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4화 (4/114)

4. 새신부 (4)

2017.08.14.

한참을 누워있다 일어난 것 같은데 아직도 바깥은 달빛이 환했다.

소희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가만히 옷을 매만졌다.

작은 풀벌레 소리와 물이 흐르는 작은 소음이 조용한 방안을 곱게 채우고 있어 혼자 있었지만 외롭지 않았다.

무릎을 끌어당겨 턱을 괴고 소리 없이 한숨을 가만히 내쉬었다.

“내세엔 다른 것은 모르겠으되, 바다를 닮은 벽안에 태양을 머금은 금발의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먼 바다 너머 벽안의 여인들은 활달하고 사랑스럽다더이다. 저도 그들 같이 사랑스럽게 태어난다면 귀히 여김 받으며 살 수 있겠지요? 내세엔 사랑받으며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죽은 자의 왕이시여."

자신은 귀왕이라 밝힌 남자에게 그렇게 소원을 빌었다.

별 뜻 없이 하문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소희의 소원은 진심이었다.

그와 얽히고 싶지 않다는 것도.

사랑받고 싶다는 것도.

이미 전생이 되어버린 자신의 삶은 무척 외로웠었다.

아껴주셨던 아버지마저 가슴 병으로 곁을 떠나자 천지간에 홀로 남겨진 기분에 막막했었다.

유모가 제 피붙이처럼 아껴준다 한들 찰나에 느껴지는 서글픈 외로움은 뼈에 사무쳤다.

그런 제게 가족이 되어주마 손을 내밀어준 해월나루의 표가 어르신의 온정에 감사했다.

표가 어르신과 자상한 대부인.

그리고 다정한 둘째공자.

이상한 일이었다.

뭔가 기억이 날 듯한데, 어딘가에 가로막힌 듯 떠오를 듯 말 듯 하며 자신을 괴롭혔다.

사실 무엇을 잊은 건지조차 알 수 없어 어디서부터 기억을 떠올리려 애써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흐음......”

포옥 내쉬는 한숨에 흘러내린 머리가 하늘거리며 날아오르다 내려앉았다.

밤을 닮은 흑단 같은 머리카락.

자신의 맹랑한 청을 들으면 화를 낼 거라 짐작했었다.

“하하하하. 저런.”

하지만 그는 웃었다.

잔잔한 울림을 담은 목소리는 풀벌레 소리처럼 너무 자연스럽고 듣기 좋아 소희는 제가 한 말도 잊고 귀왕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하얀 도포를 단정히 두르고 바위 위에 늘어진 그대로 긴 눈매를 부드럽게 휘어가며 웃는 그는 정말로 즐거워 보여 저도 모르게 따라 살짝 미소 짓기까지 했다.

속눈썹에 반쯤 가리워진 홍안은 불꽃을 품은 듯 반짝이며 끊임없이 일렁였다.

달빛 아래 남자는 정말이지 숨이 막히도록 빛이 났다.

남자는 여전히 입꼬릴 들어 올려 웃으며 말했다.

“아아...... 어쩌면 좋겠느냐? 안타깝게도 그것은 상천의 색, 내 너에게 은과 홍은 내려줄 수 있느니라.”

소희는 은과 홍을 내리겠다는 귀왕의 말에 제가 한 기대가 헛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귀왕은 저를 후생으로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한 ‘귀문의 별’로 사는 새로운 생을 말했다.

이왕에 운명이 이렇다니 일개 필부인 자신으로써는 휩쓸릴 뿐.

그러나 조금이나마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헤쳐 나갈 수 있기를 바랄뿐이었다.

바란 적 없는 생을 선고하는 귀왕의 권태로운 말투는 지긋했고 은근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거절을 담았음에도 왕의 제안은 이상하게도 가슴을 설레게 하고 마음을 달뜨게 만들었다.

“밤을 닮은 흑단 같은 머리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네게는 달빛을 박아 넣은 은발이 제격이겠구나. 어떠냐?”

왕의 손가락이 그의 말을 따라 소희의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듯 움직이자 마치 목덜미를 깨물린 듯 소름이 돋으며 가슴 깊은 곳이 간지러워져 살짝 움츠리고 말았다.

“흣-.”

소희는 이러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머리로는 그를 미워하라 외치고, 밀어내야 한다 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통제를 벗어나 자꾸만 기묘한 감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니, 자꾸만 가슴이 수줍게 두근거리며 설레어했다.

그것은 혼약자였던 표가공자를 보면서도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생경한 기분이었다.

“하하하...... 저런...... 짐을 유혹하는 것이냐?”

그 남자, 왕은 점점 더 종잡을 수 없었다.

사납고 흉흉한 기세로 무자비하게 목숨을 끊어놓더니, 이제는 다정하기 그지없고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어르고 있었다.

조금 전 일을 겪지 못했다면, 자신을 은애하여준다 생각할 만큼 애정 어린 모습이었다.

볼을 스치는 그의 손은 서늘했지만, 자신을 아끼는 손짓이라 내치고 싶지 않을 만큼 기분 좋았다.

이제 자신은 귀가 되어 생전의 피곤함이 몰려올 일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온몸이 노곤하고 졸리웠다.

깜빡.

깜빡.

소희는 제 눈꺼풀이 천근같다 생각했다.

느릿하게 밀어 올리는 눈꺼풀은 그새 다시 내려오기 일쑤였다.

“이리 오너라.”

자신을 살살 쓰다듬던 남자는 당연한 듯 소희에게 팔을 벌려 너른 품을 열어주었다.

소맷자락이 이불보처럼 크고 넓어 저 하나 눕는다 해도 부족하지 않아 보여 소희는 졸린 눈 그대로 부비며 그가 부르는 대로 가만히 다가갔다.

제게 자리를 내어주는 자세에 가만히 그의 벌린 팔에 몸을 뉘었다.

다리가 무척 아팠다.

그가 내어주는 팔에 머릴 괴고 그의 소맷자락이 어깨를 덮는 동안 작게 몸을 말아 다리를 쥐었다.

“저런, 다리가 아픈게로구나.”

염려를 담뿍담은 그의 목소리에 소희는 감았던 눈을 떠 왕을 올려다 보았다.

‘이이는 어찌된 걸까.’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무서운 것 같으면, 상냥하고.

마음이 풀어질 것 같으면 매섭게 내친다.

도무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동동거리는 건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실상, 무례한 것도 사람을 기함하게 한 것도. 모두 저이가 저질렀건만 어째서 계속 저만 눈치를 본단 말인지.’

살짝, 처지를 망각한 뾰족한 마음이 돋아났다.

“제 이름 아십니까?”

그건 반쯤 충동이었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자신을 안타깝게 여김이었다.

‘비’로 맞으러 왔다면서도 한 번도 옳게 제 이름 한번 불러주지 않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지아비’가 될 ‘왕’에게 하는 작은 항명이었다.

그건 그의 다정한 태도에 기댄 용기였다.

저를 애틋하게 여겨주는 그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 싶었던 것이다.

그의 ‘비’가 될 거라면 조금 더 귀하게 여겨 달라는 뒤늦은 ‘앙탈’이었을지도 모른다.

소희는 운명에 순응하기로 했다.

그래서 눈앞의 귀왕을 야차같이 무서운 이가 아니라 그저 돌고 돌아온 제 지아비라, 운명이라 생각하기로 두 눈 감고, 마음먹었다.

“너만큼이나 고울 테지. 무엇이더냐?”

소희는 남자의 말에 발딱 일어나 앉았다.

그런 소희의 행태를 보던 남자도 느릿하게나마 몸을 일으켜 세워 앉더니 그녀의 눈앞에 제 손바닥을 내밀었다.

소희가 가만히 두 눈을 깜빡거리며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바닥을 바라보자 왕이 손바닥을 가볍게 흔들며 재촉했다.

‘손바닥에 써달라는 것인가?’

소희의 손이 머뭇거리며 그의 손을 잡아 가만히 손가락으로 제 이름자를 써내려갔다.

“희다는 뜻의 소에 기쁘다는 희를 쓰지요. 제 아비가 이가의 종손이셨답니다.”

“소희라.......”

그는 소희의 이름에 담긴 뜻을 음미하듯 가만히 되뇌었다.

“하얀 달을 꼭 닮은 고운 이를 얻었으니 선친께서 무척 기쁘셨을테지, 딱 네게 어울리는 이름자다.”

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손바닥을 잡아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그의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 끝에서 맺히는 글자는 불꽃 염(炎) 아름다울 휘(徽) 자였다.

“내 휘호이니라. 염자와 휘자를 쓰고 있지. 하지만 네게는 ‘환’이라는 아명을 허락하여주마.”

불 화자가 차곡히 셋이 쌓인 ‘염’자와 빛나다는 의미를 가진 ‘휘’자는 그야말로 그에게 꼭 들어맞는 글자였다.

불꽃 화자에 흩어질 환자가 모여 만든 그의 아명인 ‘환’역시 그를 위한 이름자로 더할 나위 없었다.

불꽃이 일렁이는 홍안이 소희의 까만 두 눈을 지긋하게 응시했다.

따뜻한 어둠을 품은 밤하늘 같은 소희의 두 눈에 비친 홍안은 마치 살아있는 불꽃같이 일렁이고 있었다.

“불러주겠느냐?”

“환.......”

“그대의 왕이자, 지아비의 이름이란다. 어서 익숙해지거라.”

염휘, 환의 말을 끝으로 그와 소희의 손바닥에서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서로 써내려갔던 글자가 생명을 띄고 살아난 듯,

그들이 써내려간 모습 그대로 빛을 뿌리며 손바닥에서 둥실 떠올라 그들 사이로 떠올랐다.

“이......건......?”

달빛만으로 눈 앞을 가림하던 어두운 숲속에서 글자들이 뿌리는 빛무리는 상당히 밝았다.

그것은 굉장히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이라 소희의 눈은 경탄으로 물들었다.

“귀문의 별을 반려로 맞이하는 건 귀왕의 임무라 하지 않았느냐? 서로의 이름자를 나누어 영혼에 새기는 것이지. 이것은 마고께서 허락한 연이 다 할 때까지 끊어지지도 지워지지도 않는 인연의 고리가 되는 것이다.”

환은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앞에 떠올라 빛을 뿌리고 있는 자신의 이름자 ‘염휘’를 들어 소희의 가슴께로 밀었다.

길쭉하고 단단하게 생긴 손이 가볍게 그의 이름자를 밀었다.

공중에서 은은하게 빛을 뿌리고 있던 ‘염휘’는 마치 물속에 빠져드는 조약돌처럼 소희의 가슴께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갔다.

빤히 보고 있었음에도, 실감이 나지 않을 만큼 기묘한 일이었다.

소희는 두 눈을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휘둥그레 뜬 채 제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가슴을 스미던 기분 좋은 청량감이 아직도 느껴지는데,

도대체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이지 알 수 없었다.

“이, 이게.......”

“이런 것이지.”

환은 놀라 허둥대는 소희의 작은 손을 잡아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빛을 뿌리는 그녀의 이름자를 밀게 했다.

손에 닿은 이름자는 시원하면서도 보드라웠고 손에 착 감겨와 닿은 느낌이 정말로 좋았다.

환의 손이 이끄는 대로 소희는 제 이름자를 그의 가슴에 꾸욱 밀어 넣는 시늉을 했다.

사실 그것은 힘을 줄 것도 없었다.

그의 가슴께에 닿자 글자는 마치 빨려들어 가듯 빠져들어 손에서 떨어져 나갈 땐 아쉬울 지경이었다.

“이제, 49일을 지나면 귀문의 별이 아니라 염라대왕의 비로 각성하게 된다. 그 가슴에 반려의 이름자가 영원히 새겨지는 것으로 인연의 고리를 만드는 술법은 완성되지.”

“술법.”

“그렇다. 술법. 지금 그대는 귀문의 별이라 하지만 사실 하계로 내려가게 되면 모든 귀들이 탐내는 훌륭한 먹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것이 무슨 뜻인지 저는 도통.......”

소희는 몽환적인 분위기에 한껏 젖어있다 환이 하는 섬뜩한 이야기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을 번쩍 차렸다.

인생이 끝났다고 해서 이대로 끝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목이 뜯겨 죽은 지 한 시진도 안돼서 이제 귀들의 먹잇감이라니!’

‘내 팔자는 어쩌면 이렇게 기구한 것인가.’

갑자기 들이 닥친 연이은 악재에 소희는 절로 심란해졌다.

환은 잔뜩 겁에 질린 듯 희게 질려버린 소희를 보고 가볍게 혀를 찼다.

그리고는 허리를 살짝 굽혀 눈을 맞춰왔다.

“무서울 테지만 겁먹지 말아라. 나도 이렇게 겁주고 싶진 않았지만, 태자의 장난질 때문에 어쩔 수 없단다.”

환의 목소리는 다시금 낮게 속삭이듯 밤공기 사이에 깔리기 시작했다.

듣기 좋은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어 소희는 그가 건넨 몇 마디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았다.

“연서를 몇 통이나 받았지?”

환은 겁먹지 말라더니 별안간 지난 연을 캐물었다.

“연서라 하시면 그것은 표가...... 공자님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소희가 다소 꺼리는 기색으로 작게 대답을 하자 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고갯짓에 따라 어깨를 흐르는 은발이 달빛 아래 빛 가루처럼 반짝이며 잘게 흩날렸다.

“대엿새 만에 한 통씩 보내오셨으니 달포 잡아 여섯 통쯤이라 짐작합니다.”

“언제부터 보내왔더냐?”

제 목을 뜯어 죽인 사내 앞에서 혼약자와 주고받았던 서신의 수까지 헤아리게 되다니.

잊어야지 하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여도 역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소희의 목소리는 자꾸만 잦아들다 마지막엔 한숨 같은 속삭임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말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딱히 환이 사술을 부리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한 호흡을 할 때마다 무언가 계속 빠져나가며 점점 더 그에게 귀애받고 싶은 마음만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올 설부터였사옵니다. 넉 달하고도 반이니 스물일곱 번을 받았사온데.......”

말끝을 흐리며 제게 연유를 묻는 소희의 태도에 환은 코웃음을 쳤다.

“흥. 아슬아슬하게 절반을 넘겼던 것이군. 그래서 골수 넘어 영에도 속박의 인이 남았어.”

싸늘한 음성으로 노기를 감추지 않고 터트리는 환의 기세가 일순 너무도 흉흉해서 소희가 움찔하던 것도 잠시, 온몸이 따갑고 아파와 소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얼어붙은 전신을 송곳으로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앗!”

몸을 작게 웅크리며 아파하자 환은 금세 기세를 갈무리하며 그녀를 가볍게 품에 안아주었지만 소희는 환의 품안에서도 웅크린 채 떠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귀문에 발을 들인 갓 태어난 영이 된 소희에게는 자신들의 왕인 환이 터트리는 노기를 받아낼 영력이 없었다.

환은 마구잡이로 들끓는 노기를 간신히 눌러 내리며 제 품에 잠긴 소희를 커다란 손으로 살살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쓸어내리는 손바닥에 은은한 빛이 새어나오자 오래지 않아 떨림이 멈추고 바깥으로 터트리지 못한 속울음이 그쳐졌다.

“과인의 실수였다. 네가 어떤 처지인지를 미처 살펴 헤아리지 못했어. 미안하구나, 태자의 고약한 장난질에 네가 앞으로 고생할 것이 훤히 보여 그만.......”

“......괘, 괜찮습니다. 이젠 괜찮습니다.”

동그란 앞이마가 온통 식은땀에 푹 젖은 얼굴을 한 채로 작게 숨을 헐떡이며 소희는 괜찮다고 속삭였다.

“그런데 태자라 하심은 왕께서 보신 적장자를 일컬으심이십니까?”

온몸을 꿰뚫는 격통이 지나가고 정신이 들자 자꾸만 환이 이야기하는 태자가 누구인지,

그가 한 장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소희는 궁금해졌다.

“저런, 고약하구나. 아직 비를 맞이하지도 못하였거늘. 내 어디서 저런 징그런 적장자를 보았겠느냐?”

드디어 환이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붉은 입술 위에 걸린 미소가 아찔해 소희의 뺨이 살풋 달아올랐다.

“공연히 알아 마음 상할 필요는 없지만, 이것은 알려주지. 그대가 인세에서 혼인을 약조하였다는 공자는 사람이 아니었느니라. 상천의 태자였지.”

“상천......의 태자?”

소희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작게 입안으로 그의 말을 따라 말을 해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환은 소희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어 느슨하게 한 뒤 자신의 고개를 떨궈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가져다 댔다.

목덜미에 닿는 환의 시원한 숨결이 간지러워 진저리를 치던 소희는 이어지는 환의 행동에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입술로 지분거린다는 느낌이 든 것도 순간.

목덜미를 가볍게 이를 세워 물더니 그대로 입술을 벌려 뜨거운 혀로 목덜미를 핥아 올렸던 것이다.

“히익.”

파드득거리며 단정치 못한 소리가 삐죽 새어나갔지만 소희는 정신이 아득해 제가 소리를 낸 줄도 몰랐다.

“아팠느냐?”

“으흥.......”

“아팠을 것이다.”

잘근-. 가만히 목덜미를 다시 이로 물어오며 환은 알 수 없는 소릴 했다.

“상태자가 아무리 영리하고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한들 설마 목에 새겨놨을 줄이야. 생과 가장 가깝게 맞닿은 곳을 잘 찾았어.”

빈정거리는 환의 칭찬은 진심이었다.

“목에 새긴 속박의 인은 다른 곳보다 더 빠르고 깊게 골수에 파고들어 숨이 붙어있는 한은 그에게 속박이 되어있게 되지. 그대가 귀문의 별인 것도 잊고 말이다.”

“속......박의 인.......”

할딱거리는 숨소리로 소희가 환의 말을 따라하는 게 들렸지만, 환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십년 전 별이 점지되던 날 그대 어미의 천수가 다했다. 본시 별을 품은 여인은 제 영력을 소모해 별을 잉태하여 키워내느니라.”

“아....”

난산으로 출산 직후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이런 것이었나!

“영을 거두러 간 사신이 그대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아비 역시 머잖아 귀문을 건널 운명이었으나, 그댈 보러 간 나에게 정성으로 사정을 했지.”

“.......”

뜻밖의 충격적인 진실에 벌어진 소희의 입술이 가늘게 경련했다.

“그 뒤로는 아는 대로다만, 그대의 아비가 혼처를 상태자에게 넘겼다니. 그것만은 이해가 안 되는구나. 내가 그에게 건 것은 영혼의 맹약, 맹약을 깨뜨리는 자는 지옥불에 떨어져 다시는 환생할 수 없다.”

소희는 담담하게 이어지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태자가 무슨 연유로 이런 고약한 장난질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하계에 척을 질만 한 일을 벌였을 땐 짐작키 어려운 이유가 있었겠지.”

차분한 표정으로 환은 잔뜩 당황한 소희를 내려다보았다.

“똑똑히 들어두어라. 그댄 귀문의 별. 귀왕, 죽은 자와 하천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나 염라대왕의 비가 될 소중한 이니라.”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힘을 실은 말은 마치 다짐을 하는 것 같았다.

“저는.......”

“마저 듣거라. 본디 인세에 든 귀문의 별에겐 혼례 달포 전 귀왕이 육신을 끊는 비약을 건네게 된다. 인세에 육신은 그대로 남아 있되 귀문의 별인 영만 하계로 넘어오게 되는 것이지.”

“.......”

어린것에게 이르듯 찬찬히 설명하는 환의 말에 소희는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대는 상태자가 속박의 인으로 영과 육신을 묶어 인세에 붙들어 놓은 채였다. 골수까지 인이 박혀 속박의 인이 박인 목을 부수뜨리지 않고선 하계로 데려올 수가 없었다.”

“어째서입니까? 그냥 육신을 입은 채로 가면 아니 될 일이었습니까?”

소희는 얌전히 듣고 있던 태도를 버리고 따지듯 그에게 물었다.

제 비가 될 소중한 이라 하였음에도 목을 뜯어낸 그의 잔혹함에 화가 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마음의 준비도 없이

험한 꼴을 견디게 한 그에게 뒤늦게 설움을 터트린 것인지도 몰랐다.

제 아비의 사정도 가려 살핀 자애로운 분께서 어째서 반려가 될 제게는 사정을 두지 않았느냐 읍소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다. 하계엔 생명이 깃든 것은 갈 수가 없다. 육신은 상천의 권능 아래 있는 것. 상태자가 그래서 귀문의 별을 육신에 속박의 인으로 묶은 것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당당했다.

“지금 당장에야 그대를 죽인 내가 원수 같고 안 믿어지겠지만. 믿어라. 그대는 염휘의 비이며 환의 반려가 될 것이다. 그대를 가혹하게 내몬 것이 무엇인지 항시 되새겨야 한다.”

‘가혹하게....’

“영에 남은 속박의 인은 하계로 건너가 온전히 49일을 보내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니 염려 말거라. 속박의 인에 눌려 잊고 있던 것들도 저절로 깨어나 그대 스스로가 깨우치게 될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무섭고도 먼 이야기에 소희는 잔뜩 지쳐버렸다.

이렇게 죽지 않아도 될 것을 제 정인 때문에 죽어야 했고,

사실 그는 제 정인이 아니었으며,

자신은 명부의 왕 귀왕의 비라는 걸 단번에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그리고 죽었으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이야기에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환의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리 오너라. 지쳤을 터이니 내궁으로 가자꾸나. 눈감고 잠들거라. 안주인을 위한 궁은 주인을 기다리며 이십 년 전부터 비어져 있었단다. “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가만히 품에 안겨들어 머리를 기대자, 제 이름자가 새긴 곳에 뺨을 맞대게 되었다.

손가락을 들어 제 이름이 잠겨 들었던 곳을 살며시 쓰다듬자 환이 움찔거리며 저를 감싼 팔에 힘을 가했다.

그의 고르지 못한 날숨이 정수리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가 소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상천의 흔적을 다 지우고 나면 물리도록 사랑하여 줄 테니 이리 애태우게 하진 말아라.”

“네?”

“난 이십 년을 기다렸는데 그대는 49일도 길다 할 참인가?”

“.......”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소희가 가만히 올려다보자 환이 입술을 늘어뜨리며 낮게 속삭여주었다.

“이 밤서 짐을 유혹하느냐 이 말이다.”

소희에게 되묻는 환은 은근한 목소리만큼이나 잔잔한 불길이 이는 보석 같은 홍안이 일렁이며 잔뜩 그 색이 짙어진 채였다.

“흣!”

생각의 끝에, 짙어진 사내의 눈빛을 한 환이 떠오르자 무릎에 맞대고 있던 뺨이 불붙은 듯 달아올랐다.

침상 위에 앉아있던 소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환의 시선이 떠오르자 온몸에 열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에 무엇이 기억나지 않는지는 급할 것도 없었다.

환의 말처럼 49일을 지내고 나면 다 알게 될 것이니까.

환의 말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귀객이 된 후, 매 호흡마다 자신을 옭아매던 무언가가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었다.

그것이 환이 말한 속박의 인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한결 가뿐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표가 공자를 향한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어찼다.

무얼 잊은 것인지 생각이 나진 않지만. 그건 아마 둘째 공자와 관련된 것이리라.

바깥으로 나가 바람을 쐬어볼 참이었다.

환이 말하길 내궁은 오로지 귀왕의 비를 위한 궁이라 했으니 제 마음대로 후원을 거닌다 해도 큰 흠이 되진 않을 것이다.

#dar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