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10화 (10/114)

10. 푸른 태양의 휘 (4)

2017.09.04.

여명이 터 오르는 것을 지켜보는 태자는 마치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새하얀 얼굴 위엔 아무런 표정 없이 무감한 시선만을 어디론가 던지고 있어, 한편으론 지독히도 아찔한 아름다움이 넘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선인들은 전각을 쓸고 닦으며 얼굴을 붉히기 바빴다.

‘이리 일찍 일어나다니 귀여운 아이가 어쩌면 이렇게 부지런한 것이냐? 상천의 홍복이로구나.’

평상시의 그라면 어린 선인들을 늘 그렇듯 가벼운 말투로 희롱하듯 귀여워 해주었을 테지만, 이날만은 달랐다.

생각에 잠긴 듯 차게 빛나는 검푸른 눈동자만이 유일하게 빛나 미동도 없이 붉게 타오르는 하늘자락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새벽이 몰고 오는 청량한 바람에 태자의 도포가 가볍게 흩날렸다.

어깨를 타고 흐르는 백금발이 흩날리는 소맷자락을 휘감아 물결치며 태자의 눈을 가렸지만, 태자는 어디에론가 고정된 시선을 돌리는 법 없이 태양이 대지를 환히 밝혀낼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위를 울리던 어린 선인들의 수다 소리가 자취를 감춘 한낮이 되어서야 태자가 두 눈을 감았다.

감긴 눈 아래로 눈물이 타고 흘러내리는 이 광경을 어린 선인들이 보았다면 호들갑을 떨며 난리가 났으리라,

하지만 태자는 ‘울고 있다’라는 예상을 깨뜨리듯 날카롭고 높은 소리로 웃었다.

못 견디겠다는 듯 격정을 터트리며 태자는 웃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거칠게 눈물을 훔쳐내었다.

물기를 머금어 더욱 푸른 눈동자 속으로 태양이 마구잡이로 들이쳤다.

밤바다를 닮았던 검푸른 눈동자가 확연히 달라졌다.

태자의 두 눈에 자리 잡은 선명한 푸른 눈동자는 더 이상 거뭇하지도, 어슴푸레하지 않았다.

짙은 바다색을 머금은 푸른 눈동자는 불을 품은 보석처럼 차갑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정말 막바지로군.”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였다.

조금 전까지 새된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던 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굳이 영력을 돌리지 않아도, 손끝이 햇살에 닿자 은은히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힘만 깃들이면 자신은 비로소 완벽하게 상천의 하나 뿐인 지존이 될 터다.

직인이 돌아간 후 시작된 변화는 여명이 밝아오고 태양이 광오한 힘을 터트리도록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전신이 부서지고 새롭게 맞춰지는 고통을 오롯이 견뎌내야 했다.

이는 자신이 가진 힘을 절절히 느끼는 의식이었다.

지존의 육신이 빠개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무한의 힘을 생생히 느껴 함부로 쓰는 일이 없도록 일깨우는 마고의 안배였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하늘을 닮은 푸른 눈동자를 받으며 완벽히 마무리된다.

지금 자신은 상제와 버금가는 힘을 가진, 그야말로 ‘직전’의 상태이다.

하늘을 닮은 청명하고 투명한 물빛 눈동자를 받게 된다면,

그렇다면.

당장에라도 휘를 찾으러 하계로 가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속박의 인을 단번에 파훼하는 귀왕이 계신 곳이 아니던가.

“피 말리는 것도 정말 가지가지구나.”

태자는 간밤보다 길어지고 다부져진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소릴 했다.

입꼬리가 솟으며 싱긋 웃는 모양을 만들어냈다.

태자는 조금 더 남자다워진 자신의 몸이 마음에 들었다.

면경을 비춰보지 않아도 되었다.

손끝에 닿는 얼굴의 윤곽이 조금 더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다.

어린 티가 벗겨졌으리라.

소년과 같은 생김은 사라지고 젊은 사내가 들어섰을 것이다.

마지막 변화를 맞이하면 온전한 군주의 모습을 갖출 것이다.

하계의 지존인, 귀왕처럼.

늠름하고 고아해질 테지.

염라대왕처럼 지존으로 우뚝 서게 된다면, 분명 그와 마주하는 처음은 기꺼운 상황이 아니게 될 것이지만.

두렵지는 않다.

차오르는 영력을 보아하건데 상제가 될 자신 역시 그에 비견되리라는 예상이 확신에 가깝게 든다.

‘현 옥황상제를 가뿐히 뛰어넘으리라.’

확신 같은 예감에, 태자의 가슴이 거칠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가난한 희망이 조금 더 뚜렷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소희는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나, 비가 되지 않았다.

운이 따라준다면 자신이 상제로 즉위할 때까지 비가 아닌 채로 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리만 된다면 자신은 당당히 ‘휘’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형님께선 분명 ‘귀문의 별’을 내놓지 않으실 테지만.’

자신은 전쟁도 불사할 생각이니 소희를 품으시는 건 그리 쉽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사 불여튼튼이라고 했던가.

지금 비가 아니라고 해서 언제까지 소희가 그럴 거라는 보장은 아무도 해주지 못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야 방비를 할 테지.’

태자는 눈앞을 어지럽게 만드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눈높이가 달라졌다.

실쭉. 늘어지는 입매를 가리고 싶지 않다.

“하하하하하하하.”

내딛는 보폭이 넓어졌고 두 다리에 붙은 힘이 다르다.

상제의 육신은 이보다 강하고 아름답다.

도대체 그 강함이 주는 아찔함은 얼마나 황홀할 것인가.

내딛는 걸음 끝에 자신의 머리에 걸려있던 동곳이 조각난 채 떨어져 밟혔다.

“쯧.”

인세로 내려가 있을 때 소희가 사 건네준 것이었는데.

간밤의 일에 휘말려 못 견디고 터져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동곳 끝에 박혀있던 청옥이 잘게 부서져있는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바스러진 저 모습이 꼭 소희의 마음인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해 언짢다.

태자는 동곳 조각을 갈무리해 소맷부리에 넣고는 처소를 나섰다.

햇살이 닿는 곳마다 기분 좋은 열감이 퍼지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충족감이 들어찼다.

태양을 거느리며 만물을 관장하는 자, 상제.

그런 상제에게 태양빛이란 제 몸과도 같은 것이라, 가까이 두고 함께 하면 기운이 북돋아 나고 지친 심신이 달래졌다.

“으음.......”

마지막 변화를 마치고 상제로 거듭나게 되는 건 어떤 느낌일지, 이제 짐작할 수도 없었다.

들어차는 힘은 늘 상상을 뛰어넘었으며, 육신의 변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황금사를 뽑아낼 적만 해도 더 이상 놀랄 일은 없다고 생각했건만, 이제 햇살 아래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영력이 차고 넘쳐 주변을 가득 메운다.

새로이 개안한 눈은 영력을 돌리기만 하면 서 있는 자리에서 중천의 거리가 바로 들여다보듯 생생하게 펼쳐졌다.

“하!”

‘이것이 상제의 힘이라는 것인가.’

기분 같아서는 어릴 적부터 상제가 해오던 그대로 바다를 일으켜 더러운 땅을 씻어내고 염라의 힘을 빌어 뜨거운 용암으로 새로운 땅을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할 성싶었다.

마고가 간밤 맛보여준 고통이 아니라면 이 넘치는 힘을 한 번쯤 마음껏 휘둘렀을 법한 호승심이 일었다.

거대한 힘이 손에 들어오니 오히려 마지막 변화를 기다리기가 더 힘들었다.

한번 맛본 권능의 달콤함에 더해진 갈증을 참고 있기 싫어졌다.

태자의 짙푸른 눈동자 안에 새파란 불꽃이 터져 올랐다.

‘이대로 하계로 내려가 소희를 품에 거둬 오는 건 어떨까.’

사르르르.

부드러운 미풍에 햇살을 받은 백금발이 흩어져 날리고 태자의 푸른 도포가 그의 마음처럼 어지럽게 날렸다.

‘지금이라면.’

파드득거리는 소리가 나며 소맷자락이 조금 전보다 격렬하게 휘날렸다.

‘단신으로 내려가 한 호흡이 끊어지기 전에 소희를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발끝에서부터 매섭게 올라오는 칼날 같은 바람이 태자를 감싸며 흐느끼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웅-

그의 아름다운 백금발이 거친 바람에 휩쓸려 마구잡이로 날렸다.

그러나 태자는 지금 제 모습이 어떤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소희의 생각으로 들끓는 마음에 도취되어 있었던 탓이다.

“......!”

‘이 힘이라면 일각 정도 문을 열 수 있지 않을까?’

벼락이 들이치듯 강렬한 깨달음이 그의 머리를 울렸다.

손끝에 넘실거리는 황금빛 기운이 그의 ‘가정’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파도치듯 일렁이며 솟아올랐다.

“......하!!”

문만 열린다면.

“태자전하!!!”

문득 상념을 뚫고 들리는 다급한 외침에 태자가 느릿하게 뒤를 돌자, 천관이 전신에 바람을 두르고 자신에게 다가서려 애쓰며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천관의 단정했을 관복은 누가 온통 찢어발긴 듯 엉망이었고, 이미 드러난 피부 곳곳은 터지고 갈라진 상처 투성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단숨에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천관?”

“전하!!! 힘을 거둬들이십시오!!!”

천관은 그 와중에도 제게 몰아치는 바람의 위세를 다급하게 막아내며 뜻 모를 소릴 외쳤다.

“전하 제발!!!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후우우웅-

그리고 순간 천관이 제 몸에 두르고 있던 바람을 흐트러트리고 몰려드는 칼날 같은 바람을 그대로 맞았다.

쿨럭-.

뭐라 할 새도 울컥 피를 토해내며 천관이 무릎을 꿇었다.

“천관!”

당황스러운 마음에 태자가 손을 뻗어 그를 잡아채자 사방을 찢어발길 듯 무섭게 포효하던 바람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렸다.

태자의 손에 잡힌 천관은 넝마조각 같았다.

척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왜 이러느냐 천관!”

“모...... 모르십니까, 전하....... 전하께서 부른 폭풍이....... 쿨럭.”

천관이 그 한마디를 하고서 또다시 한 움큼 피를 토하며 힘에 부치는 듯 고개를 꺾으며 땅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부...... 부디...... 어린 선인들을...... 굽어......살피시어.......”

천관이 엎드린 바닥에선 이내 시뻘건 핏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린 선인을 굽어살피라니?’

태자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천천히 후원을 둘러 보았다.

그제서야, 도끼로 빠개버린 듯 잘게 조각난 나무와 짓뭉개진 화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자신이 가진 힘을 생각지도 않고 함부로 움직이려 한 대가를 천관이 받은 모양이었다.

주변이 풍비박산 난 것치곤 아무도 상하지 않았다. 몸을 바쳐 말리려 한 천관, 그 자신만 빼고.

자신의 영력이 불러일으킨 바람에 맞았대도 이렇게까지 다치진 않았을 텐데, 역시 잘라버린 왼팔을 되살리느라 몸이 예전만 못한 모양이었다.

태자는 미안한 기색을 담아 천관에게 손을 뻗었다.

얕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그의 숨소리가 서 있는 그에게 확실히 들릴 정도로 천관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미안하구나. 네가 애쓴 덕에 과인의 실책이 이렇게 덮였어.”

태자는 손을 천관의 등에 대고 영력을 돌렸다. 태자의 황금빛 영력이 천관을 감싸자 놀라운 변화기 시작됐다.

찢어진 관복이 시간을 되돌린 듯, 끊어진 실이 이어 붙여지고 터진 솔기가 아물렸다.

피가 배어 나오는 처참한 살갗에도 새살이 차오르고 가닥가닥 부스러진 천관의 뼈마디가 빠르게 붙었다.

가늘게 떨리던 호흡이 규칙적이고 깊어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래, 태자궁엔 무슨 일이더냐.”

그의 자애로운 처사에 천관이 감격하며 고개를 들어 주인을 마주하자, 태자의 짙푸른 눈동자가 천관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반짝였다.

활짝 접힌 눈꼬리에 매달린 웃음은 더욱 사내답게 변한 제 주인에게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천관은 그 모습이 눈이 시린 듯 지그시 감았다.

“전하, 간밤에 새로운 경지에 드심을 경하드리옵니다.”

“오냐. 그래. 무슨 일이더냐?”

태자는 천관의 말에 짧게 응수하며 짙게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재촉하듯 천관에게 되묻는 태자의 말은 버릇이었다.

태자는 본디 그 성정이 급하고, 격정적이었다.

힘을 물려받아 상제의 본신에 가까워져 어린 태자 시절보다는 그 조급함이 덜해졌다고는 하나, 타고난 것이라 ‘천성’이었다.

바뀐 외양만큼 단번에 바뀌지 않을 그의 버릇이었으나, 천관은 평소와는 다르게 다급한 목소리로 제 주인에게 답을 올렸다.

“확실한 것은 아니나 전하께서 꼭 아셔야 할듯하여 이렇듯 달려오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천관의 공손한 대답에 태자의 웃음이 진하게 물렸다.

“굳이 이렇게 달려온 걸 보니, 분명 나를 기쁘게 할 소식이렷다!”

천관은 침음성을 눌러 삼켰다.

간밤, 변화를 맞이한 태자는 눈이 부시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늠름하게 피어나셨는데, 황홀해진 건 외모뿐만이 아니라 마음을 설레게 하는 영취까지 깊어진 모양이었다.

태자의 웃음이 깊어지자 미칠 것 같이 달콤한 도화향이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관은 제 주인에게 마냥 떨리는 가슴을 누르며 간신히 입을 뗐다.

“전하, 하계에서 사신의 일곱 문이 열렸다고 합니다.”

“사신의 일곱 문?”

“네, 죽은 자의 거취를 정하는 일곱 번의 일곱 날을 부르는 말입니다. 인세에서 명이 다한 자를 하계로 인도하기 전 중천에서 보내는 마지막.......”

천관의 설명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설마!”

잔뜩 흥분한 태자는 높게 솟아오른 목소리로 체통도 잊고 외쳤다.

태자는 천관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 말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못하는 흥분이 그의 파란 눈동자에서 파도치듯 일렁였다.

천관은 제 주인의 눈빛에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사신의 일곱 문은 인세에서만 열립니다. 하계에서 사신의 일곱 문이 열린 것은 상하천을 통틀어 유례없는 일입니다. 전하. 이번 사신의 문은 귀왕께서 직접 열어주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숨도 쉬지 않고, 제가 들은 소식을 알렸다.

“천관아.”

“소신, 짧은 생각에 귀왕께서 아직 낭자의 명부를 하계로 완벽히 옮기지 못한 게 아닌가 하여 급히 달려온 참입니다.”

“하하하하하하. 천관아...... 천관아.”

‘소희의 명부가 아직 중천에 묶여 있다니. 놓치긴 하였으되 아예 죽으란 법은 없구나.’

이건 마치 데리러 오라 소희가 저를 유혹하는 것 같아 태자는 가슴이 마구 날뛰었다.

귀문의 별을 반려로 맞는 건 귀왕의 임무.

하지만, 귀문의 별은 하계에 그 명을 매어놓는다.

인세에 묶여버린 명부라 한다면, 귀문의 별을 띄고 있다는 의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완벽한 귀문의 별이 되려면 인세의 명부를 끊고 하계로 그 적을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휘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중천에 그 명부가 묶여 있다니.’

이제야 모든 것이 완벽히 이해가 되었다.

소희는 사신의 문을 건너기 전까지 아무것도 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생을 받지도, 운명에 엮일 수도 없는 ‘영’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늘이 도우시는구나.”

태자의 눈이 화사하게 접혔다.

길게 늘인 입매에 아스라한 미소가 걸리고, 듣는 이의 마음을 녹여버릴 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일곱 문이 닫히기 전에 즉위하여야겠다.”

시간을 벌었으니,

명분을 만들어야 전쟁을 하든,

휘를 납치하는 할 것이 아니냐.

태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했지만, 맞은편 천관의 얼굴은 핏기를 잃고 하얗게 질려버렸다.

제 주인의 미소를 바라 말을 전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제 주인에게서 나온 것은 천인공노할 소리였다.

천관이 핏기를 쭉 잡아 빼버린 듯 희게 질린 얼굴로 태자를 올려다보았다.

태자의 의중을 확인하자 함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천관의 눈에 담겨든 제 주인은 단호하고도 즐거운 기색이었다.

‘휘’를 얻겠다는 건 진심이었다.

태자는 휘를 얻기 위해 상제를 밀어내겠다 선언한 것이다.

잔뜩 얼어 굳어버린 천관을 향해 몸을 기울인 태자가 은근한 소릴 냈다.

“가서 삼관대제를 보자 한다 하거라. 천관, 아우들을 데리고 들어오너라.”

빛을 받아 반짝이는 태자의 백금발이 천관의 눈앞으로 흘러내리자, 그는 그만 두 눈을 감고 말았다.

정말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방법을 모색해 볼 수 있겠다 생각했건만, 태자가 이런 악수를 둘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대답은 정해진 것이었다.

“소신, 명 받자옵니다.”

침통한 목소리가 태자궁을 울리고 사라졌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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