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황제를 찾았는데도 안개 속에서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하냐고? 내가 그렇게 신뢰가 없나?”
“칸을 어떻게 믿어요.”
“나 원 참. 성녀가 이렇게 의심이 많아서야. 반지 좀 내밀어 봐.”
“왜요?”
“못 믿겠다니까. 특별히 허가해주지.”
“허가요?”
“이사벨라만 사용할 수 있던 기능을 너한테도 쓸 수 있게 해준단 소리다. 한 번밖에 사용 못 하지만, 영광인 줄 알아. 그만큼 귀한 거거든.”
카페 안.
나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시며 칸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무슨 기능인데요?”
“반지를 끼고 갔던 장소 중, 네가 원하는 곳으로 몸을 이동시킬 수 있는 기능이지.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700년 전의 내가…….”
반지가 기억하는 장소 한정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엄청난 기능이긴 한데, 그게 말처럼 쉬우려나.
슬쩍 주머니에 손을 넣자 수호의 반지가 만져졌다.
‘꿈이 아니었어.’
이렇게 존재감 넘치는 반지가 세상에 두 개나 있겠냐고.
그러니까 반지도 진짜. 그쪽 세계도 진짜.
‘우리 폐하도 진짜……!’
크흡. 다행이다. 꿈이 아니라서.
“신아리 양?”
내 맞은편에 앉은 기자가 나를 불렀다.
인터뷰 내용을 노트북으로 잠깐 정리한다고 하더니, 이제 다 끝난 모양이었다.
“인터뷰는 부탁하신 대로 어제 딴 녹취록이랑 같이 오늘 밤 뉴스로 나갈 거예요. 10분짜리 특집편성이라 이슈도 크게 되겠죠.”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생하셨네요. 후견인이라는 사람들이 참…….”
기자는 생각만 해도 화가 난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런 기자와 눈을 마주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가혹한 일’을 겪은 피해자가 짓는 웃음처럼.
“아리 양, 힘내세요. 볕 들 날이 오겠죠.”
그래서.
지금 내가 뭘 하느냐면.
‘젠달로 가기 전에 복수는 하고 가야지.’
‘가정 폭행범 24세 S 씨, 그리고 후견인들의 추악한 이면’을 하나부터 열까지 온 세상에 까발릴 준비 중이었다.
디데이는 오늘 밤.
당황한 얼굴들을 못 보고 가는 게 아쉽긴 하지만, 크게 미련이 남는 건 아니었다.
내가 일 분 일 초라도 더 빨리 보고 싶은 건 그 인간들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자체 발광 인간 보석’인 우리 폐하니까!
나 없는 사이에 누가 주워갔으면 어떻게 하지……!
“그 캐리어는…….”
기자는 안쓰러운 시선으로 내 의자 옆에 있는 커다란 캐리어를 바라봤다.
가정 학대를 견디다 못한 내가 짐을 싸고 나왔다고 여기는 듯했다.
……안에 든 게 대부분 폴라로이드 필름이라는 얘기는 하지 말자.
“갈 곳은 있어요?”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딱했으니, 나도 분위기에 맞춰 대답해야 했지만.
나는 입꼬리 조절에 실패하고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돌아갈 곳이 있어요.”
***
그전에 일단 환자가 돌아가야 할 곳부터 가고.
나는 좀비처럼 걸어가는 익숙한 뒷모습에 대고 말을 건넸다.
“쌤.”
이태성 선생님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아리구나. 안녕.”
“당직 서셨어요?”
“아니, 오늘 9시간짜리 수술을 들어갔더니……오. 벌써 목발 없이 걸어 다니는 거야? 이렇게 회복이 빠를 줄이야. 내 환자라 그런가?”
선생님의 능청에 나는 씩 웃었다.
“말씀드렸잖아요. 곧 있으면 뛸 수도 있을 거라니까요.”
“진짜 그럴 거 같아서 감탄스럽다. 아, 보호자분들 또 다녀가셨다던데.”
“그래요?”
열흘 전.
그렇게 다시는 안 올 것처럼 떠난 큰아빠네는 그제부터 다시 내 병실을 찾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신우환도 함께.
“야. 미안했다.”
“아리야, 한 번만 기회를 다오…….”
“큰엄마가 실수했어.”
동정심 작전을 펼치기로 했는지, 나중에는 무릎까지 꿇을 기세였다니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 간이 어지간히 탐나시나 봐요. 저 잠들어 있을 때 간에 금이라도 박아 두셨나.”
“그랬으면 수술 기록이 남았을 텐데. 선생님이 확인해줄까?”
“좋아요. 금 있으면 반은 선생님 드릴게요.”
시답잖은 농담을 몇 번 더 나눈 후, 이태성 선생님이 대견스럽다는 듯 내게 말했다.
“씩씩해졌네.”
“네. 살아남아야 이룰 수 있는 목표가 다시 생겼거든요.”
“뭔데?”
“한 남자의……. 행복?”
진지한 내 말에 짧은 정적이 흘렀고, 선생님과 나는 마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백기를 든 선생님이 커피를 든 손의 팔을 마구 문질렀다.
“……어후. 아리야, 너무 느끼해서 선생님 팔에 소름 돋았어. 이번 건 내가 못 받아주겠다.”
“항마력이 부족하시네요. 쌤.”
“봐줘라. 좀.”
나는 질색하는 이태성 선생님에게 편지를 건넸다.
“편지?”
“오늘 지나고 읽어보세요.”
“……그렇게 말하면 무서운데.”
선생님은 떨떠름한 얼굴로 편지를 받아들었다.
“유서 아니고 감사 인사 편지예요.”
“감사 인사?”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생님한테 마지막일 인사를 건넸다.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요.”
***
세계가 달라서인지, 반지의 신성력을 사용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어떤 곳은 아예 반응이 없었고, 어떤 곳은 반지가 1, 2초 작동하다 말았으니.
그래도 열흘 동안 열심히 돌아다닌 끝에, 그나마 반지의 신성력을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냈다.
얼마 전, 이태성 선생님이 명당이라며 알려준 옥상.
“무슨 와이파이 잡는 것도 아니고.”
나는 캐리어를 끌고 병원의 별관 옥상으로 올라갔다.
낑낑거리며 난간 위에 캐리어를 올리고 나도 그 옆에 앉았다.
검지에 낀 반지를 보자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돌아갈 수 있어.’
신성석에서 반가운 빛이 일렁였다.
“그냥 가고 싶은 장소를 생각만 하면 되려나?”
처음 써보는 기능이라 영 모르겠단 말이지.
어두컴컴한 하늘을 보며 칸을 믿어도 되나,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아아악-!”
1층 현관 앞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슬쩍 내려다보니 큰엄마가 건물 밖으로 나와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그 뒤를 며칠 전 같은 병원에 입원한, 병원복을 입은 큰아빠가 쫓아 나왔다.
“이 미X년! 거둬준 은혜도 몰라보고!”
“진정해.”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어딨어, 어디에 있냐고!”
“진정하라고. 이미해!! ……너 사채 썼냐?”
밤이라 그런지 대화가 선명하게 잘 들린다.
“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내 병실 침대에 누가 차용증 갖다 놨더라. 너 지장 찍은 신체 포기 각서랑. 미해야, 미해야……!! 빚 10억이 말이 돼? 이제 와 그걸 무슨 수로 갚아……! 4년 전에 왜 못 갚은 거야, 8억이 있었는데!”
“그, 그거야……. 당신 차 바꾼다고 그러고, 나도 여기저기 쓸데가……. 어, 어머! 당신! 의, 의사! 여기 사람 쓰러졌어요!”
큰아빠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고, 큰엄마는 당황하며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
후후. 차용증 갖다 놓은 게 나라는 건 모르겠지.
“어? 아저씨, 거기 우리 큰아빠네 집인데. 무슨 볼일 있으세요?”
문에 페인트라도 뿌릴까 하고 간 큰아빠네 집에서 더 좋은 걸 받아버렸다.
웬 조폭 아저씨가 나한테 눈을 부라리면서 차용증이랑 신체 포기 각서를 건넸지.
“야, 니 큰엄마가 못 갚으면 자식, 자식도 못 갚으면 사돈에 팔촌까지 갚아야 하는 거야. 알겠냐? 이거 똑바로 전해라.”
“넵.”
아무리 분위기 잡아 봤자, 폐하나 헨켈 대장 발끝도 못 미칠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속이 다 시원하네. 꼴좋다.’
“신아리!”
화가 잔뜩 난 남자의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나는 옥상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신우환이었다.
여기는 또 어떻게 알았지.
“씨X. 내가 너 이딴 데 있을 줄 알았지. 뉴스 인터뷰? 가정 폭력? 너 미쳤냐? 누구 인생 X 망하게 만들어 놓고 뒤져버리려고. 야, 너 내려와. 맞은 지 좀 오래됐지?”
아하, 내가 사고 치고 무서워서 뛰어내릴까 봐 옥상으로 와봤다 이거군.
신우환은 씩씩거리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마치 한 마리의 야생 멧돼지 같았다.
저게 아파서 유학원 휴학했다는 사람인가.
“오빠.”
나는 무미건조한 어투로 신우환을 불렀다.
이전 같으면 저런 모습에 벌벌 떨었겠지만.
저 인간은 이제 내게 길가에 굴러다니는 먼지보다 못한 존재였다.
“뉴스 말고 인터넷은 안 봤어?”
“뭐? 인터넷?”
신우환이 ‘저게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나.’ 하는 표정으로 인상을 썼다.
나는 검색할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말을 이었다.
“인터넷에 오빠 신상 다 올라갔는데. 사진이랑 이름, 다녔던 학교까지. 부럽다. 오빠 이제 유명인이네.”
“이 미친 게!!”
신우환은 당장에라도 내 멱살을 잡아 끌어내릴 것처럼 달려들었다.
“으헉!”
그때,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신우환을 뒤에서 덮쳐 제압했다.
“씨X! 넌 뭐야!”
“쓰레기 새끼.”
이태성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아리야, 넌 이런 자식 상대도 하지 마. 짐승 같은 자식.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이거 안 놔?! 안 놓냐고!”
선생님은 경멸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고, 신우환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소란에 선생님의 손에서 벗어난 핸드폰이 난간 앞까지 미끄러졌다.
액정에는 뉴스 기사가 떠 있었다.
나는 윗줄에 굵은 글씨로 적힌 기사의 요약을 읽었다.
24세, S 씨. 친척 동생에게 수년간 지속적인 폭력행사.
피해자 후견인인 S 씨 부모, 폭력 방관, 보험금 갈취…….
폭력 영상과 녹취록, 메신저 내용이 증거로 입수……. 경찰, 조사 착수.
오오, 잘 나왔네.
없어진 나를 대신해 싸워줄 사람이 없으니, 처벌은 약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평생을 따라다닐 꼬리표를 달았다는 거에 만족했다.
이제 일말의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한 그때.
일렁이던 신성력이 꺼져가는 연기처럼 옅어졌다.
‘앗, 끊긴다.’
끊기면 안 돼!
나는 생존본능 같은 반사 신경으로 캐리어를 붙잡고 반지 낀 손을 난간 아래로 뻗었다.
좀 더 아래로 내려야 하나……!
“…….”
순간 불안한 눈빛의 이태성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이런 식으로 떠나는 모습을 보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다급히 선생님에게 외쳤다.
“쌤. 편지 꼭 읽어보세요. 트라우마 안 남으시게 제가 열심히 적었으니까.”
“뭐……?”
자살 같은 거 아니라고요.
라고 말할 새도 없었다.
옥상 난간에서 뒤로 넘어가는 내 몸을 중력이 빠르게 끌어당겼다.
[빨리도 쓴다.]
두통과 함께 찾아온 반가운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