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사신의 첫 번째 문 (2)
2017.09.11.
“그런데 말이야. 아무래도 햇살 아래 자네는 영 익숙해지지가 않는구먼.”
후루룩 소릴 내가며 뜨거운 찻물을 한 모금 넘긴 풍천대제가 슬그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아수라는 그의 말에 눈썹을 살짝 치뜨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풍천대제는 그런 아수라의 대꾸를 못 본 척 계속 말을 이었다.
“그. 큼. 그게 말이야,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 혹시 낮 동안 말이야 자네는 그...... 뭐시냐.......”
“또 무슨 소리가 하고 싶어 이렇게 말을 더듬으실까.”
아수라는 찻잔을 빙글 돌리며 눈빛을 매섭게 다졌다.
그의 날카로운 턱선이 단단하게 굳고 모양 좋은 입술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시답잖은 소리를 미리 경고하듯 매서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풍천대제는 계속 눈치만 볼뿐 그만둘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 궁금해서 그러는데. 아주 오래된 궁금증이었지. 여태 기회가 없어서 말이야.”
“......듣고 싶지 않네.”
“그...... 그...... 그게 혹시 합.......”
“그 입, 그만 닥치는 게 어떤가?”
풍천대제의 뒷말은 안 들어도 알만하다는 듯 아수라가 표정을 무섭게 깔았다.
그의 위압적인 목소리가 풍천의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풍천대제는 아수라의 그런 기색에도 굳이 이야기를 이었다.
“합방도 가능한가? 계집을 품을 수 있냐는 말일세. 크흠크흠.”
“이 더러운 작자. 벌건 대낮에 염라의 세 번째의 불인 내게 감히.”
눈썹을 매섭게 치켜세우며 서늘한 어조로 아수라가 풍천을 향해 일갈했다.
새카만 눈동자 안에서 붉은 불이 터졌다.
“!”
사나운 영력이 아수라에서 피어오르자 풍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하지만, 아수라의 불길은 피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꺼졌다.
그 모습에 오히려 풍천이 어리둥절해졌다.
맞은편의 아수라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제 눈을 의심할 만큼 모든 것이 찰나에 지나갔다.
“아......니 왜?”
“네놈 수작이야 뻔하니, 기운 빼서 뭐 하나. 오늘 검을 다시 뽑진 않을 것이니 그리 아시고 애쓰지 마시게.”
아수라는 맵시 있게 찻잔을 집어 들며 눈을 내리떴다.
풍천은 작게 투덜거리며 남은 찻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도대체가 인정머리하고는.
한 번만 하자는 데도.
분명 들으라고 하는 투덜거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아수라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태도로 연거푸 찻물을 들이킬 뿐이었다.
붉은 입술이 찻잔에 닿았다 떨어지고 하얀 목덜미가 살짝 움직이며 찻물을 넘기는 모양새까지 아름답다.
‘목울대가 있기나 한 것인가.’
괜스레, 꿀꺽 침을 삼키는 건 풍천의 몫이었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유약해 보이는 저 가느다란 목이 사내 몫이라니.’
풍천은 힐끔 아수라를 훔쳐보다 혀를 찼다.
이번 대의 아수라는 너무나도 여성형이었다.
아수라.
낮과 밤.
양성을 다 가진 전쟁의 신이라 불리며, 진정한 의미로 귀신들의 왕이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아수라도를 지배하며, 천성이 호전적이고 호승심에 불타오르는 전투의 지옥불.
검을 휘두르는 아수라는 그때만큼은 귀왕보다 아름다워 모든 이의 시선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그는 매번 대를 달리해 힘의 궤적을 바꾸는데, 이번 대의 아수라는 유난히도 여성형에 치중되어 있었다.
아수라는 양기가 넘치는 낮에는 남성형의 모습으로, 음기가 흐르는 밤에는 여성형의 모습으로 성별을 달리한다.
그러나 이번 대는 음기가 넘치는 시기에 생을 받아서인지, 낮에도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풍천은 아수라를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컥거리기 일쑤였다.
염라의 불을 두고 심장이 떨리는 것에 자괴감을 느끼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사내 몫에도 가슴이 길을 잃고 두근거릴 때가 잦아 풍천의 한숨은 날이 갈수록 짙어졌다.
이제는 그저 밤의 아수라 쪽인, 적어도 여성형일 때 조금 더 설레길 비는 가여운 처지가 되고 말았다.
“흐아......”
젊은 서생의 얼굴을 하고선 계집보다 더욱 계집같이 아릿하게 가슴을 울리다니.
제 처지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가.
‘제길, 염라의 두 번째 불의 체면이.......’
풍천은 입안으로 투덜거리며 아수라를 흘끔거렸다.
지금이야 서생처럼 하얀 도포를 입고, 찻물이나 들이킨다지만 맞은편의 앉은 이는 아수라.
점잖거나,
유약할 수 없는,
타고난 맹수.
‘검을 휘두를 때의 아수라라니.’
가차 없이 적군의 생명을 탐하는 그의 잔인한 손속을 떠올리자 풍천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피가 흘러내리는 검을 높게 들어 새빨간 혀로 핥아 내리는 아수라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어디 안 좋으신가?”
밤 너울처럼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던 검붉은 눈동자에 희열이 가득 차 즐거움에 잔뜩 떨렸었지.
“에이!”
검은 눈동자를 제게 맞추고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물어오는 아수라의 얼굴을 보자마자 풍천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작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저런 얼굴에 이길 방도가 무엇이냔 말이다.’
“차가 입에 안 맞으신가?”
“풍천의 대가 끊어지면 다 네놈 탓이다.”
풍천은 진심이었다.
백 년째 혼자인 것은 정말로 아수라 때문이었다.
속도 모른 채 미끈한 얼굴로 자신을 걱정하는 아수라를 보자니 풍천은 배알이 뒤틀렸다.
“자네는 늘 이상했지만 오늘은 좀 더하군그래.”
“에잇-.”
홧김에 차를 한입에 털어 넣다가 뜨거운 찻물에 입안이 홀랑 데이고 말았다.
“커흡! 아뜨뜨뜨.”
턱 주변으로 찻물을 잔뜩 묻히고 소란을 피우는 풍천을 보던 아수라는 고개를 내저으며 질린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정말이지 싫군.”
들으라고 중얼거리는 게 분명한 소리를 티 나게 읊조리며.
하지만 냉정하게 구는 아수라를 보아도 밉지가 않으니 큰일이었다.
아수라들은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그를 흔들었다.
전장에서 빛을 발하는 건 사실 밤의 아수라 쪽이 더했다.
그녀의 무위는 더할 나위 없이 잔인해서 더없이 황홀했다.
붉은 실로 문양을 낸 띠를 두른 낭창한 허리는 한 줌도 안 돼 보이건만. 홍월을 휘두를 때의 그 압도적인 힘이라니.
청천의 전 때 너덧씩 마구 쳐내던 몸놀림을 자신은 아직도 잊지 못했다.
홍월을 길게 늘어뜨리고 피에 젖은 머리카락을 뺨에 붙인 채 휘돌아 단번에 너덧 명씩 허리를 베어버리던 거짓말 같은 무위.
아군에게는 짜릿한 전율을,
적군에게는 절망의 소름을 불러일으키던, 새하얗게 웃던 아수라의 표정.
달빛보다 찬란하게 빛이 났었다.
그러나, 어째서 번번이 이 벌건 대낮에, 저 사내놈에게 가슴이 떨리는 것인지.
‘미치겠군.’
풍천은 상념 끝에 시선에 잡혀 든 낮의 아수라를 보며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두근-.
진정되는 것 같던 가슴이 다시 요란하게 두근거렸다.
“변태같이 넋 놓은 표정을 짓는 것 그만두래도.”
아수라는 반듯한 눈썹을 찌푸리며 풍천의 잔에 다시 맑은 찻물을 따라 주었다.
“이런 작자가 염라의 두 번째 불이라니. 정말 믿을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럼 한번 해볼 텐가?”
풍천은 찻잔을 집어 들며 기대도 없이 물었다.
아수라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떠올릴 때마다 속절없이 두근거리는 이 마음의 끝을 찾아야 했다.
‘그래, 저놈과 진심으로 칼을 맞대고 나면 이 떨림의 정체가 뭔지 정확히 알 수 있을 테지.’
풍천대제는 절박했다.
강자를 만나 일으키는 호승심이라며 자신을 다독이고는 있지만, 백 년이 넘는 이 떨림은 자꾸만 더해지기만 할 뿐 도무지 좋아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아수라는 진심으로 자신과 검을 섞기를 거부하고 있어 풍천의 집착은 날이 갈수록 집요해지고 있었다.
‘자신보다 아래의 장군에게 살수를 날리다니. 이 미친놈.’
자괴감도 잠시, 풍천은 자꾸만 아수라를 보고 불끈 치미는 열감에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애를 써야 했다.
이런 작고 얇은 찻잔 따위 아차 하면 바스러져 버릴 테니 말이다.
“......차 마시러 온 건 아닐 테고?”
풍천이 찻잔을 만지작거리자 아수라는 그가 뜸을 들이고 있다 생각했다.
물론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더라면 변태 같은 놈이라고 당장에 검을 뽑아 들었을 테지만.
그러나 지금 풍천대제의 모습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사내답게 생긴 호방한 젊은 장수의 모습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9척 장신의 탄탄한 모습의 한 그가 찻잔을 쥐고 골몰하는 모습은 새소리가 한창인 후원과 묘하게 어울려 뜻밖의 정취를 자아냈지만, 그건 아수라도 풍천도 관심 없었다.
아수라의 말에 풍천은 문득 자신이 이 아침부터 수라전을 찾아온 용무를 떠올렸다.
“아. 그게 말이야. 어젯밤에 혹시.......”
“사신의 문?”
아수라가 긴 눈매를 야릿하게 접으며 웃었다.
‘역시, 저런 눈이라니. 절대 사내 몫은 아니라니까’
풍천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알고 있었나?”
“알다마다. 전하께서 문을 개방하실 때 월광을 잡아 두던 게 바로 나였지.”
“뭐어?”
풍천이 정말 놀란 모양인지 그대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 버렸다.
쾅---
“자네 제정신인가? 하계에서 사신의 문을 열다니! 전하께서 그런 미친 짓을.......”
“하셔야만 한다면 이루어 드리는 게 신하 된 도리이지.”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풍천의 영력에 아수라가 자신의 기세를 피워 맞받아치며 못마땅한 듯 눈썹을 꺾어 올렸다.
풍천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염휘, 자신의 왕의 바람이었다.
어째서인지 이십 년을 지켜만 보던 별을 갑자기 준비도 없이 모셔와 다짜고짜 안달복달하는 것이 무언가 이상하긴 했지만, 말릴 새가 없었다.
이미 별에겐 염휘의 이름자가 새겨져 있었다.
인연의 고리가 생겨나기 시작한 이상, 이제 왕의 반려는 간밤에 만나 뵈었던 그녀 외엔 아무도 될 수가 없다.
그러니 방법이 없었다.
풍천은 모른다. 별에게 인연의 고리까지 새겨진 것을.
알면 저 성미 급한 자는 심장이 멎어버릴지도 모른다.
염라의 두 번째 불이 그런 식으로 우스꽝스러운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삼천을 통틀어 두고두고 회자될 추문이라.
말릴 새도 없이 헛숨처럼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새나갔다.
‘변태 같은 녀석을 이렇게까지 생각하다니. 미우나 고우나 웃전이란건가.’
아수라는 하늘로 솟구친 눈매를 부드럽게 내리며 진득한 웃음을 빼물었다.
간밤 잡아들었던 월광은 정말이지 심장이 찢어지는 것같이 차갑고 사나웠다.
덕분에 아수라는 오늘 아침까지 새파랗게 얼어 있어야만 했다.
하계의 불을 자처하는 자가 만월의 힘에 얼어붙다니.
놀라 죽은 염라의 두 번째 불 다음으로 두고두고 조롱거리가 될 이야기였다.
간밤 아수라를 부른 염휘는 단 한마디만 말했다.
‘아수라, 사신의 문을 세워야겠다.’
아수라는 그의 말에 지체 없이 허리춤에 매달린 홍월을 꺼내 들었다.
염휘, 그는 염라의 첫 번째 불.
아수라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권속이었다.
치링-
맑은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빠져나온 홍월을 그대로 달빛 아래로 내리쳐 땅에 박았다.
검 끝에 달빛이 물려 땅에 박히자 한 귀퉁이가 만들어졌다.
아수라는 이내 달빛에 손을 넣어 다른 귀퉁이를 잡아 들어 삽시간에 문틀을 세웠다.
잡은 문틀을 통해 광포한 달 기운이 손아귀를 찢어내며 온몸을 타고 들어왔다.
그 손끝에서 시작되는 달빛의 난폭함에 저절로 이가 앙다물렸다.
삽시간에 심장까지 타고 올라오는 차디찬 달빛에 아수라의 영력이 본능적으로 맞서 요동쳤다.
찰나의 순간 동안, 동공을 길게 찢으며 자신도 모르게 얼음장 같은 달빛을 쳐내려 한 것만 수십 차례.
자신은 겨우 사신의 문틀을 잡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안간힘을 써야 했는데, 염휘는 무척이나 고요했다.
자신의 왕은 마치 그림을 그리듯 하얀 소매를 펄럭이며 우아하게 손을 움직였다.
가볍게 움직이는 손끝을 따라 문틀에서 사신 문이 떠올라 빛 속에 세워졌다.
문을 열어 일곱 날을 채우는 것을 모두 일곱 번 반복하는 동안,
단 한 번 호흡이 흐트러지지도, 월력에 반하는 영기를 뿜어내지도 않았다.
달빛에 녹아 차게 빛을 뿌리던 자신의 왕은 그 자신이 그대로 하계였다.
차갑고 아름다우며 지독하게 어두워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하아아아-.”
간밤의 기억을 더듬던 아수라는 아직 몸속에 남아있던 한기가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숨결을 따라 잔뜩 얼어버린 달빛조각들이 옷 위로 떨어져 내렸다.
“......자네! 괜찮은 건가?”
새파랗게 얼어 무자비하게 한기를 뿜어내는 숨결 조각을 보자, 풍천이 대경실색하여 아수라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크윽-.”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전신을 얼려버릴 것 같은 한기가 풍천대제의 손을 타고 올랐다.
“이게 무슨!”
“조용하게, 수라전 아이들은 겁이 많지.”
“자네! 자네가 이 지경인 걸 아랫것들이 모른단 말인가? 어서 어의를 불러야!”
풍천은 잔뜩 얼어버린 아수라를 향해 노기를 터트렸다.
“안 돼, 사신문이 열린 것은 모르면 모를수록 좋아. 이런 한기는 만월의 달빛을 맞잡아야만 생긴다는 걸 어의가 모를까? 아직까지는 소문에 불과해. 확신을 주면 그건 사실이 되지.”
“......고약하기는. 감히 염라의 두 번째 불을 이런 식으로.”
“부리는 거지. 자...... 눈앞에서 동사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녹여주시게. 내 영력으로는 역부족이야.”
아수라는 희게 빛나는 왼손을 풍천에게 내밀며 웃었다.
오늘따라 아스라하던 그의 모습은 풍천이 음심을 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아수라의 심장은 그 순간에도 착실히 온기를 빼앗겨 ‘죽어’가고 있었다.
설마 정말로 죽기야 하겠느냐마는 이대로 놔두면 결과가 그다지 좋지는 못할 것이다.
“잠깐만, 아까 그럼?”
자신의 내리치던 아수라를 되짚어보니 확실히 오른손에 의지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늘어뜨린 왼손은 이제 와 다시 보니 하얗게 얼어 빛 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고 있었다.
하얗게 얼어 빛이 나는 건 월력에 상했다는 명확한 증거.
이래서야 아수라의 말대로 어의를 부르긴 글렀다.
사신의 문은 인계, 중천에서 열리는 것.
하계의 지배자라고는 하나, 염라께서 하계에서 억지로 사신의 문을 연 것은 삼천을 통틀어 유례없는 일.
이것이 불러올 파장은 적지 않았다.
“이...... 이...... 이 미련한 인사. 몸이 이러면 아까 검을 뽑지 말았어야지!!!”
화를 내는 것과는 반대로 착실히 온몸에 영력을 피워 올린 풍천대제는 꼭 시커먼 연기에 휩싸인 것 같이 보였다.
그가 손을 뻗어 아수라의 내단에 가져다 대며 소릴 질렀다.
한 합이라도 받아준 게 용할 정도로 아수라의 몸은 엉망이었다.
‘이런 자에게 살수를 날리다니!’
풍천은 미련한 제게 욕을 하고 싶었다.
까딱했으면 아수라의 한 목숨을 애꿎게 날려 버릴 뻔했다.
그리고 아수라의 세 목숨 중 하나는 이미 비어 있었다.
‘도대체 어젯밤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풍천의 짙은 눈썹이 하늘로 치솟으며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크흑.......”
아수라가 풍천의 내력을 받아들이다 허릴 꺾으며 침음성을 삼켰다.
그의 코에선 검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미련한 것.”
풍천의 나머지 한 손이 마저 그의 가슴에 닿았다.
푸확----
검은 안개가 순식간에 후원을 가득 메웠다.
“비가 오려나?”
“비가 오면 우천화를 따다 아수라님께 차를 올릴 텐데. 즐기시는 것인데 요즘 비가 제대로 오질 않아 구하기가 영 어려워 애를 먹고 있지 뭐예요.”
시비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작게 울렸다.
멀어졌던 감각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흐렸던 시야가 또렷해지고 있었다.
꿀럭-.
질척한 소릴 내며 가슴에 박혔던 손이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심장이 있었던 자리에서 빠져나오는 풍천의 손은 온통 검고 찐득한 것이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검게 물든 큰 주먹 안에는 눈이 부실 만큼 하얗게 빛을 뿌리는 것이 쥐어져 있었다.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하얀 서리를 눈처럼 떨어뜨리며 냉기를 뿌리고 있는 그것은.
“만월의 조각이다. 심장을 반이나 먹어버렸더군. 열흘간 요양하여야 할 것이다.”
“고...... 고맙다.”
“......목숨자리가 하나 비었던데. 간밤 대단했나 보지?”
풍천은 쇠가 긁히듯 낮은 목소리로 잔뜩 소릴 죽인 채 아수라에게 물어왔다.
풍천이 무얼 오해하는지 아수라는 단박에 알아들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별에게 목숨 하나를 내주었다고 하면 저 우직한 작자가 기함하고 말 것이다.
‘염라의 두 번째 불을 놀라 죽게 만들 순 없지.’
아수라는 구멍이 뚫렸던 가슴이 빠른 속도로 메워지는 것을 느끼며 굽혔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전신으로 영력을 돌리며 얼었던 손을 가볍게 털어 확인을 했다.
손뿐만이 아니라 몸 상태가 간밤과 비견해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회복되어 있었다.
절로 입꼬리가 솟으며 미소가 물렸다.
‘풍천. 역시 염라의 불.’
깨진 심장조각이야 영력이 차오르면 메워질 것이니 이쯤 되면 완치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나저나 전하께선.......”
“괜찮으시네.”
“그러시겠지?”
“달을 품으시는 분이니 괜찮으시네. 우리와는 태생이 다르다는 걸 잊지 말게....... 오늘 일은 고맙네.”
“......뭘. 흠흠.”
조금 전까지 시커먼 영기를 품어 올리던 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당과를 집어 먹는 풍천의 모습은 영락없이 덩치 큰 개 같았다.
귀 끝이 발그레한 것이 칭찬이 싫진 않은 모양이었다.
“많이 드시게.”
드물게 아수라가 친절히 당과를 건네주었다.
“크흠.......”
그의 귀가 조금 더 붉어진 것은 불가지불문.
그리고 내궁 후원 연못 속에 잠긴 사신의 문이 떠오른 것은 다시 달빛이 사방을 메운 한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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