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143화 (143/150)

외전 3화

“…….”

보니아 왕국의 원로 회의.

샤를과 델칸은 썩은 얼굴로 원로들 사이에 앉아있었다.

갑자기 원로회를 소집해야 한다고 그래서 무슨 큰일이 났나 했는데.

“보니아의 피가 가장 짙은 두 분께서 후사를 보시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두 분께서는 어렸을 적부터 함께 지내셨으니 서로에 대해 잘 아실 테고요.”

“좋은 일이지 않습니까. 이보다 더 맞는 짝을 찾기도 힘들겠습니다.”

듣기 힘든 것을 넘어 끔찍한 수준이었다.

‘노망이라도 난 거야?’

징그러운 소리를 하는 저 입들을 막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일단은 보니아의 원로들이니 예절을 지켜야했다.

샤를은 부글거리는 속을 꾹 참으며 눈을 감았다.

원로들은 자신들이 나눈 이야기에 흡족해하며, 처음으로 당사자 중 한 명인 델칸에게 의견을 물었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와 누님이 그런 관계가 될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무슨 미래를 떠올린 건지, 델칸이 희게 질려 단호히 말했다.

원로들은 아쉽다는 듯 쩝, 하고 입맛을 다시고는 차선책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샤를 왕녀님, 국왕께서 저리 단언하시니 루이드 선왕은 어떠신-.”

“루이드는 저보다 원로님께 잘 어울리겠군요.”

원로의 말을 자른 샤를의 입매가 떨렸다.

이러다 큰일 나겠군.

샤를의 이성이 끊기기 직전이라는 걸 알아차린 델칸이 하하, 웃으며 말을 지어냈다.

“무슨 말씀이신지…….”

“누님께서는 루이드 형님께서 원로 자리에 어울리겠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아, 아아. 그렇군요. 비록 그런 일에 얽히셨지만, 원로가 될 피의 자격은 있으시니.”

피의 자격.

보니아 왕국 대부분이 검은 땅에 먹혔던 ‘그런 일’이 있었어도, 루이드에게는 보니아의 원로가 될 자격이 있었다.

루이드의 몸에 다른 이들보다 조금 짙은 보니아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델칸은 웃는 낯을 지우고 원로들에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자리가 마련됐으니 지금 이야기하겠습니다. 성녀님께서 말씀하시길, 보니아의 피는 제 역할을 다했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앞으로는 보니아의 피에 목매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말에 원로들이 심각한 분위기로 술렁였다.

“델칸, 보니아의 피에 관해 할 말이 있어. 세이칸 신께 들었는데….”

원래 세계로 갔던 아리가 다시 돌아왔을 때, 아리는 해줄 말이 있다며 델칸을 따로 불렀다.

초대 성녀와 보니아 왕족에 관한 내용이었다.

초대 성녀가 세이칸 신과 한 거래 때문에 보니아의 피가 성녀를 원하게 된 것이라고.

“……그래서 혹시 델칸도 그런 기분을 느껴? 내가 세이칸 신한테 해결할 방법을 듣고 왔거든. 너나 샤를 왕녀님이 원하면-.”

“아니. 샤를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피는 옅어서 괜찮아.”

“그래?”

델칸은 아리에게 거짓말을 했다.

이미 칸이 제 피의 문제를 해결했고, 아리가 신에게 들은 방법으로는 제 마음을 어쩌지 못할 테니.

델칸은 저릿한 기분을 미소로 감추고 물었다.

“보니아 왕국에는 지하 미궁에 신의 나무가 있어. 내가 미궁을 여는 방법을 안다면, 숨기는 편이 좋을까?”

“세이칸 신은……. 아마 아무도 그 나무에 가까이 가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

“응. 무슨 말인지 알겠어. 리리.”

세이칸 신은 미궁을 열지 않길 바란다.

그렇다면 보니아의 순혈을 향한 집착은 초대 성녀 대의 잔재일 뿐이었다.

델칸은 쐐기를 박듯 다시 원로들에게 말했다.

“보니아의 피는 제 역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원로들의 입에서 쉬이 알겠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미 보니아에서는 왕족의 피가 갖는 상징성이 왕국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을 고작 막 알게 된 진실을 위해 무너트릴 수는 없지 않은가.

원로들 사이에서 해결책을 찾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의미 없는 의견이 반복될 때쯤, 델칸은 소란스러움을 뒤로 하고 회의장에 딸린 발코니로 나갔다.

먼저 나가 있던 샤를이 난간에 기댄 채 델칸을 힐끔 바라봤다.

“왔니? 아까는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싶었어.”

“동감이야.”

델칸은 긴장을 푸는 개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샤를은 회의장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을 들으며 입을 열었다.

“제 밥그릇 지키려고 싸우는 꼴이라니. 넌 아직도 저런 나라를 바꿀 생각이야?”

“시간을 들여야지. 언젠간 바뀔 거야.”

“그러렴. 네가 기다리는 건 잘하잖아.”

그러다 툭, 하고 델칸에게 질문했다.

“후사도 언젠간 볼 거니?”

“…….”

델칸은 입을 다물었고, 샤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곁눈질하던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후사는 무슨, 평생 결혼도 못 할 팔자지.

저 새가슴으로는 한 사람도 담기 벅찰 테니까.

“나는 결혼할 거야.”

샤를이 말했다.

델칸은 벙찐 얼굴이 되어 샤를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샤를, 설마 정말로 루이드랑 결혼할 생각이라면 나는 반대야. 내가 더 좋은 사람을 찾아줄 테니까-.”

“너까지 노망난 소리 할래?”

샤를은 델칸을 흘겨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후사를 볼 생각이 없다면 내 아이를 후계자로 생각해 봐.”

“통보야?”

“권유야.”

그렇게 말하는 샤를은 뭔가를 꾸미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델칸은 찝찝한 기분을 안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

“성녀의 아이면 제 부모를 보고 자랄 테니 눈이 꽤 높겠지? 보니아의 피를 가진 내 아이면 성녀의 핏줄에 끌릴 가능성이 있을 테고.”

“……그래서?”

썩 반가운 주제는 아니었다. 뭘 하려는 거야, 샤를.

“나랑 결혼할 사람, 아주 잘생겼거든.”

“너……!”

그제야 샤를이 그리는 청사진이 델칸의 머릿속에서도 윤곽을 드러냈다.

‘그게 정말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디까지 미래를 보고 있는 건지.

델칸은 질린 표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샤를은 즐거운 듯 하늘을 바라봤다.

“갖고 싶은 건 가져야지. 부스러기라도.”

“샤를, 가령 그 아이들의 감정이 네가 마음먹은 대로 된다고 해도, 황제는 절대 허락 안 할걸.”

그거야 그렇겠지. 그 남자는 쪼잔하니까.

어차피 나중 일이다.

샤를은 기대감에 노래를 흥얼거렸다.

“기왕이면 성녀를 닮은 딸이면 좋겠네.”

***

“폐하 말인데요……. 침대에서 정신까지 잃을 정도예요?”

결혼식 다음 날 아침.

나는 오래전에 황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문을 떠올리며 폐하에게 물었다.

“폐하, 첫날밤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결혼한 날 밤이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침대 옆자리. 내 쪽을 향해 옆으로 누운 폐하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아리, 나는 지금도 좋아.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내가 누에고치처럼 숨은 이불 위로 폐하의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다정해서 더 서럽다…….

“저는 평생 폐하랑 첫날밤은 못 치를 게 분명해요…….”

사건의 발단은 어젯밤.

내게도 그토록 기다리던 대망의 순간이 찾아왔다.

“폐, 폐하. 저 처음인데…….”

“나도 그래.”

방에 단둘이 들어오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는 폐하한테 안겨 침대 위로 눕혀졌고.

키스까지도 용케 버티던 내 정신은, 폐하의 탄탄한 맨 상체를 마주한 순간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창가에 새들이 짹짹거리며 지저귀고 있었고.

폐하는 내 옆자리에 누워 내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

잠옷 단추까지 꽉꽉 채운 아주 단정한 옷차림으로.

그 와중에 아침 햇살보다 폐하 얼굴이 더 눈부셔.

“……했어요?”

했겠냐. 안 했겠지.

폐하는 아무 말 없이 웃으며 내 이마에 키스했다.

게다가 더 슬픈 건…….

‘면역력 다 사라졌어.’

맨가슴에 한 번 정신을 잃고 나니 폐하 얼굴만 보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는 거지.

나는 이제 남편 얼굴도 못 봐. 흑흑.

“저는 글러 먹었어요. 이제는 폐하 얼굴만 봐도 정신을 잃을 거 같다고요.”

정말 이러다…….

“내 인생에 첫날밤은 영영 없을지도…….”

“괜찮아.”

좌절하고 있자니, 폐하가 이불 밖에 있는 내 손을 잡아 입술을 내렸다.

“나는 네가 이렇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걸.”

꿀통을 쏟아부은 것처럼 달달한 멘트였지만, 지금 내 귀에 들어오는 내용은 아니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가…….”

“아리?”

“제가 아쉽단 말이에요!”

폐하 얼굴이 안 보여서 그런가.

아니면 욕망을 따라오지 못하는 몸뚱어리가 야속해서 그런가.

나는 평소에는 못할 부끄러운 소리를 내뱉고는 침실 밖으로 도망치듯 달려 나갔다.

그런 내 뒤로 당황한 폐하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

나는 내 예전 방 소파에 해탈한 듯 누워있었다.

요 몇 달 황제의 궁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프로딘타 궁 천장이 낯서네.

“그래, 딩크족도 괜찮지.”

나도 폐하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아마도.

내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자니, 시아나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궁으로 보낼 짐을 하인들에게 골라주던 일이 끝난 모양이었다.

“결혼식 다음 날인데, 황제 폐하와 같이 안 계셔도 돼요?”

“응. 내가 지금 폐하를 볼 면목이 없어서…….”

반나절 동안 열심히 피해 다녔지.

폐하도 내 심란함을 이해해주는지, 저녁은 같이 먹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날 찾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바쁘신 것 같더라고요. 황후 폐하와 여행을 떠나시기 전에 처리해야 하실 일이 꽤 많으신가 봐요.”

“……어?”

“네?”

훅 들어온 황후 폐하 소리에 내 얼굴이 붉어졌다.

결혼 전에 황후 수업도 빡세게 받긴 했지만.

이렇게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들으니 실감이 확 났다고 해야 하나.

아무 말 못 하고 입을 뻐끔거리고 있자니, 시아나가 후후, 웃었다.

“세계를 구하시고도 황후란 칭호에 부담감을 느끼는 분은 성녀님밖에 없을 거예요.”

“으으. 무려 황후잖아.”

“이 세계에서 세이칸 신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계시는 분께서, 엄살은요.”

시아나는 내가 곤란한 모습이 재밌었는지 조금 놀리다, 헬리가 날 찾더란 소리를 전해줬다.

“당분간은 바쁘실 테니, 시간이 나실 때 뵙길 청하더라고요.”

하지만 헬리의 걱정과 달리 바쁠 일이 없었다.

원래라면 폐하랑 침대 위에서 꽁냥거리고 있을 계획이었지만…….

“헬리! 저 찾았어요?”

내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헬리가 놀라 허둥지둥 다가왔다.

“아니, 시간 되실 때 제가 찾아뵈려고 했는데, 이렇게 직접…….”

“헬리가 저보다 더 바쁠 거 같아서요. 무슨 일인데요?”

“새로운 디저트를 개발했는데, 한번 봐주실 수 있으신가 해서 말입니다.”

자문 부탁이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죠.”

그리고 헬리가 가져온 건 동그란 모양의 초콜릿이었다.

“초콜릿?”

항상 만들던 거랑 다를 게 있나?

의아해하는 내게, 헬리는 자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어른을 위한 디저트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