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내 부탁에 세이칸은 테이블과 의자를 만들어줬다.
종이랑 펜도.
“그럼 시작할까요?”
서로의 동의하에 우리는 협상을 진행했다.
솔직히 협상이라고 할 것도 없었지.
내가 원하는 걸 말하면, 세이칸은 대부분 들어준다고 답했으니까.
이번 기회에 ‘하고 싶은 거 다 하나!’ 했는데.
“이게 일곱 번째예요.”
“그……래.”
소원 일곱 개를 넘어가면서부터 세이칸의 말끝이 떨려서, 얼른 마무리했다.
과도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지.
“……해서 모든 검은 땅을 정화하는 걸 마지막 소원으로 했으면 좋겠어요. 변절자를 모조리 없애주시는 것도 포함해서요.”
“칸드리얀의 씨앗을 되찾으면 모두 가능한 일이란다.”
“그러면 적어도 돼요?”
“그러렴.”
나는 신나서 펜을 움직였다.
신의 약속은 인간의 것과는 다른 거라, 내뱉은 것만으로 반드시 지켜진다지만.
한낱 인간인 나는 실물 계약서가 있는 편이 마음이 놓이니까.
세이칸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는 네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단다.”
“알아요.”
앗, 방금 대답은 조금 성의가 없어 보였나. 명색이 신의 말씀이었는데.
‘급한 마음에 그만.’
나는 서명란으로 향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세이칸이 생긋 웃었다.
“칸드리얀의 씨앗을 품은 아이야. 내 세계는 너를 중심으로 돌고 있단다.”
“……루를 탄생시킨 것부터 절 위한 운명이었다는 거죠?”
또 나왔다. 세이칸의 운명 이론.
듣는 건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세이칸이 무슨 얘기를 할지도 뻔하지.’
1. 세이칸의 지식을 일부 공유하는 주인님과 칸드리얀의 나뭇잎으로 빚은 아이가 계약을 맺었다.
2. 시간이 흘러, 아이는 성녀 소환진에 언제든 갈 수 있는 젠달의 황제가 되었다.
3. 세이칸이 칸드리얀의 씨앗을 품은 날 다른 세계에서 발견했다.
4. 세이칸은 날 데려오는 데 실패했다.
“세 번째의 대가는 컸단다. 잠에 빠지기 전, 네 영혼을 내가 빚은 몸에 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지.”
원래대로라면 세이칸이 지상의 소환진 술식을 수정하고 날 올려보냈어야 했는데.
“그걸 못하고 잠들어 버리셔서 저도 영영 못 깨어날 뻔했다는 거죠?”
영혼이 잠든 상태로 몸에 갇혀 있을 뻔했다나.
그랬는데 우연히도 그 시기에 소환진에 관한 세이칸의 지식이 주인님한테 흘러갔고, 폐하와 함께 소환진을 고쳐 날 소환했다, 이거였다.
세이칸이 감명받은 포인트도 바로 거기였고.
칸드리얀의 뿌리 사이에서 태어나고, 나뭇잎과 함께 빚어졌고, 씨앗을 품었던 이들이 만났다.
“그건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었지.”
고목 안에 잠들어 있었어도 세계의 상황은 창조주인 세이칸에게 흘러들어 갔다.
세이칸은 느꼈다고 했다. 이건 자신의 세계가 칸드리얀의 씨앗을 불러들이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거라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한 나는 더 큰 존재와 거래를 맺었다. 봉인된 힘을 조금만이라도 돌려준다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 영면에 들겠다고. 힘을 돌려받은 나는, 칸드리얀의 밖으로 나와 너희를 지켜봤지.”
“약초 가게 할머니가 돼서요.”
세이칸이 만든 완전치 못한 내 몸을 유지하기 위해 물약을 팔았다고 했다.
당시엔 내 몸을 고쳐줄 만큼의 힘은 없었다고.
여기서 궁금한 게 있었는데,
“왜 도중에 사라지신 거예요?”
“힘이 점점 약해져 칸드리얀 안으로 들어가야 했단다. 그리고 궁금하기도 했지.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내 세계는 어떻게 흘러갈지. 서로를 끌어당기는 너희의 운명은 어디까지 지속될지.”
크흡. 그놈의 운명.
물약 끊긴 것 때문에 우리 폐하가 얼마나 힘들어했는데.
‘폐하…….’
안 되겠다.
“나도 확신에 차지는 못했단다. 설마 하는 마음이었지. 하지만 너희의 운명은 원래 세계로 돌아간 널 다시 이곳으로 끌어당길 만한-.”
“세이칸 님.”
나는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감동적인 것도 알고, 벅찬 것도 알겠는데.
같은 이야기를 세 번이나 진득하게 듣고 있을 정도로 시간이 여유롭지 않다고.
‘빨리 폐하한테 돌아가야 한단 말이야……!’
나는 계약서를 들고 일어났다.
소원 하나, 신 ‘세이칸’은 칸드리얀의 씨앗이 든 ‘신아리’의 몸을 가져가는 대신 아주 튼튼한 그릇을 빚어준다.
이건 내가 소원으로 말하기 한참 전부터 세이칸이 칸드리얀 안에서 준비하던 일이었기에, 이미 내 새로운 몸은 완성돼 있다고 했다.
신성력을 아무리 써도 절대 깨질 일도, 금 갈 일도 없는 완벽한 몸이라 했지.
그럼 망설일 필요가 뭐 있나!
“이제 가져가세요.”
내 ‘빨리빨리’ 시전에 세이칸은 머뭇거렸다.
“내가 네 육체를 달라고 하긴 했지만……. 아이야, 너의 탄생부터 함께한 몸이란다. 미련은 없니?”
“세이칸 님께서 똑같은 외향으로 만들어주셨다면서요.”
그리고 내 미련은 ‘~할 시간에 폐하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볼걸.’ 같은 것밖에 없단 말이지.
나는 내 몸을 줄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데, 세이칸은 아직도 연민 가득한 청초한 얼굴로 망설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저런 미인에게 홀라당 넘어가 하루 정도 같이 고민하는 척했겠지만……!
“세이칸 님께서는 신이시라 시간에 여유가 있으실지 몰라도, 저는 남친과 함께할 1분 1초가 소중한 인간이라서요. 빨리 부탁드립니다.”
내 재촉에 세이칸은 내게로 다가오며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와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단다.”
“네? 씨앗만 가져가시면 되지, 굳이 저랑 시간을 보낼 필요가-.”
“내가 너를 좋아하거든.”
“……세이칸 님께서 저를 좋아하신다고요?”
“그렇단다.”
뭐지. 세계가 날 위해 준비한 깜짝 카메라인가.
신이, 그것도 다른 세계의 신이 왜 날 좋아하지.
나한테 이 세계에서 먹히는 나도 모르는 매력이 있나!
“……그러면 말이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수줍게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런 내 손에서 계약서가 바스락거렸다.
내가 이건 ‘다른 세계의 인간’이 세이칸한테 소원으로 들이밀기에 조금 염치가 없어서 말 못 하고 있었는데.
세이칸이 날 좋아한다면 용기를 내봐도 되지 않을까!
나는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세이칸에게 계약서를 펼쳐 보였다.
“저 아직 서명하기 전인데.”
“……?”
“소원 하나 더 적어도 될까요?”
“…….”
제가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하나 있어서요.
“이름은 알렌드야. 성은 레오디우스고.”
***
“만족하니?”
“완전요.”
세이칸의 물음에 나는 생기가 넘쳐흐르는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칸이 남은 힘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만든 육체였다.
솔직히 위화감이 하나도 안 느껴져서 다른 몸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전날 10시간은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은 이 컨디션. 최고다.
“아, 맞다. 이 몸도 시력이랑 청력이 뛰어나고 그래요?”
젠달에 있었을 때는 내가 그걸로 덕을 좀 톡톡히 봤었는데.
이번 몸은 더 엄청난 거 아니야?! 투시 능력이 생겼다거나, 그랬다거나……!
“그건 내가 준 능력이 아니란다.”
세이칸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러면요?”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네가 내 아이를 무척이나 좋아했기에, 무의식적으로 신성력을 사용해 신체 능력을 발전시킨 거란다.”
그러니까……. 내가 폐하 덕질하면서 얼굴 더 보고 싶고, 목소리 더 듣고 싶다 그랬다고 시력이랑 청력이 좋아졌다는 건가.
‘내 세계는 폐하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나 봐!’
세이칸의 운명론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루는 아까부터 안 보이네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세이칸과 나는 칸드리얀의 씨앗을 심기 위해 고목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주인님과의 재회를 기대했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지상에서 계약자를 돕느라 바쁜 모양이더구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뭐.
바깥은 지금 전쟁터니까.
“지상층의 상황이 궁금하다고?”
“네.”
“보여주마.”
세이칸이 보여준 광경은 끔찍했다.
대륙을 덮은 검은 땅, 변절자 군대, 이상한 모습으로 변절자를 이끄는 데르아치.
거기에 맞서 싸우는 생존자들. 그리고 수척해진 우리 폐하.
‘저게 뭐람.’
겉모습보다 더 엉망인 속이 훤히 보여서 울 뻔했다.
떠올리니 또 울컥하네.
슬쩍 눈물을 훔쳤다가 민망해서 괜히 다른 소리를 했다.
“그러고 보니 지상의 생명체는 지하에서는 먼지로 변해버린다면서요?”
“다른 세계를 만들 때, 내 정원을 지키려고 했던 방법이었지.”
“루가 신기해하더라고요. 폐하랑 저는 멀쩡하다고.”
“너희 둘은 내가 직접 빚은 그릇이니까. 그 아이는 몸에 들어간 칸드리얀의 나뭇잎도 영향을 줬을 거다.”
나는 세이칸이 소중히 품에 안은 씨앗을 바라봤다.
새로운 몸으로 바꾼 직후, 세이칸은 빈껍데기가 된 내 몸에서 저 씨앗을 꺼냈다. 내 원래 몸은 먼지처럼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이제 씨앗을 심으실 거예요?”
“그래. 그런 뒤에 지상과 이어진 모든 통로를 막고 내 정원과 함께 영면에 들 거란다.”
“주인님은요?”
통로를 막으면 주인님이 자기 영토로 돌아올 방법이 없지 않나?
내 걱정에 세이칸은 검지로 본인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 아이가 돌아올 방법은 그 아이가 알고 있단다.”
“그러면…….”
세이칸은 한 손으로 내게 포옹한 뒤, 내 어깨를 잡아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내 등 뒤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잘 가렴.”
등을 떠미는 느낌이 나고, 주위가 암전된 듯 어두워졌다.
어느새 내 손에는 캐리어 손잡이가 쥐어져 있었다.
바닥에 밝게 빛나는 선이 하나 있었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그 선을 따라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점차 빨라진 발은 어느새 뛰고 있었다.
‘이제 곧 만날 수 있어.’
폐하와. 그리고 모두와.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른 세계의 아이야.]
귓가에 신성한 세이칸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너를 축복한단다.]
뛰어가는 내 뒤를 따라, 세이칸의 정원이 새 생명을 피우기 시작했다.
[네 걸음은 생명을 되살릴 것이며, 땅을 치유할 것이다. 네 손길은 저주를 풀 것이며, 어긋난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선의 끝에 빛나는 틈이 보였다.
[아이야.]
나는 주저함 없이 그 찬란한 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네가 숨을 다하는 날까지, 네게 내 세계의 힘을 빌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