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그곳을 동경하는 건 좋지만, 내 세계도 신경 써 주겠니? 칸드리얀의 잎사귀가 떨어졌더구나. 나무의 관리를 네게 맡겼는데.”
“하지만 여기는 지루해요.”
그것은 툴툴거렸다.
“세이칸 님은 왜 스스로 움직이는 걸 창조하지 않으세요?”
“그런 걸 다스리는 건 피곤한 일이니까.”
“절 사랑한다면 해주세요.”
세이칸은 그것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몇 개의 생명체를 만들었다.
거대하거나 날개가 달렸거나 하는, 이런저런 형태의 생명체였다.
주인님이 지능이 낮은 놈들이라며 질색하던 변절자들의 사역마 같은 모양새였다.
내가 보는 풍경이 바뀌었다.
그것은 다시 세이칸을 찾아왔다.
“그 세계에 두 발로 걷는 존재가 나타났어요! 불이란 걸 사용해요! 세이칸 님은 왜 그런 존재를 창조하지 않으세요?”
“첫 번째 아이야. 나는 지금도 만족스럽구나.”
“제가 그렇지 못해요. 절 사랑한다면 해주세요.”
이번에도 세이칸은 그것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다만 본인의 정원을 어지럽히는 건 내키지 않는다며 자신의 세계 위에 또 다른 세계를 만들었다.
“세이칸 님, 무엇을 심고 계시는 건가요?”
“칸드리얀의 씨앗이란다. 이 세계의 땅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아이지.”
세이칸이 새로운 세계에 심은 씨앗은 금세 자라 거대한 나무가 됐다.
그것은 감탄했다.
“이제 지상에도 칸드리얀이 뿌리를 내렸네요! 마치 세이칸 님의 정원처럼요!”
내가 꿈에서 봤던 그 나무였다.
나무가 잎사귀를 맺는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세계는 색을 띠고 생명을 품을 준비를 마쳤다.
세이칸은 지상에 동식물을 창조하고 인간과 같은 존재를 창조했다.
“만족하니?”
“네. 너무 아름다워요.”
그런 뒤, 내가 보는 풍경이 또다시 바뀌었다.
세이칸의 정원에서, 세이칸은 그것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칸드리얀의 씨앗을 다른 세계에 던져 넣다니!”
“세이칸 님, 잘못했어요. 하지만 다른 세계의 인간들이 배고파하고 있었어요. 가뭄으로 땅이 갈라져서 먹을 게 없다고-.”
쩔쩔매는 그것의 뒤에는 틈이 하나 있었다.
틈 사이로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부족사회의 문명을 가진, 내가 살던 세계의 과거 풍경이었다.
“씨앗은 어디서 구했니.”
“정원에 있는 칸드리얀의 뿌리에서 파냈어요. 일전에 세이칸 님께서 하신 것처럼요.”
그것은 옆에서 보고 배워 행동한 자신이 퍽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아아, 첫 번째 아이야.”
세이칸은 탄식했다.
“지상에 만들어준 인간들로는 만족할 수 없었니?”
“하지만 제가 사랑한 것은 저 세계였는걸요.”
“너는 네가 사랑하는 것을 품으려고 내가 사랑하는 것을 잃게 했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세이칸 님?”
“네가 마지막 씨앗을 그 세계에 줘버렸으니 이제 내 정원은 더는 생명을 품지 못한다.”
그 말과 함께 세이칸의 정원은 메말라갔다.
물이 마르고, 식물이 시들고, 빛이 꺼졌다.
마치 주인님의 영토 같은, 지금의 지하층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그것은 그제야 세이칸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세이칸 님.”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하겠느냐.”
“그러면 절 용서해주시는 건가요?”
세이칸은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너를 저주한다.”
“네?”
“네 모습은 네가 사랑해서 만든 인간들에게 저주의 증표가 될 것이며, 죽음을 몰고 오는 존재가 될 것이다. 네 몸은 조각나 아무도 너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며, 나는 너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눈물도 흘리지 못하는 얼굴로 엉엉 울었다.
“가혹해요.”
“네가 내게 한 짓이 더 가혹하단다.”
“세이칸 님, 저를 사랑하지 않으세요?”
“사랑하지 않는단다. 네 울음마저 더는 내게 닿지 않을 만큼.”
세이칸은 그것을 두고 메마른 정원을 떠났다.
홀로 남은 그것은 점점 본래의 모습을 잃고 거대한 어둠으로 변해버렸다.
거대한 어둠은 아주 작은 어둠들로 나뉘어 형태를 잃고 무너져내렸다.
작게 변한 어둠들은 하나둘씩 세이칸을 찾아 정원을 떠났다.
[세이칸 님.]
[어디 계세요?]
[다시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게요.]
[저를 다시 사랑해주세요.]
***
데르아치는 변절자들이 끄는, 보호 결계가 둘린 금빛 전차에 앉아있었다.
‘이상하군.’
자아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데르아치는 자문했다.
자신이 변절자들의 군대를 원했나?
‘아니다.’
자신이 이 세계의 멸망을 원했나?
‘그 또한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누구보다 높이 올라가고 싶었지만, 이런 것을 원한 건 아니었다.
[무엇을 그렇게 고민해?]
[넌 우리가 말해준 대로만 하면 되는데.]
[지금도 그렇게 원하던 왕이 되었잖아?]
[변절자들의 왕.]
그의 영혼과 융화된 어둠들이 키득거렸다.
시끄러운 놈들.
“닥쳐라.”
그의 말에 어둠이 잠잠해졌다.
‘그렇지. 기생충 같은 것들이 내 말을 거스를 수는 없지.’
제 영혼의 주인은 저였다.
이 몸의 주인 또한 저였고.
‘착각인가.’
그래, 자아가 흔들린다는 건 제 착각인 모양이다.
변절자들의 검은 땅이 퍼지는 것은 세계의 멸망이 아니다.
변절자들의 왕인 자신의 영토를 늘리는 것이지.
이 세계의 모든 것이 검은 땅으로 물들었을 때야말로.
“내가 모든 것의 정점에 서 있을 때니.”
데르아치는 제 머리에 올려진 황금관을 매만졌다.
멍청한 데르아치.
어둠들이 조용히 조롱했다.
“퓨…….”
전차 바닥의 작은 새장.
그 속에 갇힌 퓨가 시무룩한 소리로 울었다.
***
“…….”
어둠의 시초를 보여준 뒤로도, 세이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칸드리얀…….”
세이칸의 세계를 지탱하는 나무, 칸드리얀.
그 칸드리얀의 생명을 유지하는 게 두 개의 씨앗이었다.
세이칸이 지상에 심은 건 둘 중 힘이 약한 씨앗.
“지상의 한 그루만으로 세계를 지탱할 순 없어.”
그렇지만 지상의 한 그루마저 시든다면 세계는 멸망할 터였다.
세이칸은 남은 칸드리얀을 지키기 위해 인간들에게 자신을 드러냈다.
칸드리얀을 보호하는 튼튼하고 거대한 지하 미궁을 만들고, 문지기를 세웠다.
세이칸은 지상에 올라와 가장 처음 만난 인간 부부에게 이곳에 왕국을 세우고 지하 미궁을 지키라 명했다.
“따르겠나이다.”
그렇게 보니아 왕국이 세워졌다.
왕국을 강대하게 만들기 위해 인간들에게 자신의 힘을 나눠줬다.
그렇게 몇몇 인간이 신성력을 갖게 되었다.
신성력은 신을 찬양하고, 두려워하고, 따르게 했다.
세이칸은 더 많은 인간에게 신성력을 내렸다.
‘역사 영화 보는 거 같네.’
나는 하품을 하며 세이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예쁘긴 예쁘다고 생각하던 중,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씨앗을 찾았다.”
틈 사이로 다른 세계를 유심히 관찰하던 세이칸이 눈을 빛냈다.
세이칸의 시선이 닿은 건,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여자였다.
씨앗은 여자의 몸속에 있었다.
[다른 세계의 어린 신이여, 내 세계의 인과율을 망치지 마십시오.]
세이칸은 씨앗이 담긴 여자의 육체를 원했으나, 거절당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어 여자를 제 세계로 데려오려 했다.
다른 세계의 인과율을 건드린 대가는 세이칸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영혼만 남았군. 실패야.”
만신창이가 된 세이칸 앞에 여자의 영혼이 서 있었다.
“……이곳은 어디인가요? 전 분명 검에 맞아 죽었는데.”
“내 실수다. 네게 새로운 육신을 주마.”
하나 인과율의 반동으로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
세이칸은 다른 세계의 영혼을 담을 그릇을 완벽히 만들 수는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신성력을 넣어 육체의 불완전한 부분을 잇고 그 속에 영혼을 넣었다.
“너를 내가 만든 세계에 내려보낼 거다.”
“그곳의 인간들이 절 안 좋아하면 어쩌죠?”
“그렇다면 왕의 핏줄이 널 사랑하게 해주마.”
그런 뒤 세이칸은 보니아 왕국에 소환진을 내려 여자를 소환토록 했다.
“성녀님께서 소환되셨다!”
인간들은 신이 축복을 내렸다며 기뻐했다.
여자는 초대 성녀가 되었다.
세이칸은 다시 씨앗을 찾았다.
두 번째도 검은 머리의 검은 눈을 가진 여자였다.
씨앗이 담긴 육체를 가져오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영혼만 넘어왔다.
“너를 내가 만든 세계에 내려보낼 거다. ……원하는 것이 있니?”
“네. 저를 상처 입히는 사람들이 상처받기를 원해요.”
“그런 인간들이 있다면 저주를 받게 해주마.”
여자는 새로운 육체를 받고 두 번째 성녀가 되었다.
‘……나도 저런 식으로 온 건가?’
나는 슬쩍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거, 원래 내 몸 맞겠지…….
그러는 사이, 풍경이 바뀌었다.
세이칸이 다른 세계의 인과율에 두 번이나 개입한 대가는 컸다.
세이칸은 신들보다 더 큰 존재에 의해 상당한 양의 힘을 봉인 당했다.
“내 정원을 되찾고 싶어.”
세이칸의 눈물이 지하의 고목나무에 떨어졌다.
환한 빛의 잎사귀 하나가 그 자리에 자라났다.
세이칸은 그것으로 아이를 빚어 지상으로 올려보냈다.
선한 인상의 한 여자가 아이를 주웠다.
여자는 아이를 자신과 함께 사는 아이들에게 소개했다.
“이름은 알렌드야. 성은 레오디우스고. 과거 영웅의 이름에서 따왔지.”
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 어릴 때부터 완성된 이목구비…….’
설마 이다음도 보여주나.
그러면, 그러면…….
‘폐하 어린 시절!’
헤이즐이 항상 자랑하던!
주인님에 심지어 데르아치까지 본!
폐하의 어린 시절을 내가 볼 수 있는 건가!
“미쳤-.”
“이야기는 재밌었니?”
아.
세이칸 님은 이따가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