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열이 오르면 뭘 해.
우리는 결혼 전까지 ‘손만 잡고 잘게.’란 건전한 슬로건을 가지고 한 침대를 사용하는 사이란 말이지.
‘결혼 후면…….’
열이 올라도 되나.
그래도 되는 걸까……!
“성녀님, 얼굴이 무서운데요. 폐하께서 결혼하지 말자고 하셨어요?”
“초비.”
“하하하……. 농담이에요. 아시죠?”
초비의 연구소장실의 테이블에 앉아있던 나는, 초비가 건네는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받았다.
사진기의 몸통과 셔터에 각각 연결된 기다란 손잡이.
세 살짜리가 흔들림 없이 사진을 찍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와. 진짜 좋아요. 초비는 천재라니까.”
“뭐, 이쯤이야. 별것도 아닙니다. 크흠, 큼.”
“초비도 찍어줄까요?”
초비를 찍은 사진을 건네줬더니, 초비는 마치 불을 발견한 원시인처럼 감탄했다.
“오, 오오……!”
저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네.
나중에 가져온 필름 다 사용하면 사진기는 초비 줘야겠어.
어쨌든.
“이제 이것만 있으면!”
그 하찮은 몸으로도 어린 폐하의 모습을 선명하게 찍을 수 있다는 거지!
보육원에서 여섯 시간 정도를 보낸 첫 번째 과거 여행.
어린 폐하는 나만 보면 도망가고, 눈이 마주치면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에본 재상님과 성격 나쁜 폐하를 합쳐놓은 작은 버전이랄까.
‘진짜 귀여웠지.’
어느 정도로 귀여웠냐면, 내 심장을 다 부술 정도로 귀여웠다.
‘오늘 밤에 당장 간다.’
어젯밤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폐하를 보러 가야 했다.
과거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를 보냈지만, 현실에서는 고작 5분 정도가 흘렀단 말이지.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있어도 괜찮겠지?’
사진기 개조에 가방 안에 넣고 갈 디저트까지. 준비는 완벽했다.
먹을 걸로 어린 폐하를 꼬시는 데 성공하면, 다른 아이들한테 보여주던 그 해맑은 미소를 내 앞에서 보여줄지도!
그리고 그날 밤.
나는 폐하가 곤히 잠든 걸 확인하고 침실을 빠져나와 나뭇잎을 사용했다.
눈을 뜬 곳은 다행히 시장이 아닌 보육원 내부였지만.
‘낮?’
대낮이었다.
여기서 한밤중에 현실로 돌아갔던 것을 생각하면, 적어도 반나절 이상은 시간이 흐른 게 분명했다.
‘아니지, 내가 왔었을 때보다 더 과거일 수도 있잖아. 지금이 정확히 언제지?’
내가 아이들을 만나기 전인지, 후인지 알 수가 없어 살금살금 복도를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아는 척을 했다.
“리리!”
“다냐.”
8살 다나였다.
“어디 갔었어? 자고 일어났는데 리리가 없어져서 다들 걱정했다고.”
“미얀. 나 가구 얼마나 지나써?”
“음……. 다섯 밤?”
다나는 한 손을 펼쳐 보이고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지금 큰일이 났어.”
“큰일?”
그리고는 내 손을 덥석 잡고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착한 곳은 식당 문 앞이었다.
“원장님께 알려야 하는 거 아니야?”
“옆 마을에 저주받은 아이를 치료하러 가셨잖아. 알려도 오늘 자정까지는 못 오셔. ……우리 보육원에는 이만한 돈도 없고.”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심각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언니, 오빠들!”
다나가 식당 문을 열었다.
식탁 주위에 둘러선 10살 넘은 아이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다나, 어린 애들은 방에 있으라고……. 어, 리리?”
“내가 리리를 찾았어!”
다나는 숨겨진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나를 자랑스럽게 아이들에게로 데리고 갔다.
다나가 가까이 오자, 아서가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급히 아래로 내렸는데.
“보육원 아이 듀 명을 데리고 이따?”
“리리, 너, 글자를 읽을 줄 알아?”
그게 내 눈앞이었단 말이지.
내가 글자를 읽을 줄 몰랐다는 듯 아이들의 눈이 커졌다.
당황한 아서가 종이를 접었지만, 내용을 다 읽은 후였다.
보육원 아이 두 명을 데리고 있다.
오늘 자정까지 천 골드를 준비하라.
게다가 폐하한테 들어서 뒷이야기도 알고 있는 상태고.
납치된 아이는 어린 폐하와, 함께 있던 레이곤.
종이의 글씨까지 허술한 이 삼류 납치극은 폐하의 활약으로 끝이 나지만.
문제는 폭주 수준으로 일으킨 신성력 때문에 폐하가 한 계절을 아팠다는 거였다.
죽음에 관여하지 말라는 세이칸의 당부가 있었으니, 내가 보육원 사람들을 데르아치의 손에서 구하지는 못하지만.
이 정도는 대신 해결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려면…….
“왜, 왜……?”
고개를 들고 말없이 아서를 바라봤더니, 아서의 동공이 살짝 떨렸다.
돈도, 신성력도, 잘생긴 약혼자도 있는 내게, 지금 딱 하나 부족한 게 있다면.
“아서.”
바로 기동력.
“다리 기녜?”
나는 아서를 향해 씩 웃었다.
***
“…….”
알렌드는 숨을 죽이고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자신들을 골방에 가둔 납치범들은 낄낄거리며 포커를 치고 있었다.
“알렌드, 원장님이 오실까?”
“오실 거야.”
“리리도 이 사람들이 잡아간 건 아니겠지……?”
레이곤이 울먹거리며 말한 소리에 알렌드는 꾹 입을 다물었다.
리리 굿페이스.
‘이상한 귀족 여자애.’
초면에 결혼하자는 소리나 하고.
처음 겪는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딱딱하게 대해버렸다.
‘너무 심했나…….’
하지만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그 어린 여자애는 자신을 놀리려고 결혼하자는 소리를 한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알렌드, 그거 아러? 넌…. 너뮤 완벽해.”
“…….”
“진짜 아기 천사 가태. 내가 세이칸이었으묜 아까워서 정원 바께 안 내보냈을 텐뎨.”
“…….”
제 외모에 관한 그런 기상천외한 말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다음에 또 보자던 리리는, 그날 이후로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그 녀석, 잘생겼네.” 정도의 말만 듣던 알렌드에게, 리리와 만난 몇 시간은 여태껏 겪은 그 무엇보다 강렬했다.
리리 굿페이스가 제 위로 칭찬 더미들을 쏟는 꿈을 며칠 동안 꿀 정도였으니.
“아닐 거야.”
그런 리리가 저런 사람들한테 당할 리 없었다.
그러나 납치범들의 동향을 살피는 알렌드의 주먹에 왜인지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알렌드, 여기 숨을 곳이 있어.”
레이곤의 말대로 골방의 벽장 속에 작은 공간이 있었다.
어린아이 두 명이 들어가기에 딱 적당한 크기였다.
“일단 숨자.”
알렌드와 레이곤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숨을 죽인 지 얼마나 지났을까, 골방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납치범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들은 잠들어 있나?”
“……이것들 어디 갔어!”
소란이 일었다.
알렌드는 레이곤을 제 뒤에 숨기고 문을 노려봤다.
“알렌드, 그 아이들은 저주받은 게 아니란다. 신성력이 그릇에 비해 방대할 뿐이지. 네가 힘을 사용하면 아픈 것도 비슷한 이유일 거야.”
“그러면 저는 평생 신성력을 사용하면 안 되나요?”
“너처럼 신성력이 강한 아이는 나도 처음이라 조심스럽단다. 네 힘에 관해 제대로 알기 전까지는 신성력을 사용하지 말렴. 자칫하다가는 네가 크게 다칠지도 몰라.”
애밀리아 원장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렇다고 레이곤을 죽게 할 수는 없었다.
알렌드는 여차하면 힘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잘못될지 모른다 하더라도.
“나가진 못했을 거야. 방을 샅샅이 뒤져봐.”
납치범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뒤이어 물건이 깨지고 엎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콰아앙 하는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
끼익, 하며 벽장이 열렸다.
알렌드는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한 문틈을 노려봤다.
그리고.
“괜차나?”
“…….”
알렌드와, 알렌드를 뒤에서 껴안은 레이곤이 놀란 표정을 짓고 바깥을 바라봤다.
날아간 골방의 문짝, 짚단에 처박힌 납치범 둘, 뭔가에 놀란 듯 입이 떡 벌어진 아서.
이상한 상황에서 가장 멀쩡한 건, 이상한 귀족 여자애인 리리 굿페이스뿐이었다.
알렌드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제게 손을 내미는 리리에게 물었다.
“……네가 이랬어?”
“웅.”
알렌드의 눈이 커졌다.
“왜…?”
“알렌드눈 내갸 평생 지켜줄 거니까.”
비록 푹푹 새는 발음이지만 어떠한가.
알렌드에게 이 순간만큼은 리리가 아서보다도 멋있어 보였다.
알렌드는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저보다 작은 손을 잡았다.
“고마워.”
“별말쑴을.”
***
“애밀리아, 그게 웬 돈이야?”
마샤는 배달한 채소를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애밀리아에게 물었다.
“글쎄.”
“글쎄, 가 아닌데.”
애밀리아가 들고 있는 건 무려 금화 주머니였다.
저런 거금이라니. 어디 돈 많은 귀족 나리의 후원이라도 들어왔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면 올해 보육원 운영은 걱정 없겠는걸? 당장 다음 달 세금도 못 낼 것 같다고 걱정했잖아. 재수 없는 영주한테 사정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네.”
애밀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화 주머니를 매만졌다.
두 달 전.
인형처럼 생긴 귀족 아이가 보호자도 없이 보육원에 나타났다.
본인을 리리 굿페이스라 소개한 아이는 이따금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처음 맛보는 디저트를 자기 몸만 한 가방에 가득 채워 왔다.
아이들한테는 또 어찌나 인기가 많던지.
리리가 사라진 날은 애밀리아가 아이들에게 “리리는 어디에 갔어요?”란 질문 세례를 받는 날이었다.
‘신비한 아이.’
애밀리아는 리리를 그렇게 생각했다.
수상한 점을 따지자면 한둘이 아니었지만, 깊게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다.
리리에게서는 이따금 신성한 기운마저 느껴졌으니.
그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은 것은, 바로 어제였다.
“원쟝님.”
“리리구나.”
사진기라 하는 신기한 것으로 단체 사진을 찍고 난 뒤였다.
아이들과 노는 줄만 알았던 리리가 복도를 걷던 자신을 불러 세웠다.
“감샤합니다.”
“응?”
“알렌드룰……. 키워주셔서….”
무슨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알렌드를 향한 리리의 사랑은 보육원 내에서도 유명했다.
애밀리아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아드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소리를 하는 리리가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나올 뻔’했다는 말이었다.
“……!”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인 리리의 갈색 머리 위로 오색의 신성력이 일렁였다.
그 빛이 닿은 부분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리리가 고개를 들자 신성력은 사그라들고 머리카락은 다시 갈색으로 돌아왔지만.
신의 기적을 목격한 애밀리아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원쟝님, 우세여?”
“아, 아니.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여? 저는 이만 가봐야 돼여. 시갼이 된 거 같거든여.”
“시간이……?”
“그리고 저 알렌드랑 겨론…해여…….”
리리는 애밀리아에게 꾸벅 인사한 뒤, 왔던 길로 돌아갔다.
애밀리아는 퐁퐁 걸어가는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 잠시만! 리리!”
애밀리아는 다급히 외쳤다.
저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이 말을 저 아이에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리리가 뒤를 돌아봤다.
“결혼 축하해. 알렌드한테도 그렇게 전해줄래?”
그 말에 동그란 눈동자가 살짝 놀란 빛을 띠더니, 리리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져! 행복하게 살게여!”
그렇게 리리는 떠났다.
그날 저녁.
애밀리아는 아이들이 쏟아내는 리리의 행방에 관한 질문에 시달리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게 뭐지?”
침대 머리맡에 놓인 금화 주머니와 메모 한 장.
지참금
깔끔하게 적은 앞면과 달리, 메모 뒷면은 걱정과 미련이 묻어나는 글자로 빼곡했다.
요약하자면, 돈 찾으러 다시 못 돌아오니 돌려줄 생각하지 마시고 이 돈으로 아이들(특히 알렌드)을 잘 키워달라는 소리였다.
‘지참금이라니.’
애밀리아는 식탁 위에 놓인 단체 사진을 바라봤다.
애정 어린 미소를 지으며 사진 속, 팔짱을 끼고 활짝 웃는 두 아이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행복하게 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