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새신부 (5)
2017.08.18.
내궁은 귀왕의 비를 위한 궁이었다.
내궁은 대대로 새 주인을 맞을 때마다 그 이름을 달리했었는데, 이번대의 귀왕은 비를 이십 년이나 들이지 않아 아직까지도 내궁엔 다른 이름이 내려지지 않은 채였다.
“와아.......”
다른 건 모르겠지만 내궁화원에 쏟아지는 달빛 하나만큼은 가히 절경이었다.
이곳이 하계건 귀들의 세계건 무어라 부르는 곳이건 간에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상관이 없을 정도였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 같이 크고 둥그런 달은 여태 봐왔던 만월의 이름을 무색하게 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은 차치하더라도 달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크고 강렬한 자태는 모든 것을 잊고 홀린 듯 그 모습을 쫓게 만들었다.
소희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저 달에 닿고 싶다.’
부지불식간에 든 생각은 어느새 집념이 되었다.
저 크고도 아름다운 달빛에 온몸을 내던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열망만이 남아 소희의 발걸음을 끌어당겼다.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내딛던 발걸음이 어느새 날듯이 뛰고 있다는 것도, 걸치고 있던 환의 도포가 이미 반쯤은 벗겨져 버린 것도 모른 채 소희는 무작정 달에 가까워지기 위해 마구잡이로 달려 나갔다.
이미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하는 것은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진지 오래였다.
전신에 내려앉는 싸늘한 달빛이 너무나 시원하고 좋았다.
정신없이 내달리던 소희를 붙잡은 건 등 뒤에서 들리는 귀에 착 감기는 권태로운 목소리였다.
“비 마마. 한낱 요괴도 아닌데 달빛에 취해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
소희는 온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웃음기를 미처 지우지 못한, 요염하고도 나긋한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상냥했건만.
그 목소리에 기분 나쁜 오싹함이 말릴 새도 없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내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등 뒤로 적발을 드리운 키가 늘씬한 미녀가 고아한 자태로 서 있었다.
‘누구지?’
내궁에 자신 외의 누군가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눈앞의 미인은 누구인 걸까.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 어떻게 이렇게 기척도 없이....’
조금 전까지 달뜬 갈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의문과 함께 경계심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소희는 어수선한 제 차림을 정리하는 대신 자신을 불러 세운 묘령의 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사르락-
비단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눈이 아찔할 만큼 대단한 미녀가 한무릎을 굽히며 소희에게 가만히 인사를 올렸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올린 공손한 자태였다.
“하계를 비추는 염라의 세 번째 불 아수라, 비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자신을 아수라라고 밝혀온 미녀는 무척 키가 크고 날씬했다.
쭉 뻗은 팔다리가 길고 곧았으며 그 자태가 날렵하고도 단단했다.
허리춤에서 흔들리는 장검이 아니더라도 마냥 규방에서 수를 놓던 이같아 보이지 않았다.
차랑-
아수라가 허리를 들어 소희에게 가볍게 다시 한 번 절을 해오자 허리에 달린 장검에서 맑은소리가 울렸다.
귓가를 두드리는 시원하고 청량한 소리에 소희의 시선이 저절로 아수라의 허리로 향했다.
소희의 시선에 한결 느긋해진 표정을 지은 아수라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답을 했다.
“왕께서 하사하신 홍월이랍니다. 청천의 전 때 내려주신 검이지요.”
아수라는 교태 어린 미소를 지으며 허리에 달린 장검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단지 검집을 쓸어내리는 단조로운 행동이었지만,
길게 뻗은 하얀 손이 검붉은 검집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선을 끌어당기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붉은 입술이 미소를 머금자 유혹적인 자태가 되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소희의 머릿속을 찌르르하게 울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온몸에 전율이 일며 소름이 돋았다.
“네.”
“이천의 선인의 피를 머금더니 더욱 식욕이 왕성해지는 욕심꾸러기지만....... 홍월의 울음소리만큼 귀력을 불러일으키는 건 없답니다. 비 마마께서도 이 녀석의 울음을 듣는 날이 오시겠지요?”
아수라의 크고 아름다운 눈이 살짝 접히며 가늘어졌다.
큰 눈 안의 눈동자는 환의 그것처럼 붉었다.
하지만 타오르는 불꽃같은 그의 홍안처럼 아름답다거나 신묘한 기운이 느껴지진 않았다.
이런 미인에게 불타오르는 보석같은 홍안이 허락되지 않았다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소희는 조금 전까지 그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던 것도 잊고 제 앞에서 입술을 혀로 핥아 올리는 아수라를 보며 애석해했다.
“홍월은 울음을 터트리면 반드시 피를 본답니다.”
소희의 시선에 담긴 안타까움을 읽지 못한 아수라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내밀해졌다.
사르락.
반 발짝 내밀어왔을 뿐인데 아수라의 날숨이 소희의 가슴에 차갑게 닿았다.
“마마께서도 한번 들어 보시렵니까?”
“홍월의...... 울음을?”
소희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손끝이 저릿하고, 정신이 몽롱해졌었다.
워낙 순식간이라 그녀스스로도 갸우뚱할 만큼.
“전신을 떨리게 하는 홍월의 울음은 단말마와 너무나 아름답게 잘 어울린답니다.”
“......그런가요?”
눅눅한 밤공기마저 황홀하게 울리는 아수라의 목소리는 단지 매력적이다는 단어로만은 설명되지 않을 힘이 깃들어져 있었다.
듣는 이의 심정을 끌어 올려 동조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목소리에 담겨 있어,
아수라를 단순히 화려한 미녀로만 치부하게 두지 않았다.
그것은 권태로운 몸짓과 함께, 듣는 이를 굴복시키는 권능이 깃들어있었다.
사르락-
잠시 처지를 망각하게 만드는 현실에 멍하게 있던 순간.
아수라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지며 다시 반 발짝 다가오자, 이제는 그녀의 숨이 소희의 뺨을 스칠 거리가 되었다.
“들어보시렵니까? 황홀할 텐데요.”
소희는 눈앞에서 교태 어린 미소를 지으며 나긋하게 유혹하는 아수라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아수라는 확실히 미인이지만 자신과는 그 범주가 달랐다.
염라의 세 번째 불이라 소개를 하는데, 그게 무얼 뜻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아름다운 자태로 얻어진 지위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수라의 말은 듣기 좋았어도 내용은 그저 가볍게 흘려듣기에는 무거운 것들이 많았다.
청천의 전......?
왕이 하사한 검.
울음소릴 내면 반드시 피를 본다는 홍월.
아수라의 말을 듣고 있자니 환의 눈동자를 들여다봤을 때처럼 순간순간 정신이 몽롱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그때보다는 덜했다.
소희는 가까스로 아수라의 ‘지배’를 떨쳐냈다.
그러자 노곤하게 잠겨들던 생각이 순식간에 맑게 깨어나며 현재 그녀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느샌가 검집이 목덜미에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노련한 검사라면 단번에 목을 베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탐욕에 가득 찬 아수라의 붉은 눈동자가 바라는 것은 소희의 목숨이었다.
저 나긋한 목소리에 정신을 놓아버렸다면,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게 냉큼 그러마 하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소희는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염라궁의 가장 내밀한 곳에 위치한 내궁. 염라대왕의 비가 머무는 하계에서 가장 안전하고도 안락한 그곳을 제 발로 뛰쳐나왔다.
‘지금 그대는 귀문의 별이라 하지만 사실 하계로 내려가게 되면 모든 귀들이 탐내는 훌륭한 먹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어째서인지 이 순간 환의 말이 떠올랐다.
단말마와 잘 어울리는 홍월의 울음소리를 제게 권하는 아수라.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중이었다.
‘저런 사술을 쓸 정도면, 나를 함부로 죽일 수는 없다는 뜻인가?’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소희는 조심스러운 추측에 용기를 얻어 보기로 했다.
소희는 자신에게 가까이 밀착하여 검붉은 검을 제 목에 들이밀고 있는 아수라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냈다.
자신이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덜덜 떨리는 가느다란 손짓이었다.
하지만 아수라는 검을 들이밀고 달콤한 위협을 하는 것 치고는 너무도 순순히 물러나 오히려 그녀의 위협이 꿈만 같았다.
“아수라.”
“마마, 소장께 그 영광을 주시겠사옵니까.”
하아-.
환이 말한 건 이런 의미였나.
소희는 착실히 자신을 유혹하는 아수라를 말없이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아수라는 자신과는 다른 의미로 몸을 떨고 있었다.
기쁨에 젖은 저 눈은, 환희인가.
“아수라. 염라의 세 번째 불, 귀왕의 장군. 정신 차리세요.”
두려움을 채 감추지 못한 소희의 작은 목소리에, 아름답게 빛을 발하던 아수라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진 까만 동공을 세로로 좁히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충격을 받은 듯 세로로 바짝 날을 세운 동물같은 동공을 한 두 눈은 잘게 떨렸다.
“아수라, 정신 차리세요.”
소희는 잦아드는 목소리로 재차 아수라를 불렀다.
순간이었지만 아수라의 붉은 입술을 비집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잠시 삐죽 나왔다.
등 뒤로 소름이 쭉 끼치고 두 다리가 통제를 벗어나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수라를 부르면 부를수록 두려움이 커졌다.
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요염한 목소리를 내던 것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뿐이었다.
하지만 소희는 아수라를 부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것만이 그녀가 살아날 방법이라는 것을 본능이 속삭여왔다.
자꾸만 아수라를 불러 ‘귀왕의 비’가 될 그녀를 시해하려 하는 불충을 막으라, 살아남으라 속삭였다.
“아수라.”
소희가 절박함을 가득 담아 세 번째 부름을 소리로 만들자, 아수라는 큰 걸음으로 훌쩍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순식간에 그녀는 한팔 간격 뒤로 멀어졌다.
검격에 엄지손가락을 찔러 넣고 언제든 검집에서 검을 쳐올리려던 손을 부드럽게 미끄러뜨려 홍월을 허리로 끌어내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희가 보기에도 아수라는 더 이상 그녀를 위협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소희는 채근하듯 부르는 것을 멈추고 가만히 아수라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통제를 벗어난 꼴사나운 몸은 여전히 잘게 떨리고 있었지만, 아수라에게 티를 내는 순간 이 아슬아슬한 상황은 최악이 될 거라는 데에 소희는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또다시 한걸음 뒤로 멀어지는 아수라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 창백하기까지 했다.
붉게 물들어 요염했던 입술은 어느샌가 앙다물렸고, 입꼬리를 따라 위협적으로 내밀어졌던 날카로운 송곳니는 그녀의 날숨을 따라 사라지듯 그 모습을 감춰버렸다.
“아.......”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아수라는 피처럼 붉은 두 눈을 천천히 감아 내리며 길고 깊은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하아아아아.......”
소희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두 눈을 감고 한참을 숨을 고르던 아수라는 마지막으로 하얗게 얼어버린 숨을 토해내고 나서야 눈을 떴다.
다시 마주한 아수라의 눈동자는 붉긴 했지만 분홍빛이라 착각할 만큼 맑았다.
“마마.”
입을 떼 소희를 부르는 아수라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리 나긋하지도 요염하지도 않았다.
낮고 지극한 권능이 섞인 목소리였다.
“염라의 세 번째 불, 귀왕을 수호하는 자 아수라, 귀문의 별을 뵈옵니다. 소장의 무례를 벌하여 주십시오.”
아수라는 아까와는 달리 무릎을 땅에 대고 꿇으며 두 손을 포개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하얀 달빛이 그녀의 부드러운 적발 위에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소희는 아수라의 갑작스러운 태도전환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신이 아수라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다.
“.......”
소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주춤거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곳을 달빛에 미쳐 내달린 자신이 잘못이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귀가 된 이후로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마다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혼을 한 사이에도 내외하며 표가 공자와 곁걸음 해본 적이 없었건만,
처음 본 사내와는 ‘비’라는 말에 그가 벌려준 두 팔에 나붓이 안겨들기까지 했었다.
심지어 다리가 아프다고 생전 처음인 어리광까지 부렸더랬다.
그뿐인가.
‘달에 닿고 싶다니.’
순간 소희의 두 뺨이 불이라도 지핀 듯 화르륵 달아올랐다.
소희는 자신이 한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눈앞의 대단한 미인에게 ‘마마’소릴 들으며 공대 받을 자격이 없었다.
밀려드는 수치심과 민망함은 소희더러 달아나라 부추겼다.
소희가 머뭇거리며 뒤로 한 발짝을 디딜 때였다.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자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게 느껴졌다.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하얀 도포가 단정하게 입혀지며 어깨를 단단하고 힘 있는 손에 감싸 쥐어진 채 끌어당겨졌다.
“그대, 산책 중이었나?”
다정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소희의 귓가를 부드럽게 울렸다.
환이 나타났다.
소희는 억지로 눌러둔 긴장감이 갑작스레 터져 나온 듯 전신이 와들와들 떨렸다.
조금 전까지의 민망함이라거나 그를 내외하여야 하겠다는 법도 같은 것은 생각나지 않았다.
온몸을 누군가가 쥐고 흔드는 듯 달달 떨리는 두 다리에 힘을 줘 버티고 서있기조차 벅찼다.
조금 전 아수라의 기세가 생각났던 탓이었다.
홀로 버텨내며 아수라에게 정신 차리라는 절박함을 가득 담아 그녀를 부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상황이 떠올랐다.
아름답고 붉은 입술을 비집고 나오던 날카로운 송곳니.
세로로 길게 찢어져 흉포함이 가득한 붉은 눈동자.
아수라가 그녀를 노리던 억겁과도 같던 순간.
자신의 키 절반이 넘는 긴 검을 턱밑에 들이밀며 교태롭게 속삭이던 아수라가 바라던 자신의 목숨.
소희는 두려움에 젖어 파들파들 떨리는 가슴을 두 손으로 꾹 눌렀다.
작은 새처럼 빠르게 뛰는 심장이 손아래서 느껴졌다.
환은 아무 말 하지 않고 희게 질려 바들바들 떠는 소희의 어깨를 감싸 안은 손에 힘을 더했다.
환의 손은 따스하진 않았지만, 그가 가진 서늘함이 이 순간엔 큰 위안이 되었다.
자신을 죽인 차가운 손에 위안을 받는다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지만 이 순간 소희가 기댈 곳이라고는 환, 오직 그 하나였다.
“아수라.”
아수라는 환의 등장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소희에게 죄를 청하던 그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없었다.
환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분노가 담겨 소희는 다시 온몸이 따끔거리는 느낌을 맛봐야 했다.
“어땠느냐?”
평이하다 못해 웃음기마저 묻어있는 듯한 목소리는 일견 유쾌해 보일법했지만,
소희는 그가 말을 하자 몸을 찌르는 것 같은 살기가 더욱 짙어진 것으로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환은 무척 화가 나 있었다.
“홍월이 울고 싶어 했느냐?”
“죽여주십시오.”
“대답하라. 홍월의 울음을 듣고 싶었느냐?”
흔들림 없이 죄를 청한 자세 그대로 머리를 조아리던 아수라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환에게 시선을 마주쳐온 건 그 순간이었다.
“홍월이 바랐사옵니다. 지금도 그녀의 의지가 흘러넘쳐 들어오고 있사옵니다. 왕께서도 듣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수라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어가는 아수라의 두 눈은 수시로 홍채가 세로로 가늘게 찢어지다 돌아오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희가 보기에도 무언가를 잔뜩 참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환이 곁을 지켜주어 안심했기 때문인가, 이제는 무섭다기보다 필사적으로 참아내는 아수라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
환을 올려다보던 아수라의 눈에서 붉은 기가 맺히나 싶더니 이내 붉은 피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피눈물을 흘리는 아수라를 보고 깜짝 놀란 소희가 뭐라 말을 할 새도 없이 단호하고도 비장한 아수라의 말이 이어졌다.
“홍월을 다루지 못하는 아수라는 죽어야 합니다. 죽여주십시오.”
“넌 홍월의 사신. 전장을 지배하며 귀왕을 수호하는 자. 홍월의 권능을 통제하지 못하면 죽어야한다. 하지만...... 이번은 네 잘못이 아니니 근신하라.”
죄를 청하는 아수라를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를 퍼트리던 것과는 달리 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의외였다.
그것은 소희뿐 아니라 아수라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는지 아수라의 눈은 있는 대로 크게 떠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순간에도 무언가를 참아내는 그의 눈은 동공이 세로로 길게 늘어져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과 묘하게 어울려 세상의 것이 아닌 분위기를 자아냈다.
“전하의 다정하신 처분에 감읍...... 하옵니다.”
“가라. 홍월의 울음이 잦아들도록 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거라. 아수라 그대를 내궁 호위에서 제하고 홍월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출입을 금한다.”
서릿발 같은 염휘의 말에 아수라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순종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비 마마, 아수라가 마마께 목숨을 하나 지우고 가오니 부디 가납하여 주십시오.”
염휘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던 아수라는 제 주인의 말이 끝나자 피눈물을 비단 소매로 슬쩍 훔치고는 무릎걸음으로 소희의 지척에 다가와 공손히 붉은 구슬 하나를 두 손으로 올렸다.
살아있는 듯 붉은 기운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포도알만한 구슬이었다.
신기함에 소희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환이 소희의 등을 살짝 밀었다.
“받아두어라. 그대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수라가 환의 말에 조금 더 가까이 소희에게 다가왔다.
소희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아수라에게 내밀자 아수라가 손에 들고 있던 구슬을 소희의 손에 떨어뜨렸다.
파삭-.
구슬은 소희의 손에 닿자마자 붉은 빛무리와 함께 손끝으로 스며들어 버렸다.
“엇......?”
마치 몸속으로 빨려들어 간 것 같은 붉은 빛무리에 소희가 제 손을 만지작거리며 당황해하자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아수라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목숨을 하나 내드렸지요, 마마. 언제고 마마를 대신해 제 목숨 하나가 마마의 명을 살릴 것입니다.”
말을 마친 아수라는 소희가 뭐라 말을 덧붙이기도 전 환에게 깊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그대로 순식간에 연기처럼 흩어져버렸다.
내궁의 후원에는 이제 풀벌레 소리와 연못으로 흐르는 작은 실개울 소리만이 가득했다.
달빛으로 가득한 이 곳에서 조금 전까지 대단한 미녀에게 목숨을 위협받았던 일이 마치 꿈만 같았다.
옆에서 자신을 잡아주는 환이 없었다면 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분명.
“얼떨떨한가?”
불꽃처럼 일렁이는 홍안이 얼굴 옆에 내려앉았다.
아찔한 콧날이 뺨을 스친 것도 같았다. 소희는 환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현실감 없는 세계에 유일하게 자신에게 바로 맞닿은 이. 서늘한 품을 기꺼이 내주는 다정한 남자.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언제나 무심한 태도 속에 녹아있는 것은 다정함이었다.
말없이 아껴주는 것은 선친을 떠오르게 하였지만, 환의 것은 아버지에게서 받던 애정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이렇게 쉽게 그에게 다가서고, 곁을 허락하고 만 것은 그래서 일 것이다.
감춰진 듯, 아닌 듯 흘러넘치는 그의 애정을 보고 만 것 같아서.
소희의 까만 눈동자가 달빛을 품듯 눈앞에서 찬연히 빛을 발하는 은발의 염휘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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