌어다 써가며 밤의 아수라를 무리하게 불러낸 덕에 영기의 균형이 깨져버렸다.
양기가 바닥이 나자 넘치는 음기가 전신을 지배했다.
뼈마디에 스미는 냉기에 내뱉는 날숨마저 서늘했다.
달 마마의 작은 손이 쉴 새 없이 그를 격려하듯 조심스럽게 매만져주지만, 어차피 육신의 문제가 아니니 달 마마의 수고로움은 실상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수라 자신을 붙들고 있는 작은 손을 밀어내지 못한 건, 자신을 정성으로 다독이는 그 손길에 은근한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럴 리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수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비웃으며 가볍게 머리를 털어냈다.
“소희님.”
낮게 깔려 쩍쩍 갈라지는 그의 목소리에 비로소 소희가 고개를 들자, ‘아수라’가 고개를 살며시 내저었다.
“시간이…… 지나야 한답니다.”
“아…….”
“마음써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읍하여 소장…….”
아수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그들의 사이로 검은 인영이 갑작스레 파고 들어왔다.
“아수라!”
깜짝 놀란 소희가 아수라를 부르며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줘 끌어당겼다.
그를 보호하려는 본능적인 몸짓이었다.
바람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나타난 남자는 눈에 익은 묵빛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그의 손이 소희 너머 막 아수라에 닿으려 할 때,
“풍천대제?”
소희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소리는 속삭임보다 작았다.
하지만 풍천은 그녀의 말에 안쓰러울 정도로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마마! 아니, 소희님. 소장이 그만 다급하여 이런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저, 그러나…….”
분명히 말은 소희에게 하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수시로 자신의 뒤에 쓰러질 듯 앉아 있는 아수라에게 향했다.
태산 같은 사내가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흘끔거리는 모습은 꽤 우스꽝스러웠다.
웃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가 쩔쩔매는 모습에 자꾸만 입꼬리가 파들거렸다.
‘아아, 어떻게 하지. 풍천대제께서 저런 표정을 지으실 줄이야.’
커다랗고 단단한 주먹을 맞잡고 쩔쩔매는 모습이라니.
그만큼 그의 뒤에 있는 아수라의 상태가 좋지 못함이었다는 뜻이었겠지만, 소희는 풍천 덕에 그만 마음이 탁 풀려버렸다.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으나. 안심이 되자 저도 모르게 자꾸만 미소가 지어지려 했다.
여전히 파랗게 질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아수라의 모습은 당장 쓰러진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수라가 진즉에 시비를 내궁 밖으로 모두 물려 놓은 터라 소리친다고 해도 와줄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상태가 안 좋은 아수라를 혼자 두고 갈 수도 없어 애타던 참이었다.
그저 파랗게 얼어 버린 손을 주물러주는 것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던 처지에 나타나준 풍천은 은인이었다.
“잘 오셨습니다.”
소희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막막하고 무서웠던 순간 나타나준 그가 마냥 듬직하고, 좋아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풍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걸 알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반갑고 기꺼워 마냥 웃어주었다.
“풍천. 어서, 도와주세요.”
금세라도 아수라를 어떻게든 해줄 것 같던, 풍천의 부리부리한 눈이 제게 고정되어 있자 소희는 채근하듯 풍천을 불렀다.
“아수라께서 형편이 급하십니다.”
아수라의 상태를 환기시키듯 그에게 일러주었다.
소희의 말에 풍천은 어딘가 넋이 빠진 것 같던 표정을 단박에 지우고는 다시 낯빛을 굳혔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실례하겠습니다.”
“어서. 부탁드려요.”
풍천은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소희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이 행동했다.
풍천이 탄탄하고 두꺼운 팔을 내밀어 탁자에 기대듯 앉아있는 아수라를 가볍게 부축해 일으켰다.
한쪽 어깨에 거의 들쳐 메다시피 해 일으켜진 아수라는 아까와 비교해 별 차이가 없었지만, 그녀의 기분 탓인지 표정이 느른하게 풀린 것도 같았다.
아수라도 소희도 풍천의 등장에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다행이다. 이제 의원께 보여드리면.’
소희는 놀라 바짝 쪼여들던 가슴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밤을 지새우고, 혼비백산하게 놀란 다음 애를 태웠더니 정말 기진맥진해지고 말았다.
풍천과 아수라가 돌아가면 자신도 침전으로 돌아가 잠깐이나마 몸을 뉘고 싶었다.
풍천이 다시 한번 아수라를 추슬러 단단히 붙들고 소희에게 입을 열었다.
“이대로 아수라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
“안 돼. 내궁에 요괴가 스미어들었어. 혼자 계시면 위험해.”
풍천의 말을 자르고 들려온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
느리게 두 눈을 깜빡이며 꺼져드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는 아수라는 여전히 무척 지쳐 보였지만, 그 눈빛만은 전에 없이 단호했다.
“뭐?”
그리고 그의 말은 풍천의 발을 묶는 데 성공했다.
풍천은 예상외의 소리에 꽤나 놀란 듯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요괴?”
당장에라도 아수라를 데리고 가버릴 것 같이 허둥대던 풍천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확인하듯 소희를 내려다보았다.
대답을 바라는 풍천의 시선에 소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됐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아수라를 풍천은 미련 없이 탁자에 다시 내려 앉혔다.
병자를 앉히는 풍천도, 다시 앉혀지는 아수라도 모두 담담한 표정이라 기겁을 하고 만류하는 건 소희, 그녀뿐이었다.
“이러지 마세요. 얼른 의원께 보여야 합니다. 아수라께선 지금 많이 편찮으세요.”
흡사 비명 지르듯 풍천에게 항의했지만, 그도 아수라도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희게 질려 쉴 새 없이 턱밑으로 땀을 떨어뜨리는 아수라를 향해 풍천이 나지막하게 무언가를 외우자 예의 검은 연기가 아수라를 두텁게 감싸 안았다.
“아!”
그 모습에 놀란 소희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뭉글뭉글 피어난 먹구름 같은 것은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아수라를 뒤덮었다.
“저…… 저것은!”
당황해서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은 소희를 풍천이 손을 뻗어 제지했다.
“정양케 하는 것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괜찮은 것입니까?”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이 걸리니 앉으시지요.”
단호한 풍천의 말에 소희는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태양빛이 눈부신 후원의 정자 아래 먹구름에 휩싸인 것 같은 아수라를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풍천으로부터 시작된 살아있는 듯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검은 연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착실하게 아수라를 칭칭 감아 죄어 마치 그를 집어삼키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언뜻언뜻 보이는 아수라의 표정은 오히려 점점 빠르게 좋아지고 있었다.
걱정도 잠시, 눈에 보이게 좋아지는 모습에 소희도 안심한 듯 표정이 한결 좋아졌다.
“그것은 대체…….”
머뭇거리는 소희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확연한 호기심이었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풍천이 모를 리 없었다.
“급한 대로 제 식의 ‘처방’을 한 것입니다.”
“처방이라시면…….”
궁금해하는 말 뒤에 숨은 걱정을 모름이 아니었다.
“영력이 고갈되었으니 제 것을 나눠 주는 겁니다.”
익숙지 않은 다정함에 풍천이 답지 않게 쑥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주변을 느릿하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천천히 돌아가는 풍천의 시선을 따라, 붉어진 눈꼬리가 가늘어지고, 싱글거리느라 처져있던 눈썹이 단호하게 세워졌다.
방금 전까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매서운 시선으로 무언가를 찾는 듯한 풍천의 모습에 소희가 의아해한 것도 잠시.
“없어, 태어난 것이라 그것 하나였어.”
마치 그런 풍천의 시선에 답을 주듯 아수라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수라의 말에 풍천은 은은하게 빛을 뿌리는 은회색의 눈을 돌려 소희를 바라보았다.
“태어났다……?”
낮게 읊조린 목소리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잔뜩 묻어 있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풍천은 무례하리만큼 노골적인 시선으로 천천히 시간을 들여 소희를 훑어 내렸다.
“태어났군……?”
그리고선 확인하듯 아수라를 향해 되묻는 풍천의 말에 아수라는 작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을 하고, 웃음을 터트릴 정도로 아수라가 회복된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지만, 심상치 않은 이야기에 마냥 기뻐할 수도 없어 소희는 난감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조금 전에 소희의 침전에서 보았던 ‘요괴’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의 탄생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들은 분명히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인 것이 분명했는데, 소희는 어째서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민망하고.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들었다.
소희가 괜스레 소매 끝단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끝나지 않은 대화 소리가 나지막이 감겨들었다.
“그러니, 곁은 떠날 수가 없어.”
“삭이지 못한 것이 남아 자라났군?”
“그런지도, 하나로 끝나면 좋으련만.”
“하나 더 나온다면 큰일일세, 자네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라니. 역시 귀문의 별이라는 건가?”
“아…… 그건…….”
어딘지 당황한 듯한 아수라와 심각한 표정의 풍천은 말을 주고받으며 상황을 정리해가는 듯싶었다.
하지만 소희는 아니었다.
영문도 모른 채 가만히 끌려 다니는 이런 식은 더 이상 사양이었다.
도대체 어젯밤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자신도 알아야겠다 마음을 정하고, 땅을 향해 꺼져들었던 고개를 그들을 향해 돌렸다.
그래, 이런 식은 더 이상 사양이었다.
자신을 휘두르는 건 환 하나로 충분했다.
소희는 망각하고 있던 자신의 위치를 떠올렸다.
‘염라의 곁을 지키고, 달 아이를 품어내는 하계의 어미. 달 마마.’
귀문의 별.
자신은 귀문의 별로 살기로 하지 않았던가.
강제된 충성이야 거절했다지만, 그것이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 다니겠다는 의미는 아니었을 터.
환의 곁에 서기로 한 이상, 자신의 자리는 스스로 만들어 볼 참이다.
조금이라도, 당당해지도록.
빛나는 그에게 어울릴 수 있게.
노력할 참이다.
긴장감과 고양감으로 다급하게 들이쉰 숨에 가슴 깊은 곳이 찌르르 울린다.
“풍천, 차 한잔 들겠어요?”
소희는 아수라가 준비한 찻주전자를 보이며 풍천을 향해 미소 지었다.
“아수라께서 귀한 차를 부러 준비해주셨으니 자리에 앉으세요.”
쪼르르르-
풍천 앞에 놓인 하얀 찻잔에 보라색 찻물이 찰랑이며 채워지기 시작했다.
시큰둥하기 짝이 없던 풍천의 눈이 찻잔을 채우는 고운 색감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수라의 말처럼 몹시 귀한 차이긴 했던 모양이었다.
“허, 이건.”
감탄사를 내뱉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셔 음미하는 풍천의 얼굴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덕분에 조금 전까지 잔뜩 날을 세우던 분위기는 반대로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그리고 풍천이 찻잔을 다 비워갈 무렵 아수라에게 뒤덮인 검은 연기도 모조리 걷혔다.
비교적 멀쩡해진 아수라의 모습에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차례로 안도감이 찾아들고, 그제야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진정되었다.
작은 새소리와 눈부신 빛내림에 각자의 사정을 담은 그림자가 온화하게 드리워졌다.
후원의 전경은 차를 즐기는 세 사람의 그림 같은 평화로운 한때,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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