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오디트리아 동맹군은 낮고 넓은 언덕 위에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기다리는 중이었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다가오는 검은 물결을.
“재앙 같네.”
말을 탄 샤를이 중얼거렸다.
빠져나갈 곳도 없이, 변절자는 모든 땅을 검게 메꾸며 움직이고 있었다.
“아아, 신이시여.”
샤를의 근처에 있는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샤를은 속으로 조소했다.
세상이 이렇게 된 판에 아직도 신을 향한 믿음을 놓지 않고 있다니.
말고삐를 쥔 샤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이칸 신은 이 세계를 버렸어.’
저 인간도 그렇게 생각할걸.
샤를의 헤이즐넛 색 눈동자가 가장 선두에 있는 젠달의 황제에게 닿았다.
‘그러니까 저 인간답지 않게 그런 무식한 작전을 생각해 내지.’
불과 어제.
오디트리아 동맹군으로 참전한 각국의 대표가 모인 작전회의.
젠달의 황제는 미친 게 아닐까 싶은 소리를 작전으로 제안했다.
변절자의 군대를 뚫고 들어가 데르아치를 죽인다. 그런 뒤, 변절자들을 결계로 가둔다.
“오디트리아 대륙에 있던 변절자들의 땅. 그곳의 결계를 다시 재현한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결계야 가능하다 쳐도, 첫 번째 단계는 수백, 수천 번을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데르아치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변절자들을 상대하면서 데르아치를 죽인다니?
그 금빛 전차의 바퀴도 만나지 못하고 전사할 게 분명했다.
“그 역할을……. 누가 합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젠달의 황제가 대답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의 등장에 모두의 머리가 충격을 받은 듯 잠시 굳었다 풀어졌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작전에 희망이 한 줄기 감돌았다.
한자리에 모인 각 나라의 왕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륙은……. 멸망하지 않을지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젠달의 황제라면!”
희망은 이내 확신이 되었다.
황제는 데르아치를 물리칠 것이다.
대표들은 황제의 작전에 찬성했다.
“돌아오실 수는 있고요?”
보니아의 국왕과 함께 대표로 나온 샤를이 황제에게 물었다.
“돌아올 겁니다.”
거짓말.
황제는 죽으려는 거였다.
성녀를 보낸 뒤에 죽을 자리만을 찾고 있는 걸 모를 줄 알고.
‘짜증 나는 남자.’
성녀를 보낼 거였으면 말을 해줬어야지.
배웅도 못 했잖아. 나도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는데.
“무사히 돌아가셨다.”라는 말만 하면 다 되는 줄 아나.
샤를은 알렌드의 뒤통수를 쏘아봤다.
“성녀님은 잘 돌아가셨겠지?”
그러다 제 속을 읽은 것 같은 누군가의 말에 깜짝 놀라 옆을 돌아봤다.
회색 머리의, 제법 준수하게 생긴 젠달의 기사였다.
“카디얀, 아직도 그 소리야? 잘 돌아가셨겠지.”
“그러셨겠지만, 자꾸 성녀님이 생각나서. 거기서 우리 생각 아주 가끔이라도 해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기도라도 열심히 해 봐. 저기 듄처럼.”
“저기……. 두 분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어서 죄송하지만, 에드워드 부단장님. 듄은 원래 세계로 돌아가신 성녀님의 건강을 비는 겁니다? 저희 부대장님처럼 ‘제 생각도 해주셨으면~’같은 사심이 아니고요.”
“흠. 그건 또 몰랐군.”
“제윌 경……. 내가 언제 그런 어린애 같은 말투를…….”
“카디얀, 안 됐군. 성녀님께서는 황제 폐하 잊으시는 것만으로도 벅차실 테니, 자네 생각은…….”
“내가 잘못했다. 그만해.”
샤를은 투덕투덕하는 젠달의 기사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옆을 돌아봤다.
“델…….”
아니지.
“국왕 전하.”
샤를의 부름에 델칸이 고개를 돌렸다.
“어디를 갔었던 거야?”
“성녀와……. 시험의 미궁에 갇혔었어.”
“자세히 말해.”
“미궁에서 겪었던 일은 말하지 못하게 돼 있어서. 미안, 샤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델칸의 세뇌는 깨끗이 풀려있었다.
더욱이 그간의 불안정한 모습은 사라지고, 단단한 외피를 갖고 탈피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그렇기에 샤를은 델칸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기로 했다.
“피의 싸움에서 델칸이 이겼어……?”
“델칸의 어머니께서 그 고귀한 보니아의 피를 가진 직계혈족의 후손이셨거든.”
“샤를, 무슨 소리를…….”
“말했잖아. 루이드. 넌 평생을 노력해도 안 된다고.”
애초에 샤를이 필요한 건 제멋대로 굴어도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변하지 않을 권력이었다.
그깟 지루한 왕좌는 저보다는 꽉 막힌 델칸한테 딱 맞았다.
“전하께서는 성녀님을 뵙고 싶지는 않으신지요?”
사람들 앞에서 이딴 존댓말을 연기해야 하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델칸에게 높임말을 쓰는 저 자신이 어색해 샤를은 남몰래 몸서리를 쳤다.
“네 피가 더는 성녀를 원하지 않는다고? 어째서?”
“그것도 시험의 미궁과 관련된 일이라 얘기할 수 없어.”
델칸은 그렇게 고백했다.
샤를은 델칸에게 물었다.
“그러면 너는?”
“……나?”
“너는 성녀를 원하지 않니? 젠달의 황제와 함께 있는 성녀의 모습을 떠올려도 아무렇지 않냐는 말이야.”
“…….”
델칸은 입을 다물었지만, 그 표정을 보고 델칸의 마음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단단히 사랑에 빠졌네. 바보 같은 놈.
‘그러니까 초반에 성녀를 데려오자고 했을 때 협조했었으면 좀 좋았어?’
이미 지난 일이지만.
“누님.”
델칸이 샤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 성녀님을…….”
“성녀님!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외침에 델칸은 입을 다물었다.
어떤 멍청이가 전장에서 저딴 고함을-.
샤를은 고개를 돌렸다.
멍청이는 젠달의 기사 중에 있었는데, 그게 또 한 명이 아니었다.
“성녀님! 저희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잘 지내시죠!”
“거기에서는 아프지 않으십니까!”
샤를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무슨 짓들이야……?’
하늘을 보며 외치는 그 행동은, 금세 주위로 퍼져 나갔다.
젠달의 군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녀를 부르며, 안부를 묻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른 나라의 군사들이 죽음을 앞두고 저자들이 정신이 나간 게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들에게 시끄럽다, 그만하라 외치는 이는 없었다.
‘신께서 들으신다면…….’
작은 희망이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하늘에 닿기를.
목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이 대륙을 구원해주기를.
그때였다.
“저, 저기를 좀 보게!”
검은 죽음의 물결.
그 위에 햇빛이 반사된 것처럼 무수히 많은 빛이 반짝였다.
“은하수다.”
누군가 그 광경을 보고 말했다.
반짝이는 물결은 점점 위치를 달리하며 앞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은하수가 나타났다 사라진 자리에는 초원이 드리웠다.
검은색으로 빼곡히 칠한 종이의 윗부분에 푸른 물감으로 선을 그은 정도지만.
분명했다.
검은 땅이 정화되고 있었다.
변절자가 사라지고 있었다.
“…….”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모두 몸을 굳히고 눈만 끔뻑였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앞으로 달려나간 이가 있었다.
남자는 찬란한 금발을 흩날리며 말을 몰았다.
그의 뒤로 생긴 말발굽 자국이 마치 그가 흘리는 눈물방울 자국 같았다.
***
“와. 미쳤다.”
나는 걸어나가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에 감탄했다.
조금 전, 틈을 빠져나오고 변절자들이 보였을 때는 망한 줄 알았지.
“끄어어.”
“……끄어…….”
“으악! 변절자!”
오랜만에 보는 끔찍한 비주얼과 고약한 악취.
나 얘네한테 당해서 녹아내리는 거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 믿을 건 언제나 반지였기에, 나는 반지 낀 오른손을 변절자를 향해 내밀었다.
하지만.
“으아악! 왜 안 되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신성석의 신성력이 다한 건지, 내 새로운 몸을 주인이라 생각하지 않는 건지.
수호 결계가 펼쳐지지 않았다.
“안 돼, 여기까지 왔는데……!”
엔딩이 코앞이고, 에필로그가 코앞인데!
당장 결계를 내놓으라고 반지 낀 손을 마구 흔들었지.
그러다 바로 앞으로 다가온 변절자의 뺨을 내가 때려버렸다.
“악! 나 죽어!”
“끄어……어…….”
“어?”
죽은 건 내가 아니라 변절자였다.
마치 폐하가 변절자의 영혼석을 베어버렸을 때처럼, 변절자의 몸은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영혼석 마저 남지 않았다는 거였다.
“으어…….”
하지만 한 마리가 죽었다고 끝난 건 아니었지.
사방이 변절자였고 그 속에서 나는 그들과 다른 이방인이었다.
주변의 변절자들이 내게 몰려들었다.
나는 생각할 새도 없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변절자의 뺨을 좀 전과 똑같이 때렸다.
변절자는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그다음 변절자는 팔을 때렸다. 이번에도 변해 먼지로 사라졌다.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나는 내 손만 닿아도 변절자들이 먼지로 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뭔데.”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내 손을 바라봤다.
또 이러다 쓰러지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잠시 들었지만.
두통은커녕, 상쾌하기만 했다.
나 혹시 각성한 능력자 같은 게 된 걸까!
주변의 변절자들이 내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자, 그제야 내 발아래 풍경도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으악?! 검은 땅 위잖아!”
심장이 머리 꼭대기까지 솟았다가 발바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죽어버리나……!’
라고 생각했다가, 곧 이성을 찾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죽으려면 벌써 죽었어야 했잖아. 안 죽나 보다.
“이 반짝이는 건 뭐지?”
내 발 길이만큼의 굵기로 검은 땅 위에 빛으로 그린 선 같은 게 있었다.
예쁘다고 생각하며 슬쩍 발을 앞으로 내디뎠는데.
“이건 또 뭔데…….”
내 발을 따라 새로운 반짝이는 선이 나타나고, 뒤에 있던 선이 사라지면서 풀밭이 드러났다.
마치 덧입혀진 검은색을 지우개로 지우자, 아래에 있는 풍경이 모습을 드러낸 듯했다.
다시 한 발짝.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그 선 위에 있던 변절자들마저 검은 땅과 함께 사라졌다.
“…….”
나는 앞을 바라봤다.
하늘 외에는 모든 것이 검은색이었다.
나는 검은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 내 뒤로 초록색의 풀들이 바람에 흔들려 소리를 냈다.
초원, 여기는 초원이었구나.
‘재밌어!’
캐리어를 끌고 한참을 걸었다.
내가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폐하의 세상이 돌아오고 있었다.
‘폐하가 좋아하겠지?’
이제는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나랑 행복했으면 좋겠다.
정화되며 푸르게 바뀌는 선 한 줄, 한 줄에 폐하를 향한 내 소망을 담았다.
그리고 나는 검은 세상에서 내게 달려오는 내 세상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