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소원 네 번째.
세이칸의 이름을 빌려 신탁 내릴 수 있게 하기.
“내 이름으로 신탁을?”
“네. 하고 싶은 게 있거든요.”
내가 픽픽 쓰러지던 때, 폐하랑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변절자가 나타나기 전.
데르아치를 처벌한 뒤에 원래 폐하가 계획했던 일이 뭐였는지.
폐하는 젠달을 바꾸고 싶었다고 했다.
“신성력이 절대적인 권력이 돼버린 제국을 바꾸고 싶어요. 이 세계에서 유일한 신인 세이칸 님의 말이라면 사람들을 설득하기 유리할 거 같아서요.”
이건 말하면서도 조금 걱정이 됐다.
신성력은 세이칸의 힘인데, 이런 계획을 말해버리면 싫어하지 않을까?
하지만 세이칸은 의외로 흔쾌히 허락을 내려줬다.
“그러렴. 신성력은 지상의 칸드리얀을 지키기 위해 나눠준 힘일 뿐. 그걸 가지고 칭송받을 생각은 없단다.”
그래서 세이칸 이름으로 신탁 내리기 10회권을 받았지.
결혼 약속 후, 폐하와 나는 세이칸의 신탁을 어떤 방향으로 사용할지를 논의했다.
제일 먼저 해결하고 싶었던 건, 니세포르엘 신전과 선택의 미궁에 관한 악습이었다.
초기에는 순수하게 신성력이 강한 아이들을 뽑는다는 이유였다지만.
세월이 흘러 보상이 붙고, 그 보상을 악용하는 이들이 생기고.
결국에는 폐하 같은 피해자들이 생길 테니.
“니세포르엘 신전을 없애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먼 미래지만, 다음 대 황제를 뽑아야 하잖아요.”
“글쎄.”
폐하는 내 물음에 한쪽 입꼬리를 장난스럽게 올렸다.
“우리 자식이 생기면 황제 후계자로 지명하면 되지 않을까.”
“자, 자, 자…….”
“아리를 닮은 딸이면 예쁠 거야.”
“으아아……?!”
그대로 뇌 과부하 걸려서 고장 날 뻔.
폐하는 반은 진담인 농담이었다며, 진짜 포부를 밝혔다.
“아카데미를 만들 거야. 황제 후보생들을 육성할 수 있는.”
“니세포르엘 신전이랑 다른 점이 있는 거예요?”
“있지. 입학시험을 치르는 건 전적으로 수험생의 의사에 따르니까. 누구의 추천도, 신성력의 여부도 필요 없어.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 외출도 자유로울 거고.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될 거야.”
그렇게 말하는 폐하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나도 같이 들떠 아카데미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났다.
“칸은요?”
“초대 황제?”
“선택의 미궁을 폐쇄하면 칸은 영영 그곳에 남는 거잖아요. 혼자.”
“그렇겠지.”
“칸이 나와서 아카데미 교수를 맡아줘도 괜찮지 않을까요? 거짓말은 잘해도 실력은 확실할 테니까.”
“좋은 생각이지만, 아리. 초대 황제는 그 미궁을 영영 나오지 못해. 미궁의 신성석으로 버티는 몸이니, 밖으로 나오면 금세 무너질 거야.”
그 말에 나는 폐하에게 내 왼손을 펼쳤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초대 황제는 자신의 영혼을 반으로 쪼갰다.
그 과정에서 쪼갠 영혼을 담을 육체가 하나 더 필요했고, 그걸 세이칸이 신탁과 함께 내려준 나뭇잎을 녹여 만들었다고 했으니.
‘폐하를 위해 받아왔던 술식이 칸한테 먹힐지도 모른단 말이지.’
그래서 폐하와 함께 주기적으로 선택의 미궁에 들려 칸에게 내 신성력을 사용했다.
생각했던 대로 칸의 육체는 미궁 밖으로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되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지만, 칸은 밖에 나가서 무엇하느냐며 거부했다.
나는 그런 칸을 꾀었고.
“칸, 제가 미래의 학생들에게 저항받을까 봐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요.”
“뭔데?”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면, 칸의 시험을 받을 학생들이 수두룩 하단 말이죠. 칸에게 점수를 받아야 하니까 피하지도 못하고요.”
“그래서?”
“칸이 그렇게 좋아하는 시험 마음껏 낼 수 있어요.”
“오호.”
칸은 산 제물을 받고 미궁 밖으로 나왔고,
아카데미가 신설되기 전까지 칸첼리아 신전에 가서 내가 내린 신탁의 방향을 잡아주는 조력자 역할을 해주기로 했다.
칸이 칸첼리아 신전으로 간 지 2주 뒤.
“……폐하,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죠?”
“응. 나도 보고 있어.”
칸첼리아 신전을 방문한 폐하와 내 일행을 마중하는 칸의 행차.
우리는 어이가 없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약 스무 명의 신관을 대동한 칸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푹신한 쿠션이 깔린 지붕 없는 가마 위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왔느냐.”
신관들을 수행원처럼 부리며 잘난 표정을 짓는 꼬맹이.
그 무뚝뚝한 대신관 오드론마저 행렬의 맨 앞에 서 있었다.
‘교주다…….’
교수를 해달라고 했더니 교주가 되어 나타났네.
“폐하, 칸이 교수를 교주로 잘못 알아들은 거 같아요.”
***
폐하는 신탁 내용과 관련해서 신관들과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잠시 자리를 비웠고.
나는 금으로 둘러싸인 호화로운 칸의 방으로 안내받았다.
카우치에 앉은 칸이 내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칸, 재밌어요?”
“긴 세월의 짧은 유흥이지.”
쿨하게 말하는 것치고는 엄청나게 즐기는 거 같은데.
이럴 거면 왜 밖으로 안 나온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성하.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없다.”
……성하?
아, 하긴. 알맹이는 초대 황제니까.
그래도…….
나는 당연한 듯 예를 갖추는 오드론과 당연한 듯 손을 내젓는 칸을 번갈아 바라봤다.
“성녀님께서도 편히 쉬시지요.”
대신관은 허리를 숙여 나한테 말한 뒤, 방을 빠져나갔다.
방 안에는 칸과 나 둘뿐이었다.
“……칸.”
“왜 그렇게 진지하게 불러? 네가 드디어 나의 위엄을…….”
“할아버지한테 버릇없이 구는 꼬마애 같아요.”
“뭐……!”
칸은 눈을 흘겼다가 내가 가져온 타르트를 입에 넣었다.
“세상 좋아졌네. 이런 것도 나오고.”
일부러 노엘이랑 다른 애들이 좋아하는 걸로만 챙겨왔는데 입에 맞는 모양이었다.
애들 입맛은 애들이 제일 잘 안다니까.
“맛있죠? 다음에 다른 것도 갖고 올게요.”
“흥. 언제 오려고? 이번엔 2주 만에 왔으니 다음엔 한 달 뒤에 올 거냐?”
“어? 칸, 저 보고 싶었어요?”
“무슨. 책임을 지란 거다. 책임을. 네가 날 빼 왔으니.”
칸은 투덜거리다 양반다리를 하고 팔을 세워 턱을 괬다.
그리고는 눈꼬리를 접고 씩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결혼 날짜는 잡혔고?”
“네. 두 달 뒤로 잡았어요.”
“주례 봐주랴?”
“으. 그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까 할아버지 영혼 들어간 꼬마애 같은데요.”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가. 그런데 주례는 라울 신관님이 봐주기로 했어요.”
“그 애송이가?”
애송이라는 말을 듣기에 라울 신관님이 그렇게 적은 나이는 아닌데.
뭐, 700년을 산 칸이니 그러려니 했다.
“신혼여행은?”
“아, 그게요-.”
나는 ‘음…….’ 하고 고민스러운 얼굴을 했다.
세이칸 신한테 마지막 소원을 비는 대신 심부름을 받은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제가 검은 땅의 정화를요?”
“아이야, 네가 빈 소원은 내 세계의 인과율을 건드리는 일이란다. 그 소원을 들어준다면 나는 빠르게 잠들게 될 거야. 이 세계의 모든 땅을 정화하기도 전에 잠들게 되겠지.”
“…….”
“곤란한 부탁인가 보구나. 그러면 정화는 내가 할 테니 마지막 소원은 없던 걸로-.”
“아, 아뇨! 제가 할게요! 제가 싹 다 정화하겠습니다!”
그렇게 이 세계의 검은 땅을 내가 다 정화하기로 했다는 거지.
문제는,
“정화 과정은 쉽거든요? 그냥 밟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그게 문제예요. 제가 밟아야 한다는 거.”
걸어서 세계 일주. 그게 내 일생의 숙제가 되었지 뭐야. 흑흑.
“그래서 신혼여행으로 대륙을 돌아다닌다고?”
“네. 다는 무리니까 우선은 보니아 왕국까지 갔다가 돌아오려고요.”
다행인 건, 그동안 변절자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단 한 건도 없었다는 거였다.
데르아치가 대륙의 변절자를 싹 다 모아 군대로 만들어준 덕분이랄까.
그때 검은 땅의 정화와 함께 죄다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러면 젠달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느냐.”
“그렇겠죠. 이번 신혼여행도 몇 달은 돌아다닐 거 같아요. 폐하는 쭉 붙어 있는다고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였지만.”
“쯧. 몇 달.”
칸은 혀를 차더니, 단풍잎같이 작은 손을 펼쳤다.
뭐지, 이 꼬맹이가 간식 더 달라는 듯한 제스처는.
귀여워서 조금 신나는데……!
“타르트 더 드려요?”
“아니, 이사벨라의 반지 좀 보여줘 봐.”
아, 반지.
나는 순순히 칸에게 오른손 검지를 내밀었다.
칸은 반지를 만져보고는 입을 열었다.
“다행히 아직 널 주인으로 인정하는 모양이군.”
“칸이 제 영혼과의 결속이 안 끊어졌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육체가 바뀌었어도 반지가 날 따라 내 세계로 올 수 있었다고 했지.
이 세계의 지상으로 돌아온 뒤, 수호의 반지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내 손가락에 붙어 빠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칸은 한참을 반지를 가지고 꼼지락거리더니, ‘옜다, 결혼선물이다.’라며 손을 놓았다.
“……달라진 게 없는데요?”
“순간 이동 기능을 활성화했어. 신성력을 많이 사용하는 기능이라, 반지의 신성석으로는 한 번이 고작일 테지만. 너는 이제 신성력에 제한이 없으니 멋대로 써도 괜찮겠지. 특별히 두 사람까지 함께 이동할 수 있게 해놨다.”
“정말요!?”
그러면 돌아다닌 곳은 언제든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잖아!
나는 기쁜 마음에 칸을 꽈악 끌어안았다.
“왜, 왜 이래?! 얼굴이나 자주 비치라고 해준 거거든? 교수 노릇을 시킬 거면 관리 잘하라는 뜻으로!”
칸이 부끄러워하며 소리쳤지만, 그 정도는 개의치 않을 만큼 완벽한 선물이었다.
“칸, 최고예요!”
“흐음. 흠!”
***
자정을 넘긴 새벽.
아직 밤이 깊었지만, 알렌드는 잠을 더 이루지 못하고 눈을 떴다.
“……아리?”
아리가 알렌드의 몸을 고쳐주겠다며 같은 침대를 사용한 지도 한 달.
알렌드의 불면증은 많이 나아졌지만, 요 며칠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 이 시각에 깨곤 했다.
“…….”
오늘도 옆자리가 휑했다.
약 30분. 아리가 밤마다 침대를 비우는 시간이었다.
‘무슨 일이지.’
처음에는 저 몰래 뭔가를 꾸미나 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그저 짧게 자리를 비우고, 일어나고 나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했다.
‘……오늘은 알아봐야겠어.’
알렌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고요한 어둠이 깔린 복도를 걸었다.
일정하게 나 있는 창문에서 달빛이 내려와 그의 금발을 비췄다.
‘왼쪽인가.’
그러다 인기척을 느끼고 모퉁이를 돌아 닫힌 문 앞에 멈춰 섰다.
황제의 궁에 널린, 비어있는 방 중 하나였다.
“후후…….”
문을 향해 귀를 기울이니,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리의 것이다.
알렌드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리?”
하지만 방은 텅 비어있었다.
보이는 거라곤 발코니 앞에 놓인 티테이블과 의자.
아리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알렌드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는 티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막 꺼진 듯한 촛대의 초와…….
“이게, 왜.”
알렌드는 당황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인 것들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