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세이칸은 알렌드에게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네게 해줄 것이 없단다.”
그 말에 알렌드의 손에서 신성력이 피어올랐다.
날카롭고 거대한 형태로 빛나던 신성력은 세이칸의 손이 닿자 허망하게 사그라들었다.
“내 아이야, 이 힘을 누가 줬다고 생각하니?”
신성력이 막혔다.
알렌드는 허리춤의 검 손잡이로 손을 가져가다, 멈췄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제가 어떻게 해야 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습니까?”
기어코 흘러나온 눈물이 흙을 적셨다.
세이칸은 그 앞에 서서 알렌드에게 말했다.
“나는 그 아이와 약속했단다. 칸드리얀의 씨앗을 돌려받는 대신 최선을 다해 새로운 몸을 만들어주겠노라고.”
“…….”
알렌드는 가만히 세이칸의 음성을 들었다.
“매우 튼튼한 몸을 만들어 달라고 하더구나. 네가 걱정이 많다고. 그리고 나는 최선을 다했단다.”
“…….”
이어 단호하고 확신에 찬 음성이 알렌드의 귀에 들려왔다.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니?”
알렌드는 침묵했다.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 갈라진 목소리로 세이칸에게 말했다.
“……상태가, 안 좋다고 했습니다.”
“곧 나을 거란다.”
“아이는…….”
“무사할 거고.”
꽈악.
바닥을 짚은 알렌드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세이칸은 허리를 숙여 알렌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제 돌아가렴.”
알렌드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 속, 세이칸의 모습이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마치 아리의 신성력처럼. 다채로운 색을 가진 아름다운 빛.
언젠가, 아주 깊은 기억 속에 저 빛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세이칸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빛이 알렌드의 몸을 감쌌다. 알렌드가 정원에서 사라지기 직전, 세이칸이 따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또 보자꾸나. 내 아이야.”
***
나는 눈앞의 풍경에 어리둥절했다.
분명 방금까지 침대에서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처럼 아팠는데 말이지.
‘왜 후원을 걷고 있는 거지?’
원래 알던 풍경과 조금 다르지만, 황궁에 있는 후원이 분명했다.
침대와 후원.
둘 중 어느 장소에 있는 게 꿈일까 고민해봤는데, 답은 금세 나왔다.
‘이게 꿈이네.’
배를 만져보려고 한 내 의지를 무시한 채 걸어가는 내 몸을 보자니, 꿈속이 분명했다.
“마마.”
그리고 옆에서 들려온 귀염뽀짝한 목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설마 지금 내 손을 잡은 이 작은 손의 주인이, 우리 애는 아니겠지!
‘괘, 괜찮을까!’
꿈이라고는 해도, 폐하를 두고 내가 우리 애를 먼저 만나도 괜찮은 걸까!
그 전에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됐는데!
하지만 우왕좌왕하는 내 생각과 달리, 고개가 멋대로 움직였다.
‘폐하랑 같이 봐야 하는데…! 아, 안 돼…!’
는 무슨.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이의 얼굴은 물감을 바른 것처럼 하얀색으로 덧칠돼 있었다.
크흡. 그래도 귀여워.
“마마, 저는 슈슈에여.”
꿈이라고 나한테 자기 소개해주는 건가. 우리 애가…!
감격스러움도 잠시, 불길함이 스쳐 지나갔다.
슈슈라니.
내 순발력 없는 작명 센스가 고스란히 묻어난 듯한 이 이름.
꿈이라고 해도 그건 아니지.
이 의견에는 꿈속의 나도 동의했는지, 아이에게 물었다.
“슈슈라니……?”
“마마가 리리니까 저는 슈슈.”
“…….”
혹시 미래의 내가 내 작명 센스를 아이한테 물려주는 건 아닐까.
나는 약간 의기소침한 심정으로 나와 내 아이의 대화를 엿들었다.
“아빠는? 아빠 별명도 이름에서 따올까?”
“파파는 그냥 파파인데여.”
“진짜? 아빠가 서운해하실 거 같은데. 우리 슈슈가 [email protected]슈인 것처럼 아빠도 이름이 있는걸.”
“아라여. 알렌드 칸 레오디우스.”
귀여워…….
우리 애가 아빠라면서 폐하 이름을 말했어…….
꿈속의 나와 같이 호들갑을 떨며 감격에 젖어있는데, 아이가 화제를 전환했다.
“저 마마 배 속에 있었을 때도 기억나여. 마마랑 파파가 저한테 사랑한다 해줘써여.”
꿈속의 나는 그 말에 슈슈를 번쩍 안아 들고 볼을 비볐다.
이 말랑말랑한 촉감 어떡하지. 내 심장은 어떻게 하지.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 우리 슈슈, 아빠 닮아서 기억력이 엄청나네!”
아이는 꺄르르 웃으며 내게 물었다.
“지금도 슈슈 사랑해여?”
“당연하지. 그때보다 더 사랑하는걸?”
“슈슈도 마마 사랑해여.”
아이는 내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이만 가여. 슈슈는 나중에 만나.”
응?
마치 영혼이 빠져나와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시야가 점점 넓어졌다.
아이와 함께 웃고 있는 내 모습, 황궁의 후원, 황궁, 그리고 어둠.
“……”
정신을 차린 곳은 침대 위였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배에 손을 가져갔다.
‘배가…….’
아직 부풀어 있었다.
설마 출산하던 것도 꿈이었나. 그 고통을 다시 느껴야 하는 건…….
식은땀이 절로 나려던 그때, 칭얼거리는 갓난아이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리……!”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건, 다급히 날 부르는 폐하의 모습과, 그 품에 안긴 작은 생명체의 모습.
“폐하?”
윽. 쉰 목소리.
목구멍에서 피 맛이 났다.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거지.
그보다…….
코끝이 찡했다.
폐하가 안고 있는 천에 싸인 작은 생명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도……. 보고 싶어요.”
폐하는 내 옆에 아이를 눕혔다.
아직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돼 쭈글쭈글한 아이.
“검은 머리네요.”
“사내아이야.”
조심스레 손가락을 가져가니, 손톱보다 작은 손가락이 내 검지를 꽉 쥐었다.
“안녕.”
내 인사에 반응이라도 하듯, 아이가 하품했다.
주책맞게 눈물이 나온다.
폐하가 손수건으로 그런 내 눈물을 닦아줬는데, 그러는 폐하도 울고 있어서 우리는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했다.
후에 폐하한테 내쫓겼던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또 한바탕 울음바다가 됐다.
나는 곤히 잠든 아이를 향해 속삭였다.
‘만나서 반가워. 슈슈.’
***
데이데른 호의 선장, 데른은 요즘 자식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놈! 쇼웬! 또 아침부터 어딜 쏘다니는 게냐!”
“일 다녀왔는데요.”
“아, 그래?”
쇼웬이 착실해졌다.
이전 같았으면 성녀교인지 뭔지에 빠져서 온종일 쏘다녔을 놈이.
젠달에 정박한 지 한 달 내내.
“저녁 시간에 맞춰서 꼬박꼬박 집에 들어오고, 주말에는 나가질 않는다고.”
“아따, 선장님두. 좋은 거 아닙니까. 선장 자리 물려줄 놈이 성녀님한테 빠져서 고민이라 했으면서. 거, 이참에 쇼웬한테 배 맡기고 노후나 즐기시면 되겠네.”
“그렇긴 한데…….”
부선장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데른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묘하게 기운 없어 보이는 그 뒷모습이 잔상으로 남는 걸 어쩌겠는가.
이놈의 자식 놈이 골치라니까.
이틀 뒤, 주말 아침.
데른은 점심 식사 자리에서 쇼웬에게 제 비장의 물건을 건넸다.
“갑자기 웬 봉투? 집문서는 아닌 거 같고. 이게 뭔데요?”
“그거다. 성녀님 포토 카드인가 뭐시기인가.”
저걸 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젠달에 저놈같이 성녀님한테 정신 나간 인간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마음에 드냐?”
이제 이걸 어디서 구했느냐며 좋아 죽겠지.
하지만 데른의 예상과는 달리, 쇼웬은 말없이 일어나 식기를 치웠다.
“저 외출해요.”
“…….”
망할 놈.
데른은 쇼웬이 일어난 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좋아하지도 않을 거면서 포토 카드란 건 왜 챙겨가?
“…….”
한편, 집을 나온 쇼웬은 황도 거리를 걸으며 사색에 빠져있었다.
그렇게 구하려 애쓰던 성녀님 포토 카드가 손에 들어와도 쉬이 좋아할 수 없는 현실.
이게 다 한 달 전의 일 때문이었다.
“아버지, 무슨 일 있어요? 술이 한 수레나.”
“선주님이 한턱내셨다! 사모님께서 둘째를 가지셨다는구나.”
“리리가요? 조만간 축하한다고 연락 한번 넣어야겠네.”
“야, 쇼웬! 이리 와서 너도 한잔해!”
“됐습니다. 성녀교 모임 가야 하거든요. 많이들 드십쇼!”
그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도착한 성녀교 모임.
그곳에서 쇼웬을 기다리고 있던 건, 신이 난 단원들의 모습이었다.
“쇼웬! 들었는가!”
“성녀님께서 회임하셨다는 소식이네!”
“안슈 황자님께서도 동생분이 생기시는군!”
단원들은 서로의 어깨를 붙잡고 환호성을 질렀다.
쇼웬도 어깨동무를 당했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에 잠겨 신난 단원들을 뒤로하고 모임을 빠져나왔다.
‘리리도 임신을 하고, 성녀님께서도 회임을……. 리리가……임신을……성녀님께서……. 리리가……성녀님…….’
성녀님의 초상화가 제국에 풀렸을 때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 초상화에서 나오는 찬란한 광채에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몰랐던 게 이상했다.
지난날들을 되짚어 봤을 때, 리리와 성녀님의 교집합은 충분했는데.
‘리리가 성녀님이라니!’
쇼웬은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지난 수년간 성녀교에서 몸 바쳐 활동한 세월.
친구가 그토록 존경하는 성녀님이었다는 사실.
‘확실한 건 아니지.’
쇼웬이 택한 건 회피였다.
당분간 리리를 보지 않고, 성녀교 활동도 하지 않으면 이 복잡한 문제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
“…….”
쇼웬은 안주머니에서 아까 챙겨온 포토 카드를 슬쩍 꺼냈다.
젠장, 빛난다. 성녀님은 리리지만 여전히 빛났다.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외면만 하기에는 제 마음이 그러질 못했다.
“어? 쇼웬!”
누군가 반가운 목소리로 포토 카드를 쥔 채 눈물을 삼키며 걸어가던 쇼웬을 불렀다.
쇼웬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다, 화들짝 놀라 포토 카드를 품 안에 숨겼다.
리리였다.
“젠달에 언제 왔어? 왔으면 연락하지!”
“왜, 왜 여기 있어…십니까?”
“……그거, 요즘 유행하는 말투야?”
뒤에 리리 제과점 건물이 보이는 걸 보니, 사업차 황궁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쇼웬은 뒷걸음질 쳤지만, 리리가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이, 이러지 마……!’
이제 리리의 모습마저 빛나 보였다.
그러고 보니 리리가 제 첫사랑이 아니던가.
그러면 그 재수 없이 잘생긴 선주는 황제…….
“저, 저, 저는.”
“시간 있어? 차 한잔할래?”
“네, 응, 네.”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뜨려고 했었는데,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쇼웬은 뚝딱거리며 리리를 따라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히펜 광장의 노천카페에 앉아 티를 마시는 중이었다.
“진짜? 우리 남편이 선장님네에 술을 보냈다고? 선장님은 잘 계셔?”
“으, 응.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돌아다녀, 셔도 괜찮아, 습니까?”
“안정기라 괜찮대.”
쇼웬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아리는 그런 쇼웬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여름도 아닌데 더운가 보네. 역시 추위에 강한 뱃사람이라 더위에는 약한가.
‘갑자기 말투도 이상해졌고.’
편지로 쭉 교류하고 있었지만, 쇼웬의 얼굴을 보는 건 거의 일 년 만인 듯했다.
젠달에서 우연히 마주칠 거란 생각은 못 했는데, 올리비아와 수다를 떨고 나오던 중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붙잡긴 했는데, 혹시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은가?
“쇼웬, 어디 아파?”
“아, 아닙, 아니……!”
“그러면 다행인데…….”
아리는 눈앞의 쇼웬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까 쇼웬만 모르네.’
이 세계에서 자신과 오랜 기간 교류를 가진 사람 중, 리리가 성녀란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쇼웬뿐이었다.
과거 언젠가 이 자리에서 한 번 밝혔던 적이 있었지만, 쇼웬이 눈치를 못 챘었지.
‘마지막으로 말해 볼까?’
그래도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리는 자신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물을 마시는 쇼웬을 향해 말했다.
“쇼웬, 나 사실 성녀다?”
“네……?”
잘 안 들렸나?
아리는 다시 말했다.
“나 사실 성녀…….”
“……?”
쇼웬은 곧 울 듯한 얼굴이 되어 아리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