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나, 신아리.
전 세계에서 가장 잘생긴 약혼자를 두고 있는 어엿한 성인이지만.
그런 설명이 무색할 정도로 꽤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내가 있는 곳은 폐하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 ‘블렌디아’의 중앙 시장.
‘세이칸…….’
폐하의 어린 시절을 본다고 과거로 온 건 참 좋은데, 좋은데 말이지.
‘제가 인간이면 어떤 모습이든 좋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런 어린애의 모습을 바란 건 아니었다고요……!’
약 한 시간 전.
한밤중에 침실을 빠져나온 나는 칸드리얀의 나뭇잎을 사용했다.
반지의 순간 이동과 비슷한 감각을 몸으로 느끼며 눈을 떴을 땐,
‘와.’
사람들이 다니는 시장 길 한복판이었다.
‘블렌디아 잡화점’, ‘블렌디아 여관’, ‘블렌디아 어쩌고.’ …….
주변 간판에서 ‘블렌디아’라는 지역명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는 걸 보니 맞게 온 거 같고.
그렇다면…….
‘이대로 보육원을 찾아가면!’
폐하가 거기에 있는 건가!
살아있는 어린 천사를 내 두 눈으로 보게 되나!
“땅쟝 가야! ……?”
의욕에 불탔던 나는 또랑또랑한 어린애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땅쟝이라니.
혀 반토막 난 듯한 이 발음이 설마 내 입에서 나온 건 아니겠지.
불안감이 엄습하자 그제야 내가 놓인 상황이 꽃밭으로 가득 찬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려면 한참은 고개를 들어야 했고,
내가 손에 꼭 쥐고 온 가방은 땅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게다가 바로 옆 상점의 유리장에 비친,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앙증맞기 짝이 없는 어린애의 모습까지.
“……덴쟝.”
고의성 하나 없을 누군가의 친절한 배려에 몸이 부들 떨렸다.
귓가에 웃음소리처럼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거에 좌절할쏘냐.
“걷는 것 봐. 귀여워.”
“왜 혼자 있지? 보호자를 잃어버렸나?”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쏠리는 시선을 받으며 시장 길을 꿋꿋하게 걸어 나갔다.
목적지는,
“마뷰님. 애밀리아 원쟝님 보육원에 가고 시퍼여.”
길가에 세워진 마차 한 대였다.
그나저나 내 발음 어떻게 하지.
폐하가 이 꼴을 안 봐서 다행이다. 크흡.
마차 앞에서 휴식을 취하던 마부는 내 말에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 내게 물었다.
“보호자는?”
“없눈데여.”
“몇 살?”
“세 쨜 정두……?”
“허.”
마부는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며 진상 손님 대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귀족 아가씨가 왜 수행원도 없이 혼자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더 큰 다음에 오쇼.”
어린애는 장사 방해하지 말고 가라, 이거였다.
나는 내 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는 마부를 보다 가방을 뒤적였다.
“마뷰님. 보육원이여.”
“거참. 일없다니-.”
귀찮은 기색으로 대꾸하던 마부의 입이 멈췄다.
마부의 눈은 내가 손에 든 금화에 고정돼있었다.
폐하한테 맛있는 거 사주려고 금화 가져오길 잘했지.
나는 인생 2회차 꼬마처럼 씨익 웃으며 금화를 흔들었다.
“지굼 가주시면 따따따불.”
돈의 효과는 대단했다.
까칠하던 마부는 곧장 나를 태우고 마을 가이드까지 자처해주더니, 얼마 가지 않아 보육원 근처에서 나를 내려줬다.
“정말 여기서 내리십니까? 보육원까지 좀 걸어야 할 텐데요.”
“괜차나여.”
나는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든 뒤, 저 멀리 보이는 보육원을 향해 걸어갔다.
담장이 둘렸고, 그 안에 작은 분교처럼 운동장과 1층짜리 건물이 보였다.
‘저기가 바로 폐하가 자란 보육원!’
나 괜찮을까. 폐하의 어린 시절을 맨눈으로 봐도!
역시 선글라스 하나 정도는 장만했어야 했는데.
기대감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품에 안은 가방을 꼭 쥐었다.
‘구경하기 좋은 명당부터 찾아봐야겠다.’
과거에 너무 개입하지 말아 달라는 세이칸의 당부도 있었으니,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내가 폐하 구경하기라면 이골이 나 있는 사람이란 말이지.
명당을 찾기 위해 담장을 샅샅이 뒤지다, 보육원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개구멍 하나를 발견했고.
냅다 바닥에 엎드린 나는 마침내 보고야 말았다.
“알렌드! 같이 놀자!”
“……헙.”
심장이 멎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어린 천사를.
젖살이 남아있는 뽀얗고 보드라울 듯한 핑크빛 뺨. 솜사탕처럼 폭신폭신해 보이는 금발, 커다란 눈망울, 날 때부터 완성형이었을 것만 같은 이목구비.
대략 7세로 보이는 폐하는 같이 놀자는 말에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쨔 미쳐따…….”
이제 헤이즐이나 주인님 부럽지 않아…….
모든 게 완벽했다.
내 몸만 빼고.
‘손가락이 너무 짧아.’
나는 바닥에 깐 실패작들을 참혹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죄다 초점이 나가 당최 뭘 찍은 건지 알 수도 없는 폴라로이드 사진들.
거리도 있는 데다가, 짧은 손으로 사진기를 잡고 셔터 버튼을 누르려 한 결과물이 이거였다.
‘에이, 모르겠다.’
지금 당장 보강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거 같고,
‘고민할 시간에 폐하 얼굴이나 더 봐야지.’
세이칸이 현실에서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혹시 모르니 오늘 내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4번의 기회 중 한 번.
그냥 흘려보낼 수 없으니, 어린 폐하나 실컷 감상한다.
“알렌드, 책 읽을 거야?”
“응.”
“알렌드, 빨래 바구니 들고 어디가?”
“원장님 도와드리러.”
아이고……. 나 죽네, 죽어.
‘귀여워……. 사랑스러움의 결정체가 인간으로 탄생한다면 우리 미니 폐하가 아닐까.’
어린 폐하는 잔디밭에서 책을 읽는다거나, 주변 또래 아이들과 신나게 논다거나, 커다란 빨래 바구니를 들고 걸어간다거나.
아주 이런저런 모습으로 내 심장을 부수고 계시는 중이셨다.
거기에 왜 다정한 모습까지. 다정한 게 원래 성격이셨나.
“후후…….”
너무 행복해.
바닥을 안방 삼아 배까지 깔고 누워 폐하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툭툭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으앗.”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중학생쯤 돼 보이는 남자애가 내 뒤에 쪼그려 앉아 서글서글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누군지 알지. 아까 폐하랑 같이 있을 때 이름 부르는 걸 들었다.
아서잖아. 폐하가 제일 좋아했다던 보육원 최연장자.
“너 왜 혼자 있어?”
“관쉼 꺼.”
무뚝뚝하게 대답하면 흥미를 잃고 가지 않을까.
라는 내 희망과 달리, 아서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무, 무순……!”
“어린애가 혼자 있으면 안 돼. 보호자 올 때까지 우리랑 같이 놀자!”
“내 보호쟈는 나……!”
그리고는 그대로 보육원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서한테 양쪽 팔을 붙잡혀 대롱대롱 매달려 가는 꼴이라니.
“보육원에 오려고 했었다며? 마부 아저씨가 그러던데.”
“그 아조씨랑은 언제 만났담. 하여튼 나눈 들어가기 시러. 실타구……!”
“아서 형.”
나는 발버둥 치던 몸을 멈췄다.
빈 소년 합창단에 들어가고도 남을 맑고 청아한 미성.
고개를 대각선으로 내리니, 동그란 눈으로 날 빤히 바라보는 폐하가 있었다.
“그 애는 누구야?”
“얘? 얘는…….”
“이짜나.”
글러 먹었다.
내 주둥이는 작아져도 내 의지랑 상의 없이 말을 내뱉고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너 나랑 커서 겨론할래?”
“…….”
그 말에 작은 폐하는 이곳에서 본 것 중 가장 냉랭한 얼굴을 하고, “아니.”라 대답하며 보육원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아서가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아, 저기. 우리 알렌드가 부끄러움이 많아서-.”
“아서…….”
“어? 내 이름 아네?”
“나…….”
저 얼굴.
요즘 나만 보면 꿀이 뚝뚝 떨어지는 폐하한테서는 볼 수 없는 저 쌀쌀맞음!
“심쟝이 듀근거려.”
“…….”
이건 마치 어린 폐하에게서 내 남편(예정)의 덕질 포인트를 발견해버린 느낌이랄까!
‘성격 더러운 이중인격자 미남이라니. 정말 좋아…….’
오랜만에 덕심이 차오른다.
가슴께를 움켜쥐고 있자니, 아서가 슬그머니 날 바닥에 내려놨다.
***
“간밤에 좋은 꿈이라도 꿨어?”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알렌드는 옆에 누운 아리에게 질문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리가 그런 알렌드의 품을 파고들었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알렌드는 읽던 책을 놓고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자는 동안 입꼬리가 올라가 있던데.”
“제가요?”
아리는 입가를 매만졌다.
과거에 다녀온 일이 너무 좋아 꿈까지 이어진 모양이었다.
아리는 어린 알렌드를 떠올리며 웃었다.
“예쁜 사람이 나오는 꿈을 꿨거든요.”
멈칫.
그 말에 알렌드의 손이 멈췄다.
“……누가 나왔는데?”
불안함이 스멀 올라왔다.
아리의 입에서 예쁘다는 소리가 나올 만한 인물이라니.
누구지. 샤를 왕녀인가, 아니면 보니아의 왕인가.
실존하는 인물이라면 평생 아리의 눈에 들지 못하도록…….
“비밀요.”
“나보다 더 예뻐?”
유치한 말이었지만, 자존심 챙길 때인가.
아리가 자신을 왜 좋아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을 때, 그나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외모’였다.
이것만큼은 밀리면 안 됐다.
능청스러운 질문에 감춘 불안을 읽었는지 아닌지.
아리는 “폐하보다 예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라고 말하며 알렌드의 손을 붙잡았다.
“폐하, 애들은 단 걸 좋아할까요?”
“그렇겠지.”
“폐하를 닮은 애도요?”
“……나를 닮은?”
그 말에 알렌드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다시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나는……. 나보다는 아리, 널 닮은 아이가 좋아.”
“절 닮은 애는 혀가 짧……. 네, 네에?!”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의 볼이 화르르 열이 올라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