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나를 알아?”
사내는 루를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어깨에서 일렁이는 검은 기운이 제 의지를 가진 듯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커졌는데.]
[그때와 달라.]
[우리가 이겨.]
그 소리에 루의 꼬리가 참을성 없이 살랑였다.
가지고 놀다가 먹을 생각이었지만, 저걸 당장 한입에 삼켜 버리지 않고는 못 배길 듯했다.
“갸옹.”
루의 짧은 울음소리가 신호탄이 됐다.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뻗어나가 루를 공격하고, 골목을 가득 메운 루의 커다란 그림자가 사내를 공격했다.
콰아앙.
굉음이 울리고 흙먼지가 일었다.
시간이 지나자 먼지가 가라앉고, 그 속의 광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컥, 컥.”
무너진 담장 옆에 착지한 루.
루의 그림자의 검은 꼬리가 사내의 목을 감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사내는 허공에서 발버둥 쳤다.
검은 기운이 목을 조르는 그림자를 뜯어내려고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내의 몸에서 당황스러움이 섞인 어둠들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째서?]
[왜 못 이기지?]
[넌 뭐야?]
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는 게 맞았다.
입에 고이는 침을 삼키느라 정신이 없던 탓이었다.
지상에서도 후각을 자극하는 농축된 신성력의 향기.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신성력자를 잡아먹고 다녔으면.
‘참을 수 없네.’
꽈악.
그림자의 꼬리에 힘이 더해졌다.
“커억…….”
눈깔이 뒤집히기 시작한 사내의 입에서 검은 물체가 튀어나왔다.
새로운 몸의 거부반응을 버티지 못하고 튕겨 나온 어둠이었다.
어둠은 스며들 수 있는 어두운 곳을 찾아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그곳이 쩍 벌린 짐승의 아가리 속인지도 모르고.
터업.
“키이익!”
닫힌 주둥이 속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났다.
꿀꺽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루는 위장에 들어간 어둠의 신성력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맛있었어?”
그런 루의 뒤로 갈색 머리의 아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맛있냐고?]
루는 되물었다.
성녀가 온몸이 떨릴 정도로 맛있는 걸 먹여준다고 해서 따라왔는데.
데르아치 몸에 들어가 있던 어둠이었다.
그것도 제가 십수 년 전 갖고 놀다 놓친.
[당연한 걸 물어.]
루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맛의 여운에 젖어 눈을 반짝였다.
“그러면 폐하 영혼 먹는 건 만 년 정도 기다려 줄 거지? 맛있는 걸 먹게 해주면 그러겠다고 했잖아.”
[흐음…….]
루는 뻔히 보이는 성녀의 속내에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인간이 얼마큼 사는지는 이제 나도 안다고.’
인간의 평균 수명은 고작 백 년 전후.
몸을 떠난 인간의 영혼은 그보다도 짧은 세월을 떠돌다가 어딘가로 사라지곤 했다.
루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아리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좋아. 만 년 정도 기다려 줄게.]
“정말?”
계약자의 영혼을 먹으면 성녀가 저를 상대해주지 않을 거 같으니.
그렇지 않으면 성녀랑 놀기 위해 지상에 남은 의미가 없었다.
“루는 파수꾼이래. 세이칸 님의 정원을 지키는.”
며칠 전.
원래 세계에서 돌아온 성녀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루의 머릿속으로 새로운 지식이 흘러들어왔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지식, 그리고 지하로 돌아가는 방법도.
“지하로 돌아가면 다시 나오지 못한다고? ……돌아갈 거야?”
아쉬워하며 물어보는 성녀를 보니, 갈 수가 있나.
제 영토가 세이칸의 정원이 되었다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안 들고.
[조금만 더 밖에 있다가.]
루는 꼬리를 살랑였다.
자신을 만들었다지만, 루는 세이칸의 얼굴도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
돌아가 봤자 따분할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엔 성녀와 계약자가 있는 이곳이 낫지.
더욱이 성녀가 자신을 ‘신수’라 소개한 덕에 인간들에게 떠받들어지는 것도 나름 재밌었다.
“그러면 이제 가자.”
아리는 쓰러진 사내의 숨이 붙어있는 걸 확인한 뒤, 몸을 일으켰다.
[어디로?]
루는 그렇게 물으며 자연스럽게 아리가 든 피크닉 바구니 안으로 들어갔다.
황궁 내에서야 신수 노릇을 하며 마음 놓고 돌아다닌다지만.
바깥에서는 검은 털이 눈에 띄니 이렇게 숨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퓨!”
바구니 안에 먼저 들어가 있던 퓨가 루에게 밟혀 항의하는 소리를 냈다.
루는 무시하고 뚜껑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황궁으로?]
“황궁은 이따가.”
[그러면?]
“후후……. 주인님, 내가 오늘 엄청난 일정이 있거든.”
아리는 꿍꿍이속이 있는 사람처럼 웃었다.
들뜬 것 같기도, 결연한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얼굴.
[일정?]
루의 질문에 아리는 설명할 틈 없다는 듯 급히 로브의 후드를 쓰며 말했다.
“급하니까 가면서 말해줄게. 폐하 몰래 나온 거라, 후다닥 해치워야 하니까.”
***
그래서 우리가 급하게 마차를 잡아타고 온 곳이 어디였냐면.
“오, 고객님. 어제 연락드렸는데, 빨리 오셨네요?”
천재 조각가, 코아루의 작업실이었다.
몇 달 동안 청소 한 번 안 한 듯 사방이 어지럽혀져 있었다.
마치 초비의 연구소장실을 보는 것 같았는데, 그게 뭐 대수인가.
나는 눈을 빛내며 코아루에게 물었다.
“조각상! 벌써 완성됐다고요?”
어제, 리리 이름 앞으로 우편이 하나 날아왔다.
3년은 족히 걸릴 거라던 폐하 조각상이 완성됐다는 소식이었다.
“네. 갑자기 나라가 이 모양이 되다 보니. 작업실에서 작업만 했거든요. 고객님께서 추가금을 두둑이 주셔서 빠른 마감을 위해 노력해 봤죠.”
코아루는 앞치마에 묻은 석회 가루를 털며 나를 작업실 중앙으로 안내했다.
“성녀님께서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네?”
그 말에 지레 찔려 되물었는데, 코아루는 흰색 천을 씌운 물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성녀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으면 제 희대의 역작이 빛도 보지 못하고 검은 땅에 녹아내렸을 테니까요.”
다행히 나한테 직접 하는 소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코아루는 자신만만하게 천을 벗겼다.
그러자 그 속에 숨겨졌던 엄청난 비주얼의 조각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쳤다.”
“마음에 드십니까?”
“당연하죠!”
1:1 스케일의 폐하 조각상.
따뜻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질감은 딱딱한 대리석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없었고.
머리카락 한 올, 눈썹 한 가닥마저 섬세하게 조각해 당장에라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듯했다.
게다가 조각상에서 느껴지는 후광과 위엄이라니.
내가 폐하 미모를 온전히 담을 수 있는 예술품은 영원히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한 오십 프로는 담지 않았을까……!
‘으……. 조각상한테도 설레.’
특히나 저 오묘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최고였다.
보고 있으면 빠져들어 갈 것 같달까.
치료계 신성석으로 눈동자를 표현해 달라고 하길 잘했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코아루에게 물었다.
“배송은 오늘도 가능해요?”
“아, 저……. 그 부분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코아루는 배송 이야기에 난감한 기색으로 더벅머리를 긁적였다.
“고객님께서 황궁으로 배송을 희망하셨잖습니까?”
“그랬죠……?”
“성녀님께서 돌아오신 뒤로 황궁으로 들어가는 물품의 검열이 심해졌답니다. 백 개 중 구십구 개는 다시 돌려보낸다더군요. 그래서 배송 기사들이 황궁으로 가는 의뢰는 아예 거절하는 상황입니다.”
“헛, 그러면 어떻게 해요?”
내 조각상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하는 눈으로 코아루를 바라봤다.
“황궁으로 배송이 가능한 기사를 찾을 때까지 무기한 연장될 듯합니다. 조각상의 운반은 전문 배송 기사들이 없으면 불가능하니까요.”
“아, 안 돼요!”
배송 때문에 무기한 연장이라니!
나, 나는.
‘폐하한테 조각상 선물하면서 프러포즈할 생각이었다고!’
내가 그리던 핑크빛 미래가 순식간에 와장창 무너졌다.
조각상이 없으면 폐하는 뭐로 꼬셔…….
사색이 된 내 모습에 코아루는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급하신 거면, 기다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긴 합니다.”
“뭐, 뭔데요?”
“이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말씀드리지 않은 것입니다만, 황제 폐하의 인장이 찍힌 반입 허가증이 있으면 가능하죠.”
“황제 폐하의…….”
코아루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나는 울상이 되었다.
내 프러포즈 계획에서 조각상이 황궁에 도착한다는 걸 몰라야 하는 유일한 사람이 폐하인데.
‘폐하의 허가증이라니!’
그건 서프라이즈가 아니잖아…….
“다른 분들은 안 되나요? 에본 하이벤 재상님이나.”
“오호, 재상님과 친분이 있으십니까?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허가증 외에는 안 된다더군요.”
크흡. 뭐가 이렇게 빈틈이 없담.
코아루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나를 보더니, ‘역시나 안 되겠지.’ 하는 얼굴로 말했다.
“고객님, 그냥 제가 운반 협회에 의뢰를-.”
“……갖다 드릴게요.”
“가능하십니까?”
“해 봐야죠.”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갖고 온다. 우리 폐하 인장 찍힌 허가증.
***
그건 나중 일이고.
코아루의 작업실을 나온 뒤, 프러포즈용 반지를 사러 보석상에 들렀다.
그러다 올리비아 씨를 만났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차 한잔 같이하시는 건 어떠세요? 제과점 일로 논의하고 싶은 것도 있고요.”
올리비아는 웃고 있었지만, 안색이 피곤해 보였다.
검은 땅 사건으로 가맹점 수가 꽤 줄어들었다더니, 그것 때문인가.
어쨌든 앙뜨완 제과점 일은 내 통장에도 직결되는 문제란 말이지.
“좋아요.”
그렇게 앙뜨완 제과점 본사로 가서 올리비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건물 밖으로 나오는데.
“으, 으악.”
나는 건물 앞의 풍경을 마주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호화로운 마차, 그 양옆으로는 황실 근위대 기사들.
그리고 그 앞에서 팔짱을 끼고 날 보는 청명한 푸른 눈동자가 있었다.
‘시, 심장아…….’
은발 폐하였다.
생각지도 못한 등장에 내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지.
“성녀.”
나 지금 갈색 머리인데…….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어서 망정이다.
아니, 사람 있었어도 폐하는 잘못 없어. 아무렴.
다정한 목소리에 오랜만에 식은땀이 흘렀다.
“연인은 재워두고 홀로 돌아다니시니 좋으신가 봅니다.”
“하하……. 잘 주무셨어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 내게, 폐하는 꽃처럼 환히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도망칠까.
폐하 화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