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16화 (16/114)

16. 엉켜 드는 바람 (1)

2017.09.25.

창백한 달이 기울어지고, 아침 해가 구석구석 잊지 않고 도탑게 쌓인 안개를 헤치기 시작했다.

따스한 햇살이 밤새 차곡히 쌓인 냉기를 몰아내기 시작하는 새벽.

새소리와 잔잔하게 들리는 후원정의 물소리만이 내궁 침전을 가득 채우는 그 시간이 되도록 소희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환은 평소와는 확실히 달랐다.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 침전까지 데려다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다정하긴 하였으나 한걸음 멀어진 느낌이었고, 든든히 옆자리를 지켜주었지만 정중해서 싸늘하였다.

소희는 환이 돌아간 후 어쩐지 마음이 쓰라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창밖의 햇살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침전 안으로 길게 늘어지자, 문 바깥에서 시비들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넘어왔다.

“기침하셨사옵니까.”

“소세 물 올리리까?”

소희는 시비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동그라니 말아 침상 위에서 웅크린 채 얕은 숨마저 가만히 죽였다.

“…….”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소희는 문밖에서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등을 돌려 누운 채로 가만히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소곤거리던 목소리까지 모두 멀어진 후에야 소희는 이불을 걷고 침상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내궁 후원이 잘 보이는 의자에 앉아 창밖의 눈부신 광경을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하아…….”

밤새 혹사당한 두 눈은 몹시 쓰라렸지만 잠시 감았다 뜨는 것으로 뻑뻑한 눈을 달랬다.

‘간밤 도대체 사신의 문에서 무얼 본 걸까.’

밤 내내 그녀를 괴롭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휘?”

‘도대체 휘는 무엇일까.’

소희는 시린 눈에 차오른 눈물을 슬쩍 닦아내며 눈을 문질렀다.

눈을 감자 기억 속의 모습이 조금 더 생생하게 그려졌다.

‘하지만 두 지존께 한 분의 비라니……! 설마…… 그래서 이렇게!’

온몸에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소리를 치던 풍천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했다.

은회색 눈동자에 가득 찬 경악과 분노,

그리고 자신을 향하던 묘한 적대감.

‘왜일까. 휘는 무얼 이름하는 것일까.’

소희는 쓰라린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탁자 위의 팔에 그대로 턱을 괴었다.

저절로 눈이 감겨들었다.

하지만 감긴 눈두덩 위로 햇살이 비쳐 눈을 감고 있어도 온통 환했다.

‘어제 환에게 물었어야 했던가.’

환을 떠올리자 소희의 가슴에 붉은 불이 지펴진 듯 열기가 퍼지며 그와 함께 알싸한 고통이 뒤따랐다.

염라의 두 불꽃이 자리를 뜨자 함께 꺼진 그의 눈빛의 온기.

그들이 사신의 문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소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고 있는 눈꺼풀을 통해 환한 빛내림이 느껴졌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은 무척이나 강렬하고 따스해 심란했던 마음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전신을 감싸 안는 온기에 서럽게 날 서 있던 신경이 가만히 가라앉았다.

간밤 뜬눈으로 밤새웠던 피곤함이 일순 몰아닥쳤다.

‘잠시만 이러고 있을까.’

하지만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전신을 따뜻하게 달궈주던 태양빛이 사라지고 감긴 두 눈 안이 일시에 어두워졌다.

소희는 불시에 닥쳐든 서늘함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누구……?”

소희가 고개를 돌리자, 후원으로 난 창 바깥에 양산을 쓴 미형의 사내가 소희를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나타난 사내를 보자 문득 소름이 돋았다.

“누구십니까?”

밤 내내 굳어 있던 목소리를 짜내느라 작고 갈라진 목소리가 삐죽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 작은 소리로도 충분했던 모양인지 남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그런 느릿하고도 여유로운 태도에 오히려 뉘시냐 두어 번 재촉하듯 물은 소희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시간을 들여 손에 들고 있던 양산을 곱게 접어 손에 들고서야 남자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몰라보시는군요?”

소희와 똑같은 흑단 같은 머리채를 해에 달구어진 따스한 아침 바람에 살랑이게 둔 남자의 목소리는 바람만큼이나 온유하고 부드러웠다.

다정하고 정중한 목소리에는 웃음이 서려 듣는 이의 경계를 허물기에 충분했다.

점잖은 모습과 단정한 얼굴이 화려하진 않아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모습이었다.

‘몰라보다니.’

그의 말이 마치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 같아 소희는 시비를 불러오는 대신 가만히 서서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용모만큼이나 단정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길고 윤이 나는 검은 머리는 동곳으로 작게 여미고 나머지는 등 뒤로 늘어뜨려 놓았다.

푸른빛이 도는 것 같은 하얀 피부는 그의 머리카락과 대비되어 더욱 하얗게 빛을 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가늘고 길게 빠진 눈매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검은 눈동자가 뚜렷하게 자리해 희미한 인상을 무게 있게 잡아주었다.

전체적으로 선이 가늘고 선량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손에 양산이 아니라 접선이나 서책이 쥐어져 있으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서생 느낌.

남자는 소희가 자신을 찬찬히 뜯어보도록 가만히 서서 기다려주었다.

그는 소희 시선이 그의 발끝까지 남김없이 훑고 내려간 뒤에야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오시겠습니까?”

볕이 좋답니다.

웃음기 서린 듣기 좋은 목소리에 소희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나 한 걸음을 떼고 말았다.

“!”

무저갱에서 떠온 듯한 까만 눈동자.

분명 처음 보는데 어째서 낯설지 않은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온화한 음색에 절로 마음이 동했다.

서생과 같은 남자는 상냥하게 웃고 있음에도 단정하기만 한 입매가 어딘지 요염했고, 무채색 동공 안에서 홍염이 일렁이고만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사박-

소희는 한걸음을 뗐다.

전신이 나른하고 몽롱한 기분이 드는 것은 간밤 마음을 끓이며 밤을 샜기 때문이다.

자꾸만 눈이 감기는 건 창에서 쏟아지는 눈부신 태양 때문이다.

사박-

또 한걸음이 주저 없이 나갔고, 막 창밖의 남자가 웃으며,

“아니면, 문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라고 말을 할 때까지 아무런 의구심이 들지 않았다.

그의 단정한 목소리에 홀린 것처럼 닫힌 문을 열려던 찰나.

창가에 서 있던 그를 돌아본 것은 그저 아무 뜻 없는 행동이었다.

자신에게 미묘하게 거리를 두는 것 같은 서늘한 환의 태도에 온밤 내내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저 다정한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하고 만 것은.

그래서 그가 시키는 대로 문을 열면 웃어주려나 기대 했을지도 모른다.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같이 배시시 웃으며 돌아본 것은, 사실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볍게 돌아 그의 얼굴을 바라본 소희는 순간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바짝 나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흑발을 잔잔히 흩날리며 따사롭게 미소 짓던 그가 기괴하리만큼 입이 쭈욱 찢어내고선 얼굴을 창안으로 들이밀며 웃고 있었던 것이다.

입안에 촘촘히 박혀있는 날카로운 이들은 흡사 톱니 같아, 흘러내리는 끈적한 액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끔찍한 모습이었다.

“어…… 어…… 헛.”

생각지 못한 기괴한 모습에 전신에 소름이 돋고 온몸이 얼어버렸다.

목이 졸린 듯한 신음이 간신히 새어나왔다.

달달 떨리는 다리가 제 일을 못 하고 기어이 풀썩 꺾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소희에게 정체를 들키자 본격적으로 방안으로 들어오려 무척 애를 쓰기 시작했다.

‘우드득-.’

이미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돌아간 목을 괴이한 소릴 내가며 더욱 비틀어 방안으로 밀어 넣으려 안간힘을 썼다.

큰 키로 낮은 창을 넘어오는 건 꽤 쉬운 일이었을 텐데.

창밖의 그것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 같았다.

마구잡이로 목을 잡아 비틀며 머리를 쑤셔 넣으려는 것과는 반대로 얼굴이 잔뜩 짓이겨지기만 했다.

‘키이이이이이야앗!’

그것은 조금 전의 침착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는 어디가고 쇠를 긁어내리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를 연이어 내질렀다.

귀가 터져버릴 것 같은 높고 소름 끼치는 소리에 소희는 정신이 자꾸만 아득해졌다.

‘키야아아아앗-!’

머릿속을 갈고리로 걸어 긁어내는 소리에 손으로 귀를 막았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몸을 추스르려는 노력 역시 부질없었다.

수용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 공포에 몸은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떨거나 늘어지기만 했다.

온전한 ‘본능’만이 살고 싶다는 외침을 끌어냈다.

무서워.

살려주세요.

후드득 눈물이 떨어지며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턱을 적셨다.

“사…… 살려…….”

환.

이 순간 가장 다급하게 생각나는 것은 오로지 그였다.

자신에게 한걸음 물러나 냉정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소희가 아닌 '별'을 보던 그.

이 순간마저 기댈 곳은 냉정해진 그뿐이었다.

얼굴을 흉측하게 일그러뜨리며 허공을 길게 뻗은 손톱으로 긁어내리는 그것을 보며 소희는 안간힘을 다해 목소릴 내려 했다.

“화……안…… 환.”

살려줘요.

무서워요.

“캬아아아앗-!”

속삭임처럼 허공에서 흩어지는 부름은 두려움에 떨리는 숨결보다 작아 귓가에 닿기도 전 사라지고 말았다.

주저앉은 자리에서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문가로 기어가려던 소희는 뒤에서 들리는 단정한 목소리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이리 오시겠습니까?”

“!”

허릴 굽혀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서 있는 남자는 조금 전까지 창문 밖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던 서생의 얼굴을 한 그것.

그것의 얼굴을 한 사내였기 때문이었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침전으로 들어선 사내가 다시 입을 뗐다.

“어서요.”

소희의 절망 어린 눈동자가 부릅떠지며 말릴 새도 없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덜덜 떨리는 턱을 타고 마침내, 눈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며 짙은 얼룩을 만들어 냈다.

쪼르르륵-

경쾌한 물소리와 함께 투명한 보랏빛 물이 하얀 자기잔을 채웠다.

“이제 좀 진정 되십니까?”

후원에 놓인 정자에 앉아 달콤한 향이 나는 차를 받아드는 소희를 향해 그가 물어왔다.

보기에도 딱하게 움찔 떨리는 어깨가 가여웠다.

걱정이 깃든 까만 눈동자는 겁을 먹고 애처롭게 떨리면서도, 끝끝내 작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하는 소희의 상냥한 마음씀씀이에 그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놀라셨겠습니다.”

미소만큼이나 잦아든 목소리였다.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한 음색에 소희는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대답해주었다.

“……네.”

놀라다마다.

놀랬겠기만 하였겠는가.

이제 죽었구나 싶은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소희는 아직도 잘게 떨리는 손을 소맷자락으로 살짝 가렸다.

쥐고 있는 찻잔에 계속해 작은 파문이 생기는 것까지야 감출 수 없다 치더라도, 저이의 면전에서 겁먹고 바르르 떠는 모습을 대놓고 보이고 싶진 않았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만든 짙은 그림자 덕에 까만 눈동자가 가려져 도무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너무도 깎아놓은 듯 매끈한 표정이라 속내를 짐작키 어려웠다.

“하아.”

남자는 한숨도 아니고 웃음도 아닌 묘한 소리를 내며 이내 날렵한 콧날 아래 입술을 미끄러뜨려 미소를 그려냈다.

“…….”

소희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자신을 무척이나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을 추스르기도 벅차 그의 마음까지 배려할 기력이 없었다.

그래서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외면하고 놀란 마음을 추스르는 데만 집중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찻잔을 비워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보라색 찻물이 여간 상쾌한 것이 아니었다.

찻물 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겁을 먹고 움츠러졌던 몸이 한결 부드럽게 풀렸다.

“……이렇게 인사드리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담담한 말투에 서린 것은 안타까움이었지만, 소희는 그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분명, 아까 침전으로 들어오려 애쓰던 그것과는 다른 이인 걸 알지만, 아직 그것과 똑같은 얼굴을 한 그를 마주하기엔 조금 전 일의 충격이 컸다.

놀라 파들거리는 제 심장이 딱하기 그지없었다.

단지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다시 손이 가늘게 경련했다.

‘괜찮아.’

소희는 찻잔을 쥔 손을 내려다보며 주문처럼 되뇌었다.

입안에서 작게 굴리는 말이 목숨이라도 되는 양, 공들여 한 자 한 자.

소희의 태도는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런 소희의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 그녀의 태도에 아무런 불쾌감을 내비치지 않았다.

다만 비어버린 그녀의 찻잔에 다시 찻물을 채워 주었을 뿐이었다.

‘쪼르르륵-’

빈 잔에 다시금 가득이 보랏빛 물이 차오르며 달콤한 향기를 물큰 풍겼다.

향기로운 꽃내음을 머금은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와 식은땀을 식혀주고, 놀라 퍼덕이던 가슴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었다.

“이런 상황을 염휘께서 미리 언질 주셨을 테지요.”

남자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설마 이 말은……?’

소희는 그의 말에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시선을 들어 올려 처음으로 그를 올곧게 마주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남자는 소희가 뭘 떠올렸는지 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지금 달 마마께서는 표적이 된 겁니다. 굶주려 죽기 직전인 이 앞에 놓인 진수성찬. 그것이 지금 소희님입니다.”

“아아…… 저것이 그…….”

‘환’이 주는 효과는 대단했다.

단순히 그의 언급이 가볍게 스쳤을 뿐인데도 소희는 ‘그것’과 같은 얼굴을 한 사내를 바라보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오히려 대화에 적극적이 되었다.

“맞습니다. 저것이 바로 요괴입니다.”

“요괴가…… 요괴를 처음 본지라…….”

남자는 허둥거리는 소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인계에는 요괴가 없지요. 그래서 중천에서 사신의 문을 여는 것이랍니다. 요괴로부터 영을 지키려고요.”

남자의 말에 소희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럼 요괴는 이곳에만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항시, 요괴로부터 영을 보호해야지요. 요괴가 영을 탐내니 말입니다.”

“탐내다니요?”

“영을 빼앗는 것입니다. 잡아먹는다고 표현하면 이해가 쉽겠습니까?”

남자는 소름 끼치는 무서운 이야기를 잘도 태연한 표정으로 했다.

“본래 요괴도 영이었던 존재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망가지면 요괴가 됩니다. 새롭게 생명을 받는 건 영에 한해서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것을 탐내지요.”

“그래서…….”

“한번 망가진 건, 돌아오지 않습니다만. 미련을 못 버리더군요. 기어코 멀쩡한 영을 빼앗으려 들죠.”

마치, 어린 것을 앞에 두고 글줄을 가르치는 것같이.

차근차근.

조곤조곤.

이해하기 쉽게.

나른하고 평화롭기까지 한 남자의 목소리와는 달리 내용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뺏기지 않을 것입니다.”

결연한 표정으로 작지만 다부진 소릴 내며 소희가 남자의 말을 잘랐다.

“뺏기지 않으실 겁니다.”

살랑대는 바람처럼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남자가 그녀의 다짐을 확인해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소희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라 그만 찻잔을 놓치고 말았다.

“이 아수라가 지켜 드릴 테니까요.”

쨍그랑-

맞은편에서 검은 머리를 나부끼며 선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

'아수라'가 찻잔을 들어 우아한 태도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수라?!”

경악한 듯 크게 치뜬 소희의 커다란 눈이 그의 하얀 얼굴에 집요하게 달라붙었지만, 자신을 아수라라 칭한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차를 드시겠습니까? 이래봬도 귀한 차입니다.”

“아수라?!”

“무려, 상천에서 공수해왔거든요.”

쪼르르륵-

아수라는 비어버린 자신의 찻잔에 다시 보라색 고운 찻물을 가득 채웠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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