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헨켈은 장군 슈벨첸과 이야기를 마치고 사령관 막사로 들어왔다.
열띤 회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테이블 앞에, 황제가 앉아있었다.
“…….”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세우고 턱을 괸 황제.
소매 위로 보이는 팔은 그새 손목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랐다.
“성녀를 원래 세계로 보내드려야겠네.”
“하오나, 폐하. 성녀님은-.”
“경도 알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라면 성녀께선……. 붙잡는 건 우리의 욕심일 뿐이네.”
성녀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했고, 황제는 결정을 내렸다.
성녀를 돌려보낸다는 소식이 황궁에 퍼졌다.
다음과 같은 명령도 함께.
“성녀께서 깨어계실 땐 그 누구도 이 일을 아는 척해선 안 되네.”
그렇게 고된 훈련 뒤에 맞는 잠보다, 긴 갈증 끝에 마시는 물보다 달고 애달픈 나날들이 평소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마치 이 땅에 처음 온 그날처럼, 성녀는 원래 세계로 돌아갔다.
“성녀님께선…….”
“가셨네.”
헨켈은 그날 황제의 그런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다.
모든 것이 멸망한 땅 위에서, 소중한 이들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자가 짓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날 이후로 황제는 감정 없는 고목처럼 메말라갔다.
성녀가 있었을 때와 달리 밥을 먹고 잠을 잤다.
황제의 업무도 문제없이 해냈으나, 마치 끝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폐하.”
헨켈의 부름에 황제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
살이 빠져 이전과 달리 날카로운 인상의 눈매였다.
성녀님께서 보셨으면 안쓰러워하셨겠군.
헨켈은 씁쓸한 마음을 무덤덤한 얼굴로 감추며 입을 열었다.
“바롬 왕국의 생존자들은 슈벨첸 장군이 대피소까지 인솔하기로 했습니다.”
변절자들의 군대가 결계 밖으로 나왔다.
사령관은 데르아치.
변절자들의 땅과 인접한 바롬 왕국이 맞섰으나, 무서운 속도로 잠식하는 검은 땅에 바롬 왕국은 속절없이 멸망했다.
그뿐인가.
놈들은 밖으로 나온 지 불과 나흘 만에 오디트리아 대륙의 반을 검게 물들였다.
이제 남은 것은 젠달과 보니아 왕국. 그 외 6개국이었다.
“헨켈 경.”
황제는 진중한 모습으로 제 곁을 지키고 있는 헨켈을 불렀다.
“네.”
“자네와 한 약속을 못 지키게 되었군.”
헨켈과 황제가 맺은 충성 계약은 끊겼다.
재계약을 맺지는 않았다.
하지만 헨켈은 여전히 황제의 곁에 있었고, 황제 또한 헨켈의 꿈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세계는-.”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모두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사실이었다.
이 세계는 끝날 것이란 걸.
세이칸 신의 기적은 나타나지 않고, 인간만이 남았다.
황제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췄다 한들, 세계를 구원할 수는 없었다.
“제국은 이미 바뀌었습니다.”
헨켈은 낮고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신성력으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은 보지 못했으나, 그의 제국은 바뀌었다.
이전의 자신은 몰랐을 터였다.
제겐 언제나 삭막하기만 했던 젠달이, 이토록 따뜻한 빛으로 채워질 수 있는 곳이라는 걸.
황제와 함께하고 나서부터, 그리고 그분이 나타난 뒤부터.
헨켈의 제국은 두 번 달라졌다.
“그러니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헨켈은 마음을 다해 말했다.
얼마 남지 않는 세계의 끝을, 황제와 함께 보리라 다짐했다.
“……바삐 움직여야겠군.”
알렌드는 그런 헨켈을 응시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조금이라도 그 끝을 오래 보려면.”
***
“아야.”
병원 옥상 난간에서 떨어진 나는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의자에서 떨어진 것 같은 약한 통증이 전해졌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달라진 주위 풍경에 감탄했다.
“진짜 왔잖아.”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사역마의 입에 먹혀 지하로 떨어졌던 그날처럼.
칸,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주인님은 없나?”
내가 온 장소는 그 위대하신 칼리……어쩌고 님의 영토인데.
지난번 변절자가 왔을 때처럼 달려오지 않는 걸 보면 바깥에 있는 모양이었다.
“폐하랑 같이 있으려나. 으. 나도 폐하 보고 싶다.”
너무 오래 못 봐서 혈중 폐하 농도 떨어졌다니까.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나는 바닥에 앉아 캐리어를 열었다.
“……역시 한 개만 살걸.”
나는 캐리어에서 손전등 두 개를 꺼냈다.
“이게 제일 밝아요?”
“그렇다니까. 야간 축구 경기하는 거, 그거 조명 수십 개 가져다 놨자 다 낭비라니까. 이거 두 개면 상대편 골대에서 골키퍼가 코 파는 것까지 다 보이는데.”
“두 개 주세요.”
크흡. 젠달에서 플렉스 하던 습관이 그때 발휘될 건 뭐람.
덕분에 폴라로이드 필름 한 팩을 포기해야 했지.
“기왕 지나간 거 좋게 생각하자. 신성력이 없으면 현대 문명에라도 빌어야지.”
딸깍.
그래도 못 산 필름 한 팩이 아른거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쓰린 마음을 붙잡고 손전등의 전원을 눌렀다.
그래도 비싼 값은 하려는지, 순식간에 가로등 하나 킨 것처럼 주위가 환해졌다.
그런 내 앞엔 거대한 고목나무가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엄청 크네.”
나는 천천히 나무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나무 몸통을 손전등으로 비췄다.
내 가설에 따르면 이건 분명…….
“세이칸 나무.”
지난번에 봤을 때 왜인지 익숙한 느낌이 든다 했는데.
꿈속인가 어딘가에서 봤던 화려한 나뭇잎을 가진 커다란 나무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그래서 가설을 하나 세워봤지.
화신체인 나무가 말라버려 세이칸이 힘을 못 쓰고 있었다면?
그래서 데르아치가 변절자 우리 같은 걸 만들어서 난장판을 치는 데도 가만히 있었던 거라면?
증거는 없지만, 설득력만큼은 있는 내 가설에 내가 소름이 다 돋더라니까.
그래서 직접 확인한 후에, 만약 내 가설이 맞는다면 세이칸이랑 결판을 지어보려고 여기로 온 건데.
“어떻게 확인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그때는 어떻게 했더라.
나는 가물거리는 지난 기억을 되짚어봤다.
세이칸한테 방치된 게 화가 나서 발로 한 번 찼다가.
하소연 좀 했다가.
‘돌아가’란 말을 듣고 쫓겨났었던 거 같은데.
“그러면 차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나.”
시작이 반이라고, 일단 기억나는 대로 나무를 차보기로 했다.
“두 번 찰 일 없게 한 방에 확실하게 끝내야지.”
나는 오른발을 최대한 뒤로 뺀 뒤, 나무 몸통을 힘껏 찼다.
아니, 차려고 했다.
촤아아아아-.
말라비틀어진 고목 나무밖에 없는 이곳에서 나뭇잎 스치는 소리라니.
[여전히 과격한 아이구나.]
낯선 목소리와 함께 오른발이 닿은 나무의 몸통이 푹하고 꺼졌다.
“으앗…….”
그리고 발 디딜 곳이 사라진 나는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져, 나무 몸통 안에 생긴 공간으로 떨어졌다.
***
여긴 어디야?
라고 혼잣말하려다 깜짝 놀라 입을 뻐끔거렸다.
‘목소리가 안 나와.’
몸은 제대로 있는데.
주위는 무릉도원 같은 곳이었다.
맑은 시냇물, 푸르른 초원, 싱그러운 꽃과 나무.
신선들이 살 법한-.
‘무릉도원 취소.’
요정이나 정령들의 숲인가.
내 앞에 허리까지 오는 은발을 가진 엄청난 미소녀가 있었다.
‘엘프다.’
귀는 확인 안 해봤지만, 폐하만큼이나 눈이 부시는 이 미모를 보아하니 요정이나 정령이 분명했다.
미모에 놀라 눈을 잠깐 감았다 뜬 사이, 소녀가 내 앞으로 와 있었다.
‘속눈썹 완전 길다.’
가 아니라.
나 지금 수상한 사람처럼 보이는 건 아니겠지.
아무것도 없는 양손을 교차해서 흔들며 내 무고를 증명하려는데.
‘뭐, 뭐야?’
앞으로 걸어간 소녀가 그대로 내 몸을 통과했다.
당황해 뒤를 돌아봤지만, 소녀는 날 신경도 안 쓰는 기색이었다.
‘혹시 내가 안 보이나?’
조심스레 손을 뻗었더니 내 손은 소녀의 어깨를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헐. 완전 무서워.
“…….”
내가 유령인지, 소녀가 유령인지.
뭔지 모르는 신세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움직이는 생명체는 이 소녀뿐이었기에, 나는 열심히 뒤를 따라 걸었다.
소녀는 이곳의 관리인처럼 보였다.
가끔 멈춰 식물들의 상태를 살피고, 다정히 바라봤다.
이따금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소녀의 손에서 오팔처럼 색이 다른 여러 개의 빛이 섞여서 빛났다.
‘저 힘은…….’
“세이칸 님!”
내 생각이 맞는다고 확인시켜주려는 듯, 누군가 소녀에게 다가가며 신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역시 세이칸이었나.
‘본인 얼굴 보고 만들어서 피조물이 완벽했던 게 분명해…….’
순간 폐하 얼굴이 생각나서 잠시 딴생각에 빠졌다가, 세이칸의 앞으로 간 누군가를 보고 경악에 찼다.
“제가 오늘 뭘 봤는지 아세요?”
세이칸보다 작은 키, 인간과 같은 실루엣, 하지만 온몸이 검고 이목구비가 없는 저 모습은-.
‘변절자.’
코를 찌르는 악취도, 끔찍한 검은 땅도 없었지만.
외향은 분명 변절자였다.
“‘그 세계’에 거대한 생명체가 생겼어요! 날개가 달린 것도 있었고, 물속에서 사는 것도 있었어요! 저희 세계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신이 난 듯 들뜬 목소리로 몸을 방방 뛰었다.
“또 그 세계를 구경하고 왔니.”
내가 이곳에 들어온 후, 세이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맑고 청아한 음성이었다.
세이칸은 지금껏 봤던 것 중 가장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불렀다.
“내 첫 번째 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