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126화 (126/150)

126화

열여섯 살.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 아빠의 유일한 혈육이라는 큰아빠가 찾아왔다.

“오늘부터 우리랑 같이 살 거야.”

그 전에 우연히 큰아빠랑 큰엄마가 보험금을 가지고 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당장 수중에 돈 몇십만 원도 없던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나는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으로 큰아빠네 집으로 들어갔다.

“아리야, 큰엄마가 요즘 관절이 안 좋아져서 집안일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아, 네! 도와드릴게요!”

새로운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것이 불안했다.

‘큰아빠네한테 잘 보여야 해. 미움받아서 쫓겨나면 안 돼.’

그런 마음으로 도와준다고 했던 집안일은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내 일이 되었다.

그것뿐이었더라면 그래도 버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야, 넌 기분 나쁘게 왜 볼 때마다 웃냐? 내가 우스워 보여?”

“안 우스워 보이는데……?”

“씨X. 뭐래. 지금도 쳐 웃는데.”

그 집에는 수험생이란 이름의 폭군이 있었다.

수험 스트레스는 쌓이면 안 된다며 바로바로 터트려줘야 한다나.

그 스트레스 해소용 인간 샌드백이 나였다.

“큰아빠, 오빠 좀 말려주세요……!”

“애들 싸움은 애들끼리 끝내거라.”

“큰엄마……!”

“네가 좀 봐줘라. 네 오빠 수능 200일밖에 안 남았잖니. 신우환! 너는 애 좀 봐가면서 때려. 얼굴을 때리면 어떻게 하니? 아파트 사람들 보기 창피하게.”

폭군 하나와 방관자 둘.

이 울타리 안에서 내 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지옥과도 같던 3년.

날 샌드백처럼 굴리던 폭군은 삼수마저 실패해 캐나다 유학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 좀 살겠다 싶었는데,

“아리야, 너 주말 알바 관뒀으니까 시간 많겠다? 큰엄마가 주말에 문화센터가 있어서 바쁜데 큰아빠 식사 좀 챙겨 드릴래? 청소랑 빨래는 원래 네 몫이었으니까 그것도 하고.”

“저 이제 고3이라 공부하려고 관둔 건데요…….”

“얘가, 넌 대학 못 가.”

“네?”

“우리 형편에 두 명을 어떻게 대학 보내니? 네 오빠 유학비만 해도 등골이 빠지는데.”

목 끝까지 숨통이 막히는 기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큰아빠를 찾아갔다.

“저 방 얻어주세요.”

“안 된다.”

“수험생이잖아요. 공부에만 전념하고 싶어요.”

“유난이다. 그깟 공부, 밖에서 하나 집에서 하나 똑같지.”

“……3년 동안 모은 진단서랑 폭행 녹취록, 메신저 내용이에요. 우환 오빠 이제 성인이라 빨간 줄 그을 수도 있을걸요.”

그렇게 얻어낸 보증금 300만 원에 28만 원짜리 반지하 원룸.

생활비로 달에 50만 원.

3년간의 상처를 내세워 받은 값으론 쌌지만, 그래도 벗어나야 했다.

월세, 관리비, 공과금을 제외하면 15만 원 정도가 남았다.

거기서 문제집 값, 학용품값, 식비, 기타 비용.

부족한 생활비는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아둔 돈으로 메꿨다.

‘대학 갈 기회는 올해밖에 없어.’

저축해둔 돈은 빠듯했다. 큰아빠가 재수까지 도와줄 리 없었다.

성인이 되면 보험금 통장을 내가 관리할 수 있겠지만.

큰아빠에게 바로 받아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

싸워야 할 때가 왔을 때 수험에 발목 잡히는 일은 없어야 했다.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악착같이 살았다.

유일한 숨통이었던 학교 동아리도 끊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공부에 전념했다.

‘성인이 되면 그 울타리에서 나오는 거야.’

중3 때부터 신우환처럼은 살지 말아야겠다며 공부만큼은 놓지 않은 덕분인지.

다행히도 국립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입학금을 낸 뒤, 찾아간 큰아빠는 의외로 순순히 보험금 통장을 내어주겠노라고 했다.

큰아빠한테 신우환 협박한 게 그때까지 먹히기라도 한 건가.

생각지도 못한 약속에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반지하 원룸으로 돌아가던 날.

나는 트럭에 치였다.

***

통장에 보험금이 다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남아있겠지.

“126만 원…….”

나는 큰아빠가 건넨 통장 잔액을 보며 중얼거렸다.

5년 사이에 8억이 126만 원이 됐다.

신우환 캐나다 유학비용은 내 등골이었나.

옆에서 보던 큰엄마가 찔렸는지, 되려 큰 소리를 냈다.

“표정이 왜 그러니? 우리도 할 말 많다? 너 병원비며, 생활비며, 수업료며, 먹는 거, 입는 거. 그게 다 공짜인 줄-!”

“여보.”

“…….”

“어, 어머. 나도 참. 그래서 생각해 봤니? 큰아빠가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네가 간 기증을 안 해주면 올해 안에 돌아가실지도…….”

큰엄마는 안달 나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보호자 간이침대 위에 앉은 큰아빠의 얼굴은 노란색 셀로판지를 입힌 듯했다.

“……제 간밖에 안 맞는대요? 우환 오빠는요?”

“네 오빠는 몸이 약하잖니. 이번에 휴학하고 귀국한 이유도 건강이 너무 안 좋아져서고.”

“아리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큰아빠가 내 손을 잡았다.

순간 몸에서 일어난 거부반응에 반사적으로 손을 잡아 뺐다.

큰아빠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큰아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누그러진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큰아빠가 그동안 못 해준 게 너무 많았지? 그런데 염치없지만……. 살고 싶구나. 살아서 너한테 가족의 정도 알려주고 싶고…….”

“하.”

소름이 끼치도록 가증스러운 그 모습에 내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신아리, 얼마나 호구처럼 보였으면.’

노동 착취, 폭력, 학대, 방치.

그 가족이라는 끔찍한 울타리 안에서 그 지옥을 겪었는데도.

내가 부탁만 하면 장기까지 넙죽 갖다 주는 사람으로 보였나.

이 사람들은, 날 어디까지-.

“가족요? 가족이 뭔데요? 저희 부모님 보험금 죄다 가져가고도 참는 거? 집안일 하라고 하면 군말 없이 하고, 때리면 그냥 맞는 거? 제가 왜 큰아빠한테 제 간을 드려야 해요? 그렇게 살고 싶으시면 그 잘난 아들이나 큰엄마한테 달라고 그러세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처럼 대상자 순서를 기다리시거나-!”

“신아리!”

허억. 헉.

큰엄마의 고함에 나는 봇물 터지듯 내뱉던 말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며 두 사람을 노려봤다.

큰엄마가 눈을 부릅뜨고 내게 다가와 삿대질로 경고했다.

“신아리. 너 잘 생각해. 너 대학 입학 취소됐어. 수중에 돈도 마땅찮은 데다가 갈 곳도 없지. 게다가 재활까지 해야 하는 반병신이야. 당장 일이라도 구할 수 있을 거 같니? 지금 너. 우리가 안 받아주면 못 살아.”

“잘됐네요. 어차피 살고 싶지도 않은데. 그냥 이대로 인연 끊고 살죠. 큰아빠 목숨이야 그 정 많은 가족끼리 알아서 하시고.”

“이게 정말, 애미애비 잃은 불쌍한 년 거둬줬더니 은혜도 몰라보고……!”

큰엄마의 손이 당장에라도 내 뺨을 칠 듯 올라갔다.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큰엄마를 응시했다.

살벌한 공기가 병실을 채웠다.

“크흠, 큼.”

침대 주위로 친 커튼 밖에서 누군가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와 두 사람의 고개가 소리 난 방향으로 돌아갔다.

커튼이 젖히고 나타난 사람은 이태성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신아리 환자 상태 체크할 시간이라서요.”

“…….”

큰엄마는 입을 다문 채 손을 내리고 큰아빠는 등을 돌렸다.

이전처럼 이태성 선생님, 하며 살가운 척하던 두 사람은 없었다.

“보호자 분들은 잠시만 나가 계셔주실래요?”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다시 돌아올 일 없다는 듯 가방과 외투를 챙겨 병실을 빠져나갔다.

마지막에 큰엄마가 매서운 눈으로 날 노려봤다.

이태성 선생님은 아무 일도 보고 듣지 못한 사람처럼 평소와 다름없는 질문을 던졌다.

입을 열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늘은 재활 갔다 왔어?”

“……아니요.”

“그러면 운동 겸같이 바람 좀 쐬고 올래?”

“…….”

“제발. 쌤 땡땡이치는 것 좀 도와줘라. 환자랑 같이 있으면 아무도 뭐라 못한단 말이야.”

내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자, 이태성 선생님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리고 병실에 혼자 있으면 주변 침대에서 한 마디씩 물어볼걸?”

내가 있는 곳은 6인실 병실이었다.

그 두 사람과 내 말싸움이 다 들렸겠지.

쏟아질 질문 세례냐, 이태성 선생님과의 산책이냐.

나는 벽에 기대 세운 목발을 잡았다.

“좋은 선택이야.”

이태성 선생님이 좋은 곳이 있다며 안내한 곳은 병원 별관의 옥상이었다.

“한적하지? 본관 옥상 정원에 밀려서 그렇지, 여기도 명당이라니까.”

우리 둘은 같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자판기에서 뽑은 캔 음료의 병따개를 손톱으로 튕겼다.

어느덧 하늘에 노을이 물들었다.

“행복하게 해줄게. 신아리.”

귓가에 폐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진짜 진상인 꿈이야.

꿈은 깨면 잊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왜 시간이 흐를수록 생생하기만 한 건데.’

또 울 것만 같아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 나 줄 거 있는데.”

“네?”

이태성 선생님은 가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쥐고는 손바닥을 펼쳤다.

“이거.”

“…….”

나는 그 물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너 일어날 때까지 썼던 침대 프레임에 걸려있더라. 아리 네 거인 거 같아서 가져왔어. 네 거 맞아?”

“……맞아요.”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내가 주인 찾아주는 촉이 또 좋아요. 자, 여기. 비싸 보이는데 간수 잘하고. ……아리야, 우니……?”

“안 울……. 흐어엉-.”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어 서럽게 울었다.

그런 내 손바닥 위에는 이태성 선생님이 건넨 반지가 놓여있었다.

“지난번에 준 반지. 그게 내가 성녀한테 주는 생일선물이라고.”

0