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푸른 태양의 휘 (3)
2017.09.01.
“이 밤에 부르시다니, 수청이라도 들란 뜻이옵니까?”
풍만한 몸매의 뇌쇄적인 미녀가 커다란 눈을 게으르게 깜빡이며 물었다.
탁자에 얹고 있는 손에 턱을 괴고선 접선을 팔랑팔랑 부치는 품새가 권태롭다.
하지만 애교 있는 말투와는 달리 커다란 눈은 무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허리 너머로 늘어진 머리카락이 부채가 팔랑거릴 때마다 작게 흔들렸다.
“직인, 그대에게 듣고 싶은 게 있어서 청하였어.”
“흐응. 수청이 아니라니 섭섭합니다.”
말과는 다르게 직인의 눈은 새치름하기 그지없었다.
살짝 치켜든 턱 끝엔 숨기지 못한 도도함이 묻어나고 있어 그녀의 직분이 태자보다 낮지 않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래도 직인 앞에 있는 것은 상천의 태자.
다음 상제의 보위를 이을 고귀한 분이었건만, 직인의 태도는 확실히 도를 지나친 감이 있었다.
“이런 이런, 수청이라니.”
태자는 찻물을 한 모금 넘기며 몹시 웃긴 소리를 들은 것처럼 킬킬거렸다.
숨을 작게 헐떡이며 쥘부채로 가벼이 부쳐내는 품새가 정말 즐거워하는 것 같아 보일지경이었다.
“이 밤에 갑자기 소청조를 날리시기에 드리는 말씀이지요. 청조까지 불러내가며 저를 청하실 게 또 뭐가 있답니까.”
은근한 적의와 경계심이 말끝에 묻어났다.
버릇처럼 느리게 깜박거리는 커다란 눈은 맑고 순해보였지만, 상대는 천년을 넘게 산 직인.
저런 귀여운 소리를 할 위인이 아니다.
태자는 저를 떠보는 직인을 향해 알 수 없는 시선을 던지다 다시 한 번 찻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딱 맞게 식은 찻물이 입안을 데우고 목을 따라 부드럽게 넘어가길 기다려 태자가 다시 입을 뗐다.
“직인. 내 묻고자 하는 것이 있어.”
“그런 건 청조를 시키셔요. 제가 얼마나 바쁜지 모르셔서 이리 골탕을 먹인단 말입니까.”
직인은 태자의 말에 짜증스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짤랑거리며 비녀 끝에 달린 황금방울이 맑은소릴 내고, 허리 뒤의 긴 머리채가 부드럽게 물결쳤다.
신경질적으로 찰랑거리는 소리가 태자의 방을 가득 채웠다.
직인의 무례한 행동이 눈살이 찌푸려질 법했지만 태자에게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부챗살처럼 풍성하게 뻗은 속눈썹을 다만 느긋하게 깜빡일 따름이었다.
“.......”
그는 직인의 앙탈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아쉬운 건 자신이었고 어차피 밤은 길었다. 밤새 저런다 해도 다 받아줄 참이었다.
대답만 해준다면.
“직인. 그대 요새 새로이 짜는 것이 있는가?”
“무얼 말이셔요. 저야 늘 하는 게 그 일이라 새로울 것이 없는데.”
태자의 질문에 내놓은 대답이었으나, 정작 제대로 된 답은 빠진 말이었다.
직인, 삼천외의 땅에서 마고의 위업을 따르는 자.
부여된 생에 운명을 자아내는 자.
그리고, 운명을 다루는 자의 숙명으로 허언을 할 수 없는 자.
직인은 답이되 답이 아닌 말로 얼버무렸다.
“.......”
태자는 묘하게 경계하며 물러나는 직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직인이 상천의 태자를 경계한다라.......’
게다가 정말로 척이라도 진 것처럼 태자를 바라보는 직인의 눈꼬리가 샐쭉하게 늘어졌다.
태자는 ‘알 수 없는 적의’를 품은 직인에게 이렇게 가벼이 질문을 해서는 답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즉위하지 못한 반쪽자리 상제라 업신여기는 것인가?’
그 어떤 추측으로도 직인의 태도는 설명 되지 못했다.
그 어떤 변명을 한들, 훗날 직인은 그의 추궁을 피할 수 없으리라.
‘건방진 것.’
직인을 바라보는 태자의 검푸른 눈동자가 새파랗게 타올랐다.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다니.’
쥘부채를 쥔 태자의 손에 힘이 바짝 몰렸다.
‘아니, 제법이라 칭찬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태자의 유쾌하지 않은 시선이 직인을 향했다.
“하기사, 그도 그렇겠군.”
쥘부채를 소매 안으로 갈무리하며 태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가벼운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눈은 서늘하게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느릿하고 여유로운 태자의 움직임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직인이 지루한 태를 감추지 않던 것도 잠시.
직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희게 질려 커다란 눈동자가 잘게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잔뜩 일그러진 미간 아래 두 눈은 크게 홉뜨여있었다.
“그...... 그...... 그것은...... 그건.”
소매 안에서 빠져나온 태자의 손끝엔 황금색으로 은은하게 빛이 나는 실이 딸려 나오고 있었다.
“아, 직인도 익히 아는 것이던가? 황후의 실이지. 알아보는군그래?”
가늘어진 눈매 아래 검푸른 눈동자 가득 물린 것은 시퍼런 분노였다.
“세상에.”
바들바들 떠는 가느다란 손이 벌어진 입을 가리며 간신히 외마디 탄성을 내뱉었다.
태자의 길고 곧은 손가락 끝을 따라 늘어지는 황금색의 실은 그의 궤적을 따라 아름답게 늘어졌다.
그것은 마치 실이되 실이 아닌 듯 빛가루를 뿌리며 부드럽게 물결쳤다.
살아있는 것 같은 움직임이 너무나 유연하고 아름다워 마주 보고 있던 직인이 눈물 흘린 건 당연해 보였다.
“이렇듯 아름다운 황후의 실은 실로 오랜만입니다.”
조금 전까지 태자에게 건방을 부리며 비녀를 시끄럽게 흔들어 대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순후하고 공손한 태도였다.
지극히 귀한 것을 마주한 듯 자세는 경건했고, 목소리에선 감탄의 기색이 비쳤다.
태자의 아름다운 입매가 비뚜름하게 늘어나며 피식거리는 소리가 새어나가도 직인은 눈앞의 황후의 실을 보느라 듣지 못했다.
“직인, 하문하겠네.”
“그러시옵소서. 정성껏 답할 것입니다.”
직인은 다른 이가 된 듯 단정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직인의 비녀에 매달린 황금 방울마저 그 소리를 잃고 얌전히 움직였다.
“그대, 요새 새로이 짜고 있는 것이 있는가?”
태자가 재차 직인에게 물었다.
이미 그가 손에서 뽑아낸 황후사는 전부 거둬드렸다.
직인의 눈이 황후사에서 떨어지지 않으니 달리 방도가 없었던 탓이었다.
사방은 달빛으로 고즈넉하고 조용하기 이를 데 없어 직인이 침을 삼키는 작은 소리까지 전부 생생했다.
황후사를 보여 주며 재차 질문을 하는 태자의 의도는 너무도 노골적이었다.
직인은 태자가 무얼 물어보는지 가늠해보았다.
그는 직인의 베틀에 새로이 걸린 지존의 비를 알아보고자 했다.
이번에야 말로 얼버무렸다간 태자가 제 목을 날려버릴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은 없습니다.”
직인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흥분이 가라앉자, 조금 전까지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한밤에 이름 없는 강을 건너게 한 ‘애송이’라 생각해 그간의 분풀이 했던 것이 후회되었다.
‘언제 이렇게 성장하셨는가.’
직인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눈앞의 태자는 태자이되 상제였다.
즉위를 목전에 두고 있는 ‘상제’ 그 자체였다.
황후의 실.
옥황상제의 비가 일생에 단 한 번 자신의 영기로 뽑아내는 생명의 실이었다.
황후사라고도 하고 황금사라고도 했다.
태양을 머금은 영기라 실은 모조리 황금빛으로 반짝였기 때문이었다.
황후가 자신의 영기로 자아낸 실은 오로지 태자를 위해서만 사용됐다.
황후사로 강보를 지어 후계자를 받아 내는 것으로 지존 탄생의 마지막 단계가 끝난다.
그러니, 실을 잣는 건 황후 고유의 능력이자, 새로이 태어나는 지존에 대해 황후가 어미로서 내리는 축복이었다.
황후사는 영기를 뽑아내 잣는 것이니만큼 오랜 시일이 걸렸다.
강보 하나를 만드는데 열 타래의 황후사가 필요했는데 한 타래의 황후사를 자아내려면 일 년이 꼬빡 걸렸다.
그러니 황후사는 보통 비로 맞아들인 다음 날부터 바로 자아내는 것이 통상적인 것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황후사를 자아내야 십년 뒤에 새 지존을 생산할 수 있게 되니, 그것은 상·하천을 가리지 않고 두 지존의 비라면 응당 해왔던 일이었던 것이다.
직인에게 새로이 걸린 베틀이 없다는 건 소희가 아직 염라의 비가 되지 못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하하하하핫. 그렇군.”
태자는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보다 즐거울 수는 없었다.
이미 심장을 내주면서까지 확인한 사실이었지만, 태자는 소희가 아직 혼례를 올리지 못했다는 ‘확증’이 필요했다.
어째서인지 이유야 차차 밝혀내면 될 일이고, 지금은 자신에게 아주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다는 사실에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자, 그렇다면 어찌 된 건지 누굴 시켜 알아오라 한다.......’
태자는 곰곰이 생각했다.
긴 손가락이 매끈한 턱을 쓸며 가늠하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적어도 하계로 내려가 버틸 자라면.......’
“전하...... 언제부터.......”
그런 그의 즐거운 고민을 끊어낸 건 맞은편에 앉은 직인이었다.
직인. 황후사로 태자의 강보를 짓는 자.
황후의 영력을 태자에게 덧입혀주는 자 이기도 했으며 운명을 잣는 자였다.
직인이 황후사로 짜낸 천으로 강보를 지어 태자를 받아내면 강보가 그대로 태자에게 스며 삼칠일, 즉 스물 하룻날을 진으로 감싸 안아낸다.
태자는 그동안 강보라는 이름의 황후의 영력으로 짜인 진 안에서 아비와 어미에게서 받은 영력을 합치고 쪼개며 제 것으로 만들고 자라난다.
해서, 일곱 날 뒤에는 열 살의 아이가, 또 다시 일곱 날 뒤엔 열다섯의 소년이, 그리고 세 번째 일곱 날 뒤엔 스무 살의 청년이 되어 성장을 끝내는데, 그 삼칠일 동안 태어날 때 받은 황후의 영력을 모조리 쓰는 것이다.
그래서 황후의 사는 무척 중요했다.
황후가 일생에 한 번 지어내는 황후사가 태자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황후의 영력이 모조리 고갈되어 이제 곧 새로운 휘가 태어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태자를 위한 새로운 휘는 혼인을 통해 태자에게서 황후사를 잣는 능력을 건네받을 것이고, 그전까진 태자에게 깃들여 있을 것이다.
“며칠 안 되었네.”
태자의 손끝에는 황금빛 가루가 묻어있는 듯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별것 아니라는 듯 대수롭잖은 그의 태도는 심드렁했지만, 이것은 그렇게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휘께서 황후사를 잣는 능력을 상실하다니.’
상천의 안팎을 책임지는 두 지존께서 이곳을 떠나실 때가 머지않았음을 의미해 직인은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곧, 이곳 상천에 커다란 새 바람이 불 것이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습니다.”
직인은 접선을 조용히 탁자 위에 내려두고는 두 눈을 내리뜨며 시선을 감췄다.
“그분께서 땅에 내려보낼 어린 것을 품어주시지 않은 지 꽤 되어 달라 청하였지만 내주시지 않으셨거든요.”
“황후사 말고도 태양의 아이도 내려주시지 않으신다고?”
“네. 수십 년이 되었습니다.”
“수십 년?”
“정확히는 올해로 이십 년이지요.”
직인은 태자의 황후사를 본 뒤로 숨기는 것 없이 말하기로 한 모양인지, 듣자 청하지 않은 것까지 알아서 술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의외였다.
황후사와는 달리 태양의 아이는 황후가 상천을 떠나는 그 날까지 직인에게 내려주는 것이었다.
상천의 모든 선인은 황후가 생산해냈다.
자신의 태로 품어서가 아니라 태양을 품어 영기로 낳는 것이었다.
태산전 앞뜰에 황후가 매일같이 영기를 쏟아부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혼인을 한 부부에게 인연을 따라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 삼칠일이 지나 열매에서는 옥동자가 나오기도 하고 꽃 같은 아기씨가 나오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황후가 태양의 아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길게 보았을 때 상천 모두의 끝을 예고하는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인은 불로불사의 존재가 아니었다.
오백 년이라는 조금 더 긴 수명이 다소간 차이 날 뿐, 인간과 다름없었다.
상천에서 태어난 그들도 나면 죽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십 년 동안 태어난 태양의 아이가 한명도 없다니, 이건 정말로 큰일이었다.
“직인,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셨는가?”
생산하지 못하는 비는 존재해서는 안 됐다.
“허나, 그것은 제 힘을 넘는 문제였습니다.”
‘제 힘을 넘는다라.’
그 말인 즉, 누군가 힘으로 직인의 입을 봉하고 문제를 덮었다는 소리로 들렸다.
태자의 미끈한 눈썹이 날카롭게 솟았다.
“말하라, 어떻게 된 일이냐?”
단순히 소희의 황후사를 확인해보려 했던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은 결코 작지 않았다.
만약 이일에 직간접적으로 상제가 연관되어 있다면 자신은 지금이라도 아비인 상제를 단죄해야할 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것은 마고께서 결정하시겠지만, 자꾸만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십 년이라. 도대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내가 자리를 비운.......’
“이십 년?”
태자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직인을 향해 되묻자 직인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넉 달 뒤면 꽉 채운 이십 년이 됩니다.”
“!”
태자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났다.
아까부터 묘하게 걸리던 그것.
우연이라 보기엔 어려운 기간.
그것은 소희가 태어난 시간과 똑같았다.
소희가 태어나며 황후는 ‘휘’의 권능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것을 덮은 것은 옥황상제였다.
분명히, 옥황상제는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직인이 자세히 말하고자 할 때마다 그녀의 말을 삼키는 저 무형의 힘은 몹시 익숙했으니까.
도화향이 코 아프게 진동하는 영취, 자신의 아비, 옥황상제의 것이었다.
도대체, 이건 무슨 일인가.
태자는 소희를 놓친 것이 정말로 큰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고 뼈저리게 후회했다.
일이 돌아가는 품새가 심상치 않았다.
“소희야.......”
‘반드시 곁에 두고야 말리라.’
후회는 언제고 늦었지만, 이렇듯 가슴이 에일 줄이야.
소매부리에 넣어 다니던, 천도를.
그 언제고 급할 때 쓰려던 천도를.
‘내어 드릴 것을.’
명분을 쫒던 자신의 미련스러움에 쓴물이 올라왔다.
‘모르는 척 권하여 볼 것을.’
그 언젠가 운종가를 거닐던 날.
동그란 앞이마에 촉촉이 땀이 배어들던 더운 날.
시원하게 드시라, 단물 흐르는 천도를 모르는 척 손에 쥐어 드릴 걸.
꽃당혜 사드리지 말고, 은장도 따위에 의미를 두지 말 것을.
태자는 너무도 늦은 후회에 이대로 가슴에 불이 붙어 버릴 것 같았다.
삭여야 하는 마음이 너무도 딱해서, 기분 좋게 턱을 쓸던 손이 얼마나 다부지게 쥐어졌는지.
하얗게 도드라진 손마디가 감춰지지 않은 그의 후회처럼 돋아 올라 있었다.
“태자전하, 괜찮으십니까?”
직인이 심상찮은 그의 표정에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직인 그대는 입이 막혔군.”
“......그렇사옵니다.”
태자가 하문하는 예민한 것들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숨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못했던 직인이었다.
그때마다 직인의 숨결을 타고 흐르던 영취가 그의 심사를 예리하게 긁어 팠다.
“......!”
또다시 허락되지 못한 말을 내뱉은 듯 직인의 입이 물밖에 건져놓은 붕어처럼 벙긋거리기만 했다.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리는 직인의 모습은 웃기기도 했고, 태자 자신만큼이나 딱하기도 했다.
태자는 벙긋거리며 연신 나오지 않는 소리를 내뱉으려 애쓰는 직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글거리던 눈빛은 이미 차게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직인, 그대는 오늘 나를 만난 적이 없다. 알겠는가.”
“전하...... 어찌.......”
“그대의 베틀에 찬란한 황후사가 걸리도록 해주지. 함구하라. 나 역시 오늘 그대를 본적 없으이.”
“태자 전하.......”
“달빛이 차갑네.”
태자는 쥘부채를 꺼내 들어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직인에게 내리는 축객령을 대신했다.
지금은 말 못 하는 직인을 데리고 노닥거릴 때가 아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은밀히 수하를 푸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직인은 뭔가 결심한 듯 태자를 향해 사배를 올렸다.
“새로운 황후사를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전하, 강녕하시옵소서. 청조는 언제든 날 준비가 되어 있나이다.”
아비인 옥황을 등지겠다는 직인의 은근한 어조를 못 알아듣진 않았을 텐데, 태자는 돌려 앉은 그대로 미동이 없었다.
사르락.
비단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오래지 않아 푸드덕거리는 청조의 날갯짓 소리가 들리고, 달빛 푸른 밤 태자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달이 잠겨든 식은 찻물이 몹시도 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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