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신의 첫 번째 문 (5)
2017.09.22.
달 푸른 밤, 소청조가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날았다.
청조의 푸른 깃이 달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작은 새는 날개를 부지런히 놀려 태자궁으로 날았지만, 그의 침소가 있는 전각까지는 거리가 한참이었다.
새의 작은 날갯짓으로는 태양전 후원을 가로지르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소청조가 태자궁에 다다를 무렵엔 이미 반 각이 지나있었다.
푸드덕 소릴 내며 새가 침전에 난 창틀에 올라섰다.
새가 움직일 때마다 파란 날개 끝에 보석가루라도 바른 듯 새하얗게 빛을 흩날렸다.
톡톡-
작은 부리가 침소에 난 창문을 점잖게 쪼았다.
톡톡-
두어 번의 두드림 끝에 창문이 열리자, 하얗고 커다란 손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새를 반겼다.
“어서 오너라.”
목소리만큼이나 따스한 손에 새가 올라서자, 밤길을 날아오느라 잔뜩 지친 소청조를 가만히 안아 들어 따스한 방안에 들여 주었다.
“가엽기도 하지. 추웠을 테지?”
백금발이 부드럽게 물결치며 흘러내리고, 그보다 더 매끄럽고 훌륭한 목소리가 작고 어여쁜 새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 작은 아이에게 많이도 들려 보냈구나.”
태자가 소청조의 발목에 묶인 대롱을 보더니 낮게 혀를 찼다.
새의 발목에 매달린 대롱은 척 보기에도 불룩하니 늘어져 작은 새가 움직일 때마다 묵직하게 흔들렸다.
태자는 그사이 한층 더 푸르러진 눈에 따스한 기를 머금으며 넘치는 힘을 감추지 않고 일렁이게 두었다.
“이 밤, 짐까지 지고 먼 길 마다치 않고 오다니, 착한 아이구나.”
착해.
새가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연신 다정한 말을 읊조리던 태자는 손을 들어 소청조의 다리에 가져다 댔다.
투명한 서리를 매달고 있는 새의 다리는 이미 얼어버린 지 오래였다.
“믿고 날아왔으니, 녹여주어야 할 테지.”
태자의 손끝에 황금빛이 일렁이더니 새의 다리로 빛무리가 옮겨갔다.
달빛에 언 가느다란 다리에 생기를 부여해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일순간에 끝이 났다.
‘삐이-.’
파랗고 작은 머리가 기쁜 듯이 갸웃거리며 까만 눈을 끔뻑였다.
“이젠 괜찮다.”
태자는 마치 뭔가를 아는 듯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는 새에게 살짝 웃어주었다.
처치가 끝난 소청조의 머리를 검지로 슬슬 문질러준 태자는 새의 다리에 매달린 묶인 대롱을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그 후, 새를 소맷부리에 넣어 비단 옷감 안에서 아직 차갑게 굳어있는 몸을 녹이게 해주는 다정함도 잊지 않았다.
‘삐이-.’
소매 속의 새가 기쁜 양 작은 울음소릴 냈다.
“그래. 그래. 나 역시 무척 기쁘구나.”
태자는 직인이 보내온 전갈이 무엇인지 대단히 기대에 차 있었다.
평상시 사뭇 냉정한 그의 성정과는 달리 작은 새를 보물처럼 귀히 대한 것도 ‘기쁜 소식’을 물어 왔을 거란 기대 덕이었다.
현 상제에게 험한 꼴을 당하고, 이대로 입막음 당한 채 잊혀질 위기에 처했었다.
막막하고 두려웠으며, 억울했을 것이다.
그런 차에 그녀를 불러준 태자는, 반드시 붙들어야 할 동아줄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상제의 좌에 오르게 될 태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가 못 할 일은 없을 터였다.
“어디 보자꾸나.”
대롱을 여는 손이 흥분에 자꾸만 미끄러졌다.
제가 먼저 나서 태자의 편에 서겠다던 그이니 이 밤 무리해가며 소청조를 날렸을 땐 무언가 중요한 소식을 전하려 했을 것이다.
가벼운 흥분이 거세게 가슴을 달구었다.
대롱의 뚜껑을 열자 삐죽 솟은 글줄이 보였다.
“어지간히 급했군.”
단정치 못한 글줄을 보며 태자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솟은 글머리를 손으로 잡아 허공으로 띄우자 직인이 급하게 써 내려간 듯 엉망인 글자들이 태자의 앞이 둥실 떠올랐다.
‘사안이 중하여 이 밤 이렇듯 무례를 저지릅니다.’
“네 주인은 침착함이라곤 모르는 모양이다. 천년을 살았는데도 이렇게…….”
빙긋이 웃으며 작은 새에게 농을 건네던 태자의 말이 잦아들었다.
유쾌한 목소리를 내던 입이 한일자로 다물리고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은 건 바로 그때였다.
당연히, 제게 이로운 소식이 아닐까 했건만.
직인이 보내온 것은 그의 전신의 피가 단번에 빨려 나가듯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하여, 첫 문이 닫혔다는 소식을 들었사옵니다. 사신의 첫 관문을 이렇게 단시일에 건넌 것은 유례없는 일입니다.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태자께옵서도 단단히 방비하시라 다급히 청조를 날립니다.’
‘사신의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다니?’
어째서인지 알 수가 없다.
과연, 직인이 괴발개발 써 내려갈 법한 내용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일이 마무리될지도 모르겠사옵니다. 최악의 경우 엿새 후면 귀문의 별로 그 좌가 내려질지도 모릅니다. 한시바삐 휘를…….’
그 외에도 다른 자잘한 것들이 함께 쓰여 있었다.
하지만 좌절과 분노의 문을 통과해 그녀의 명부 중의 칠 분지 일이 하계로 내려갔다는데.
태자의 눈에 다른 것들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소희와 관련된 일은 하나같이 궤를 벗어난 것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 존재 자체가 궤를 따르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어째서…….”
‘마치 놀리듯이 이리 애를 태우는 것이냐. 손에 넣었다 싶은 순간에 훌쩍 멀어지는 것인가.’
태자의 눈동자가 새파란 분노를 가득 머금고 가늘게 떨렸다.
‘어째서 그대는.’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며 애를 태우니 상태자로썬 입맛이 썼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안심할 만하면 그를 절망하게 했으나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아…….”
헛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삐이-.’
그때, 소맷부리 안에서 작은 새가 울음소릴 내며 상념에 잠겨있던 상태자를 일깨웠다.
“아아, 저런.”
기세를 갈무리하는 것을 잊을 정도로 넋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새 소맷부리 안의 소청조가 잔뜩 웅크린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다급하게 소청조를 꺼내 손바닥 위에 놓았지만 새는 바르르 거리며 쉽게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흐음…….”
손에 올려진 작고 파란 새를 살살 쓰다듬으며 달래는 상태자의 표정은 아까와 별반 차이는 없었다.
다만 눈앞의 작고 가여운 것을 지나칠 수 없어 애써 착잡한 마음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아니, 이 작은 것을 달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그저 이렇게 위안할 뿐이었다.
손끝에 스치는 부드러움마저 서글프게 와 닿았다.
그나저나, 이 와중에 한 가지 소득이라면 직인이 생각보다 유능한 자라는 것.
‘하마터면 아무것도 모른 채 느긋하게 굴다 된서리를 맞을 뻔하지 않았는가.’
“평생 실뭉치를 들고 지루하게 실이나 엮는 작자라 업신여겼건만. 생각보다 꽤 재미가 있구나. 그렇지 않느냐?”
상태자가 긴 손가락으로 소청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열린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 소맷자락이 부드럽게 나부끼자, 상태자가 소청조를 손바닥에 올린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영력을 담아 매만져 주길 수 분, 새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았다.
똘망해진 까만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일이야 이미 벌어진 것.’
여기까지 작은 몸으로 고생하여 날아온 소청조의 공은 칭찬받아 마땅하고, 애쓴 직인에게도 작은 호감 표시정도는 하여야 할 테다.
“네 주인에게 전하거라.”
상태자는 소청조를 창틀에 올려두고 손끝에 영력을 집중했다.
곧 손끝에 찬란한 황금빛이 일렁이며 가느다란 빛무리가 그의 손끝을 타고 흘러내려 긴 형태를 잡았다.
상태자가 그것을 주워들어 소청조의 목에 둘러 맵시 나게 묶어주었다.
황후사였다.
휘가 만들어낸 황후사가 아니어서 태자 강보를 만드는 데 쓰이지는 못하겠지만, 직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이것은 기록될 일조차 없는 은밀한 것이라 아무도 직인에게서 황후사를 회수해 갈 수도 없을 테니.
그렇게 따지면 상태자는 직인에게 분에 넘치는 하사품을 내리는 것이다.
상태자는 황후사를 두른 소청조를 손위에 다시 올려놓고 영력을 두른 손으로 가만히 청조를 쓰다듬었다.
이 작은 새를 위한 선물은 따로 있었다.
달빛이 차가워 날아가다 잔뜩 얼어버릴 가여운 아이에게 작은 호의를 붙여 보낼 참이었다.
바로 태자 자신의 영력이었다.
황금빛 영력으로 마치 도포를 둘러주듯 새의 전신을 싸주었다.
“두르고 가거라, 네 주인에게 갈 때까지 얼지 않도록 보호해 줄 것이니.”
은은한 빛이 소청조에게 스미고 나자, 태자는 소청조를 밤하늘로 힘껏 떠올려 보내주었다.
소청조는 때론 황금빛으로, 때론 푸른빛으로 빛을 뿜으며 빠르게 시야에서 멀어졌다.
“…….”
멀어지는 새를 바라보는 태자의 표정이 어둠에 짙게 물들었다.
‘마흔아홉 날을 벌었다 생각했건만.’
삼관대제를 불러 즉위를 당길 묘안을 가져오라 명을 내리고 채 하루를 꼬박 채우지도 못했건만.
‘쉽지 않겠구나.’
하루 사이 하계로 명부가 넘어갔다니.
넘어간 것이 일부라고는 하나 앞으로 남은 건 여섯 번의 기회뿐.
이번과 같이 사신문을 넘는다 치면 상태자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휘를 놓치게 되는 것인가.’
가정만으로도 가슴이 빠개지는 것 같은 격통이 몰아친다.
그러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지만, 기운이 빠지고 만다.
‘그녀의 관문이 이렇게나 빨리 열린 건 어떤 연유에서일까.’
상태자는 싸늘한 빛을 뿌리는 달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은은하게 빛을 뿌리며 하늘에 떠 있는 고아한 자태가 영락없는 소희같이 보여 그리움이 물씬 차올랐다.
명부가 모조리 넘어가면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어진다.
‘그러니 제발.’
상태자는 손을 들어 올려 아직은 남빛의 두 눈동자를 가렸다.
상제가 되려면 마지막 힘이 깃드는 두 눈이 맑은 하늘빛이 되어야 하니 자신은 아직 발목이 잡혀 있는 처지였다.
“제발, 조금만.”
기다려다오.
‘너무 멀리 가지 말란 말이다. 그대.’
상태자의 짙푸른 눈동자는 그 뒤로도 한참을 하얗게 빛나는 달을 담았다.
“귀문의 별이 될 것입니다.”
여리기 그지없는 그녀에게서 들려온 단호한 대답에 잠깐이었지만 두 장군은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들은 그녀의 말에 담긴 진심을 알아내려는 듯 머뭇거리다 이내 달싹거리던 입매를 굳게 다물고 공손히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지금으로선 그녀의 말 외에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달 마마, 오늘 밤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날이 밝으면 찾아뵙고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아수라가 가느다란 손을 들어 맞잡고는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자, 옆에 선 풍천이 얼굴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리며 씰룩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던 그는 잠시간 시선을 아수라에게 두었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려 소희에게 포권을 취하며 허릴 굽혔다.
“소장 보탬이 될지는 모르겠사오나, 성심으로 뫼실 것입니다. 밝은 날 아수라와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이만 물러가 보아도 되겠습니까.”
풍천은 굳은 표정으로 소희에게 정중히 인사를 고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소희 역시 피곤했던 터라 그들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 환에게 먼저 물어봤어야 했나?’
뒤늦게 이들의 ‘왕’인 환의 입장이 떠올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환을 보았지만 그는 담담한 기색이었다.
그리고 소희의 걱정이 무색하게 재차 환에게 인사를 올리는 염라의 불들은 왕의 무언의 허락을 듣고서야 물러났다.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물러날 때도 순식간이었다.
순식간에 마치 연기처럼 일렁이며 그들의 모습이 흐려지더니 눈 깜빡하는 사이 증발하듯 없어져 버렸다. 소희는 환이 아니었다면 꿈을 꾸었다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희는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본 뒤에야 가까스로 몸을 돌렸다.
‘분명 길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이 후원에서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지 무척 오래 있었던 것 같았다.
일순간 파도치듯 덮치는 피로감이 전신을 무겁게 눌렀다.
느릿하게 옮긴 시선 끝에 걸린 환의 모습이 달빛 아래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차갑고도 아름다우며, 늘 마지막인 것처럼 장엄하게 타오르는, 염라의 불.
소희는 달빛을 받아 시리게 빛나는 환을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은사로 빼곡하게 수가 놓인 새하얀 도포를 몇 겹 겹쳐 입고 있었다.
처음 보았던 날처럼.
그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가늠할 수 없는 기품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했고, 너무도 고결해 범접할 수 없는 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세상과는 동떨어진 확연히 다른 존재.
소희는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천천히 환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오늘, 그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언제나 같이 아름답고 당당했으며 매력적인 것은 분명했지만 웃지 않는.
다정함이 사라져버린 그는 이렇게나 낯선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군신.
그것이 바로 환이었다.
은빛 머리칼을 바람에 잔잔히 나부끼며, 보석과 같은 홍안을 하고 황홀한 자태 그대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하계의 지배자, 염라대왕.
한낱 인간인 자신과는 그 신분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날 테다.
그런 그가 나를 원한다니.
그에게 운명으로 묶였다니.
얼떨떨하고도 황송한 기분이지만 가끔 한 번씩 차게 식은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면 여지없이 자신의 비루한 처지를 비교하고 만다.
이미 발을 디뎌 그가 바라는 대로 옆에 서는 것 외에 남은 선택지는 없지만, 그에게 설령 버림받아 혼자가 되는 날이 오더라도.
‘잊지 않을 겁니다.’
소희는 차게 빛내는 그의 홍안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절대로.’
그래.
가슴이 지저귀는 작은 새처럼 쉬지 않고 두근거리며 자신에게 알려오는 이 느낌.
이제 소희는 알게 되었다.
그러니 잊지 않을 것이다.
저토록 아름답게 빛나는 염라의 첫 번째 불이 자신을 향해 미소 지으며 품을 내주던 날을.
다정하게 품어주는 그의 안에서 기쁨에 가느다랗게 떨리던 가슴을.
자신은 분명 그에게 첫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은애하게 되었음을.
이제는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했다.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소희는 눈에 그를 새겨 넣듯이 바라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눈에 깃든 그가 씻겨 나가기라도 할세라, 느리고, 가볍게.
“무척 고단할 테지.”
그녀의 느릿한 시선에 졸음이 묻었다 생각한 환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희는 그의 목소리에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옷감이 땅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환이 한걸음 다가왔다.
바람에 어깨를 타고 내리는 그의 은발이 가볍게 흩날리며 소희의 눈앞에서 흔들리고, 불을 품은 것 같은 보석 같은 홍안이 오롯하게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는 분명 눈앞에 있었지만, 지독하게 현실감 없는 모습이었다.
“그대, 이만 돌아가 쉬는 게 좋겠어.”
“……그럴까요?”
돌아갈 곳을 내주던 당신을 잊지 않을 것임을.
당신이 나로 하여금 현실감 없는 현실을 버티게 했음을.
소희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환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서늘하고도 큰 손안에 잠겨든 자신의 하얀 손은 그에게 비교돼 참 작아 보였지만, 그의 손을 붙드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당신 곁에 서기로 한 오늘을.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인정한 오늘을.
내게 자리를 내어주던 당신을.
혼자 남겨진다 해도 잊지 않으리라.
그러니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오늘은 이대로 흘려보낼 참이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마음에 담았으니.
소희는 말로 전하지 못한 마음을 그렇게 꾹 눌러 가슴에 담았다.
대신, 자신의 손을 단단히 붙든 환의 손위에 남은 손마저 가만히 얹으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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