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여기까지인가?”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검게 물들어있던 드넓은 대지는, 이제 완전히 제 색을 찾아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델칸과 약속한 만큼의 땅의 정화가 드디어 끝났다.
“수고했어.”
내 손을 잡은 폐하가 옆에서 다정한 인사말을 건넸다.
나는 후련한 기분으로 폐하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폐하도요. 오늘도 저희 열심히 걸었다. 그렇죠?”
“그래.”
황궁을 떠난 날부터, 우리의 하루는 매번 비슷하게 흘러갔다.
여기저기 널린 폐하의 개인 별장 중 마음에 드는 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아침이면 반지로 전날 정화한 지점으로 순간이동 했다.
그리고는 그날 정화할 땅의 크기와 목적지를 정하고 열심히 걸었다.
해야 할 일이라고는 걷는 게 전부여서, 놀고 있는 손으로는 폐하의 손을 잡고 온종일 이야기꽃을 피우며 걸어 다녔지.
그래도 명색이 신혼여행이니 가끔은 별장에서 며칠씩 처박혀 있기도-.
“후후…….”
지난날을 떠올리며 실실 웃고 있는데, 입안으로 달콤한 것이 들어왔다.
폐하가 넣어준 꿀 사탕이었다.
“음…….”
“왜? 맛없어?”
입에 넣은 채 눈을 조금 굴리니, 폐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아니요. 폐하 목소리처럼 달아서요.”
“다행이네.”
“폐하도 드세요.”
우리는 꿀 사탕을 하나씩 물고 바위에 앉아 정화한 땅을 바라봤다.
“내일 젠달로 돌아갈 거죠?”
“응. 조금 더 둘이 돌아다녀도 좋고.”
“안 돼요. 초비 편지에 라울 신관님 얼굴이 반쪽이 됐다고 적혀 있었는걸요.”
폐하의 빈자리는 라울 신관님이 채워주고 있었지만, 슬슬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칸이 매번 말하는 것처럼 노인 공경해야죠.”
조상 공경이라 그랬었나. 어쨌든.
내 말에 폐하는 아쉬운 듯 잡은 손을 흔들며 속삭였다.
“돌아가서도 놀아줄 거야?”
“…….”
윽. 투정 부리는 강아지 같아.
갑자기 들어온 공격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런 폐하가 내 폐하라니…….
나는 벌떡 일어나 폐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별장-.”
“저, 성녀님.”
젠달로 돌아갈 때까지 시간도 남았겠다, 흑심을 부려 폐하를 꾀려 했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보니아 왕국의 왕실 기사단장이었다.
기사단장은 우리에게 허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건넨 뒤, 이곳을 찾은 용건을 건넸다.
“내일 돌아가십니까?”
“네. 그러려고요.”
“혹 이후에 일정이 없으시다면, 근처에서 피로를 푸시는 건 어떠하십니까? 성녀님께서 땅을 정화해 주신 것을 기념하여 연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두 분께서 자리를 빛내주시면 보니아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음…….”
연회에 초대해주는 건 고맙지만, 오늘은 단둘이 있을까 했는데.
폐하와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기사단장은 연회의 장점을 급히 어필하기 시작했다.
맛있는 것도 많고 따뜻한 물로 목욕도 할 수 있다.
연회는 자리를 지키지 않으셔도 되니 식사만 하시고 푹신한 침구가 있는 침실에서 편히 쉬셔라.
마음에 드는 제안들에 귀가 솔깃해지던 중,
“그리고…….”
기사단장은 내게서 시선을 돌려 폐하를 바라봤다.
그리고 어디서 언질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저희 국왕 전하와 샤를 왕녀님께서는 참석하지 않으실 겁니다.”
“…….”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
“마지막 날을 이렇게 보내는 것도 좋네요.”
“생각했던 것보단 괜찮네.”
폐하와 나는 상석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보고 있었다.
보니아 사람들은 춤을 잘 추네.
옛날에 샤를 왕녀님이 춤추는 것을 보면서 요정 같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는데.
“아리, 이것도 먹어 봐.”
폐하가 접시 위에 깔끔하게 자른 스테이크 조각을 올려줬다.
때마침 공연이 끝나고 무대 위로 가면 쓴 사람들이 새롭게 올라왔다.
사회자가 ‘이번 무대는 성녀님께 바치는 춤’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스테이크 조각을 입 안에 넣었다.
‘나한테 바치는 춤? 그러고 보니 보니아는 젠달처럼 무도회에서 추는 첫 춤 같은 문화가 없어서 다행…….’
쿨럭. 쿨럭.
급하게 식도를 타고 넘어간 스테이크가 사레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멈추지 않는 기침에 입을 손으로 막으면서도, 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저, 저게 뭐야!’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출처를 알고 싶지 않지만, 알 것 같은 저 좀비 춤은…….
“성녀님의 춤이 무척이나 흥미롭다며 연습 중이랍니다. 보기 드문 춤사위라 꼭 몸에 익혀 가고 싶다고 했다는군요.”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진다.
이 와중에 폐하는 무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기침하는 내 걱정하기 바빴다.
“아리, 잘못 삼켰어?”
“콜록, 괜찮-.”
“식도가 놀란 모양이야. 뭐라도 마셔봐.”
폐하는 급히 내 등을 쓸며 주스 잔을 건네줬다.
그래서 한 모금 입으로 넘겼는데.
“…….”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젠달의 황궁.
아리와 알렌드가 돌아올 곳으로 정해둔 단 앞.
무릎을 꿇은 두 사람과 앞발을 핥는 한 마리가 있었다.
“탄신 선물……. 받아주시는 모습은 볼 수 없겠군.”
에드워드가 허망한 눈으로 바닥에 놓인 검을 응시했다.
그의 옆에서 카디얀이 같은 눈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쩌겠나. 남은 단원들이 잘해주겠지.”
과거의 자신들은 알았을까.
성녀님의 탄신 선물 대신 제 목을 바치는 날이 올 거라고.
“우선은 알겠어요. 정확한 건 성녀님, 아니, 리리 님이 돌아오셨을 때 제가 직접 묻죠.”
필사적인 변명과 거짓말에도 올리비아는 속아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냉정히 돌아서는 올리비아의 뒷모습을 보며 석상이라도 된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카디얀.’
‘에드워드.’
‘우리가 감히…….’
‘성녀님께서 애써 숨기시던 비밀을…….’
그날부터 카디얀과 에드워드는 목숨으로 사죄할 각오를 하고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늘.
아리가 돌아온다고 말한 것은 내일이었으나,
정확히 언제 도착할지 모르니 두 사람은 전날부터 검을 내어놓고 목을 바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녀교의 간부들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자들이라 다행이야. 미련 없이 갈 수 있겠어.”
“짧다면 짧은 생. 성녀님을 만나서 행복했네.”
“그렇게 맛있는 냄새는 안 나지만, 너희가 죽으면 영혼은 내가 먹어줄게.”
“…….”
카디얀과 에드워드는 루에게 얌전히 눈을 흘겼다.
무려 ‘신수’시라니 뭐라 말은 하지 못했지만,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당당하다던 루가 자신들처럼 여기에 있다는 건 본인도 찔리는 구석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루 님도 성녀님께 사죄를-.”
번쩍.
카디얀이 입을 연 그 순간이었다.
단 위로 환한 빛이 번쩍이더니, 빛나는 금발을 가진 미남이 급히 튀어나왔다.
황제였다.
“시아나, 시아나는 어디에 있나? 치료 신관은……!”
“괜찮다니깐요.”
다급한 목소리로 시아나를 찾는 알렌드를 말리며 아리도 모습을 드러냈다.
알렌드는 보기 드물게 허둥지둥하다가, 아리와 눈이 마주치자 제 겉옷을 벗어 아리의 어깨를 감쌌다.
“너무 춥게 입은 거 같아.”
“폐하가 계속 뭘 입혀줘서 더운데요…….”
그 말처럼 아리는 설원 속에 던져놔도 살아남을 것 같은 차림새였다.
본인 옷에, 두툼한 로브에, 숄에, 알렌드의 겉옷까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카디얀과 에드워드가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자신들이 두 사람의 길을 막고 있는 걸 깨닫고는 엉거주춤 일어나 옆으로 비켰다.
“갸옹.”
그 사이, 루가 아리의 부츠에 몸을 비볐다.
석 달 만에 보는 성녀였다.
반가움에 아리의 품으로 뛰어올랐는데, 품에 닿지 못하고 공중에서 그쳤다.
제 몸을 들어 올린 계약자 때문이었다.
“안기지 마.”
무뚝뚝한 그 소리에 어이가 없어진 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렌드는 그런 루와 눈이 마주쳤지만, ‘어쩌라고.’라고 말하는 듯한 냉랭한 눈빛을 보냈다.
이 계약자가 안 본 사이에 왜 이렇게 치사해졌어?
“성녀 품이 네 거야?”
알렌드는 그 말에 대꾸도 없이 시선을 아리에게 옮겼다.
“아리.”
순식간에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뀐 계약자의 태도에, 루는 기가 막혀 콧바람을 내뿜었다.
“눕고 싶지 않아? 침실로 갈래?”
“아직 모른다니깐요. 그냥 속이 안 좋은 걸 수도 있고. 보니아 할머니가 말한 대로 임신인지 아닌지는……!”
임신?
……누가?
스쳐 지나간 단어 하나에 셋의 시선이 자연스레 한곳으로 모였다.
그제야 카디얀과 에드워드를 발견한 아리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아는 척을 했다.
“아, 다들 오랜만…….”
“……!”
카디얀, 에드워드, 루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는 조금 전의 알렌드처럼 허둥지둥 움직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이 바보 같은 계약자가!”
“성녀님! 왜 서 계십니까……!”
“드, 들것, 들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