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일전에 아리가 앙뜨완 제과점에서 만든 포토 카드란 것과 비슷하게 생긴 모양새.
손바닥만 한 종이 속 정교한 그림은 모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담은 것이었다.
그것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알렌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헤이즐, 그 작자인가.”
제 어린 시절의 소장품을 가지고 있다고 아리한테 자랑을 하더니.
그때 태운 상자 하나가 전부가 아닌 모양이었다.
더욱이 이렇게 이목구비마저 생생한 초상화라니.
헤이즐이 제작했다는 상상을 하자 소름이 돋고 기분이 나빠졌다.
“……태워야겠군.”
알렌드의 손에서 신성력이 피어오른 그때였다.
“으악!”
알렌드가 들어온 문으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급히 신성력을 거두고 고개를 돌리니, 아리가 경악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리.”
반가운 마음에 알렌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지만, 아리는 그렇지 못했다.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알렌드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곤 빠른 속도로 그의 손에 들린 것을 살짝 빼낸 뒤, 테이블 위에 있던 그림들마저 조심히 거둬 품에 안았다.
“폐, 폐, 폐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게, 불결한 물건이 있어서.”
“……지금 제가 안고 있는 거요?”
“응.”
알렌드는 다정히 웃으며 아리에게 다가갔다.
당장 그 불결한 물건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겠다는 속내를 품고서.
그 속을 읽은 아리가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무, 무슨 소리세요! 이건 제가 직접 찍은 건데! 제 보물이라고요!”
“직접 찍다니……? 그게 무슨-.”
“쟈, 찍숩니다!”
순간 일어난 두통에 알렌드는 머리 옆면을 짚었다.
머릿속에서 자신도 모르던 기억 하나가 생생히 펼쳐졌다.
이건, 도대체…….
“그러면 정말 그림이 돼서 나와?”
“리리는 신기한 것도 많이 알고, 똑똑해. 알렌드보다도 어린데!”
“아, 나 리리가 지난번에 알렌드랑 결혼하고 싶다고 그런 거 들었다!”
“진짜? 알렌드, 리리랑 결혼할 거야?”
“어……?”
“알렌드 얼굴 빨개졌다. 알렌드가 리리 좋아하나 봐!”
헤이즐을 만난 후가 아니었다.
이건, 보육원 시절의…….
알렌드는 새로운 기억 속의 어린 여자아이를 떠올리며 아리를 바라봤다.
“리리 굿페이스……?”
***
폐하의 말에 나는 진땀을 뺐다.
7살 때 일인데 어떻게 기억하고 계셨지. 내가 폐하의 기억력을 우습게 본 모양이었다.
‘우습게 볼 게 따로 있지……!’
내가 세이칸에게 빌었던 마지막 소원.
“폐하 어린 시절 보고 싶어요! 이 폴라로이드 사진기에 찍히게요! 으으. 어린 폐하 진짜 귀엽겠지……. 목소리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과거로 가보고 싶다는 말이니?”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단다.”
내가 말했던 건, 세이칸이 끊었던 부분부터 폐하의 성장 과정을 이어서 보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과거라니.
얻어걸린 대어를 놓칠 수 없었다.
그걸 위해선 검은 땅 정화 심부름도 감수할 수 있었지.
“대신 원래 네 모습으로 가지는 못한단다. 그 시간대에 성녀는 아직 등장하기 전이니.”
“인간이면 어떤 모습이든 좋아요. 사진은 찍을 수 있을 테니까요. 아, 세이칸 님. 과거에 물건도 가지고 갈 수 있어요?”
“네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면. 하지만 아이야, 너무 많은 것을 바꾸면 안 된단다. 정해진 죽음에 관해서는 특히나.”
그렇게 경고한 세이칸은 지상의 칸드리얀의 나뭇잎 여덟 장을 건넸다.
“과거로 갈 때 한 장, 돌아올 때 한 장이 필요하지.”
“총 4번 왕복이네요.”
고작 네 번.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캐리어에 고이 모셔두고 덕질에 올인할 환경이 될 때까지 기다렸지.
그게 바로 최근 일주일이었고.
폐하가 잠든 틈을 타 과거를 몇 번 다녀왔었는데…….
“같이 놀 때 사심 있었던 거 너무 티 났었죠?”
나는 내 마지막 소원을 폐하에게 설명한 뒤, 폐하가 떠올렸을 기억에 관해 머쓱하게 물었다.
크흡. 그냥 멀리서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보육원 아이 중 제일 연장자인 아서한테 들켜서…….
“너 왜 혼자 있어?”
“관쉼 꺼.”
“어린애가 혼자 있으면 안 돼. 보호자 올 때까지 우리랑 같이 놀자!”
“내 보호쟈는 나……!”
어떤 모습이든 좋다고 한 건 나였지만, 굴욕스럽게도 세이칸은 나한테 세 살짜리 어린애의 몸을 줬다.
리리 모습이 어려진다면 그런 모습일 것 같은.
일곱 살이었던 폐하랑 나이 차를 맞춰주려고 한 것 같은데, 굳이 그런 세심한 배려가 필요했나……!
‘하지만 후회는 없지.’
사진도 원 없이 찍었고, 일곱 살의 폐하랑 놀기까지 했으니…….
나 너무 행복해…….
이제 헤이즐이나 주인님 부럽지 않다 이거야.
“……아주 가끔, 꿈속에서 뿌연 모습으로 등장하는 아이가 있었어.”
품에 안은 사진들을 보며 실실거리고 있는 와중, 폐하가 조용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심각한 분위기에 나도 웃음기를 지우고 폐하의 말을 들었다.
“나는 그게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내 무의식이라고 생각했어.”
“왜요?”
“그 아이는 언제나 손을 뻗어줬거든. 그런데 그 아이가, 아리 너였다니.”
폐하는 주먹을 쥐었다.
새롭게 떠오른 기억과 함께 고개를 든 보육원의 추억.
거기서 이어지는 죄책감, 그리움, 혹은 내가 알지 못할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듯,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폐하.”
나는 그런 폐하의 주먹에 손을 포갰다.
“보고 싶으세요? 보육원 분들.”
폐하는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어. 내 가족이었으니까.”
그랬지. 그 사람들이 폐하에겐 유일한 가족이었을 거였다.
나는 어깨에 멘 가방 속에서 사진을 골라 폐하의 손에 건넸다.
“이건…….”
“이번에 가는 게 마지막이었거든요. 그래서 찍어왔어요.”
폐하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보육원을 배경으로 채소가게의 마샤가 찍어준 그 사진 속에선 폐하의 가족들과 폐하와 내가 환히 웃고 있었다.
“애밀리아 원장님이 결혼 축하한대요.”
내 말에 폐하의 눈에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그런 폐하를 꼭 품에 안았다.
***
칸첼리아 신전.
“…….”
나 살아있나.
나는 신부 대기실로 들어온 폐하의 모습을 넋을 놓고 쳐다봤다.
새하얀 예복 차림의 폐하라니.
사람이 저렇게 하얀색이 잘 받아도 되나. 힘주고 세팅된 머리는 또 어떻고. 폐하 얼굴, 얼굴은…….
“성녀님, 숨 쉬세요! 숨! 결혼하셔야죠!”
원래 몸으로 돌아온 초비가 내 눈앞에 폐하를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흔들었다.
“제, 제가 써봐도 될까요?”
내가 가져온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예전부터 눈독 들이던 초비는, 결국 오늘 결혼식에서 사진 기사 역할을 자처했다.
대신 내 부탁이 있었지만.
“초비, 필름 네 통 중에 세 통은 폐하 사진만 찍어주세요.”
“……아까운…….”
“그러면 그냥 제가-.”
“하하. 황제 폐하께서 제가 찍기에 아까운 피사체라는 거죠! 제가 열심히 찍어보겠습니다!”
초비는 내가 숨을 쉬는 걸 확인하자, 중간보고라며 폐하의 사진 몇 장을 내게 쥐여 줬다.
“황제 폐하께서 제가 찍는 건 안 좋아하셔서요.”
초비의 말을 듣고 사진을 보니, 사진 속 폐하의 얼굴이 죄다 무표정했다.
내 눈앞에서 얼굴을 붉힌 폐하랑 같은 사람인 게 의심될 정도로.
무표정이면 어떻고, 이런 폐하면 어떤가. 오늘 폐하 외모 미쳤어…….
“아리.”
폐하는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오늘 너무……. 아름다워.”
그런 아름답다는 소리, 폐하한테 들어봤자…….
‘너무 좋지. 폐하가 날 좋아한다는 거잖아!’
부디 그 콩깍지 평생 안 떨어지면 좋겠다.
“폐하,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저 중간에 정신 잃으면요-.”
“……몸 상태가 안 좋아? 그러면 식을 중지해야겠군. 아니, 치료 신관을 먼저 불러야 하나?”
“아니요.”
나는 우왕좌왕하는 폐하에게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 너무 행복해서 정신 잃어도 절대로 결혼식 끊으시면 안 돼요.”
폐하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날 바라봤다.
나는 손에 든 사진을 쥐고 폐하에게 힘주어 말했다.
“그래야 정신을 차렸을 때 폐하가 제 남편이 돼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지, 시아나?”
“네.”
내 말에 옆에 있던 시아나가 쿡쿡 웃었다.
프라단 후작가의 저택에서 일이 있고 나서, 시아나는 다시 내 전담 시녀 자리로 돌아왔다.
상태는 많이 좋아져서 지금은 이전처럼 잘 웃고 얼굴에 생기도 가득했다.
내 말의 의도를 알아차린 폐하도 피식 웃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식은 진행할게.”
폐하는 식을 준비하기 위해 폐하의 대기실로 돌아가고.
“감회가 새롭네요. 성녀님께서 오셨을 때가 얼마 전 같은데.”
“축하드립니다.”
에본 재상님과 헨켈 대장이 찾아와 축하 인사를 하는 것을 시작으로, 반가운 얼굴들이 나를 찾아왔다.
“젠달의 앞길이 이렇게 밝을 줄이야.”
“성녀님, 축하드립니다……. 훌쩍.”
“이보게, 자네는 또 우나?”
라울 신관님과 허퍼슨.
“경축드립니다. 결혼 기념 선물은 제 소장품 중에서 원하시는 걸로 드리지요.”
“성녀님, 축하드려요!”
“성녀님……. 너무 예뻐요.”
헤이즐과 이제는 신전 밖으로 나온 아이들.
“성녀님은 제 은인이세요. 이 빚은 제가 꼭 갚을게요.”
“뭐, 나도 갚아 드릴게요. 포인 빚은 내 빚이니까.”
쿠카의 아이들.
“성녀님! 공식적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하세요!”
성녀교 단원들.
“리리, 라고 불러도 될까. 마지막으로…….”
“젠달이 지겨우시면 언제든 보니아 왕국으로 오세요.”
델칸과 샤를 왕녀님.
이어 나열할 수 없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 폐하와 내가 함께 걷는 새로운 시작을 축하했다.
“……하여 세이칸 신의 이름으로 성녀, ‘신아리’와 신성 제국 젠달의 황제, ‘알렌드 칸 레오디우스’가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엄숙하고 들뜬 분위기 속, 라울 신관님의 목소리가 칸첼리아 신전 예배당에 울렸다.
거대한 예배당을 박수 소리가 가득 채웠다.
식의 마지막 순서에 따라 폐하와 나는 퍼레이드형 마차에 올랐다.
꽃으로 장식한 대로, 그 양옆에 빼곡히 선 사람들의 환호 소리.
“폐하, 그거 아세요?”
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옆에 선 폐하에게 물었다.
“글쎄.”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던 폐하가 내게 대답했다.
나는 폐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 폐하는 저한테 꽉 잡혔어요.”
그 말에 폐하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