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1화 (1/114)

1. 새신부 (1)

2017.08.04.

“요즘 날이 무척 좋습니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지척에 계시지마는 내외하여야 한다니 자주 찾아뵐 수 없어 그저 글줄로나마 아쉬운 마음을 달래봅니다.”

조용하니 나긋한 목소리가 서신을 읽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돌려 억지로 내뱉는 헛기침에 숨겨진 것은 열아홉 꽃 같은 아씨의 부끄러움이었다.

“아씨 어째서 읽다가 헛기침이시랍니까? 대충 하셨으면 마저 읽으셔요.”

아씨의 부끄러움은 제 알바가 아니니 덕실이는 야무지게도 소희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하자꾸나. 이 정도 읽었으면 충분한걸.”

“아니, 아니지요. 아씨.”

하지만 살그머니 서신을 접어 갈무리하는 소희의 손을 잽싸게 낚아채는 덕실은 생각이 다른 눈치였다.

세모꼴로 치켜 올라간 작은 눈이 제법 매섭게 뜨여있었다.

“달포를 졸랐는데, 이렇게 잡아떼시면.......”

야무지게 따지던 덕실의 입술을 소희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꾹 눌러 다물렸다.

곧게 뻗친 검지는 그녀의 표정만큼이나 다부졌다.

“쉿. 일이 있으니 이만 일어서야 해.”

“바느질이야 손이 하는 것이니, 어서 읽으세요.”

덕실은 제 입을 막고 있는 소희의 손을 치워내며 야물게 대꾸했다.

그러나 남은 서신을 읽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소희는 냉큼 일어서서 장옷을 꺼내들었다.

처음이야 저를 얼러보려고 하는 것인 줄 알았건만, 장옷을 뒤집어쓰는 소희의 손길은 망설임이 없었다.

“아니, 서신을 읽다 말고 대체 어딜 가신답니까?”

그제야 따라 일어선 덕실이 툴툴거리며 소희의 차비를 거들었다.

“어디긴, 별꽃 따러 간단다.”

“뭐하시게요.”

덕실이 수북한 삯바느질 감을 보며 보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제 처지를 딱하게 여겨 늘 그렇듯이 같이 앉아 바느질해주지 않으려나 하는 기대를 했지만, 오늘 소희는 평소와는 달리 단호했다.

“서방님 배자 한 벌 지으려고 그러지.”

“배자 짓는데 별꽃이 왜 필요하답니까?”

해 좋은 날, 말랑한 연애담 대신 바느질감이 떠안겨진 신세였다.

부루퉁한 덕실의 말에도 소희는 그저 말갛게 웃었다.

“별꽃 색이 얼마나 곱니, 고거 따다 물들여 지어드리려 하지.”

“아, 예에.”

“왜 싫으니?”

“제 옷도 아닌데 좋아 무엇한답니까?”

작고 살집 있는 손이 야무지게 장옷 동정을 매만지며 꼼꼼히 단장을 해주었다.

다른 이가 들었더라면 크게 경을 칠 덕실의 말에도 소희는 다만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덕실의 손끝에서 말끔하게 모양을 잡아가는 자신의 장옷은 남루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깨끗하기만 한 옷이었다.

그나마도 유모가 몇날 며칠 고생을 해 장만해준 ‘아가씨’ 몫으로, 덕실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어휴우-.”

소희의 작은 어깨가 보란 듯이 들썩이며 과장스러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소리에 덕실이 찔끔한 기색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제가 생각해도 조금 과했다.

“덕실아.”

소희는 부러 매서운 목소릴 냈다. 제가 해봐야 얼마나 무섭겠냐만은 덕실은 소희의 부름에 잔뜩 주눅이 들었다.

“예, 아씨.”

“네가 이러니 내 발걸음이 너무 무겁구나. 도대체 뭐가 문제니?”

“문제라니요. 그저 이것이 그만 다정히 대해주시니 천지분간 못하고 입에 망조가 들었습니다.”

덕실이는 주워들은 어렵다 싶은 말은 죄다 이어붙이며 쩔쩔맸다.

그 모습이 어찌나 딱한지 웃음이 터지려 했지만, 소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서신을 다 읽어주지 않아 그래?”

“......아씨.”

“아님 새 옷이 부러워 그러는 것이야?”

“잘못했어요, 아씨.”

“응? 무언지 말을 해야 들어줄 것 아니니?”

이어지는 말에 잔뜩 옴쳐들었던 덕실이가 대번에 낯빛이 환해져 소희의 장옷을 움켜쥐었다.

“아씨? 그 말씀은? 네?”

“기다려보거라. 내 별꽃 고운 것으로만 한 다발 꺾어와 네 장옷도 지어주마.”

“참말인가요?”

“아무렴.”

소희는 별처럼 눈을 빛내는 덕실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놓으며 집을 나섰다.

“아씨, 많이 꺾어 오셔요. 바느질 죄다 해놓고 기다릴게요.”

“그래, 이 밤서 별꽃 손질이나 하자꾸나.”

오뉴월 햇살 아래 소희의 발걸음이 야무졌다. 그녀의 등 뒤에서 손을 나풀나풀 흔드는 덕실이는 연서 따위 잊은 지 오래였다.

***

날이 좋다던 둘째 공자의 말과 같이 햇살이 제법 따가웠다.

산길로 접어들면서부터 소희는 장옷을 벗어 들었다.

‘산신이 나타난다는 험준한 산길에 누가 다닌다고.’

호기로운 마음이 수줍음도 잊고 장옷을 벗을 용기를 주었다.

정수리를 달구는 강렬하고 따가운 햇살은 이미 초봄의 것이 아니었다.

소희는 가만히 그늘길로 발걸음을 옮기며 이마에 배어나는 땀을 살짝 훔쳐냈다.

‘대낮에 나와 본 것도 오랜만이구나.’

햇살 아래 서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뒤 도통 밖으로 다닐 일이 없기도 했지만, 어느 새부턴가 소희는 대낮에 나가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햇살은 날이 갈수록 따가워졌고, 눈이 아리도록 부셨다.

늘 해가 진 후에야 간신히 덕실이를 데리고 가볍게 저녁 산보나 즐길 따름이었다.

‘그런 내가 이런 대낮에, 심지어 산신이 계신다는 산에 오르다니.’

소희는 다시 한 번 땀을 훔쳐내며 살풋 웃고 말았다.

그러다 차마 덕실이에게 들려줄 수 없어 황급히 접어 넣은 서신이 떠오르자 소희는 땀도 식힐 겸 바로 앞에 있는 너럭바위에 잠시 걸터앉아 소매부리에 넣어둔 서신을 꺼내들었다.

-요즘 날이 무척 좋습니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지척에 계시지마는 내외함이 법도라 하니 자주 찾아뵐 수 없어 그저 글줄로나마 아쉬운 마음을 달래봅니다.

달이 차면 기운다고 하던데, 저는 어찌 된 영문인지 달이 찰수록 그 마음이 더욱 커지기만 하여 그리운 얼굴이 늘 눈앞을 맴돌고 맙니다.

해서, 면구함을 무릅쓰고 청하오건데 사흘 뒤 운종가로 모시고저 합니다.

혼례 전까지 저 인양 품어 달라 은장도를 부탁드려놨습니다.

꽃보다 고운 분께 더한 것도 해드리고 싶지만, 더한 것은 받지 않으실 테니 가납하여 주십시오.

소희의 손에 들린 편지에선 끊이지 않고 잔잔한 향이 피어올랐다.

낭랑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소희는 인적 없는 산길 가운데서도 혹시 누가 보나 싶어 부끄러움에 잔뜩 발그레 해진 얼굴로 온 사방을 둘러보았다.

'한번만 읽어주세요 아씨. 네?’

‘제가 평생가야 한번이나 받아보겠어요? 받아도 읽지도 못하니 무용지물이에요.’

‘듣고선 그대로 잊을 테니 한번만요 네?’

‘저번서는 잘만 읽어주시더니. 네? 네? 아씨!’

달을 꽉 채운 덕실의 성화에 지고 말았지만.

이렇게 잔뜩 부끄러운 소리가 쓰여 있으니, 덕실이에게 읽어줄 수 있을 리 없다.

“.......”

손에 들린 서신을 내려다 보는 얼굴이 또다시 달아올랐다.

별꽃을 핑계 삼아 나왔어도 장옷을 지어주련다 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아기씨 태가 나고 내외해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였건만, 유모는 빈한한 살림에 제 딸의 장옷을 눈감았다.

그것은 소희에게 두고두고 마음의 빚이 되었다.

달포 뒤면 자신은 표가댁 작은 마님이 될 터였다.

혼례를 치르고서 살던 집은 유모에게 남겨 줄 요량이었다.

하지만 팔지 않은 이상 형편이 크게 나아질리 없으니 덕실이의 장옷은 요원하기 매일반.

그러니 집을 떠나기 전 소희는 덕실에게 장옷을 꼭 해주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어휴...... 다리야.”

잠시 쉬었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땀은 차갑게 식었고, 햇살도 확실히 그 위세가 줄었다.

소희는 험한 산길을 걷느라 부어버린 다리를 잠시 두드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어째 오늘따라 그 흔한 별꽃이 눈에 뜨이지가 않는지.

소희는 그 뒤로도 한참을 더 산을 올라야 했다.

그러나 자꾸만 걸어 들어간 것이 실수였다.

땀을 식히고자 쉬었던 너럭바위에서 몸을 돌렸어야 했다.

물밀 듯 들이닥친 상념에 사로잡혀, 고집을 부리고 말았다.

그날따라 보이지 않는 별꽃을 찾아 헤매느라 너무 오래 지체를 하고 말았다.

다급하게 한 다발을 따 안고 서두르며 걸음을 재촉했건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길이 설었고, 해가 뉘엿뉘엿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허둥거리는 걸음을 재촉해 무작정 아래로 바삐 걸어 내려오다 그만 비탈길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한 아름 꺾었던 별꽃은 죄다 놓쳐버렸고, 손을 떠난 꽃은 비탈 아래 흐르던 산 계곡으로 모조리 떠내려 가버렸다.

“아이, 이걸 어째.”

아쉬움에 한참을 물이 흐르는 모양만 넋 놓고 보다 사방이 어두워진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주위를 감싼 어둠에 삽시간에 공포가 엄습해왔다.

길을 잃으면 물길만 따라가도 살 수 있다던, 행랑채를 드나들던 약초꾼의 말이 생각나 미끄러운 돌을 벗 삼아 내려오길 한참.

어느새 달이 떠 차라리 한결 수월해졌다.

주변이 조금씩 눈에 익고 저 아래 불이 일렁이는 것이 보이자 안심했다.

‘천만다행이다. 제대로 찾아 가고 있었구나.’

하지만 소희는 일렁이는 불꽃이 점점 다가와 눈앞에 섰을 때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이 놀라고 말았다.

어룽지는 것은 멀리 보이는 민가의 불이 아니라 안광이었다.

바짝 얼어 다리를 간신히 땅에 붙이고 선 그녀에게 '그'가 한걸음에 성큼 다가왔다.

“이 밤에 혼자 산을 다니면 위험하답니다. 조심하셔야지요.”

시퍼런 안광을 뿌리며 맞은편에 선 남자가 제법 묵직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얼핏 보기에도 자신보다 나이가 있음직한 남자였다.

“길을 잃어 이 지경이랍니다. 염려 고맙습니다.”

소희는 저보다 연장자인 그에게 곱게 대답을 하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재촉했다.

하지만 남자는 혼자 보낼 생각이 없었던 모양인지 불퉁했던 언사와는 달리 착실히 그녀가 산 아래로 내려가는 걸 도왔다.

미끌- 물이끼가 낀 바위가 미끄러워 자꾸만 휘청거렸다.

구름이 짙어져 달빛을 온통 가린 탓이다.

보이지 않으니 더 자주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크고 힘 있는 손이 그녀의 작은 손을 덥석 잡아 넘어지지 않게 부축해주었다.

얌전히 치례하며 잡힌 손을 거두려했지만, 잡힌 손은 빠지지 않았다.

“발설치 않을 것이니 의지하시고.......”

“아닙니다. 남녀가 유별하니 내외함이 옳습니다. 머리 올리지 못했으나 혼약자가 있는 처지입니다. 놓아주세요.”

소희는 다소곳하면서도 결기있게 말을 맺었다.

매서운 말에 그가 도리를 아는 자라면 곧 손을 놓아주겠거니 했다.

하지만 여태 점잖았던 남자의 기세가 사나워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황금빛을 품은 적안은 그 기세가 흉흉했다.

“무얼 해?”

여태 공손한 어투는 꿈이었던 듯 자연스러운 하대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눈앞에 버티고 서있는 사내는 산 아래 잠들어 있을 그녀의 혼약자보다 더 고운 미장부였지만, 그보다는 몸이 더 탄탄하고 키가 반 뼘쯤 커다래 다부진 느낌이 강했다.

그런 사람이 작정하고 사나운 기세를 퍼트리자 소희는 삽시간에 공포에 질렸다.

‘설마 나를 겁간이라도 하려는 건가.’

나쁜 쪽으로 생각이 미치자 소희는 잡힌 손을 마구잡이로 비틀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남자는 흔들림조차 없이 손목을 쥐고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위협적으로 냈다.

“무얼 했다 했지?”

“놓으시오. 이 무례한 작자 같으니라고! 놓으란 말이오!”

“무례하다?”

순간 세찬 바람이 불며 달을 가렸던 구름을 멀리 밀어내자 밝은 달빛 아래 홍안을 무섭게도 번뜩이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시릴 정도로 하얀 피부가 달빛 아래 빛 가루라도 묻은 것처럼 반짝이고,

날리는 머리카락은 은사로 자아낸 것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사람이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인가.’

일순 소희는 넋을 놓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황금색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은 홍안은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온몸이 노곤해지기 시작했다.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도.

낯선 남자에게 혼사를 추궁당하고 있다는 것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느리게 깜빡이는 시선 끝에 잡힌 남자는 달빛을 받아 빛이 났다.

지독히 현실감 없는 아름다움에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혼약을 하였다고?”

광포함이 사라지고 나지막이 건네 오는 그의 말은 크지 않아도 잘 들렸다.

귓가를 울리는 듣기 좋은 목소리에 노곤하게 늘어지는 마음이 한결 더 풀어졌다.

“달포 뒤면 표가 둘째 공자와 혼사를 치를 것입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몽롱함을 가득 담은 여자의 목소리가 낯설게 울렸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생각조차 하기 귀찮았다.

모든 게 현실과 멀어져 어딘가를 부유하는 이 느낌이 너무도 좋아 소희는 더 이상 다른 것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네 지아비를 두고 어디 가서 다른 사내를 보려했더냐?”

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고,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 분명했다.

그러나 눈물이 나도록 다정한 목소리에 소희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자꾸만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어딘가에 누워 잠이 들고 싶었다.

자신이 이상한 상태라는 것도 자각 할 수 없었다.

“열아홉 번째 유월 초하룻날 신부를 맞이하러 가겠다 네 아비에게 일러두었거늘.”

“맞습니다. 그날이 제 혼사 날입니다.”

그녀의 대답에 어디선가 으드득거리는 이가 갈리는 오싹한 소리와 함께 낮은 욕설이 들린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내 바람 소리에 묻혀 소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녀를 지배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부유감과 몽롱함이었다.

“곧 끊어질 명이었으나 십 년의 목숨을 구걸하여 내주었느니라. 가엾은 피붙이를 믿고 맡길 유모 하나 두고 잠시간만이라도 지켜보겠다고 하였지.”

들이치는 바람처럼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먹고 살 돈푼이라도 물려주고 싶다 하여 재물도 주었느니라. 애달픈 소리에 마음이 동해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별다를 대꾸가 없어도 남자는 소희에게 설명하듯 묵묵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신 이것은 천계의 일. 모든 것을 부정 타지 않게 발설치 아니하기로 하였느니라. 그리고 그 아이 장성하거든 아이의 열아홉 번째 유월 초하룻날 신부로 맞이하러 가겠노라 했고 그이도 그러마 했지.”

귓가를 스치는 나지막한 소리가 노곤한 온몸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귀문의 별을 타고난 아이를 신부로 맞이하는 건 귀왕의 임무. 이 모든 것을 순리대로 풀어가려 네 아비의 더러운 욕심도 눈감고 기다려주었건만.”

“!”

남자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말에 소희 눈이 커다랗게 홉 뜨였다.

“......요괴들도 지키는 영혼의 맹약을 인간이 저버렸단 말인가.”

낮은 웃음소리가 섬뜩하게 온몸을 감아오는 것 같아 등허리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찬물을 뒤집어 쓴 것 마냥 정신이 반짝 나 자신도 모르게 황금빛이 난폭하게 일렁이는 적안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큰 키만큼이나 커다란 손이 단번에 소희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소희는 단숨에 날숨이 닿을 만큼 지척으로 끌려갔다.

“으윽!”

“신의를 더럽혔구나.”

알 수 없는 소리에는 은은한 분노가 깃들여 있었다.

아무리 자신보다 체격이 크다지만 남자는 자신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는 들고 있음에도 우아하기 짝이 없었다.

“크읍.......”

금세 숨이 막히고 목을 파고든 손가락 아래로 뜨끈한 뭔가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배덕에는 배려가 없는 법이지.”

“크으으.......”

이번에는 확실하게 들렸다.

살이 찢어지며 날카로운 뭔가가 목을 파고드는 소리를.

의지와는 상관없이 뜨겁고 비릿한 것이 입으로 넘어왔다.

힘이 빠진 두 손으로는 목을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을 때리기는커녕 제대로 손을 들어 올리지도 못했다.

양팔이 허공을 힘없이 휘저었다.

그녀가 하는 양을 비웃듯 바라보던 그의 적안이 시선 밖으로 사라졌을 때 귀로 들어서는 안 되는 소리가 들렸다.

콰드득-.

뼈가 부수어지고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온몸의 감각이 멀어지고 눈앞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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