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133화 (133/150)

133화

“…….”

검은 땅의 경계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만났다.

폐하는 안쪽에서 말을 멈추고 말에서 내려와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가만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수호계 신성석을 말발굽에 박은 폐하의 말이 초원을 찾아 경계의 바깥으로 나올 때도. 폐하의 곁으로 온 변절자 한 마리가 까불다 폐하에게 영혼석을 베였을 때도.

……이러다 여기서 밤새우겠네.

“폐하. 그렇게 바라보시면 제 심장에 안 좋은데. 저 지금 한계라서요.”

“아리……?”

폐하가 중얼거렸다.

으. 이거지. 폐하 목소리 오랜만에 들었더니 내 고막 녹는다, 녹아.

“맞아요.”

“…….”

순간 폐하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나는 과거 몇 번이고 봤던 그 표정의 의미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폐하가 내게 죄책감을 느낄 때 짓는 그 표정이었다.

“내가…….”

“미안해요?”

내 기습 질문에 폐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귀여워…….’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숨기고 폐하에게 반 발자국 가까이 걸어갔다.

“멋대로 돌려보내서, 미안하죠?”

폐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을 인정하는 그 와중에도 폐하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신아리가 다시 사라지지는 않을까.’, ‘이게 허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시는 게 분명했지.

뭐, 폐하 만나면 물어볼 게 몇 개 있었는데.

“다 됐고요.”

나는 캐리어를 두고 경계를 넘어 폐하에게 다가갔다.

검은 땅이 사라진 초원 위에서, 폐하의 보호 결계가 해제됐다.

우리 폐하, 보호 결계 덕분에 갑옷 안 입어도 돼서 좋다니까.

나는 브로치를 단 폐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순순히 끌려온 폐하가 나와 눈높이를 맞춰 상체를 숙였다.

나는 그 눈을 바라보며 내 얼굴을 가까이했다.

“폐하.”

폐하의 호수같이 맑고 푸른 눈동자에서 내가 헤엄치고 있었다.

“미안하면 입이라도 맞춰주시던가요.”

머뭇거리며 다가온 입술이 내 입술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그러다 서로의 입술이 포개지고, 폐하가 내 허리를 감싸고, 나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한동안 이어진 입맞춤은 눈물 때문에 짠맛이 났다.

‘진짜 보고 싶었어요. 폐하.’

***

“가봐야 하지 않을까?”

언덕 위.

젠달의 기사들은 서로에게 숙덕였다.

황제께서 홀로 변절자의 군대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적이 멈췄다.

“두 시간 정도 지났지?”

“응.”

기적은 멈췄지만, 변절자의 군대는 계속해서 전진해오고 있었다.

이제 30분 정도가 지나면 이 언덕도 검은 땅에 무너질 터였다.

“폐하께서…….”

기사는 입을 다물었다.

‘실패’라 말하기엔 검은 땅 안의 상황을 알지 못하니 모든 것이 추측일 뿐이었다.

‘황제께서는 데르아치를 죽이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셨는가.’

‘실패하셨기에 기적이 멈춘 것인가.’

‘폐하께서는 살아계신 것인가.’

모든 의문과 걱정에 답을 내리기 위해, 당장에라도 말을 몰고 싶었지만.

군대 안에서 그런 개인행동이 가능할 리 없었다.

기사들의 시선이 말을 탄 채 둥글게 서 있는 일곱 사람에게 향했다.

진전 없이 악화만 되는 상황에 각국의 총사령관이 동맹군의 선두에 모였다.

황제를 믿고 기다리자는 의견이 반, 지금이라도 개죽음을 면하기 위해 도망가야 한다는 의견이 반이었다.

“흥! 겁쟁이들은 도망가게나! 나는 황제 폐하의 안위를 확인하러 가야겠으니!”

결국 좁혀지지 않는 의견에 슈벨첸 장군이 화를 내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황제의 뒤를 쫓으려 말 옆구리를 차려던 그때였다.

“저자는 누구인가!”

자신보다 먼저 언덕을 내려가 검은 땅으로 들어가는 이가 있었다.

“장군님! 황실 근위대의 헨켈 레바르튼 대장입니다!”

“헨켈인가! 질 수 없지!”

슈벨첸은 헨켈의 뒤를 쫓아 달렸다.

그 뒤를 카디얀이 쫓았고, 성녀교 기사들이 쫓았고, 젠달의 군대가 쫓았다.

결국, 헨켈을 선두로 젠달의 군사들이 모두 달려나갔다.

뒤에서 멀뚱히 있던 다른 나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을 따라갔다.

“따, 땅이! 다시 정화되고 있습니다!”

그 사이, 반짝이는 검은 물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디트리아 동맹군이 기적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변절자의 움직임이 느리고 불규칙하게 변했다.

데르아치의 통솔이 무너졌다.

“젠달의 황제가 성공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대기하던 신성력자들이 움직였다.

검은 땅과 변절자들 주위로 거대한 결계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젠달의 군사 중 보호 결계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 검은 땅 안으로 들어갔다.

“불 안에 뛰어드는 나방들도 아니고!”

다른 나라의 기사들이 경악했다.

이제 변절자만 가두면 한동안은 안전할 텐데, 왜 굳이 저 안으로.

미친 짓이었다.

와아아아아아!

그러던 중, 검은 땅 안에서 젠달의 군사들이 내는 듯한 엄청난 함성이 흘러나왔다.

“젠달은……. 정말 미쳐버린 건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때, 목청이 큰 자가 언덕에서 내려오며 쩌렁쩌렁한 소리로 외쳤다.

“결계 세우는 걸 중지하라!”

‘결계 세우는 걸 왜 중지하라는 거야?’

의문은 곧 해결됐다.

기적이, 드디어 경계 밖에 있는 이들의 시야에도 들어온 것이었다.

타고 간 말은 죄다 어디에 뒀는지.

검은 땅 안에 들어간 이들이 한 무리가 되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서서 젠달 황제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뭐야.”

검은 땅 경계 바깥에 선 샤를이 어이없다는 듯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황제고 기사고. 왜 죄다 울고 있어?”

울보 군대가 따로 없네.

“저거 보여? 델……. 국왕……. 아니다.”

여기도 울보가 있잖아.

그렇게 중얼거리는 샤를의 코끝도 붉게 물들어있었다.

마침내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을 정화한 성녀가 사람들의 앞에 섰다.

그 어떤 존재보다 찬란한 모습으로.

“다녀왔어요!”

***

폐하의 막사 안.

나는 캐리어에서 꺼낸 선물 꾸러미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신아리.”

“왜요.”

“신아리.”

“……?”

“아리야.”

“왜 자꾸-.”

부르냐고 하려던 나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저렇게 꿀 떨어지는 눈에 행복하단 얼굴로 날 보는 게 정녕 우리 폐하인가.

누가 우리 폐하한테 이런 눈 가르쳐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절 한 번 올리겠습니다.

“그렇게 좋으세요?”

“응.”

나는 꾸러미를 놓고 폐하에게 걸어가 품에 안겼다.

이제 청력이 일반인 수준이라 다른 사람 듣는 거랑 똑같을 텐데.

폐하의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고막을 가득 채웠다.

“폐하 심장 엄청나게 두근거리는데요? 이제 제 심장보다 폐하 심장이 더 큰일 난 거 아니에요?”

“그럴지도.”

뭐야. 왜 이렇게 솔직해.

기분 좋게.

나는 고개를 들고 씩 웃으며 폐하에게 말했다.

“폐하, 저 이제 몸 완전 튼튼해요.”

“그래.”

“세이칸 신이 이 세계도 멸망 안 한대요.”

“그래.”

우리 폐하, 못 본 사이에 어휘력이 좀 약해지셨나.

‘그래’ 밖에 못 하시네.

“뭐예요. 그래, 말고 다른 말도 해보세요.”

“사랑해.”

…….

윽. 내 심장.

방금 심장 한 번 멈춘 거 같은데……!

‘폐하 심장이 큰일 나긴 무슨.’

아직도 내가 더 큰일 났다.

“……그, 그렇게 훅 들어오지 마시라니까요.”

크흡. 세이칸한테 심장은 특별히 더 튼튼하게 만들어달라 부탁했는데, 의미 없어…….

“아, 맞다.”

그러다 고이 모셔둔다고 필름이랑 같이 보관해뒀던 초콜릿이 생각났다.

캐리어에서 안 꺼냈네.

“폐하한테 드릴 거 있는데! 제가 저 살던 곳에서 가져온 게 있거든요!”

나는 폐하의 품에서 벗어나 캐리어를 향해 걸어가려고-.

“어?”

했는데, 폐하가 내 뒤에서 어깨를 감싸 안고 날 다시 품에 가뒀다.

“왜, 왜, 왜요?!”

“나중에.”

“저거 생초콜릿이라 빨리 먹어야…….”

으아아…….

생초콜릿이고 뭐고.

폐하 머리카락, 내 목덜미에 폐하 머리카락 닿는데……!

결 좋은 폐하의 머리카락이 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내 눈동자가 절로 두꺼운 천으로 닫힌 막사 입구로 향했다.

집에 남친 데려와서 방문 잠겼나 확인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나는 이전의 신아리가 아니지.

‘후후…….’

나는 내 본능에게 코웃음 쳤다.

까불지 마라. 새로운 내 몸.

나는 이제 본능보다 이성이 앞서는…….

“돌아온 뒤로 단둘이 있었던 적이 없잖아.”

“그, 그렇죠?”

돌아오고 이틀이 지났다.

원래라면 바로 황궁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동맹군이 다 모인 곳이어서 그런가.

내게 인사하러 오는 사람들이 어마무시하게 많았다.

내가 머무는 폐하의 막사 앞에 대기 줄이 진영 끝까지 길게 생길 정도였다니까.

5분 정도 대화하면 그다음 사람, 또 그다음 사람.

무슨 영원히 계속되는 팬 사인회인 줄.

그러던 오늘 저녁, 폐하가 성녀의 건강이 걱정된다는 말로 사람들의 방문을 일체 차단했지.

어쨌든.

폐하도 옆에서 다정 버전 미소 짓고 있길래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거 괜찮은 줄 알았는데 말이지.

“아리야.”

아니었나 보다.

폐하는 낮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나 많이 참았는데.”

불끈.

뒤에 ‘둘이서만 이야기할 시간을…….’ 따위의 말이 붙었지만, 내 귀에 제대로 들어올 리가!

심지어 곧 밤이었다.

이제 아무도 폐하의 막사를 찾지 않는 이 타이밍.

막사 안에 폐하랑 단둘인 이 상황.

보통의 연인들이 할 법한 일을 해도……!

‘정신 차려! 신아리!’

머릿속에서 이성이 날 뜯어말렸지만, 새로 태어난 내 본능은 그깟 이성이 뜯어말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래, 짐승이면 어떤가.

우리는 충분히 성인이고, 연인이고……!

폐하가 쓸쓸한 어조로 ‘내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했어.’ 같은 말들을 하고 있긴 하지만…….

“폐하.”

나는 내 어깨를 감싼 폐하의 품에서 몸을 돌렸다.

“오늘……. 악.”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영문도 모른 채, 날 보고 있는 폐하의 얼굴이 나와 주먹 하나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오늘?”

윽. 외모 공격은 생각 못 했는데!

내 본능마저 눈이 부신다며 뒷걸음질쳤다.

나한테 손전등 판 아저씨가 우리 폐하 얼굴을 한 번 봤어야 했는데.

야간 경기장에 조명을 켤 게 아니라 폐하를 초청했어야 한다고!

“다들 백야 현상인 줄 알 게 분명…….”

“…….”

“……어?”

방금 뭔가가 내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는데.

관람석에서 자체 발광하는 폐하 모습 상상하느라, 무슨 일이 일어난 지 모르겠-.

다고 생각했는데.

어리둥절한 날 보며 피식 웃음이 터진 폐하가, 내 볼에 키스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생각해.”

“…….”

넌 평생 글렀다. 신아리.

짐승이면 뭐해. 폐하 뽀뽀 한 번에 심장이 이렇게나 뛰는데.

크흡. 내 평생 폐하랑 연인다운 신체접촉은 키스까지일 지도…….

“폐하.”

나는 눈물을 머금고 폐하의 양 볼을 감싸 쥐었다.

우리 폐하 왜 이렇게 말랐어. 밥 좀 잘 먹여야겠네.

“저랑 키스나 해요.”

“……뭐?”

“저랑 폐하는……! 앞으로 이것 밖에……!”

억울하니 이거라도 하자고요!

나는 고막을 쿵쿵대는 내 심장 고동을 무시한 채 폐하를 향해 까치발을 들었다.

“황제 폐하!”

그리고 막사 문 너머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젠장. 이제는 키스도 못 해. 흑흑.

나는 폐하의 볼을 놓고 폐하는 날 가둔 손을 풀었다.

“들어오게.”

폐하의 명이 떨어지자, 기사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인가?”

“데르아치가……! 임시 감옥을 지키던 기사들을 살해하고 사라졌습니다……!”

안 돼. 허퍼슨 몸.

폐하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