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3화 (3/114)

3. 새신부 (3)

2017.08.11.

사위가 적막한 가운데 아연 쩡하니 울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아....... 이토록 음울한 영력이라니.”

킬킬거리며 웃는 건 미끈한 사내였다.

푸른 도포가 어울리는 상큼한 용모의 어린 사내.

하지만 그 눈빛만은 해묵은 별빛처럼 깊고 진득해 영명해 보였으며,

한편으론 속을 알 수 없게 해 마냥 어린 미동 같아 보이지 않았다.

촤아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쥘부채가 펼쳐지며 호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을 가렸다.

“전하, 어찌하여야 할지요?”

젊은 남자 앞에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고개를 조아려왔다.

“으음...... 글쎄다.”

쥘부채 뒤로 가려진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거렸다.

팔랑거리는 부채가 일으키는 바람을 따라 길게 드리워진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흩날렸다.

달빛을 머금은 머리카락은 밤바다처럼 까맸고 너울처럼 부드러이 출렁였다.

부복한 노인 뒤로 역시 머리가 반백인 여자가 공손히 머리를 조아린 채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기이한 모습이었다.

노인은 성심으로 아들인 젊은이를 모셨고, 그는 이를 당연히 여기며 시중을 받아들였다.

다른 이가 보았더라면 대노할 광경이었지만, 집안의 이들에겐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미남자는 하늘보다 높은 곳에 군림 하는 분이셨다.

상태자.

삼계의 맨 윗천을 담당하는 상천의 태자.

옥황상제의 장자 되시는 분이시다.

삼천의 가운데 중천, 인계인 이곳은 상천과 하천의 권능 아래.

엄밀히 따져 천계라고 부르는 것은 상천과 하천뿐이었으니,

인계인 중천의 모든 것이 천계의 권속이라 불러 마땅했다.

그렇게만 가늠해도 이들의 극진한 태도는 당연했지만, 상태자의 앞에 부복한 것은 그저 노인이 아니라 실은 그의 삼관대제 중의 하나인 천관사복대제, 천관이었다.

천관, 상태자의 수족과 같이 따르는 이이며 그의 의지를 천명하는 자이다.

본래 천관이라 함은 하늘과 상천에 머무는 신을 관리하여 중천에 있는 자들을 선한 길로 나아가게 하는 일에 힘쓰는 자였다.

그러나 천관뿐 아니라 삼관대제의 으뜸 책무는 바로 웃전을 공경하고 섬기는 것이였고,

나아가 상천의 복을 짓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으니,

지금 천관은 그 으뜸 책무를 이행하는 중이라 하겠다.

“형님 몰래 뫼시려던 건 이제 물 건너갔구나.”

아쉬움을 담은 말과는 달리 쥘부채 뒤의 두 눈은 하르르 녹아내릴 것 같은 눈웃음을 지었다.

청량한 음색은 기쁨으로 잔뜩 떨려 그의 눈을 보지 못했다면 자칫 울고 있다 오해할 정도였다.

촤악!

상태자의 옥안을 가리고 있던 쥘부채가 하얗고 미끈한 손안에서 접혔다.

“하기사. 형님을 상대로 이런 얄팍한 수가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느니라. 한때의 여흥이 되었어.”

“전하......!”

그의 앞에 부복한 천관사복대제가 막 입을 떼는 순간 녹아나듯 달콤하던 태자의 목소리가 냉기를 가득 품고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허나, 기분이 상하는 것만은 어쩔 수 없구나.”

“전하! 소신의 죄이옵니다.”

상태자의 앞에서 머리를 돌바닥에 쾅쾅 찍으며 천관사복대제가 저의 죄를 청하였다.

존귀하신 분의 심사를 어지럽힌 죄, 거사를 성사시키지 못한 죄를 물어 달라 엎드려 읍소했다.

천관이 하는 양을 내리뜬 눈으로 보고 있던, 쥘부채를 쥔 태자의 손이 가볍게 흔들리나 싶더니 섬뜩한 소리가 안마당을 울렸다.

스걱-.

“크으.......”

천산사복대제가 제 왼팔이 있던 곳을 황급히 움켜쥐며 침음을 삼켰다.

그의 눈앞에는 이미 깨끗하게 잘려나간 천관의 왼팔이었던 것이 피를 흘리며 나뒹굴고 있었다.

“소......신의 죄를 이다지 자비롭게 처분......하여주심에 그저 감읍하옵니다.”

“천관. 다음번엔 양팔을 바쳐야 할 것이다. 난 두 번은 용서치 않아.”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당장 차비를 하라. 상천으로 돌아가겠다.”

“전하, 묘시가 되면 천문을 열겠사옵니다. 채비할 동안 들어가셔서 옥체의 노고를 달래시옵소서.”

연시 포를 적시고 흘러내리는 피는 지혈하지도 않은 채 천산사복대제, 천관은 상태자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순후히 말을 올렸다.

상태자는 일별 없이 몸을 돌려 안채로 사라졌다.

그가 걸을 때마다 걸음걸음 진한 도화향이 피어올랐다.

‘상계의 휘'가 사라진 작금에 태자가 굳이 제 본신을 감추지 않은 탓에 사방이 진한 도화향으로 그득해졌다.

도화향, 그것은 상태자의 전신을 타고 흐르는 천신의 기세였다.

그의 도화향이 옅어지다 종내엔 아무런 향취가 남지 않게 되고서야 천관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잘려나간 천관의 왼팔이 흉물스럽게 나뒹굴고 있었고 안마당은 온통 핏물로 엉망이었다.

콸콸 솟아나는 핏물에 안뜰엔 이미 시뻘건 웅덩이가 생겨나고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잔뜩 예민하게 돋았다.

안마당과 그의 몸을 흥건히 적신 피에서 역한 비린내가 날 법도 하지만, 그는 선인.

그들의 피에서 역한 냄새가 날 리가 없었다.

신이 아니라 도화향은 아니라 해도 상쾌한 향취는 잔잔히 계속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그대로 두실 참입니까?”

자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관의 등 뒤에서 맑은 음색이 들려왔다.

지관사죄대제, 통칭 지관. 그의 아우였다.

지금은 인계에 내려오며 상태자의 역사에 일조하느라 노부인의 꼴을 하고 있었으나 본디 그는 용왕의 차남.

우스꽝스러운 꼴을 하고서도 저어함 없이 연신 피를 흘러내리는 제 동기를 차분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냥 두지 않으면......?”

노인의 목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낭랑한 목소리로 천관이 대꾸하며 몸을 일으키자 여태 도포를 적시며 무섭게 흘러내리던 핏물이 일순(거짓말 같이) 멎었다.

“묘시에 천문을 열려면 한 팔로는 어림없답니다. 잘 아시질 않습니까. 서두르시지요.”

재촉하는 것과는 달리 상냥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공기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상계의 휘'를 놓친 지금 조금의 불편함도 모시는 게 그나마 태자 전하의 너그러움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노부인의 모습을 한 지관이 젊은 남자의 음성으로 제 동기에게 다정하니 이르는 모습은 기괴하면서도 누구든 호기심이 일게 할 만큼 낯선 광경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당을 소리 없이 조심히 오가는 시비와 잔뜩 숨죽인 바람마저 익숙한 듯 모두들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

잔잔히 부는 바람에 천관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지관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천관이 몸을 돌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느릿하게 몸을 돌린 그가 지관사죄대제를 마주 보고 섰을 땐, 한쪽 팔이 잘린 늙은 촌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신 양손으로 앞섶을 가지런히 여미는 젊은 학자풍의 선관이 서 있을 뿐이었다.냉정하게 생긴 얼굴에 병약한 듯 창백한 안색은 그를 몹시 예민하게 보이게 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관에게는 더욱 익숙한 모습이었다.

바로 천관의 본신이었다.

“역시, 양팔이 있는 편이 보기도 좋습니다.”

“네 말 때문에 되돌린 것이 아니야. 다음번에 양팔을 내놓으라는 태자 전하의 엄명 때문이었느니.”

유약한 생김과는 달리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정히 울리는 제 아우의 말을 차갑게 쳐냈다.

“네,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지관은 다소 신경질적인 천관의 말에도 가지런한 눈썹 한번 찌푸리는 법 없이 공손히 대답하였다.

천관은 그런 지관의 모습을 보다 가볍게 한숨을 터트렸다.

“아니다. 내가 공연히 화풀이하였다. 달포도 안 남은 지금, 상계의 휘를 잃어버릴 줄이야. 태자께서 상심하시는 게 보여 마음이 좋지 않아 괜히 네게 쓴소릴 했구나. 미안하다.”

“아닙니다. 형님.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사실 상계의 휘를 속박의 언으로만 묶어 두기는 무리였습니다.”

“아쉽구나. 귀왕께서 조금만 늦게 눈치 채셨더라도 '휘'를 상천으로 무탈하게 뫼시었을 텐데.”

천관은 지관의 말에도 진한 아쉬움을 숨기지 않은 채 인상을 구겼다.

천관의 아쉬움은 태자가 사라진 안채로 시선을 끌어 당겼다.

태자께선 여흥이라며 가벼이 웃어넘겼지만, '휘'에게 귀문의 별 그림자를 가리우기위해 덧씌운 진만 무려 108개였다.

그것은 휘를 이승에 묶어두고 있던 생사의 끈이 끊어짐과 동시에 모두 파훼 되었다.

귀왕의 힘은 가히 경이로웠다.

아직 즉위하기 전이라고는 하나 거의 모든 힘을 내림 받은 상태자의 기세가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는데.

상태자가 정성을 쏟아 휘에게 한겹 한겹 씌워 올린 진을 거미줄 끊어내듯 한 번에 걷어낼 줄이야.

적어도 상태자가 시전한 진이 자신들이 당도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줄 알았었다.

태자께서 애지중지 아끼고 아끼시던 분이었다.

장중보옥이 이보다 귀하랴. 태자가 휘에게 쏟은 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날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휘를 지켜보며 하루를 억만년같이 마음 졸이셨다.

‘상천으로 뫼시고 가기를 얼마나 고대하셨던가!’

상계의 휘를 뫼시고 태자와 함께 돌아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모두 파훼 된 진을 따라 한낱 꿈이 되고 말았다.

작은 한숨을 따라 달빛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하얗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지관은 문득 손을 들어 눈 위로 손 그늘을 만들었다.

“괜찮으십니까, 형님?”

“아아...... 만월이로구나. 어쩐지.”

상계의 선인인 그들은 하계의 권속인 월광에 약했다.

만월의 빛은 선인의 양기를 약화시켰으며 그들의 권능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영력이 약할수록 지대하게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옥황상제의 아랫단을 차지하는 자신들에겐 그저 뼈가 시리는 듯한 추위가 찌르는 정도의 느낌 그 이하 그 이상도 아니었다.

월광의 영향보다 영력이 강하니 제약을 거의 받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만월은 평상시와는 달랐다.

상계의 휘가 인계를 벗어나 광휘가 완전히 걷혔기 때문인지,

귀왕께서 현신하셨기 때문인지,

만월의 힘이 평소와는 달리 상당히 광포해 도저히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귀왕.

염라대왕, 저승시왕을 이끄는 우두머리,

죽은 것들을 관장하는 하계의 지존이시며 죽은 자의 운명을 내정하시는 단 하나뿐인 존귀하신 이셨다.

상계의 옥황상제가 살아있는 모든 것의 운명을 주관한다면 염라대왕께서는 사후의 모든 것을 아우르셨다.

그리고 지고하신 옥황상제의 단 한 분뿐인 동기이며, 손 위 형님 되시었다.

그것은 천지를 아우르는 마고께오서 태초에 정하신 것.

상하계 두 지존의 존귀함을 비교하는 것은 불경한 것으로 터부시되었다.

그러나 근자에 이르러 산 자들의 영역인 땅 위로는 도무지 현신하지 않는 귀왕의 위세는 사람들에게 잊혀져버렸다.

귀왕을 잊은 산자의 땅에선 언젠가부터 상계를 으뜸으로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불경함에도 친림하지 않으신 분이 노기를 터트리며 중천에 발을 딛으셨다는 것은.......’

천관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감긴 두 눈꺼풀 아래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굵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두 눈을 찔러대는 만월의 빛 내림을 그대로 올려다본 탓이었다.

“올해 겨울은 혹독하겠구나.”

소매를 들어 얼굴을 흐르는 핏물을 무심히 닦아내며 천관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전에 상계의 휘를 모셔와야지요.”

지관 역시 만월의 힘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모양인지 어느샌가 노부인의 모습을 하고 있던 둔갑술을 풀고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온 채였다.

“쉽지 않겠구나. 아직 하계의 달은 멀었는데도 벌써 만월에 깃든 힘이 예사롭지가 않아.”

“마음을 강잉히 잡수십시오. 이번대의 휘는 저희 삼관대제가 진상할 것입니다.”

“......귀왕께서 이미 거두신 별을 무슨 수로 받아 온단 말이냐. 까딱 잘못하였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음이다.”

“하오나, 형님!”

“말을 삼가거라. 지금은 만월의 지배에 있는 하계의 시간이니라. 귀왕께서 듣고 계시리란 걸 잊지 말고.......”

천관이 조심성 없이 젊은 혈기를 내세우며 다짐을 하는 아우를 다잡으며 다시 한 번 소매를 들어 눈에 맺히는 핏물을 찍어냈다.

만월의 서릿발 같은 기세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상계의 휘.

상천의 빛이라는 운명을 타고난 여아의 명이 조금 전 해시에 인계에서의 연을 다했다.

귀문의 별 기운을 가림 해주던 속박의 인은 여아의 숨이 끊어지며 흔적도 없이 파쇄 되었다.

귀왕께서 직접 힘을 쓰신 걸로 보아, 술법자가 상태자인 것도 아실 터였다.

이제 자신들은 인계에서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해시에서 자시로 넘어가면서 사위를 가득 메운 건 귀왕의 차가운 영력이었다.

염라대왕께서는 귀문의 별을 거두자마자 그의 비를 탐한 자신들을 벌하듯 마구잡이로 날뛰고 거친 기세를 한껏 피워 보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분명 자신들이 어디에 머무는지 아실 텐데도 찾아와 치도곤을 내는 일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대의 귀문의 별, 귀왕의 반려는 얄궂게도 상계의 휘도 타고났던 것이다.

그리고 상계의 휘는 옥황상제의 비를 이르는 말이었다.

귀왕께서는 이쯤에서 일을 마무리 하고자 하심이었던가.

천관은 조심스레 귀왕의 속내를 짐작해보려 했지만 모든 것은 마치 눈앞의 컴컴한 하늘처럼 아무것도 가려낼 수가 없었다.

한낱 선인인 천관은 마고의 뜻을 알 수 없어 그저 막막하기만 할뿐이었다.

귀문의 별이자 상계의 휘.

그녀를 조금 전 귀왕께서 거두어 가셨다.

상태자가 머무는 장원까지 찾아오시진 않으셨으되 상당히 진노하신 까닭에 단번에 휘의 명줄을 끊어 품으신 것으로 보였다.

귀왕의 비를 넘본 상태자에 대한 처분치고는 매우 합당하고 자비로웠다.

귀왕께서도 상태자가 이럴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가려 살피심이었다.

실상 그녀는 금번 대의 귀문의 별이자 상계의 휘였지만,

귀왕의 비 자리는 공석이었고 상제의 비는 현 상태자의 모친이신 ‘휘’께서 자리매김 하고 계신 까닭에,

그녀는 귀문의 별로 제 소임을 다함이 옳았다.

지금은.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었다.

금번 대라 함은 바로, 새로이 즉위하신 귀왕을 일컬음이며,

금번 대라고 함은 새로이 즉위할 상태자를 이름이라.

금번 대의 귀문의 별과, 상계의 휘를 타고난 소희는 존재만으로 파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두 지존에게 하나의 비라니.’

상태자의 즉위까지는 채 일 년도 남지 않았지만, 즉위하지 못해 태자에 신분이 머무는 지금으로썬 상태자에게 소희를 취할 명분은 없었다.

순리대로라면 휘는 귀문의 별로서 소임을 다하는 게 옳으나 문제는 일 년 뒤였다.

상태자가 즉위하게 되면 안곁 되실 분이 아니 계시게 되는 것이다.

본디 마고께서 지존의 비를 점지하시나 지금 이 상황은 괴이하며 사리에 맞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상천의 지존 안곁 자린 비워지게 된다.

그래서 무리해가며 '휘'를 근 이십년 숨겨왔던 건데 어디서 어떻게 잘못됐기에 귀왕께 들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들조차 우연하게 휘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이 아닌가.

천관의 근심과는 관계없이 흉포하던 만월은 산 너머로 이지러졌고, 곧 태양이 장원 안으로 그 기세를 뻗쳤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상념을 거두고 의관을 정제한 천관이 뜨락을 가득 채우는 황금빛 아침 햇살을 단단히 움켜쥐고 양쪽으로 크게 펼쳐 문을 열어 천도를 냈다.

그리고는 금빛으로 은은히 빛나는 손을 소매 안으로 공손히 갈무리하며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태자 전하 납시오.”

태상의가 고하자 뒤에서 천문을 기다리던 태자가 백마에 올라타 천관이 열어 놓은 빛무리로 들어섰다.

휘를 빼앗겨 단단히 비틀린 심사에 미끈한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린 태자의 모습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사실, 상태자는 힘을 내려받기 시작하며 육신이 거대한 영력을 담아내려 수시로 그 틀을 깨부수고 다지는 통에 부지불식간에 찾아드는 어마어마한 고통 속에 있었다.

타고나기에도 워낙에 날카로운 성정이 날로 예민해져 힘을 내려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랫것들이 더더욱 뫼시기 힘들어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휘의 곁에 아예 자리를 잡고 나서는 많이 유해져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늘 다정하시더니.

이날로 그것도 끝이었다.

‘혼약을 한 처지에 남처럼 부르시렵니까. 공자라는 말보다는 명이라고 불러주세요.’

휘에게 그의 아명을 은근히 허락할 때는 모두가 제 귀를 의심 할 수밖에 없었다.

저토록 다감한 태도라니.

감히 상태자의 아명을 입에 담다니.

태자의 아명은 그보다 윗배분이나 그가 허락한 자에 한함이었다.

역사상 아무리 휘라 한들 아명을 허락받지 못한 이가 태반이었건만.

태자는 정식으로 휘를 맞기도 전에 그녀에게 제 아명을 불러 달라며 깊은 마음을 내비쳤었다.

깊은 정을 준 휘를 빼앗긴 상태자의 심경이 얼마나 날카로울지 감히 짐작조차 어려웠다.

푸르르르-

천도를 딛고 선 말이 연신 투레질을 하며 말발굽을 두드렸다.

“그놈 참. 성가시구나.”

미풍에 흔들리는 백금발을 가볍게 뒤로 넘기며 나지막이 말하는 태자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를 오래 모신 이들은 그것이 단단히 화가 난 것임을 알고 있었다.

태자는 심사가 좋지 못하면 입꼬리만 들어 올려 미소를 짓는 버릇이 있었다.

붉게 물든 모양 좋은 입술 꼬리가 비틀려 미소를 짓는 태자의 모습은 아침 햇살을 받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지만, 아무도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저 모두가 무탈히 천계로 돌아갈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태자의 검푸른 눈동자가 시린 빛을 담고 자꾸만 날뛰는 천마를 내려다보았다.

태자 허리에 매달린 장검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던 그때.

지관이 나서서 주의를 돌렸다.

“다들 저리 비키거라, 태자마마께옵서 천도에 오르시질 않느냐.”

“.......”

열을 맞춰 반듯하게 서있는 호위들을 괜스레 드잡이하며 지관이 한동안 행렬을 헤집고 다니자 잔뜩 날이 서있던 시퍼런 안광이 태자 눈에서 사라졌다.

깜빡-

느리게 한번, 눈을 떴다 감으며 천천히 장원을 둘러본 태자가 지관을 불렀다.

“그만하면 알아들었으니, 너도 채비하거라. 가자꾸나.”

“예 전하. 뫼시겠사옵니다.”

얼굴을 잔뜩 붉힌 지관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태자가 고삐를 잡아 쥐며 말을 몰았다.

거친 투레질을 하며 빛무리에 올라선 백마의 옆구리에서 순식간에 6척이 되는 큰 날개가 펼쳐지며 그대로 땅을 박차 올랐다.

상태자와 선인 일행 근 백여 명이 돌아가는데 걸린 건 채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간 뒤 남겨진 장원은 햇살 아래 빠른 속도로 바스러지기 시작하였다.

표가 장원.

그곳은 이미 오십 년 전 반역으로 몰려 멸문당한 가문의 장원이었다.

날듯이 번듯했던 장원은 원래 폐허였던 것이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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