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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130화 (130/150)

130화

‘안 돼…….’

나는 사라지는 아기 폐하를 보며 절망했다.

다른 건 한참 보여주다가 이것만 이렇게 짧게 보여주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원통한 심정으로 고개를 돌리니, 할머니 한 분이 뒷짐을 지고 서 계셨다.

“아가씨, 정기 배송은 어뗘? 한 상자에 30골드인데.”

약초 가게 할머니.

아니, 정확히는 할머니가 아니라…….

“VVIP 대접이 너무 박한 거 아니에요? 세이칸 님.”

물약을 끊자마자 내 몸이 급격히 안 좋아졌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

내가 세이칸을 만나려고 지하로 온 거긴 하지만…….

폐하 성장 과정 조금만 더 보여주고 나타났어도 됐잖아요. 흑흑.

“알고 있었니?”

“그럼요…….”

이런 수상쩍은 장소에 세이칸 님 말고 나타날 존재가 더 있겠어요.

실망한 기색으로 중얼거리자, 할머니(세이칸)의 눈가 주름이 깊어졌다.

“네 말이 맞구나.”

그 말과 함께 세이칸의 모습이 달라졌다.

지금껏 풍경 속에서 움직이던 세이칸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헙. 미인.’

영화배우가 스크린을 뚫고 나와 내 앞에서 선 느낌이랄까.

실제라 생각하니 더 눈이 부신다.

종아리까지 내려온 은색의 약한 곱슬머리 때문인지, 신비로운 분위기가 한층 살아났다.

“안녕, 세 번째 성녀.”

“…….”

세상에. 폐하, 저렇게 아름다운 신이 나한테 인사했어요.

세이칸은 멍한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맑은 물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청량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동조하는 듯 아무것도 없는 주위에서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이거, 아까 나무 차려고 했을 때 들었던 소리잖아.

“역시 이 공간은 지하의 고목 안인가요?”

“그렇단다. 칸드리얀의 내부지. 내가 힘을 대부분 봉인 당해 칸드리얀의 바깥으로 나가는 게 쉽지 않거든. 그래서 너를 이곳으로 데려왔단다.”

세이칸은 그렇게 말하며 그리워하던 이를 만난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모든 것을 비출 듯한 투명한 은빛 눈동자였다.

“어……?”

순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이칸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야기가 도중에 끊겼구나.”

“도중이라면…….”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 남았거든.”

“설마.”

나는 두 손을 꼭 모았다.

설마 폐하 어린 시절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가.

그래, 내가 물약에 쏟은 금화가 몇 갠데!

이 정도 서비스는 해주겠지! 세이칸도!

“내가 지금의 황제를 빚기 몇백 년 전의 일이란다.”

……해주지는 않으시는군.

내가 실망하건 말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영상이 틀어진 화면이 여러 개 나타났다.

“어둠이네요?”

화면엔 모두 어둠이 등장했다.

세이칸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단다. 내 첫 번째 아이. 오랜 시간 동안 내게 용서받지 못하자 그 아이는 점점 변해갔단다.”

나는 영상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돌아오지 않는 세이칸을 그리워하며 신성력을 먹는 어둠, 흡수한 신성력으로 강해진 어둠, 신성력을 가진 인간을 노리는 어둠…….

그중 많은 신성력을 먹고 몸집을 불린 어둠이 말했다.

[이 세계의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면 세이칸 님께서는 날 사랑하실 거야.]

세이칸을 힐끔 바라봤다.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실 거예요?”

“그럴 일은 없을 거란다.”

세이칸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호했다.

‘퓨가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인가…….’

화면이 모두 사라지고 주변 풍경은 어두컴컴한 지하층으로 바뀌었다.

“이번에도 몇백 년 전인가요?”

“맞아. 지상에서 두 번째 성녀가 소환된 직후란다.”

고목, 그러니까 시들어버린 지하의 칸드리얀.

그 앞에 세이칸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왜 저렇게 기운이 없으셨어요?”

“칸드리얀의 씨앗을 가져오기 위해 네가 살던 세계에 두 번이나 개입한 대가를 받았거든. 나는 긴 잠에 빠질 예정이었단다.”

과거의 세이칸이 허리를 숙였다.

현재의 세이칸은 나와 함께 그런 본인을 바라보며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걱정이었다. 내가 잠든 사이, 네 세계를 볼 수 있는 봉인된 틈이 밖으로 드러날까 봐. 어둠이 그 틈으로 칸드리얀의 씨앗을 찾아낼까 봐.”

“어둠이 씨앗을 찾아내면 안 됐나요?”

“변한 그 아이는 칸드리얀의 씨앗을 증오했거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씨앗을 담은 육체를 없애려 했을 거다.”

“없앤다면…….”

“인간은 죽고, 씨앗은 대지에 스며들어 잠이 들었다가 다시 다른 인간의 육체에 깃들게 되지.”

세이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떨어졌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움직임이었다.

세이칸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정원을 지킬 파수꾼을 만들었다.”

지면 위에 튀어나온 칸드리얀의 마른 나무뿌리 사이. 척박한 땅 위에 막 태어난 작은 생명이 하품했다.

앙증맞은 몸으로 똬리를 틀고 자는 그 모습은 나에게도 익숙했다.

“주인님?”

세이칸이 내 혼잣말을 듣고 웃었다.

“너는 그렇게 부르더구나. 그 아이는 ‘루’라고 부르던데.”

그 아이가 혹시 제가 아는 그 곤란할 정도로 제 취향인, 잘생긴 남성분인가요.

크흡. 우리 남친 얼굴 떠올렸더니 눈물이 아른거리네. 살 더 빠지신 건 아니겠지…….

폐하, 조금만 기다려요. 세이칸 님 말씀이 아직 안 끝나서요. 흑흑.

“어둠을 잡아먹고, 내 지식의 일부를 공유하는 존재지.”

“주인…… 아니, 루가요?”

“그렇단다. 그 아이가 네 신성력을 좋아하지 않았니?”

환장했죠.

만년도 기다려서 잡아먹고 싶다고 할 정도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이칸은 다정히 미소를 지었다.

“칸드리얀의 뿌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 네게 끌린 거지. 칸드리얀의 잎사귀를 담은 지상의 아이와 계약을 맺게 된 것도 그 이유고.”

“……루가 폐하에게 끌린 건 그렇다 쳐도 저는 왜요?”

“모르는 척하는 거니?”

내 쪽을 보며 말하는 세이칸의 질문했다.

나는 시선을 피했다.

“다른 세계의 아이야.”

하마터면 입 열 뻔.

세이칸이 날 부르자, 또 내 명치에서 따뜻한 기운이 퍼지며 가슴이 일렁였다.

마치 그 부름을 오랜 세월 기다린 것처럼.

“칸드리얀의 씨앗은 지금 네 육체에 있었단다.”

“으아아아……!”

나는 세이칸이 말한 것과 동시에 소리를 냈다.

“아이야?”

“전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못 들었는데요.”

모르고 못 듣기는 무슨.

할머니 모습의 세이칸이 나타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칸드리얀의 씨앗이 든 내 육체를 틈으로 발견하고, 이 세계로 데려오려다 또 영혼밖에 못 가져온 거겠지.

그래서 내 영혼은 신성력 쓸 때마다 HP 팍팍 깎이던, 세이칸이 만든 개복치 몸에 들어간 갔고.

원래 세계에 남은 내 몸은 1년 동안 병원에 누워있었지.

‘칸드리얀의 씨앗을 품은 채 말이야.’

그러다 소환진을 통해 돌아간 내 영혼이 다시 그 몸으로 돌아왔고.

수호의 반지로 씨앗을 품은 내 몸을 가지고 이 세계에 돌아온 거라는 거.

나도 알지, 알겠는데-!

‘다시 그 개복치 육체로 돌아갈 수 없지……! 폐하가 살아있는 한, 건강한 내 몸은 절대 못 내놓는다고!’

“그래서-.”

하필 다짐하는 그 타이밍에 세이칸이 입을 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제 몸은 못 준다고요! 신이면 다냐! 이 날강도야!”

“……”

“아, 아니. 뒷말은 취소…….”

***

[날강도.]

황제의 막사 안.

대화 도중, 루가 뜬금없이 저런 소리를 내뱉었다.

알렌드는 말을 멈추고 루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지?”

루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몰라. 갑자기 그 단어가 떠올랐어.]

“……지금 하는 건 중요한 이야기라 말했을 텐데.”

[흥. 다 듣고 있었다고. 네가 데르아치를 죽이면 거기서 나올 어둠을 삼켜버리리라는 거잖아?]

“그래.”

알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가 어둠을 먹으면 통솔이 풀린 변절자들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길 테고.

그 틈을 타 준비한 수호계 신성석과 신성력자들로 변절자들을 가둘 새로운 결계를 세울 계획이었다.

오디트리아 대륙은 이제 70%가 검은 땅으로 먹혔다.

남은 대륙을 살리기 위해선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루는 책상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앞발을 핥으며 물었다.

[그런데 괜찮겠어? 변절자의 무리에 혼자 뛰어든다니. 아무리 너라고 해도-.]

“죽겠지.”

알렌드는 덤덤히 말했다.

제 삶의 끝을 그리기 시작한 지 오래였기에,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계약자의 죽음 예고에 루가 눈을 크게 떴다가 눈매를 좁혔다.

[나야 아무래도 좋지만.]

성공하면 그만큼 신성력이 농축된 어둠을 먹을 것이고.

실패해도 계약자의 영혼은 제 것이 될 터였다. 어쩌면 둘 다 먹을 수 있을지도.

뭐든 저한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루의 생각과 달리, 검은 꼬리가 상황이 못마땅한 듯 책상을 몇 번 쳤다.

왜인지 입맛이 뚝 떨어졌다.

[성녀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그랬더라면 네가 이런 생각을 할 일도-.]

“루.”

알렌드는 막사 안에 쳤던 방음 결계를 해제했다.

대화의 종료를 의미했다.

그는 공허한 눈으로 루를 응시했다.

“내 죽음에 무슨 문제라도.”

[……없어.]

쳇. 바보 같은 계약자.

***

“하나 더요.”

“……또?”

내 말에 세이칸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나는 양손을 펼쳐 손가락을 하나씩 접던 걸 멈추고 세이칸에게 말했다.

“제 몸을 드리는 건데 이 정도는 받아야죠. 게다가 앞에 성녀들 소원은 다 들어주셨잖아요. 저는 세이칸 님이 바로 잠들어 버려서 얼굴도 못 보고 젠달로 내려갔는걸요. 그러니 방치된 정신적 피해보상이랑, 씨앗의 가치랑…….”

“다른 세계의 아이야.”

세이칸은 나를 불렀다.

어째 주인님 만들 때 봤던 모습보다 더 지친 기색이었다.

“확실히 하자꾸나. 그래서 들어줬으면 하는 소원이 몇 개니?”

드디어.

세이칸이 소원과 내 몸을 바꾸자는 제안에 덥석 물렸다.

나는 씩 웃었다.

“일단 종이랑 펜 갖고 와서 얘기 시작해볼까요?”

이런 건 계약서로 확실히 해야 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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