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두 달 정도 되셨군요. 회임을 경하드립니다, 황후 폐하.”
치료 신관이 왔다 가면서 내 임신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주스를 마시고 구역질을 하는 게 입덧이라던 보니아 할머니의 말이 정말이었다니.
게다가 두 달 전이면…….
“괜찮겠어……?”
“아, 아마도…….”
폐하와 내가 처음으로 밤을 보냈던 때가 분명했다.
미쳤어.
부끄러움에 발버둥을 쳤더니, 금세 시아나가 다가와 나를 제지했다.
“다치시면 어쩌시려고요.”
“시아나,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나는 이불 위로 얼굴만 빼꼼 내민 채 시아나에게 물었다.
임신 소식이 확정되자마자, 다들 나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취급을 해줘서 말이지.
달리는 것도 안 돼, 걷는 것도 안 돼, 뭘 드는 것도 안 돼, 얇게 입는 것도 안 돼.
안 된다는 걸 다 빼다 보니 남은 게 누워있는 것밖에 없어서, 지금 같은 대낮에도 침대 속에 있게 됐다.
이건 그냥 포대기 대신 이불을 두른 신생아다. 이 상태로 발버둥을 쳐봤자 다칠 리가.
“과보호라니까. 폐하도, 시아나도.”
“어머나, 진짜 과보호는 시작도 안 했는걸요. 원하세요?”
“아니…….”
시아나의 눈이 빛나는 걸 보고 나는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시아나가 진심이 되면 임신 기간 동안 내 발로 걸어 다닐 일이 없을 것 같거든.
그래도 과보호 덕에 좋은 건 하나 있었지.
때는 엿새 전이자,
황궁으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제 생일 연회에요?”
“네. 규모가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황후 폐하의 의견을 받아들여 초대장을 돌리지는 않았습니다만. 각국의 왕족들과 귀족들이 몇 주 전부터 젠달에 머물면서 참여 의사를 보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에본 재상님의 말에 나는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러니까, 지금 젠달에는 내 생일 파티에 와도 좋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들이닥칠 신분 높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단 거였다.
“황후, 부담스러우면 무시해도 됩니다.”
“그래도…….”
멀리서들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데, 그냥 돌아가라 할 수도 없었다.
문제는 규모였지.
각국 귀빈들이 모이면 규모가 커질 테고, 규모가 커지면 분명 무도회가 있을 테고, 무도회가 있으면 첫 춤이 있을 테고!
‘춤은 안 돼……!’
전날, 보니아에서 봤던 좀비 춤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이걸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해결책은 과보호에 시동을 건 폐하에게서 나왔다.
“탄신 연회는 진행하되, 황후의 몸이 걱정되니 우리 두 사람은 참석하지 않는 걸로 하게. 라울 신관께는 하루만 더 고생해달라 하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본 재상님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의 아니게 아직 보지도 못한 우리 애한테 도움을 받아버렸다니까.
‘우리 애.’
크흡. 우리 애라니! 또 심장이 울렁거린다.
임신이란 걸 알게 된 지도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배를 만져봤자 그냥 평평하기만 한데, 여기에 정말 나 말고 다른 존재가 있는 걸까.
‘……이상해.’
느낌이 이상했다.
태어날 아이는 사랑스럽겠지.
폐하와 내가 아이를 사랑할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하지만.
‘조금 무섭기도 하고.’
어떤 형태로든 행복하리라 생각했던 폐하와 내 미래에 지켜야 할 존재가 실제로 나타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내 인생은 한 치 앞도 몰랐단 말이지.
이 세계에 온 뒤로, 폐하 덕분에 내 머릿속은 꽤 꽃밭이었지만.
그렇다고 이전 세계를 포함한 내 현실이 썩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내가 태어날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아리야, 가방 싸서 나갈 준비하렴. 지금 병원 응급실에서 연락이…….”
열여섯 살의 내가 겪은 갑작스러운 상실감을, 혹시라도 이 아이한테 느끼게 하는 날이 오지는 않을까.
이미 내게 부모, 자식 간의 사이란 끝을 생각할 수 있는 관계였다.
훗날 내 노력이나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변수가 일어난다면…….
한번 시작된 가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으으. 정신 차려.’
임신 호르몬 때문인가.
왜 갑자기 불안해지고 그러는지.
상념을 떨치려 뺨을 툭툭 쳤다가, 시아나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떠올랐다.
슬쩍 눈치를 살피니, 시아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방 안을 걷고 있었다.
품에 든 상자를 들어 올리느라 내 행동을 못 본 모양이었다.
“시아나, 뭐 도와줄까?”
“아니요. 그나저나 황후 폐하께서 황제 폐하께 받은 탄신 선물이 섬이라 다행이에요.”
“다행?”
“황궁으로 가져오실 수 있는 크기였으면 놓을 자리가 없을 뻔했거든요.”
시아나는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지만, 주변 상태를 보면 마냥 농담으로 흘려들을 이야기는 아니었다.
거실까지 있는 넓은 방이 비좁을 정도로 들어찬 선물 꾸러미들.
개중에는 지인들에게만 받은 생일 선물도 있었지만.
방을 이렇게까지 만든 범인은 따로 있었지.
“이게 다 뭐예요……?”
“임산부한테 좋다는 걸 추천받았어.”
하루가 멀다 하고 상점가를 쓸어오는 폐하가 바로 그 범인이었다.
이것들은 임산부에 좋고, 저것들은 애가 태어나면 사용할 거고, 또 다른 것들은…….
“이러다 황도에 있는 임산부들한테 항의받겠어. 살 물건이 없다고.”
“후후, 그러게요.”
“웃을 일이 아니야, 시아나. 차라리 내일 폐하를 따라가서 반품할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오랜만에 은발 폐하도 보고……!
바깥에는 정체를 숨기려 염색약을 사용하고 다녀오신다 했지.
내가 그동안 에본 재상님이 강조했던 황후의 체통 때문에 폐하 덕질을 얼마나 자제했는데.
이번에 반품하면서 겸사겸사 우리 은발 폐하도……!
“아리.”
윽. 눈부셔.
생각하기가 무섭게 폐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 외모를 하필이면 덕심으로 심장이 요동칠 때 마주하다니.
불시의 습격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폐하의 상태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마치 보따리 상인처럼 물건을 머리에 이고, 양손에 들고.
열린 문 너머로 폐하의 쇼핑에 따라갔던 헨켈 대장과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폐하에 비해 다소 소박한 짐을 들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폐하한테 짐을 뺏긴 모양이었다.
“잘 지내고 있었어? 다녀왔어.”
“어서 오세요. ……그런데 등에 업고 계신 건 뭐예요?”
나는 폐하의 머리 위쪽을 보며 물었다.
푹신푹신하게 생긴 커다란 머리통이 있었다.
웬만한 사람보다도 더 큰 곰 인형이었다.
“요즘 황도에서 어린아이들한테 인기라더군. 한정판이라 나중에 구할 수 없을 거라 해서 사버렸어. 태어날 아이가 잘 갖고 놀겠지?”
……그거 몇 년 뒤 이야기인데요.
지름신 강림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던 폐하는, 내게도 곰 인형을 보여주려는지 몸을 돌렸다.
그러다 그 커다란 곰 인형의 다리가 시아나가 정리해서 쌓아둔 상자를 쳤고, 상자들이 와르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
“두게. 내가 하지.”
폐하는 곰 인형과 들고 있던 물건들을 내려놓고 상자를 들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됐을 때쯤.
주섬주섬 상자를 쌓아 올리는 폐하의 뒷모습을 보던 내 입에서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웃음소리에 폐하가 마지막 상자를 원래 자리에 두고 내게 걸어왔다.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있어?”
폐하는 내 볼에 키스한 뒤, 다정히 웃으며 속삭였다.
그러면서 이불을 내 턱 아래까지 끌어 올려줬지.
“그냥요.”
언제나 완벽했던 폐하가, 내가 임신했다는 이유로 이렇게 허점을 마구 보인다니.
가슴께가 간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꼭 완벽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그러는 사이, 내 불안도 멀끔히 씻겨 내려갔고.
오지 않을 미래를 미리 걱정해봤자 뭐 해.
그냥 폐하가 지금 하듯이, 어설프겠지만 나도 태어날 아이에게 사랑을 듬뿍 주면 되는걸.
“누가 완벽해야 한다고 그랬어? …아리, 황후 자리가 부담스러우면 내가 황제 자리를 다른 이에게 물려주고-.”
“폐하.”
“응.”
“행복하세요?”
내 뜬금없는 질문에도, 폐하는 당연하다는 듯 곧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무척이나.”
그것도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미소를 지으며.
이것 봐. 기분이 간지럽다니까.
“그런데 폐하, 이제 선물은 그만 사 오세요.”
“……왜?”
내 말에 폐하의 눈썹이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윽. 이렇게 눈에 띄게 시무룩하실 일인가.
하지만 이러다가는 황도에 임산부와 신생아 용품 품귀 현상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어디, 지금 이 상황에서 폐하한테 잘 먹힐 말은…….
“저 셋 이상 낳을 자신은 없거든요.”
폐하는 내 말을 잠시 생각하다가,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며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다.
그런 폐하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와 멀찍이 떨어져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있으면 어때.
폐하와 나도 많은 고난 끝에 행복해졌는데.
나는 배에 슬쩍 손을 갖다 대며 아이에게 속마음을 전했다.
‘너도 행복해질 거야.’
***
하지만 우리 애를 만나기 전에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지.
“손님이 오셨습니다.”
응접실에 앉은 나는 하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을 모셔 오라는 의미였다.
올 것이 왔다.
얼마 전, 리리 앞으로 올리비아의 편지가 도착했다.
몇 달 전에 의견을 나눴던 앙뜨완 제과점 사업에 관한 건 줄 알았는데,
성녀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라는 내용이었다.
“성녀님께?”
“왜 그러세요?”
“이것 봐. 시아나. 올리비아 씨한테 편지를 받았는데, 리리가 아니라 성녀님께라는데?”
“서, 성녀님!”
시아나와 내 대화를 옆에서 듣던 카디얀이 냅다 무릎을 꿇었다.
“진작에 말씀드려야 했는데…….”
이어 카디얀은 내게 이실직고했다.
내가 젠달에 돌아오기 전, 우연히 올리비아에게 내 정체를 들켰다.
바로 말했어야 했는데 임신한 내 몸에 무리가 갈까 말하지는 못하고 고민만 하다가 한 달이 흘러버렸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는 목을 바쳐 사죄하겠다며 난리를 치는 바람에 말리느라 고생을 좀 했지.
‘들킨 거야 어쩔 수 없지. 언젠가는 밝혀질 거라 생각했으니까.’
이런 날도 올 거라고 예상은 했다.
다만…….
‘올리비아 씨가 어떻게 나올지.’
위장 신분으로 계약했다고 계약 파기 당하려나.
그렇게 되면 위약금도 있을까.
지금 내 통장으로 지불 가능하려나…!
‘폐하 두 번째 조각상 제작 주문을 좀 더 늦출 걸 그랬나.’
초조함에 물잔을 집었는데,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는 귀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