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2화 (2/114)

2. 새신부 (2)

2017.08.07.

맞은편의 남자는 처음 만났던 것과 같이 새하얀 도포를 우아하게 두르고 너른 바위 위에 비스듬히 기대있는 채였다.

마치 달놀이라도 나온 듯 여유로운 그의 태도에 소희조차 넋을 잃고 바라보길 수차례.

귓가를 울리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혼몽하고, 일견 평화로운 분위기에 이대로 숲길에서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쉬지 않고 귓가를 맴도는 섬뜩한 소리는 소희를 잠들게 놔두지 않았다.

콰드득-

뼈가 부수어지고 살갗이 무자비하게 찢기는 소음.

그리고 그녀는 소름끼치는 소리에 이어 목에서 흘러내리던 핏물의 뜨거움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였다.

소희는 요요한 달밤의 적막을 깨뜨리고 입을 열었다.

“저는 창귀가 된 것입니까?”

창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둘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사람들이 말하는 산신, 영물인 호랑이라는 뜻과 함께 그녀는 이미 귀객이 되었다는 의미.

산신이 나온다는 산에서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는 것에게 해를 입었으니 물어야만 했다.

창귀는 보통의 귀가 아니었다. 이지를 상실한 영이었다.

산신에게 붙들린 채 제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혈안이 되어 피붙이를 끌어당기는 저주받은 것이었다.

피붙이가 없으면 생전에 가까운 이들을 꾀어내어 홀로 산길을 오르게 하고 그 끝에는 위협적인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산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창귀가 무서운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대물림 되는 죽음.

자신의 죽음만으로는 끝이 나는 게 아니었다.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담겨있는 속내는 간단치 않았고, 남자의 답을 기다리는 동안은 잠시였으나 무척 길게 느껴졌다.

“저런, 창귀라니. 내가 사람이나 잡아먹는 산신 나부랭이로 보였느냐?”

산신이냐 여쭙는 말에 대번에 잘생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웃는 남자는 언짢아보였다.

“산신이 아니십니까?”

소희는 남자가 언짢음을 알면서 재차 물었다.

“아니다.”

남자는 소희의 처음 보는 다부진 눈빛이 마음에 든 것인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푸스스-

잔뜩 긴장해 부풀어 있던 가슴이 안심되어 바람빠지듯 가라 앉았다.

창귀는 산신을 보필하고 그의 수족이 되는 것이 정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눈앞의 남자는 산신이 아니니 그에게 붙들려 유모나 제 혼약자를 꼬여내는 죄받을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외려 감사했다.

소희는 뒤늦게 남자의 기분을 맞추려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산신께서 계시는 산인지라 여쭈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몸이 기억하는 공포는 두려움을 만들어 내고 두려움은 사람을 굴복시켰다.

소희는 제 목을 꺾어버린 미지의 사내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고분고분하게 순후한 목소리로 그의 하문에 성심을 다해 답을 할 수 있던 건 그래서였다.

분명 죽었을 것이다.

그것은 확신 같은 짐작이었다.

어두워지던 시선 끝에 제 몸통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어슴푸레하게나마 떠올랐다.

반듯하게 서 있는 제 몸을 훑어 내리던 자신의 시선은 마치 타인인 듯 낯설고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살아서 단 한 번도 남을 바라보듯 멀리서 제 몸을 내려다 볼 일이 없었으니,

제게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인지 미루어 짐작하기 참담할 뿐이었다.

‘사나운 들짐승처럼 목을 뜯어내 죽인 것일까.’

가만히 어림하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분노와 절망이 가슴을 빼곡하게 채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공포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차게 식은 손끝이 딱할 정도로 떨려왔다.

이왕 죽어버린 자가 되린 몸.

저 불한당 같은 놈에게 맞서 대거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은 건 지금 자신의 상태가 산자와 그다지 다르지 않아서였다.

남자는 생사와 관계없이 자신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앙갚음은커녕 그저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한번 죽은 목숨이라고 분수를 모르고 덤비다 죽음보다 더 끔찍한 짓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죽어서라도 저 무뢰배 같은 자에게 범해지고 싶은 마음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잘 넘긴 다음 성불이라도 하고자 하는 것이 소희의 본심이었다.

소희는 죽음을 받아들이자 허탈하고, 한편으론 서글픈 마음에 설핏 미소가 물렸다.

“이상하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무엇이 말입니까.”

“네 태도.”

그사이 소희의 미소를 봐버린 모양인지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남자의 홍안이 다시 황금빛을 품고 일렁였다.

그 빛은 아차 할 새도 없이 속절없이 그녀를 마음껏 휘두르기 시작했다.

또다시 온몸이 노곤하고 머릿속이 멍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저 홍안에는 자신이 모르는 무슨 힘이 담긴 것이 틀림없었다.

소희는 자꾸만 몽롱해지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 무척 노력했지만 식은땀을 흘려가며 애를 쓴 것과는 달리 몸은 주인의 의지에 반해 자꾸만 늘어지려고 했다.

“분하지 않느냐? 목이 뜯겨 죽었느니라.”

남자가 팔을 들어 올리자 눈앞에 하얀 장벽이 드리워졌다.

난폭하게 굴며 겁박하던 것과는 달리 한없이 다정한 손길로 떨어져 앉은 소희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넣었다.

그는 그대로 손을 내려 소희의 턱을 가볍게 쓸더니 긴 손가락으로 뺨을 지분거렸다.

뺨에 닿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무척 섬세하고 부드러워 소희는 문득 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어 작게 웃었다.

조그맣게 터트린 웃음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멀게 느껴졌으나 어째서인지 간지러움만은 생생했다.

그 순간만큼은 그가 자신을 해친 사람이라는 것도, 내외해야 할 사이라는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팔 안에 잠겨든 지금이 마치 제 자리를 찾아든 것처럼 마음이 푸근하고, 다정할 따름이었다.

그가 뺨을 어루만지는 손끝에 녹아든 것은 뜻밖에도 익숙한 것이었다.

‘아버지!’

어린 시절 선친께서 상냥하게 쓸어주던 애정이 담긴 손길.

가슴을 적시는 기분 좋은 느낌에 두 눈이 저절로 감겨들었다.

커다란 눈을 가만히 감고 있는 소희는 곱게 내려앉은 눈썹이 아니더라도 천진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늘 미소를 머금고 고운 말을 하는 입매는 어여뻤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합쳐진 모습은 미색이 빼어나다고만 말하기엔 부족했고,

그보다 더 상냥했다.

“이번 생의 별은 유난히 유순하고 곱구나.”

“그렇습니까?”

나지막한 남자의 말에 소희는 의외라는 듯 되물었지만, 밤하늘을 닮은 까만 눈엔 천성인 양 깃든 다정함이 진하게 물려있었다.

아직까지 멍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크고 순한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이내 소희는 뺨을 타고 흘러드는 간지러움에 작게 진저리치며 웃었다.

미소를 지으며 휘어지는 고운 눈매는 달빛아래서 지극히 몽환적이고도 어여뻤다.

“분하지 않느냐 물었느니라.”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소희는 멍한 머리로 대꾸하면서도 어딘가 대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크게 상관없는 문제이긴 했지만 작은 의문은 자꾸만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으며 이상하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남자의 목소리는 어느 결엔가 다정하게 가라앉았다.

뺨을 어루만지는 건 더 이상 손가락만이 아니었다.

“......돌아가 그 남자의 처가 되고 싶으냐?”

“글쎄요.”

무심한 말투와는 다르게 목덜미를 따라 움직이는 손길은 한껏 애틋했다.

손이 스치는 대로 피어오르는 간지러움에 소희는 또다시 작게 웃으며 눈꼬릴 해사하게 접었다.

“어째서 글쎄요냐. 그를 은애하지 않는 것이야?”

“절 아껴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지아비가 될 분이라 성심을 다했으나, 제 목숨은...... 끊어졌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소희는 그에게 되물었다.

제 죽음을 이런 식으로 다시 캐묻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생시와는 전혀 다르지 않은 몸 상태에 단념했다 생각한 삶에 대한 미련이 불쑥 솟아 올라왔던 탓이었다.

목이 뜯겨 죽었다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에게 자신의 죽음을 또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지 미련뿐만이 아니었다.

혹시나 제가 죽은 것도 모르고 원귀가 되어 집을 맴돌아 산자를 기함시키기라도 할까 저어해서였다.

해를 입는 건 저 하나로 족했다.

그래서 단단히 마음 먹고 그를 떠본 것이었다.

자꾸만 헛된 희망을 바라는 미련을 잘라낼 확언이 필요했다.

“그런데?”

담담하기 짝이 없는 그의 대답에 소희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선뜩하게 내려앉았다.

죽었다고 이미 들었다지만, 그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말을 받는 그의 태도에 뒤늦게 설움이 솟았다.

그리고 그 설움은 이내 남은 자에 대한 축원으로 이어졌다.

“그분께는 다른 고운 분이 생기실 테지요. 사이에서 귀여운 아기씨들도 나실 것입니다. 저는 아마 이렇게 스쳐 갈 인연이었을 겁니다.”

말미에 머뭇거리던 소희는 한숨보다 더 작게 속삭였다.

“......다시 인연 따라 제게도 다정한 분이 와주시겠지요.”

“스쳐 가는 인연이라니, 너는 그가...... 아니다."

그녀의 말에 이상한 점이라도 있는 것처럼.

남자는 소희의 뺨을 다정스레 감싸 쥐었던 손을 풀어 내리고는 가만히 말을 따라했다.

낮게 가라앉는 그의 음성을 따라 온몸을 노곤하게 녹이던 기운이 옅어지자,

소희는 아까보다 한결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이자는 사람이 아닌 게 분명한데, 도대체 무엇이지? 산신이 아니라는 걸 보니 더 끔찍한 것인가?’

정체를 알지 못하는 것보다 무서운 것이 어디 있으랴.

소희는 남자를 마주보고 있다 문득 소름이 오르는 작은 몸뚱이를 진저리쳤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남자는 순간, 다짐이라도 받듯 소희에게 답을 바랐다.

“이번 생에선 닿지 못할 운명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제가 이리 된 것 아니겠습니까.”

소희는 거슬리는 말이 없도록 최대한 말을 고르며 나긋이 말을 하려 애썼다.

‘이미 스러진 목숨에 분심 품는다고 달라지는 건 하나 없을 테지.‘

서글프고 억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소희는 가만히 가슴 속에 묻었다.

다정한 당부가 담긴 서신을 보내오던 그가 그립지 않을 리가 없다.

지금도 무서워 죽겠으니 제발 달려와 주십시오, 간청하고 싶었다.

살려 달라 소리 한번 못 내보고 죽임당한 제 처지가 기가 막히고 딱하지만, 소희는 몰아치는 감정을 가만가만 누르고 있었다.

남자는 그녀 자신뿐만이 아니라 혼약자에게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괜한 산목숨을 하나 더 꺾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화를 입는 건 제 한 목숨으로 충분했다.

산자는 끝까지 살아남아 제 명을 다 해야 함이 옳았다.

혼자 나서는 저승길이 외롭지 않을 리 없었지만, ‘벗과의 오래된 약속을 지키련다.’며 천애 고아에 빈털터리가 된 소희에게 청혼서신을 넣어주시던 표가 어르신께 그 은혜를 갚고자 함이었다.

그러니 소희는 산자를 보호하고, 이미 죽어버린 자신을 애도 하려면 사람이 아닌 저자에게서 벗어나야만 했다.

무섬증이 인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남자는 소희의 뺨을 만지던 손을 거두었다.

자세는 여전히 느른한 그대로였지만 생각에 빠진 듯 내리뜬 눈은 움직일 줄 몰랐다.

이렇게 엮이지 않았다면 감탄했을 자태였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미형의 얼굴은 차치하더라도 남자에게는 마주하기 어려운 고아함이 있었다.

등 뒤로 흘러내린 머리칼은 무얼로 감은 것인지 달빛에 파랗게 윤이 나며 바람이 불 때마다 찰랑이며 흩날렸고,

하얀 도포 아래 길게 뻗은 팔다리는 곧고 단단해 늠름해보였다.

실로 지극히 고귀한 자태에 천계의 옥황상제가 자신이라고 말을 해도 믿을 법한 모습이었다.

......천계......?

소희는 혼잣말 끝에 무언가가 생각이 난 듯 까만 눈동자를 크게 치켜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남자가 제 목을 꺾기 전 그런 말을 했었다.

‘귀문의 별을 반려로 맞는 건 귀왕의 임무이니라.’

‘저이는 귀왕이라는 건가?’

낯선 이름에 떠오르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대체 귀왕은 무어람. 죽은 자의 왕, 염라대왕을 이름하는 것인가.’

남자가 기이한 사술을 부리지 않으니 소희의 머리는 금세 맑아졌다.

얌전히 앉아 있었지만,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빨리 돌아갔다.

자신의 아비는 저이에게 딸을 주겠노라 약속을 하고 십 년의 수명을 받았다. 재물도 함께.

저 귀왕이라는 자는 모르겠지만, 그 재물은 아버지가 애저녁에 도성 기민에게 나누어 주고, 절에 공양을 하며 다 없애버렸다.

'딸아이가 내드리는 것이니 복은 딸아이에게 빌어주시오.’

그때마다 아버지가 외던 한결같은 말이었다.

재물은 한정되어 있으나 가난한 이는 차고 넘쳤다.

결국에는 당장 저녁거리를 걱정해야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굶주린 사람 있으면 풀죽이나마 같이 나눠 먹자며 그마저도 청하곤 하셨다.

‘아.......’

떠오른 옛 생각 끝에 까만 눈에 다시금 가득히 물이 차올랐다.

‘아버지는 알고 계셨구나. 그래서 다른 이의 축원을 바라 마지않으셨구나.’

‘내가 이리 될까 봐.’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 이렇게 죽어버릴까 봐.’

소희는 서러움과 죄송스러움에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라고 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으랴.

식솔을 먹일 것도 마땅찮은 날까지 기민을 데리고 와 죽사발을 건네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그날이,

아버지를 원망하며 투덜거렸던 제 작은 입이 이제와 면구할 뿐이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절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제 목숨 때문인지도 모르고,

제 목숨 값을 구걸하는 아비를 저가 나서 비난 했던 어린 날을 이제야 뒤늦게 반성하고 후회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후회였고, 전하지 못한 감사함이었다.

‘아버님!’

소리가 되지 못한 절절한 부름이 그녀의 마음을 메웠다.

‘아버님께서 십년을 들인 그 정성은 아무 소용이 없었으나 그 마음에 응하지 못한 제 운명을 너무 딱히 여기진 마세요. 운명은 인간이 관여할만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소희는 얼른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훌쩍거리는 소리라도 새서 딴생각에 골몰하느라 자신을 놓아두는 남자를 자극하게 될까 봐 염려됐다.

‘약속된 십 년을 아버지는 그렇게 쓰셨구나.’

‘남은 평생을 자식 걱정에 다른 이의 축원을 그렇게나 바라셨구나.’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눈물이 어룽져 치맛자락에 짙은 자국을 냈다.

그런데 아까부터 들었던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

‘다른 이와 혼약하였다고 단숨에 목을 뜯어낼 만큼 광분했던 자가, 어째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 둘째공자를 은애하지 않느냐고 물어 오는가.’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놀리려 함인가? 혼약하기 위해 나를 죽인 게 아니란 말인가?’

순식간에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자신은 그저 삿된 것에게 해를 입은 것인가.

그새 흥미가 떨어졌다면 이대로 성불 하도록 놔주진 않으려나?

소희는 자꾸만 가난한 희망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놓아달라 말하고 싶어 자꾸만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입을 열지는 않았다.

확실치 않은 생각에 모험을 하기엔 위험했다.

소희가 숨죽이며 남자를 살피는 것을 눈치 챈 것일까.

미동조차 없이 앉아있던 남자가 몸을 곧게 세우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느슨하게 벌어진 도포를 여미고, 반듯하게 허리를 곧추세우자 단순히 자세를 바꾼 것이었음에도 남자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했다.

한량같이 능글거리던 미소마저 단단히 갈무리 되었다.

남자의 현실감 없는 미모에 침노하지 못할 고아함이 덧씌워지자 차마 함부로 바라보기 힘들 정도였다.

도포를 여민 손이 이내 소희에게 내밀어지자 사르락거리는 비단끼리 스치는 소리가 선명했다.

“혹, 다시 한 번 살아낼 기회가 있다면 바라는 것이 있느냐?”

소희를 응시하는 홍안은 불꽃을 머금은 것처럼 일렁이며 빛을 뿌렸다.

보석과 같은 홍안은 그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긴 속눈썹에 가리웠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은은한 황금빛을 머금은 홍안에서 건너오는 아릿한 기운은 그의 미형을 더욱 더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보이게 했다.

그의 찬연한 자태에 눈멀어 마음이 다잡아지지 않았다.

파도치듯 술렁이며, 끝 간 데 없이 흔들렸다.

숨겨야만 하는 분심과는 달리 마음을 현혹하는 미장부의 속삭임에, 소희는 그만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뜬금없는 그의 질문에 감춰진 본심이 무엇일까.

‘도대체 무슨 말이람.’

점점 알 수 없는 남자의 태도에 소희는 한숨처럼 무겁게 깔린 숨을 가만히 내쉬었다.

‘다시 살 기회라 함은 내세를 이름인가. 아버지께서 혼인시켜주마 하고 약조한 저이는 정말 죽은 자의 왕이신, 염라대왕이신 것인가.’

순식간에 많은 물음이 생겨나고 스스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생기를 띄고 있는 산 자일 때는 동하던 흥미가, 이제 귀객이 되니 그 맛이 덜한 것인가. 신부로 삼기 모자란다 마음을 먹고 후생을 도모케 해주시려 함인가. 그렇다면.’

다시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는 그에게 소희의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닿았다.

생시와 다름없는 예쁜 분홍빛 입술이 달싹거리며, 그에게 차분하게 말을 전했다.

“내세엔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바다를 닮은 벽안에 태양을 머금은 금발의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까만 눈동자는 어느 먼 곳을 응시하는 듯 따사롭게 풀려있었다.

“먼 바다 너머 벽안의 여인들은 활달하고 사랑스럽다더이다. 저도 그들 같이 사랑스럽게 태어난다면 귀이 여김 받으며 살 수 있겠지요? 내세엔 사랑받으며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죽은 자의 왕이시여."

달빛을 닮은 은발에 불을 머금은 당신과는 정반대로의 모습이고 싶습니다.

하다못해 검은 밤과 지독히도 잘 어울리는 당신 옆을 스치지도 않게 제 검은 머리와 눈도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막 행복해질 기회를 얻은 이 목숨 가차 없이 거두어 가는 당신과는 두 번 다시.

‘조금의 접점 없이. 다시는 마주치지 않길. 바라옵니다.’

소원을 읊은 소희는 하얗게 웃었다.

귀객이 된 여자는 이제는 자신의 왕이 되신 그 남자, 귀왕을 향해 소원을 빌었다.

그녀의 숨겨둔 분함과, 어쩔 수 없는 원망이 알알이 들어찬 충동적인 소원을 소리 내 원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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