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150화 (150/150)

외전 10화

“……아니야. 농담이야.”

울겠다. 그만하자.

그리고 쇼웬이 왜 저러는지도 대충 알 거 같고.

아리는 덕질 선배로서, 쇼웬에게 조언했다.

“쇼웬, 덕질에는 말이야, 환상이 있어야 하거든?”

“……?”

“너랑 나는 영원히 친구로 남자.”

아리의 말에 쇼웬은 무언가 크게 깨달은 얼굴이 되더니, “그래, 너는 리리니까…….”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이상한 말투를 집어던지고 예전처럼 리리와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

“응. 오늘 성녀교 정기 모임이 있는 날이거든. 너도 빨리 들어가 봐라. 선주님 걱정한다.”

쇼웬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아리는 그런 쇼웬에게 손을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엄마!”

“슈?”

도도도 달려온 작은 아이가 활짝 웃으며 아리의 다리를 붙잡았다.

놀란 아리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곰돌이 귀가 달린 뜨개 모자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 한 가닥이 빠져나왔다.

아리는 머리카락을 모자 안으로 숨겨주며 아이에게 물었다.

“안슈, 어떻게 여기에 있어? 왜 혼자 있어?”

긴 속눈썹 아래, 똘망똘망한 푸른 눈이 아리를 담았다.

안슈는 배시시 미소 지으며 아리의 품을 파고들었다.

“엄마 보고 싶어서 안슈가 혼자 왔어요.”

“뭐?”

“혼자 왔을 리가.”

쇼웬이 떠난 자리의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가 고개를 돌리니, 은발의 미남이 맞은편에 앉아 피식 웃었다.

“같이 마중 왔어. 안슈, 엄마한테 거짓말하지 마.”

“흥. 아빠가 저 두고 혼자만 가려고 했잖아요.”

“위험하니까 그렇지.”

“거짓말. 엄마랑 둘이서만 데이트하려고 그런 거면서.”

올해 네 살인 안슈는 어휘 구사력이 또래보다 뛰어났다.

아리는 혀 짧은 소리를 내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속으로 ‘내 아들 천재 아니야!?’라는 호들갑을 백 번쯤 떨었다.

애 앞에서 주접은 자제하기로 했으니, 속으로 떠는 주접이 늘었다.

아리는 안슈의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

“안슈, 데이트가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이야?”

“알아요.”

안다고?

알렌드와 아리가 놀란 듯 시선을 마주쳤다.

‘누가 알려준 거예요?’

‘글쎄.’

그 사이 안슈는 몸을 알렌드가 있는 방향으로 틀어 앉고 작은 두 손으로 아리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랑 손잡고 다니는 거잖아요.”

그게, 맞는다면 맞는 소리긴 한데.

아리는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폭 껴안았다.

‘으으. 시아나가 떠준 모자 뒤통수 진짜 귀엽다.’

안슈가 아리의 뺨에 볼을 비비며 말했다.

“엄마, 안슈가 데리러 왔으니까 데이트해주면 안 돼여?”

“당연히 되지. 우리 안슈.”

“아빠는?”

사이좋은 두 사람을 지켜보던 알렌드가 안슈에게 물었다.

“아빠는…….”

안슈는 뾰로통한 얼굴로 알렌드를 보며 고민했다.

아까 자신을 두고 가려고 했지만, 아빠도 데이트에 끼워줄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긴 했다.

엄마 다음이긴 하지만.

“안슈한테 ‘미안해.’하면요.”

“미안해.”

“……그러면 아빠도 같이 데이트해여.”

“고마워.”

뭐 하는 거람.

부자의 싱거운 대화에 아리는 웃음이 터졌다.

잠시 뒤, 안슈는 양손에 아리와 알렌드의 손을 하나씩 잡고 히펜 광장을 씩씩히 걸어 다녔다.

그러다 피곤해진 안슈가 알렌드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알렌드는 아리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며 물었다.

“이제 궁으로 돌아갈까?”

둘째를 임신한 아리의 몸이 걱정됐다.

사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오늘 아리가 외출하는 것도 알렌드에게는 큰 걱정이었다.

임신하고 나서는 아이에게 영향이 갈까 봐 순간 이동 기능도 사용하지 못하니 마차로 이동해야 했다.

“오늘 업무 볼 거 많으시다면서요. 저 혼자 다녀올게요.”

아리가 따라오지 말라고 해서 자신은 황궁에 남고 주변에 기사들을 최대한 심어놓았지만.

일도 손에 안 잡히고, 반나절을 내내 아리 생각만 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마차를 준비하라 일렀다.

그러다 안슈한테 들켜 같이 오게 된 것이었다.

“안슈도 갈래요!”

누구를 닮았는지, 제 엄마가 엮인 일이라면 뭐든 끼고 싶어 한다니까.

그래도 안슈를 데려오길 잘했다 생각했다.

쇼웬을 보고 깜짝 놀라 “저 아저씨한테 안슈가 있다는 걸 보여줄 거에여!”라고 달려간 게 안슈의 아이디어였으니까.

알렌드는 감탄하며 안슈를 보냈고, 그 뒤를 따라갔다. 자신도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

하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쇼웬이 먼저 자리를 떴다.

“……아리.”

알렌드는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아리를 불렀다.

창밖을 구경하던 아리가 알렌드와 눈을 맞췄다.

“왜요?”

“바람피우지 마.”

“네?”

“……내가 잘할게.”

호기롭게 말을 던지고 미움받을까 봐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알렌드는 민망함에 슬쩍 눈길을 돌렸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도 이 마음은 깊어지기만 하고 식을 줄은 모르니.

정말 아리한테 잡혀도 단단히 잡혔다.

“…….”

슬슬 뭐라고 말이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나.

알렌드는 고요함에 불안을 느끼며 다시 아리에게 눈을 돌렸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아리의 모습에 알렌드의 눈이 커졌다.

“아, 아리?”

괴로운 듯 가슴팍을 부여잡은 아리.

숨소리까지 거칠어진 게, 설마.

알렌드는 품에 잠든 안슈를 좌석에 눕히고 곧장 아리에게로 몸을 숙였다.

“왜 그래? 숨쉬기가 힘든 거야? 무슨 상태인지 말해 줄 수 있어?”

알렌드는 아리의 맥을 짚으며 다급히 물었다.

심장 뛰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폐하……. 안슈…….”

“말해. 아리.”

“안슈 자요……?”

안슈는 왜?

알렌드는 뒤를 돌았다.

모자를 벗고 검은 머리카락을 완전히 내놓은 안슈는, 누가 업고 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응. 자고 있어.”

“……와. 진짜 폐하 너무 심장에 해로워요. 어떻게 이렇게 잘생겼는데 요망하기까지 하지?”

“뭐……?”

“그거 알아요, 폐하? 아까 카페에서 갑자기 나타났을 때 저 심장 멎을 뻔한 거? 진짜 무슨 광채가 나는 게-.”

안슈가 듣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아리의 입에서 속사포로 주접이 튀어나왔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알렌드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앉았다.

‘듣기 좋네.’

그리고는 잠든 안슈를 가만히 토닥였다.

부디 안슈가 깨는 일로 아리의 주접이 멈추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

마을 니티마.

서쪽과 동쪽을 잇는 마을 특성상, 여행객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마을의 안내를 맡은 데이빗은 그날도 길을 돌아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찾고 있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마을 중앙에 있는 황제와 황후의 조각상 앞이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 우두커니 서서 조각상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소년.

키가 크고 골격이 훤칠해 성인처럼 보였지만, 옆얼굴이 앳되었다.

17, 18살 정도 됐으려나.

‘어린 여행객이군.’

데이빗은 슬그머니 소년의 옆으로 가서 섰다.

“기도를 드리는 중인가요?”

“……기도요?”

소년이 옆을 돌아보자, 데이빗은 순간 저도 모르게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년의 미모가 상당했다.

이거야, 원. 눈만 마주쳐도 좋아한다 고백할 사람들이 줄을 서겠군.

데이빗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각상을 가리켰다.

“이 세계를 구원하신 두 분 아니십니까. 조각상에 박은 치유계 신성석의 힘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경외의 마음을 담아 기도를 하러 오는 이들이 꽤 많죠.”

소년이 설명을 요청하지도 않았건만, 데이빗은 여느 여행객들에게 그러하듯 조각상에 관해 설명했다.

이것도 직업병이라니까.

“게다가 지역마다 세워진 이 조각상에는 두 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도 담겨있죠.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에 하나씩 세운 조각상이, 이제는 제국 전 지역에 세워졌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연인들의 기도 장소로도 유명하지요. 두 분의 조각상 앞에서 사랑을 맹세하면 그 사랑이 영원히 이어진다더군요.”

보통 저 나이대 여행객들은 이 대목을 좋아하던데.

소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데이빗은 헛기침을 하며 소년에게 물었다.

“여행객인 것 같은데, 무슨 일로 돌아다니시는 겁니까?”

“…….”

“사연이 있나 보군요?”

데이빗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을 많이 대하니 이런 것도 익숙했다.

소년과의 대화는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즐거운 관광-.”

“제 아버지께서는.”

소년이 입을 열었다.

대화하기 싫은 게 아니었나?

호기심이 동한 데이빗이 소년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얼마 전 후계자를 찾으셨습니다.”

“다른 사람 일처럼 말하는 걸 보니, 후계자가 그쪽이 아닌가 보죠?”

“네. 아버지는 후계자를 찾음과 동시에 자신의 자리에 후계자를 앉히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소년의 옆얼굴이 우수에 찼다.

데이빗은 미소년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저 표정을 보아하니 필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슬픈 이야기일 것이다.

후계자 싸움에 밀려 가문에서 내쫓긴 귀족 도련님이라도 되는 사연을 가지고 있나.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은 이 소년의 상심을 어떻게 달래주어야 하나.

“어머니를 데리고 가출하셨습니다.”

“……?”

소년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어렸다.

무척이나 분하다는 얼굴.

“저희는 그런 부모님을 찾으러 여행을 다니고 있고요.”

저희?

데이빗은 그제야 소년의 옆에 한 사람이 더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위치상 소년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13살 정도로 보이는 부드러운 금발을 가진 미소녀였다.

‘거참, 부모님이 누구신지. 인물들이 대단한 모양일세.’

다람쥐같이 귀여운 소녀가 입을 움직였다.

“가만 안 둬.”

가만 안 둔다는 게, 그 가출했다는 아버지인가.

데이빗은 어린 소녀가 내뱉는 험한 말투에 조금 기가 죽었다.

흉흉히 빛나는 저 갈색 눈동자라니.

소년은 그런 데이빗에게 가볍게 눈인사하며 동생의 팔을 붙들고 자리를 떴다.

그러는 중에도 소녀는 화가 난 말투로 말을 내뱉었다.

“오빠, 말이 돼? 방학하자마자 집에 왔는데 엄마가 없다는 게. 여행을 갈 거면 아빠 혼자 가지. 엄마는 왜 데려가.”

“이스나.”

“노엘 오빠가 황제 후계자 따윈 안 한다고 한번 들고 일어나야 해. 엄마가 노엘 오빠는 니세포르엘 신전에 있을 때도 착했대. 너무 착해서 황제 대리인지 뭔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니까 아빠가 마음 놓고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안슈는 뿔이 잔뜩 난 제 동생을 진정시키며 타일렀다.

한 학기 내내 ‘엄마 보고 싶다’를 입에 달고 살았던 동생이니, 이렇게 씩씩거리는 게 이해는 가지만…….

“이스나. 아버지께 ‘가만 안 둬’가 뭐야.”

그 말에 이스나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렇긴 하지. 제 아버지는 황제니까.

하지만 그 말 말고는 제 감정을 보일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스나는 살짝 풀이 죽어 안슈에게 물었다.

“그러면 뭐라 그래?”

“가만 안 두겠습니다.”

“……좋아.”

아이들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루가 “성녀는 칸한테 간다고 했어. 총장이 된 걸 축하하러 간다던데?”라고 말했으니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카데미에 그냥 있는 건데.”

“그러게.”

안슈는 이스나의 말에 동의했다.

아카데미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며칠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됐을 터였다.

이스나는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오빠, 우리도 칸 할아버지한테 반지 만들어 달라고 하자. 엄마처럼.”

***

“그래서, 이제 검은 땅 정화는 다 한 게냐?”

“네. 오래 걸렸죠?”

아리는 학장실에 앉아 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안슈가 태어나기 일 년 전부터 정화를 시작했으니, 햇수로 18년이었다.

“그런데 칸, 의자가 너무 큰 거 아니에요?”

“어허. 가구는 사람의 품격을 나타내지.”

“책상도……. 아이들 크기로 새로 맞춰드릴까요? 고급 자재로 해드릴게요.”

“일없다.”

칸은 제 몸보다 서너 배는 큰 의자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괴고 있었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아리에게 툭 하고 물었다.

“그러면 이제 뭘 할 건데?”

“보물찾기요.”

“……애냐?”

그 말에 아리가 품속에서 지도 한 장을 꺼냈다.

“헤이즐 전 총장님한테 보물 지도를 받았거든요. 아이들 방학이 아직 남았으니까 가족 여행이라도 가려고요.”

“나 원. 외형만 그대로인 줄 알았더니, 머릿속도 아직 애들 수준이구나.”

칸은 슬쩍 아리를 바라봤다.

저야 나이를 먹지 않는 몸이니 그렇다 쳐도, 성녀는 여전히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리.”

하긴, 외향이 늙지 않은 건 저 녀석도 마찬가지지.

저 탱탱한 피부와 결 좋은 금발.

미궁에서 버릇없던 그때와 여전히 똑같은 모습이었다.

세이칸 신이 직접 빚은 몸이 좋긴 좋은 모양이군.

“아이들이 왔어.”

창문 밖을 지켜보던 알렌드의 말에 아리가 서둘러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찬란한 햇빛 아래, 안슈의 흑발과 이스나의 금발이 반짝였다.

“안슈! 이스나!”

아이들은 고개를 들었다.

총장실의 창문에서 손을 흔드는 자신들의 엄마를 보고 활짝 웃었다가, 그런 엄마와 함께 있는 아빠를 보고 고민에 빠졌다.

“오빠, 우리가 아빠한테 화내면 엄마가 슬퍼하겠지?”

“슬퍼하시지.”

“……이번은 봐줄까?”

“그러자.”

그리고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부모님이 있는 총장실로 뛰어갔다.

아리와 알렌드가 환히 웃으며 그런 아이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렴.”

< 외전 완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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