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후후…….”
나는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보며 실실 웃음을 흘렸다.
요즘에는 이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니까.
‘폐하랑 결혼이라니!’
생각만 해도 너무 좋아서 베개를 껴안고 침대를 반 바퀴 돌았다.
그러다 빈 소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시아나가 종종 앉아서 자수를 놓던 자리였다.
“…….”
시아나가 있었으면 좋아해 줬을 텐데.
날 피해 다니는 사람 둘. 그중 하나가 시아나였다.
황궁으로 돌아온 뒤, 가장 먼저 시아나를 찾았지만.
‘저는 성녀님을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우편만이 돌아왔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황궁에서 만난 프라단 후작에게 사정을 물었다.
“제 딸아이가 성녀님을 뵐 염치가 없다더군요. 그동안 성녀님을 속였다고.”
시아나가 나를 속이다니?
의문에 대한 답은 폐하가 알려줬다.
“너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는 데 찬성한 사람 중 하나가 시아나 프라단이야.”
그걸 숨긴 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내 옆에 있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라는 게 시아나의 입장인 모양이었다.
“황궁에 나오고 안 나오고는 시아나의 자유니까 강요할 순 없지만…….”
지난번에 프라단 후작과 했던 대화 내용이 영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시아나는 건강히 잘 있나요?”
“건강…….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본인의 방에서 통 나오질 않으니……. 식사도 대부분 돌려보내는 것 같더군요.”
역시 안 되겠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
프로딘타 궁의 정문 앞.
나는 화려한 마차의 기를 미모로 다 죽여놓는 폐하를 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으, 폐하. 왜 이렇게 꾸미고 오셨어요. 데이트 아니고 시아나 보러 갈 거라니까.”
“안 꾸몄습니다. 성녀.”
“거짓말…….”
가르마 바꾸셨잖아요……!
이건 어제 폐하 집무실에서 나랑 헨켈 대장이 나눈 대화 때문인 게 분명했다.
“오오, 대장. 오늘 머리 멋있네요.”
“머리 말씀이십니까.”
“네, 자연스럽게 올린 6대 4 포마드 머리. 크흐. 제가 한때 이 머리 한 연예인에 꽂혀서…….”
“꽂혀?”
“앗, 아무것도 아니에요. 폐하.”
크흡. 그냥 흘려 말한 건데, 그 머리를 그대로 하고 오시다니.
‘평소보다 열 배는 더 빛나잖아-!’
눈이 부셔서 멀어 버릴 것 같다.
이제 폐하 미모에 어느 정도 적응됐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난 평생 폐하 미모 적응 못 해…….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폐하, 안 되겠어요.”
“……?”
“오늘 너무 잘생기셔서 같이 못 갈 거 같아요. 저 결혼 전에 심장 터지기 싫으니까 혼자 다녀올게요.”
“성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마음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죽으면……. 폐하는 누구랑 결혼할 건데!
“이번에 혼자 외출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나는 폐하를 황궁에 두고, 홀로 마차에 올라 황도에 있는 프라단 저택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시아나를 만날 수 없었다.
내가 저택에 방문했다는 소식에도, 시아나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울 장애가 심해졌다고요?”
“치료 신관이 그러더군요. 마음의 병이라 본인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프라단 후작 부인은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시아나에게 마음의 병이라니.
그러면 시간 많고 돈 많고, 약혼자는 잘생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성녀님, 오늘도 와주셨군요.”
“네, 어제 말한 디저트도 가져왔어요. 후작님네 차랑 먹으면 알맞을 거 같아서요.”
“성녀님께서 이렇게까지 신경을…….”
나는 폐하가 정신없이 바쁜 낮 시간대를 노려 프라단 후작가에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내일도 프라단 후작가에 간다고? ……언제까지?”
“시아나가 스스로 나올 때까지요. 저희 결혼 전에는 나오지 않을까요?”
“나도 같이 갈까? 옆에 붙어 다니라고 했잖아.”
“에이, 폐하는 바쁘잖아요. 카디얀 경도 같이 가고. 후작가만 다녀오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는 게 아니라 보고 싶어서 그래. 매 순간.”
“무, 무, 무슨…….”
폐하는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지만, 내가 하고 싶다는 걸 말리진 않았다.
“식기 전에 드세요.”
응접실에 자리를 마련한 후작 부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차를 권했다.
“시아나에게 성녀님께서 오셨다고 말을 할까요?”
“아니요. 오늘은 저 가면 얘기해주세요.”
나는 후작 부인에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와 있다는 게 시아나에게 내려오란 강요로 들리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저는 이 차가 그렇게 좋더라고요. 이 씁쓸한 향과 끝에 오는 단맛이-.”
쿵-.
챙그랑!
차를 마시며 감상을 늘어놓던 중, 천장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응접실 바로 위. 시아나의 방이었다.
후작부인과 나는 놀란 시선을 교환했다.
내가 먼저 시아나의 방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고, 후작부인과 하인들이 그 뒤를 따라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시아나, 시아나?!”
“아가씨, 문 좀 열어주세요!”
모두의 애원에도 단단히 잠긴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들 물러서세요.”
내 말에 순식간에 문 앞이 비워졌다.
기물파손이지만…….
수호의 반지의 신성석을 타고 나온 노란빛의 신성력이 문고리를 부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목에 밧줄을 감고 바닥에 쓰러진 시아나, 그 옆에 작은 의자, 천장에서 떨어진 샹들리에.
“아가씨!”
“숨을 쉬지 않으십니다!”
“신관! 치료 신관을……!”
“제가 할게요!”
나는 쓰러진 시아나에게 치료계 신성력을 사용했다.
금세 발견한 덕분인지, 시아나의 숨은 다시 돌아왔다.
‘아, 생각났다.’
정신을 잃은 시아나가 깨어난 건 이틀이 지난 뒤였다.
“왜…….”
눈을 뜬 시아나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다 침대 옆에 앉은 나와 눈이 마주치고,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날 바라봤다.
“시아나?”
시아나를 부르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서, 성녀님께서 왜 제 방에…….”
“나? 시아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제게 비난……을.”
시아나의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나는 시아나가 어느 정도 안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습 질문을 했다.
“시아나, 살 거면 나한테 올래?”
“네……?”
“잘해줄게.”
그 말에 시아나가 놀란 듯 시선을 내게 돌렸다.
주황색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오르길래, 시치미를 떼고 한 번 더 공격에 들어갔지.
시아나는 아직 모른다고 했으니까.
“시아나, 나 결혼한다.”
나는 내 왼손에 낀 반지 두 개를 자랑하듯 보이며 장난스레 웃었다.
“폐하랑.”
“……!”
다시 눈이 커진 시아나는 그간 혼자만 쌓았던 감정이 복받친 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그런 시아나의 마른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시아나도 같이 행복해지자고.”
***
젠달에서 깊은 역사와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칸첼리아 신전.
그곳에는 신탁을 관리하는 신관들이 있었다.
신탁이라고는 하지만, 고대의 성물에 태어난 해와 이름을 넣고 신관의 신성력을 주입해 나온 글귀를 해석하는 일종의 예지였다.
과거, 세이칸의 말이 이드만타로 만들어진 비석에 새겨지던 때도 있었으나-.
“세이칸 신께서 인간에게 직접 말씀을 내리시던 때는 지났다.”
대신관 오드론도 그렇게 말할 정도로, 비석은 오랜 시간 잠잠했다.
지금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신전 중앙에 자리 잡은 비석.
“……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칸첼리아 신전의 신관들은 이른 아침부터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경탄이 섞인 그들의 눈이 향한 곳은 원의 한가운데 있는 비석이었다.
불투명한 하얀색 비석 위에 새겨져 은은히 발광하는 검은 글자.
세이칸 신의 말씀이 몇백 년 만에 인간들에게 내려졌다.
“새벽기도를 가다가 발견했다고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어제 성녀님께서 황제 폐하와 다녀가신 것 때문인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성녀님께서 이드만타 비석 앞에서 기도를 드리셨잖아요.”
“세이칸 신께서 감동하셔서 성녀님께 응답하신 것일지도.”
믿기 힘든 일에 성녀가 언급되자, 모두 수긍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기적의 성녀’라 칭송받는 현 성녀에게는 인간들의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적이 따르고는 했으니.
“그런데…….”
모인 이들이 은은히 빛나는 검은 글자에 감탄하는 사이, 대신관 오드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의 말씀을 해석하기 위해 목욕재계를 마치고 온 참이었다.
오드론은 비석 앞에 앉아 글자를 받아 적었다.
그런 뒤 신성력이 흐르는 그의 손이 글자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
마침내 신탁의 해석이 신관들에게 공개됐다.
내용을 확인한 신관들은 혼란스러움에 빠졌다.
“니세포르엘 신전과 선택의 미궁을 없애라고……?”
그렇게 되면 젠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
황제는 어떻게…….
“잘됐네.”
낯선 어린아이의 음성에 신관들의 시선이 일제히 뒤로 쏠렸다.
붉은 눈에 흑발을 가진 대여섯 살 돼 보이는 어린 사내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갑자기 어디에서, 아니, 그것보다 신의 색을 머리카락에 지닌 아이라니?
칸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저를 보는 신관들에게 말했다.
“이것들이 왜 멀뚱히 있어? 와서 조상 대접 좀 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