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올리비아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의 모습인 내가 어지간히 놀라웠는지, 감탄사를 내뱉고는 그대로 굳었다.
“올리비아 씨! 어서 오세요.”
그러다 반기는 내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친근하게 날 대하던 평소의 올리비아와 달리 무척이나 정적이고 예를 갖춘 모습이었다.
“그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지 않아도 되는데……. 아, 차 드실래요? 여기 앉으세요.”
내 차 권유에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드셔보세요. 선물받은 차예요.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맛있네요.”
그리고는 침묵이 가라앉았다.
응접실 밖으로 사람들을 전부 내보내지 말 걸 그랬나……!
하지만 위압감을 주지 않는 분위기에서 올리비아랑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었는걸.
‘수, 숨 막혀.’
두 사람 중 누구 하나 목소리를 내는 이가 없었다.
시곗바늘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함.
자수하고 광명 찾을까.
그래, 그러자.
나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올리비아 씨, 지금까지 숨겨와서 죄송해요.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었는데 위장 신분이어서.”
“어머나. 저는 괜찮은데요.”
“제가 양심에 찔려서 안 될 거 같아요. 계약 파기……. 하고 싶으신가요?”
끝에 목소리가 조금 떨린 건, 위약금으로 빈약해질 내 통장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지.
거지는 돼도 파산은 안 할 정도면 좋겠는데. 크흡.
“설마요. 제가 왜 성녀님-.”
“그냥 리리라고 불러주세요.”
“리리 님과 계약을 파기할 생각은 전혀 없답니다.”
“정말요?”
환해진 내 얼굴에, 올리비아는 눈을 고요히 빛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리리 님께서 양심에 찔리신다면, 부탁 하나만 드려도 괜찮을까요?”
올리비아 씨, 역시 성공한 기업가라 다르다.
기회를 놓치지 않네…….
고개를 끄덕이니 올리비아는 가져온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읽어보니 앙뜨완 제과점의 보니아 왕국 진출 계획이 담긴 사업 계획서였다.
“민족성이 강한 나라다 보니 타국의 제과점 입점 허가를 쉽게 내주지 않아서요.”
“그래서요……?”
“해당 권한의 총책임자가 보니아 왕국의 샤를 애딩커 왕녀이신데, 성녀님께서 그분과 꽤 친분이 있으시죠?”
“샤를 왕녀님께 성녀인 제 입김을 불어넣어 달라는 얘기인가요?”
나는 테이블 위에 서류를 올려놓았다.
앙뜨완 제과점의 규모가 커지는 일이니 내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지난번 샤를 왕녀님과 대화를 나눴던 일이 짧게 지나갔다.
“어머나, 보니아의 피가 성녀님을 원한다니.”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걱정하지는 마세요. 제가 해결 방법을 알아 왔거든요.”
“어쩌죠. 저는 성녀님께 그런 감정이 들지는 않는걸요.”
“헛, 그래요?”
델칸도, 샤를 왕녀님도 나한테 아무 감정이 없다고 했지.
사용하지 않아도 될 일에 소원을 빌어버린 건가, 하고 낙심하던 내게 샤를 왕녀님이 상냥히 말했다.
“그런 피에 얽히지 않아도 저는 성녀님께 좋은 감정이 있어요. 젠달의 일이나 개인적으로 힘드신 일이 있다면 언제든 절 찾으셔도 좋답니다.”
크흡. 샤를 왕녀님만큼 친절한 사람은 또 없을 거야.
폐하한테 이 말을 했더니 “몇 년 동안 들었던 말 중에서 제일 웃긴 농담이었어.”란 반응이 돌아왔다.
제일 웃긴 농담이었다는 말치고 폐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지만.
어쨌든, 샤를 왕녀님의 친절함을 이용해 내 이익을 챙기는 게 내키지 않았다.
성녀 지위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도 별로고.
올리비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단호히 내 의사를 밝혔다.
“그건 안 될 거 같아요. 올리비아 씨. 개인적인 친분이나 제가 가진 지위를 협상의 도구로 사용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마르지 않는 줄로만 알았던 덕질 통장에 바닥이 드러나는 소리가 들린다.
내 융통성 없음에 질린 올리비아가 이번에야말로 계약 파기 얘기를 꺼낼지도.
‘그래도 그동안 돈지랄 원 없이 해봐서 다행…….’
눈이 마주친 올리비아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네?”
“그러면 없던 일로 하죠.”
올리비아는 깔끔하게 단념하며 테이블 위에 서류를 치웠다.
날 만나는 자리에 서류까지 가져온 준비성치고는 너무 쉽게 물러서는 것 아닌가.
내가 아는 올리비아는 이런 사업가가 아닌데……!
“오, 올리비아 씨? 정말 괜찮아요?”
“네.”
“왜, 왜요?”
오히려 내가 올리비아한테 왜 괜찮냐고 매달리는 꼴이 됐다.
허둥거리며 그러면 다른 부탁이라도 해달라 했더니, 올리비아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후훗, 하고 웃어버렸다.
“죄송해요. 리리 님. 저만 몰랐던 게 섭섭해서, 조금 놀려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너무 심했네요.”
“네……?”
“후후. 사실은 이게 본론이랍니다.”
올리비아는 리리를 만날 때처럼 미소 지으며 가방에서 서류를 하나 꺼냈다.
“리리……. 제과점?”
“천천히 읽어보세요.”
올리비아의 말대로 천천히 읽어보던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리리 제과점에 내가 대표로 취임하고, 앙뜨완 제과점은 리리 제과점의 산하에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바지 대표가 아닌 실질적 소유권을 갖는 데다가, 계약 조건 하나하나가 나한테 무척이나 유리하게 적용돼서-.
“올리비아 씨. 이건 너무 과한데요!”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회사의 운명을 내 손에 쥐어놓은 올리비아는, 태연하게 마시던 차에 어울릴 법한 디저트를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 목소리에 눈을 마주치고는,
“전혀요.”
라고 말하며 생긋 웃었지.
그리고 이어서, 운영은 하시면 좋지만 부담스러우시다면 중요한 결정 외에는 최대한 신경 쓰시지 않게 할 거다, 수익만 가져가셔도 좋다, 등등.
내 이런저런 걱정들을 해결해주는 말들을 해줬지만.
제일 큰 걱정은 그게 아니었다.
“앙뜨완 제과점은 오디트리아 대륙에서 제일 규모가 크잖아요. 너무 과해요…….”
“과하지 않아요. 성녀님께 드리는 결혼 축하 선물과 회임 축하 선물인걸요.”
……회임 축하라니.
내가 임신한 건 외부로 퍼지는 건 극비로 하고 있는데, 그걸 올리비아가 어떻게 알지?
“올리비아 씨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어리둥절해 묻자니, 올리비아는 자신이 한때 탐정을 꿈꿨었다며 자신의 추리를 들려줬다.
“황제 폐하의 외모와 버금가는 은발의 미남이 상점가의 출산 관련 용품을 쓸어간다는 소문이 파다했거든요.”
그런 뒤, 올리비아는 좋은 답변을 기다린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제안을 싫다고 하셔도 어쩔 수 없지만요. 그래도 이것 하나만 알고 계셔주세요. 리리 님께서 어떤 분이시든, 저는 항상 리리 님 편이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올리비아의 말투가 여느 때와 다름없어서, 조금 눈물이 날 뻔했다.
***
“…….”
젠달, 본궁의 회의장.
에본은 상석에 앉은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오늘도 황제의 궁에 머무르실 예정이라 하셨습니다.”
황후의 임신 소식이 있던 지도 벌써 8개월이 지났다.
막달에 가까워지자 황후는 잠이 부쩍 늘어났고, 거기에 지난날의 트라우마가 떠오른 것인지 황제는 한시도 황후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황제의 업무 대부분이 두 사람의 침실에서 처리됐지만, 본궁에서밖에 볼 수 없는 업무 또한 있기 마련이었다.
가령 오늘 열리는 정기 회의라던가.
“폐하, 오늘은……. 나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총대를 멘 것은 에본이었다.
옆에서 그 소리를 들은 황후는 당연한 듯이 황제를 회의장으로 가라고 떠밀었고.
황후 앞에서만큼은 순한 양이 되는 황제는 고분고분 말을 들으며 회의에 참석했다.
비록 생글생글 웃는 낯에 불편한 심기를 섞고 있었지만.
“그런 야만족에게 무슨!”
“미래를 생각하면-!”
“됐네. 쿠센 지역의 무역세를 낮추지.”
…….
“모르는 소리 마십시오. 백작. 이번에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건 자네 영지민들…!”
“그 권한은 페스티 백작에게 위임하도록 하지.”
…….
대신들이 의견을 대립할 새도 없이, 황제의 결정이 떨어졌다.
거의 독단적인 판단이었지만.
회의장에 모인 이들 중 그보다 더 좋은 의견을 낼 수 있는 이 또한 없었다.
덕분에 다른 때 같았으면 한 달을 두고도 결정하지 못했을 사안들이 몇 시간 만에 깔끔히 끝나버렸다.
“조심히들 들어가시게.”
안건이 모두 처리되자, 황제는 급히 몸을 일으켜 회의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황제에게 오랜만에 안부를 물으려 했던 귀족들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활짝 열린 회의장 문을 바라봤다.
“저렇게 지극정성이 되어야 성녀님을 가질 수 있나 보네……”
“나라도 넘어가지, 아무렴.”
“자네가 넘어가서 뭣 하려고?”
시답잖은 농담으로 껄껄거리던 귀족들은 에본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고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하나둘 떴다.
한편, 알렌드는 본궁을 나와 아리가 있는 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걸음을 멈춘 건, 식당 건물에 있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이것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