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소원 두 번째.
폐하의 몸을 건강하게 해줄 것.
“폐하가 어렸을 때부터 불면증에 시달렸던 것도, 신성력을 많이 사용하면 아픈 것도. 다 칸드리얀의 나뭇잎과 폐하의 몸이 맞지 않아서라고요?”
“그렇단다. 그 아이의 그릇이 칸드리얀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지.”
그래서 폐하가 잠도 잘 자고, 아픈 일 없이 장수하고, 신성력을 많이 사용해도 괜찮을 수 있도록 세이칸에게 소원을 빌었다.
“가능하단다.”
“……가능한데 왜 진작 안 해주셨어요?”
처음부터 튼튼하게 빚어줬으면 폐하가 그렇게 아플 일도 없었을 텐데.
내 투덜거림에 세이칸은 내 손을 붙잡았다.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네가 있지. 지난 삶의 대부분을 칸드리얀의 씨앗과 보냈던 네 영혼이.”
세이칸은 내 왼손을 펼쳐 손바닥 위에 검지를 움직였다.
간지러움을 참기 힘들 때쯤, 얇은 선으로 그려진 무언가가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소환진에 적힌 것과 비슷한 글자와 기호로 이루어진 동그란 술식이었다.
세이칸이 마지막 선을 잇자, 술식은 환한 빛을 내며 내 손바닥으로 스며들더니 감쪽같이 사라졌다.
“신성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영혼에 맞춰 변화하지. 네게 준 새로운 신성력은 씨앗과 함께한 네 영혼에 맞춰 변화해 그 아이의 그릇을 안정시킬 거란다.”
***
……라는 세이칸의 말을 듣고 내 신성력을 묵힌 지 약 열흘.
사건의 발단은 데르아치의 처형일인 오늘 새벽, 막 자정을 넘긴 시각에 일어났다.
“폐하가 불면증이 심해졌다고?”
[응. 요즘엔 한 시간도 못 자고 일어나던데.]
나는 방으로 찾아온 주인님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보니아 군이 보관하던 볼프만의 어둠을 먹었다던 주인님은, 폐하에게 무리를 주지 않고 말할 수 있다며 종종 나와 대화하곤 했다.
오늘의 주제는 폐하의 불면증이었고.
“……가야겠어.”
[어디를?]
“폐하 침실에.”
사람한테 가장 중요한 게 수면 아닌가.
불면증을 어렸을 때부터 달고도 그 피부, 그 키……. 아니, 이게 아니라.
더는 폐하의 불면증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아, 아리? 한밤중에 무슨 일로…….”
“폐하! 제가 재워 드릴게요!”
“……뭐?”
그래서 폐하를 찾아가 침대에 눕히고 왼손바닥으로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세이칸이 그려준 술식의 효과는 대단했다.
너무 대단해서 문제였지.
“폐하가 안 일어나…….”
원래라면 데르아치의 영혼과 융합된 어둠을 해결하기 위해 폐하가 주인님과 함께 처형장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이렇게 잠자는 황궁의 미남같이 깊은 잠에 빠진 폐하를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마침 코아루의 우편을 받고 어떻게 하면 폐하 몰래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던 때라,
“주인님, 나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맛있는 거?]
주인님과 퓨를 데리고 황궁 밖으로 나갔지.
“침실 주변의 호위 기사들도 잠재우고.”
“그랬죠…….”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맞은편에 앉은 폐하가 오늘 내 행적을 줄줄 말해주는 중이었다.
다행인 건, 폐하의 화가 이렇게 말로만 끝낼 정도로 생각보다 덜해 보인다는 거였다.
‘크흡. 재울 의도는 아니었는데.’
‘심신 안정’, ‘긴장 완화’에 효과적이라던 세이칸의 술식은 폐하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효과적이었다.
“성녀님? 어디르……을.”
털썩.
“성녀님! 무슨 이……ㄹ.”
털썩.
몰래 나가려던 걸 카디얀한테 들키고, 수습하려다 술식으로 재우고.
그 장면을 또 다른 기사한테 들키고 재우고. 몇 번 반복하다 급기야는 헨켈 대장한테까지도…….
“덕분에 다들 오후까지 푹 자고 일어났지.”
어쩐지 아까 다들 피부가 반질반질하더라니. 푹 자고 일어나서 그런 건가!
라고 해맑게 말할 처지는 아니지. 내가.
나는 폐하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말했다.
“그래도 저 이제 엄청나게 강한데. 혼자 돌아다니는 거 걱정 안 하셔도 될 만큼.”
이래 봬도 세이칸에게 직접 신성력을 받은 몸이란 말이지.
신성력만 따지면 아마 세계관 최강자가 아닐까.
폐하 빼고 다 이길 자신 있다.
“…….”
폐하는 그런 나를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황궁에서까지 호위 기사가 붙는 건 불편하다고 했지.”
“어……. 지난번에 그렇게 말씀드리긴 했죠.”
“앞으로 황궁 내에서 원할 때는 혼자 다닐 수 있도록 해놓을게.”
“정말요?”
뜻밖의 횡재에 내 얼굴이 환해졌다.
호위 기사들이 좋긴 하지만,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게 조금 불편하긴 했는데.
“아리야.”
폐하는 헤실거리는 내 오른손을 붙잡았다.
“내가 걱정하는 건 네가 혼자 다니는 게 아니야.”
“폐하……?”
폐하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폐하, 혹시 지금 불안해하시는 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공포였어.”
“공포……요?”
나는 당황했다.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폐하의 말 때문이었다.
혼자 위험한 짓을 하러 간 나한테 화가 났을 줄만 알았는데.
공포라니.
“네가 날 떠났을까 봐. 너를 원래 세계로 보낸 날 용서하지 않았을까 봐.”
“네?”
이어진 폐하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원래 세계로 돌아간 거야, 폐하가 날 살리려 한 거였고.
내가 왜 폐하를 떠나! 죽을 때까지 붙어있을 건데!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내 말에 신뢰를 더하기 위해 폐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자 폐하가 상체를 숙인 뒤, 내 오른손을 본인 뺨에 갖다 대며 날 올려다봤다.
헙. 이, 이 각도 뭔데요……!
“나는 네가 날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질까 봐 걱정돼.”
날 담은 눈동자가 애절한 눈빛을 했다.
“네가 내 시야에 있었으면 좋겠어.”
폐하는 내 손에 자신의 뺨을 슬쩍 문지르며 내게 애원했다.
“다음에 어디 갈 때는 나도 데리고 가.”
“…….”
“아리야.”
으. 으으. 으으윽.
시차를 두고 훅훅 들어오는 공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호흡이 격해지고 폐하의 뺨에 닿은 내 오른손이 덜덜 떨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손은 폐하의 손을 붙들고 내 입은 호언장담을 하고 있었다.
“제가 폐하 두고 어디를 가요. 앞으로 제 옆에만 딱 붙어 계세요.”
아찔해지던 정신을 차리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말을 뱉어버린 뒤였지.
‘어디서 이런 무서운 스킬을……!’
이전보다 레벨업한 폐하가 이번에야말로 화사하게 웃었다.
“그래. 네 옆에만 붙어있을게.”
“으……. 네…….”
***
황제의 집무실.
“……?”
에본은 황제에게 넘길 서류를 확인하다 종이 한 장을 집어 올렸다.
내용을 확인한 보라색 눈동자에 일순 날카로운 빛이 돌았다.
‘양식만 적힌 빈 종이를 끼워 넣다니.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다른 이도 아니고, 황제 폐하께서 보실 서류에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에본이 종이를 쓰레기통에 버리려던 그때였다.
“재상?”
대각선 책상에 앉은 황제가 에본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황제의 푸른 눈이 에본의 손에 들린 종이에 닿아있었다.
“아……. 실수로 빈 종이를 끼워 넣은 모양입니다.”
“봐도 되나?”
안 될 리가.
에본은 곧바로 종이를 넘겼다.
알렌드는 [황궁 반입 허가 신청서]라 적힌 종이를 보다, 피식 웃더니 승인란에 황제의 인장을 찍었다.
“폐하, 왜 인장을……?”
옆에서 보던 에본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제 눈이 이상하지 않은 한, 그건 분명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였다.
알렌드는 서류들 사이에 인장을 찍은 허가증을 뽑기 쉽도록 끼워 넣고, 에본에게 대답했다.
“누구께서 이게 그렇게 갖고 싶으신 모양이라서.”
그렇게 말하는 알렌드의 눈에는 애정이 듬뿍 묻어나왔다.
요 며칠, 아리가 인장 반지를 노리고 있었다.
“오늘에야말로 반지를…….”
“뭐해?”
“으앗. 폐하 안 주무셨네요? 그냥 보고 싶어서요. 하하…….”
한밤중에 찾아온다거나, 일부러 손장난을 건다거나.
뭐에 필요한가 했더니, 자신 몰래 황궁으로 가져오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짓을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갖고 싶으시다는데 드려야지.”
알렌드는 삐져나온 종이의 귀퉁이를 슬쩍 매만지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엥……?”
회의 시간을 노려 폐하의 빈 집무실에 몰래 잠입한 나는, 곧장 초비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 작전이 정말로 성공했다고요?”
원래 몸으로 돌아간 초비가 반입 허가증을 들고 나타난 날 보며 황당하단 얼굴을 했다.
얼떨떨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성공할 줄이야.
“크흡. 허가증을 어떻게 받냐고오…….”
인장 반지를 빌리려고 별 방법을 다 써도 안 돼서 좌절하던 어제, 우연히 초비를 만났다.
“반지 말고 허가증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결재 서류들 사이에 몰래 끼워 넣었다가 인장만 받으면 되죠.”
“……초비, 그게 가능할까요? 폐하랑 재상님인데?”
“제가 실언했네요. 절대 불가능하죠.”
그래도 시도라도 해보자며 끼워 넣었던 게, 인장을 받아버렸다.
“에본 하이벤이 졸았나? 황제 폐하께서 조셨을 리는……. 없을 테고.”
초비가 혼잣말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왤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뭐든 어때.’
중요한 건 백지 허가증이 내 손에 들어왔다는 건데!
나는 초비에게 펜을 빌려 빠르게 빈 양식을 채워나갔다.
품목에는 조각상, 승인란에는 폐하의 인장.
크. 완벽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허가증은 성녀님께서 직접 전달을 못 하신다고 그러셨죠?”
초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정이 있어서요.”
황궁 밖에 가려면 우리 폐하를 데리고 가야 하는데, 폐하한테 조각상을 보여 줄 수는 없으니까…….
“그러면 저한테 주세요.”
“초비가 가줄 거예요?”
낯선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일에 초비가 자원을?
어리둥절해져 초비를 바라봤는데,
“아니요. 이 녀석이 갈 거예요.”
초비는 허공에서 무언가를 잡더니 아래로 휙 내렸다.
모습을 숨겨주는 망토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그 속에서 어색하게 선 허퍼슨이 내게 꾸벅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